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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3 - 갈리아(프랑스)에서 훈족과 싸운 로마 게르만족 오도아케르에 망하다!
훈족(Huns)은 4~6세기 중앙 아시아에 거주한 민족으로 스키티아라고 알려진 지역인 볼가강
동쪽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인도~이란인 계열 민족인 알라니족의 서쪽
이주에도 관련이 있으니 370년에 훈족은 볼가강에 이르렀고, 로마 제국의 국경 밖에
살고 있던 고트족등 게르만족들을 정복해 여러 게르만족들을 로마 영토로 도망치게 만듭니다.
훈족은 430년에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유럽에 거대한 영토를 세웠으니 아틸라왕 지도하에 동로마
제국에 파괴적인 약탈을 벌였고... 451년에는 서로마 제국의 갈리아 속주를 침입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 및 서고트 연합군과 싸웠으며, 452년에는 이탈리아를 침입했고 453년 아틸라가
죽은 후에야 바로소 로마를 향한 위협을 멈추었고 네다오 전투 패배후 영토의 상당량을 상실합니다.
훈족의 후계자들은 4~6세기에 동유럽과 중앙 아시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이웃한 민족들에게
기록됐는데 훈족의 변형적 명칭들은 코카서스에서는 8세기 초까지 기록되었으며, 18세기에 프랑스
학자 조제프 드 기네는 훈족을 기원전 3세기 북아시아에 존재했던 흉노족과의 연관성을 주장했습니다.
전한 무제(武帝)는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을 파견, 흉노를 공격하고 황하
서쪽 지역에 진출해 서역(西域)을 정벌해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는 경제적으로 약화
되었고 기원전 60년경 선우 자리를 놓고 수십개 부족으로 분열되어 내전이 일어났으며
호한야 선우는 기원전 51년 한나라의 지원을 얻어 흉노는 재통일되었으며 전한과 화친을 맺습니다.
이후 서흉노의 질지(郅支) 선우는 동흉노에 패하니 일부 집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였으며 그후 남흉노
는 후한에 복속되고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는데 89년에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은 북흉노
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북흉노의 일파는 서방으로 피신하였으니 이때 서방으로 향한 북흉노
를 훈족으로 보기도 하며, 몽골 고원에는 선비(鮮卑)· 오환(烏桓) 등 다른 유목 부족들이 성립 됩니다.
훈족은 청동으로 된 가마솥을 사용했고 인위적인 두개골 변형을 한 것으로 여겨지며 점복이나
샤먼의 풍습들이 존재하는데, 경제적으로 유목 형태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고 조공, 약탈,
교역을 통하여 로마와 연결되었으며 로마인들과의 전쟁에서 통일된 부족 지도 체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 민족들을 지배했으며 훈족의 핵심 군사 기술은 궁기병이었습니다.
훈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기원했으니 이란계 유목민들의 영향을 받은 투르크족으로 보지만 사료는 훈족
이 370년 무렵 유럽에 나타났다고 기록하는데, 로마 작가들은 훈족이 케르치해협을 건너 크리미아로
들어간 사슴이나 잃어버린 소들을 찾아 고트족의 영토로 들어갔다가 그 땅이 좋은지라 고트족을 공격
했다고 말하는데... 고트족은 훈족을 "사악한 영“ 들과 “고트족 마녀”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믿었습니다.
