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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3월 설교 시리즈 'The Word of God is Everything, 말씀이 전부다!' - (1)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면!
본문 : 느헤미야 1장 9절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면, 쫓겨난 우리가 하늘 끝에 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거기에서 우리를 한데 모아서, 주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이제 기억하여 주십시오. <새번역>
중세 시대 라틴어는 당시에 아무나 배울 수 없는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는 많은 차별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공부한 사람들만이 라틴어로 기록된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마치 그들만이 성경을 해석할 능력을 가진 듯 보였습니다. 우월한 이가 나타나니 당연히 뒤처지는 자가 생겨났습니다. 그것도 말씀, 즉 성경 때문에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주신 말씀을 가지고 계층과 빈부와 권력과 재력이 나누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이 때 깨어 있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이 라틴어를 읽기 쉬운 글자로, 당시에는 헬라어나 독일어로 재빠르게 번역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맛은 참으로 달콤했습니다. 특권의식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나 반발이 있을까 두려워했던 것도 잠시 ‘면죄부’는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성경을 자기 맘대로 해석해도 되는 길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특정 사람만 성경을 읽으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시대를 그 어떤 암흑보다도 깊은 암흑으로 느끼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새벽이 깊어질수록 아침이 가까이 다가온 법이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성경으로부터 오는 모든 불평등과 빈부 격차와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던 이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조금씩 열리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것도 아닌 신앙으로 인해 생기는 비참함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떠나서 ‘르네상스’ 시대, 즉 인간 중심의 시대로 옮겨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르네상스 시대를 새로운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시대는 성경 속에서도 수도 없이 반복되는 시대였습니다. 진짜 새로운 시대는 당시에는 정말 없을 것만 같았던 진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서 있으려고 발버둥 치던 목회자들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들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 헬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지니지 못한 자들, 신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이들, 그저 말씀이라고 하기에 억울함에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일반 성도들에게 그 성경을 나누어 주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읽히게 되는 시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종교 개혁’이라고 하며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a fide(오직 믿음), sola gratia(오직 은혜)를 외치며 드디어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말씀을 읽게 되는 새로운 시대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여파를 지금 우리까지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 때문에 어떤 패배감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해석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까막눈이라고 스스로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우리는, 이 시대는, 벗어난 굴레를 다시 쓰려고 노력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맹목적으로 누군가의 해석에 좌지우지 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스스로가 성경 말씀을 읽고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귀찮음’은 우리를 다시 라틴어 성경 앞에 무릎 꿇던 패배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패배자를 선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지만 말씀을 외면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누군가의 설교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시대는 라틴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던 그 시대를 이미 뛰어 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앞에 두고도 무엇이 진리인지 물어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니 진리로 자유케 됨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악세사리로 취급하다보니 필요 없을 때는 거추장스러운 도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하는 동역자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러분의 삶을 밀도 있게 구성해 주고, 여러분의 삶을 옳은 길로 인도해 주며, 새롭고 산 길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이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말씀을 통하여 이 말씀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19~23절, 새번역>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되고, 모든 것이 무너진 가운데에서도 새싹이 돋게 하시며, 눈물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시는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정녕 있으십니까? 저는 지금 성경을 읽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읽었던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진짜 믿음으로 인정할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 인생길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유일하며 전부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드렸던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는 BC 445년으로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마틴 루터보다도 2000년이나 앞서 새로운 시대가 어떻게 열리는지를 보여주었던 인물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어찌 보면 당시에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벨론에서 의해서 BC586년에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느헤미야의 조상들은 포로로 끌려왔고, 몇 세대를 거치며 정착한 후, 그 후손 느헤미야는 자기 나름대로 성공하고자 노력했으며, 그 노력의 결과로 왕에게 술을 따르는 아주 중책을 맡을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최측근 중에 최측근이 아니라면 절대 맡을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느헤미야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것이었을까요?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충분히 큰 힘을 얻을 수는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직분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아주 특별한 사연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에게는 하나니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 동생을 통하여 자신의 고향인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할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대답하였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 <느헤미야 1장 3절, 새번역>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전해 듣자마다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슬픔에 잠긴 채로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기도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출발하게 됩니다. 기도가 정말 중요하고 기도의 내용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바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만드는지 아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동안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잠을 깨울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언약’입니다.
기도자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선포하며 기억해 달라고 외치면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그 공식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소서!”
“하나님, 당신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하나님, 당신은 당신이 하신 언약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자복합니다. 그러면 용서해주시겠다고 하신 분이 당신이오니 용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분명히 간절한 호소인 것처럼 보이지만 왠지 이상하게 점점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가까이 다가서며 오히려 하나님을 옥죄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십니까? 마치 잘못은 우리가 해놓고, 큰소리치며 하나님께 협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면, 쫓겨난 우리가 하늘 끝에 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거기에서 우리를 한데 모아서, 주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이제 기억하여 주십시오. <느헤미야 1장 9절, 새번역>
이 말씀은 그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세를 통해 주셨던 언약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약속을 지키라고 느헤미야가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쫓겨난 당신들이 하늘 끝에 가 있을지라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거기에서도 당신들을 모아서 데려오실 것입니다. <신명기 30장 4절, 새번역>
느헤미야는 바로 이 말씀을 거론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기서 느헤미야의 평소 삶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 신명기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계속해서 말씀을 읽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조상들로부터 구두로라도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자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누구든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다면,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면, 바로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는 느헤미야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기도 어려운 페르시아가 다스리던 시대였고, 여차하면 왕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반역자로 몰려 사자 밥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성경책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도 느헤미야에게서 말씀을 빼앗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부분에서 3월을 새로운 시대를 열 시작으로 만들어가고자 하는 타이밍으로 생각하고 문을 열고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신앙이 기존의 벽을 뛰어 넘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가능하다!’ 라는 것입니다. 며칠 동안을 금식하며 눈물 흘렸던 느헤미야가 기도를 끝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이 모든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기도한 느헤미야는 눈물을 거두고, 금식을 거두고 다시 왕의 곁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느헤미야의 마음에 기대감이 충만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의지하는 이들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 기대하며 꿈을 꾸게 되는 이들입니다. 아브라함처럼 100세에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요셉처럼 꿈꾸는 사람이 됩니다. 다니엘처럼 보호받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결코 절망이라는 녀석이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이들은 이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승리의 공식은 ‘말씀’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장 37절, 개역개정>
‘말씀의 힘’은 우리의 상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새번역>
무엇보다 말씀은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6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이제 말씀을 읽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넘어서야 합니다. 물론 말씀을 읽는 것도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읽음으로 멈추지 않고, 삶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움직이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길 축복합니다.
말씀이 새로운 시대를 열도록,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줄 여러분의 믿음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게 되면 일어나게 될 수많은 역사를 눈으로 경험하는 3월 한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친히 일하는 것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말씀은 죽은 단어가 아닙니다. 살아서 역동하는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우리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바로 이 ‘말씀’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3월입니다. 겨울이 지나갑니다. 봄이 옵니다. 꽃이 핍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할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가 먼저 말씀으로 활짝 피어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단 찬양 - 새로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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