18세기 조제프 드 기네 이래 역사가들은 4세기에 유럽 경계에 나타난 훈족을 기원전
3세기와 서기 2세기 사이 북방 스텝 지역에서 중국을 침입했던 흉노족이라고
보았으니 중앙아시아에 있던 흉노족들은 유라시아를 통해 이주했으며 따라서 훈족과
문화적, 유전적 연속성을 가졌을수도 있으며 유목민 전사들의 연합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훈족의 어원은 불확실하니 가장 유력한 설은 현재 남아있는 훈족의 언어가 중앙아시아 의
투르크족 언어와 가장 비슷하니... 튀르크어 왼(ön), 외나(öna, 성장), 쿤(qun, 대식가)에서 온
것으로 보는데, 반면에 멘헨헬펜은 hūnarā (기술), hūnaravant- (숙련된) 등 아베스타어 단어에서
온 이란어군 유래를 제시하고 훈족이라는 명칭이 민족 보다는 계층을 지칭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르다네스는 훈족이 작은 키에, 적갈색의 피부를 지녔다고 했으며 눈이 작고 평평한 코를 지녔다고
언급했는데, 프리스코스는 아틸라의 목격자로 "넓은 가슴과 큰 머리를 가진, 작은 키에, 그의 눈은
작았고, 턱수염은 얇고 새치가 나있었으며, 자신의 혈통을 나타내는 평평한 코와 적갈색 피부를
지녔다" 고 적었지만 김현진은 중앙아시아 투라니드 인종의 튀르크족 계통의 민족이라고 주장합니다.
로마인들은 훈족의 폰토스 스텝지역 침략으로 수천명의 고트족들이 로마제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도나우강 하류로 이동한 376년에 훈족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훈족은 알라니족, 그레우퉁기족
, 서고트족, 테르빙기족과 동고트족을 정복했으며.... 395년에 훈족은 동로마 제국에 대규모
공격을 가했으니 트라키아를 공격했으며 아르메니아를 휩쓸었고 카파도키아를 약탈했습니다.
시리아 안티오키아를 위협했고 같은 시기에 사산 제국도 침공했으니 수도인 크테시폰 인근까지 접근
하며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페르시아인들의 반격에 극심한 패배를 당했는데, 최초로 알려진
훈족 울딘은 이탈리아를 방어한 라다가이수스에 맞서 훈족과 알라니족을 이끌었으니 도나우강에서
동로마에 대한 고트족 반군을 진압하고 400~401년 쯤에 고트족 가이나스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408년에 울딘의 훈족은 도나우강을 건너 트라키아를 악탈하자 동로마인들은 울딘을 매수하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요구액이 너무 높아서 대신에 그들은 울딘의 부하들을 매수했으니,
이는 울딘의 무리에 많은 이탈을 야기했는지라 세력이 줄어든 울딘은 도나우강을 다시
넘어 도주했으며 이후 용병으로 고용되니 433년에 판노니아 지역의 일부를 훈족이 넘겨받습니다.
파비아의 라틴어 비문은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라고 기록했는데.... 434년부터 아틸라와 블레다 형제
가 훈족을 함께 다스렸으니 435년에 이들은 동로마에 훈족들의 무역 권한과 로마로 부터 매년
조공을 받기로 한 마르구스 조약을 서명하도록 강요했지만, 로마인들이 440년에 조약을 어기자
아틸라와 블레다는 로마의 요새이자 도나우강의 상업지 인 카스트라 콘스탄티아스를 공격했습니다.
훈족은 로마군을 압도하고 마르구스, 싱기두눔, 비미나키움 등의 도시들을 파괴하였으며 이후 훈족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했고 케르소네소스 전투에서 로마군에 패배하기 전까지 몇몇
도시들을 약탈했는데,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훈족의 요구를 들어주고 443년 두 훈족
왕들과 아나톨리포스 조약을 맺었으며 445년 블레다가 죽고 아틸라는 훈족의 단독 통치자가 됩니다.
447년에 아틸라는 발칸 반도와 트라키아를 침공하자 동로마는 연간 2,100 파운드의 금을 지불하는데
동의하였고, 동로마 제국을 약탈한 훈족은 서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서로마를 공격
하라는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의 부추김을 받았는데 마침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나
호노리아가 자신과 결혼하면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주겠다는 편지와 그녀의 반지를 받습니다.
그러자 아틸라는 발렌티아누스에게 호노리아와 그녀의 지참금을 건네달라고 강요했으며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서기 451년에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진격해 메츠를
공격했고 파리와 트루아를 지나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에 포위공격을 가하자, 로마 장군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의 로마와 서고트족 연합군은 샬롱(Chalons) 부근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훈족을 격퇴합니다.
당시 갈리아(프랑스)는 로마의 통제력이 약해짐과 동시에 수많은 게르만족이 난립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는 로마의 통제력을 강화시키려고
애썼고 많은 부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언제든 복속된 게르만족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제어할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있지는 못했습니다.
갈리아 오를레앙 인근 카탈라우눔 전투는 로마 연합군은 아이티우스의 로마군 2만명에 테오도리쿠스 의
서고트족 2만, 알라니족과 프랑크족 및 부르군트족등 6개 부족 5천등 4만 5천이고 훈족 연합군은
훈족 2만 5천에 발라미르의 동고트족, 아르다리쿠스가 이끄는 게피다이(Gepidae)족과, 라인강 프랑크족
및 마인강 부르고뉴(부르군트)족과 게피드족 5개 부족등 5만 정도였는데 로마연합군이 이긴 것으로 봅니다.
로마연합군은 서고트족이 우익(높은 곳), 아에티우스의 서로마군은 좌익(낮은곳), 알라니족
왕 상기반의 군은 중앙(달아나지 못하도록?)에 포진했으며, 아틸라는 좌익은 동고트족
에게 맡겨 서고트족과 상대하고 우익은 게피드족과 게르만족에게 맡겨 아에티우스
의 로마군과 대적케 했으며.... 최정예인 훈족은 중앙에 포진해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습니다.
서고트족 왕 테오도릭의 아들 토리스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을 점거했는데 양측의 전략은 갈렸으니
아에티우스는 양쪽 날개에 정예 병력을 포진시켜 적을 포위하고자 하였고, 아틸라는 그와 반대로
정예 병력인 훈족으로 중앙을 돌파하기로 한 것인데 두 군대가 가까워지자 아틸라는 중앙군을 이끌고
돌격을 하였으니... 양쪽 날개가 서로 맞붙기 전에 이미 아틸라군과 상기반 군 병력간 교전이 시작됩니다.
중앙이 교전하는 동안 전진하던 우익의 서고트족과 훈족의 좌익인 동고트족이 전투에 돌입하였고 서고트
족을 지휘하던 테오도릭 1세가 전사할 정도로 접전이 이어졌는데.... 테오도릭의 전사후 서고트족
은 혼란에 빠졌으나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본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리스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
에서 내려와 동고트족의 좌측을 향해 돌진한 덕분에 서고트족은 전열을 재정비 하고 전투에 돌입 합니다.
좌익에 포진된 아에티우스의 로마군은 공격하지 않고 자리를 사수했는데 우익의 게피드족도 로마군에게
덤비지 못한채 공격 기회를 엿보며 마주보게 되는데, 대치하는 동안 중앙의 훈족은 알라니족을 뒤로
밀어붙이며 전진하자 훈족은 로마군에게 후미를 노출시키니... 아에티우스가 즉시 병력을 쪼개
훈족의 후미를 향해 돌격시켰고..... 갑작스러운 후미 공격에 무너진 훈족의 군대는 패주하여 달아납니다.
한편 서고트족과의 싸움에서 밀려나던 동고트족의 군대와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던 좌익의 게피드 족
군대도 중앙이 무너지는 것을 보자 진형을 무너뜨리며 퇴각하였으며, 로마군과 서고트족의 군대,
중앙의 상기반의 군대가 이들을 추격하였고 아틸라의 군대는 진영으로 들어가서는 그곳을 사수합니다.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잔존병력들이 많이 있었으니 서로마~서고트 연합군은 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 까지 계속 추적하면서 살해하였는데, 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연합군은 추격을 중지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으며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연합군 측은 무너져버린 아틸라군의 진영을 포위
하였고.... 아틸라는 패배하면 불을 질러 자결할 생각을 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테오도릭의 유해를 발견하고 분노한 토리스먼드가 원한을 갚기위해 아틸라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로마군 아에티우스는 반대하고는 토리스먼드에게 서고트의 수도 툴루즈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면 그의 동생이 왕의 자리를 강탈할 것이라고 주장해 돌려보내게 되는데, 하지만 이는 명분
에 불과한 것으로 실상 아에티우스는 훈족을 살려두어 서고트족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소멸은 앞으로 야만인에게서 병사를 제공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며, 서고트족에 이어 로마군도 철수하자 죽음
을 각오한 아틸라는 자신을 평야로 유인하려는 함정이라고 생각했지만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뒤
비로소 군을 이끌고 진영을 정리한뒤 갈리아에서 철수해 라인강을 넘어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갑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 전투에서 훈족이 이겼다면 갈리아(프랑스)는 훈족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말을 냈을 것이며.... 또한 훈족의 세력이 더욱 강성
해져 서유럽 기독교 왕조의 성립이 늦춰지는 결말이 초래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전투는 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한 페이지를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Bury 의 경우 훈족은 수많은 종족들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 종족은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훈족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한 처지였고, 아틸라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 없이는
와해되기 쉬운 조직으로 설령 위 전투를 이겨 갈리아의 지배를 확립했다고 하더라도 훈족
의 갈리아(프랑스) 통치는.... 얼마가지 못할 공산이 크므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에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술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니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기반족
군대와 로마군의 포지션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훈족이 알라니족을 밀어붙이면 자연스럽게 로마군
에게 그들의 후방을 노출되게끔 하였고, 알라니족과 훈족의 전투력 차이를 아니 알라니족을 밀어
붙이면 어디까지 밀려 후방이 노출될 것인가를 예측하여 시기적절한 시점에 후방 협공을 이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고트족과 동고트족과의 싸움에서 아에티우스는 토리스먼드에게 기병으로 언덕을 점령
하게 한뒤 전투가 무르익자 좌측을 협공하는 기동전술을 짰고 이러한 기동은 지형활용에 대한
지식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니, 지형의 활용을 극대화하고 아군과 적군의 장단점을 고려한 배치가
이루어졌으며 전황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하여 적시에 협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훈족을 끝내지 못한건 아에티우스의 판단착오니 아틸라는 일년뒤 북이탈리아를 침공했는데....
호노리아와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요구하면서 북이탈리아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하자, 로마가
약탈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는 만토바에서 아틸라를 만난 교황 레오
1세 뿐만 아니라 고위 관리를 파견해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고 강화 협상을 맺을 것을 약속 합니다.
한편 즉위한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훈족에 조공 지불을 중단하자 아틸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준비하는 중에 453년 자신의 결혼식날 밤에 사망하니... 훈 제국은 봉신인 게르만족과
또 훈족 지배층 내부 권력갈등이 일어났으니, 아틸라가 총애하던 아들로 아카치리족의 통치자
엘라라크는.... 게르만족의 연합을 이끈 게피드족의 왕 아르다리크와 네다오 전투를 벌여서 패합니다.
같은 해에 발라미르 휘하의 아말리계 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카르파티아 지역에서 훈족
제국의 완전한 붕괴를 일으키지는 못 했으나, 많은 게르만족 봉신의 상실을 낳았으며
동시에 오그후르족, 사라구르족, 사비르족을 포함해 동쪽 오그후르계 투르크어인들이 대두
하니 463년에 사라구르족은 아카티르 훈족을 패배시키고 폰토스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합니다.
뎅기지크 휘하의 서쪽 훈족은 동맹인 사다게스족과 전쟁에서 발라미르에게 패했으니 오그후르인들에게
집중하길 원한 아카치리 훈족의 통치자 에르나크의 도움 없이 467년 로마를 공격했지만 로마군에게
둘러쌓여 포위됐고, 땅과 식량을 준다면 항복하겠다는 조약을 맺었는데 아스파르 장군 휘하의 로마군은
서로 싸우던 고트족과 훈족을 공격해서 물리쳤고 469년에 뎅기지크는 트라키아에서 패배하고 전사합니다.
아틸라 사후인 453년에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아들 가우덴티우스를 발렌티니아누스 3세
의 딸 플라티데아과 혼인시키려 했으나 황제는 아에티우스가 자기 아들을 제위에
올리려는 것이라 믿게 되어 위협을 느꼈으니, 원로원 의원 막시무스 페트로니우스와
시종 헤라클리우스의 부추김을 받고는 로마의 기둥 아에티우스를 제거할 결심을 합니다.
454년 9월 21일 라벤나의 궁정에서 황제를 알현한 아에티우스를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자신의 검으로 직접 암살했는데 이 사건에 대해 한 원로원 의원은 "신은 폐하
께서 무슨 생각으로, 노여움으로 이리하셨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자신의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잘라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454년 아에티우스가 암살당하자 갈리아(프랑스)는 사실상 로마제국에서 분리되었으니 마르세유
등 프로빈키아(프로방스)는 겨우 로마에 붙어 있었으나 나머지는 게르만 여러 부족들의
각축장으로 변했으니, 그 중에 북부는 프랑크족이 차지하였고 동부는 부르군트족이 자리를
잡았으며 중남부는 서고트족의 손에 들어갔지만 이후 프랑크족에 패해 스페인으로 이주합니다.
페트로니우스는 아이티우스의 지위를 받지 못하자 훈족 옵틸라와 트라우스틸라 두 사람과 함께 모의해
455년 3월 16일 병사들의 활쏘기 훈련을 살피기 위해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앞의 광장에서
말에서 내린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를 옵틸라가 찔렀고 헤라클리우스는 트라우스틸라에게 살해됐는데,
그곳에 있던 병사들은 아에티우스의 옛 부하들이니 황제를 도우러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막시무스 페트로니우스가 황제에 올랐지만 75일간 재위했을 때 반달족이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항해
하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니 성난 폭도들에게 살해당했으며, 게르만의 반달족은 두번째로 로마를
잔인하게 약탈했으니... 이 도시의 약탈동안 그들의 극도의 폭력은 '반달리즘 : 파괴 행위' 라는 용어
를 낳았는데 457년 장군 마조리안에 의해 폐위된 아비투스(Avitus) 가 황제로 잠시 뒤를 이었습니다.
로마 재건에 주력하며 야만족이 갈리아, 히스파니아에서 권력 다툼에 빠진 사이 콘스탄티우스
3세를 등용해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일시적인 평화기를 이루었지만 로마 황제는
강력한 군벌의 꼭두각시였으니, 군벌들은 야만적인 혈통으로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없었고 약한 로마인들을 통해 제국을 다스렸으니 Ricimer 는 세베루스를 황제에 앉혔습니다.
세베루스는 자연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시메르와 동로마 황제가 안테미우스에게 왕관
을 씌웠고 결국, 반달족과 서고트족을 물리치지 못한후 안테미우스는 폐위되고 죽임을
당했으며, Olybrius 라는 로마 귀족을 꼭두각시로 왕좌에 앉혔고 이후 리시메르의
조카 군도바드는 Glycerius 라는 이름의 로마인을 로마의 명목상의 황제로 임명했습니다.
게르만 용병들의 지도자 오도아케르(Odoacer)는 수도 라벤나로 진군했으니 라벤나를 포위해 수비하고
있던 로마군의 잔당을 무찔렀으며, 16세의 황제 로물루스는 불쌍해서 목숨을 건진후 오도아케르
에게 왕위를 양위해야 했으니.... 이로써 1,200년 동안 이어진 이탈리아 서로마의 통치가 막을 내렸고
동로마황제는 동고트족을 부추겨 오도아케르를 공격하게 하니 이탈리아에 "동고트왕국" 이 세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