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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姜邯贊) 장군..낙성대 (落星垈)
강감찬(姜邯贊. 948~1031) ...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이고 시호(諡號)는 인헌(仁憲)이다. 본관은 금주(衿州)로 현재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이다. 이 곳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그가 태어 난 날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落星垈)라고 한다.
금주(衿州)는 조선시대에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의 관악구 봉천동이다. 강감찬(姜邯贊)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 부친인 강궁진(姜弓珍)이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의 건국(建國)에 공(功)을 세우고 벽상공신(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의 집안으로 부상했다.
강감찬(姜邯贊)이 다른 역사 인물과 다른 점은 역사의 기록은 물론이고 문헌(文獻) 혹은 구비설화(口裨說話)를 통하여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강감찬은 사후(死後)에 역사와 문학작품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오랫동안 회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화(說話) 속 주인공으로 신격화(神格化)되고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역사 속 인물이 설화 속 주인공으로 환생(還生)한 것은 아마도 그의 공적이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감찬(姜邯贊)은 고려 정종(定宗)과 현종(顯宗)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英雄)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高句麗)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조선의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 3대 영웅 (三大 英雄) '으로 회자되는 고려의 장군이다. 강감찬이 막아낸 외적(外敵)은 '거란'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종을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契丹)의 성종은 목종을 끌어내린 ' 강조의 정변 (康兆의 政變) '을 구실 삼아 고려(高麗)를 침공하였고, 이를 물리친 장군이 강감찬(姜邯贊)이다. 이후 현종의 친조(親朝)를 들어 '강동 6주(江東六州)'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차 칩입한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을 귀주(龜州)에서 뛰어난 계략으로 물리침으로써 명장(名將)과 명신(名臣)으로 추앙받는 삶을 살았다.
文臣 출신 장군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학문을 사랑하고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고 처신이 신중하고 위엄이 있어 정적(政敵)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명문 귀족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관직에서는 청백리의 모범이었고 충신이었다고 하였다. 실제 그는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문신(文臣) 출신이다.
영웅(英雄)이 탄생하는 데 신화(神話)가 없을 수 없다. 강감찬(姜邯贊)의 탄생설화(誕生說話)는 매우 유명하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세상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라고 전제(前提)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탄생설화는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기록되어 있다.
탄생설화 誕生說話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어떤 사신(使臣)이 한 밤중에 시흥군(始興郡)으로 들어옫가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 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으로 재상이었다고 전하여, 그가 재상(宰相)이 된 후 송(宋)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 文曲星不見久矣 今在此云'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전하는 강감찬(姜邯贊)의 탄생설화는 막 태어난 아이를 사신이 데리고 가서 키웠다는 앞뒤 안맞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전설의 흔적을 오늘날 우리는 낙성대(落星臺)에서 찾을 수가 있다.
한편,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傭齋叢話) '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한다. 관상이 실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 강감찬이 관상(觀相)만은 귀인상(貴人像)이었다. 어느 날 키 크고 잘 생긴 선비를 관리(官吏) 복장을 하게 하고 ㅈ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송(宋)나라 사신이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이다. '고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 염정성(廉貞星)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 '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는 강감찬을 ' 문곡성의 화신(文曲星의 化身)'이라 하였고, '용재총화'는 염정성(廉貞星)의 화신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마도 구전(求傳)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내용상 차이가 생긴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文曲星)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네 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 반면에 북두칠성의 다섯 번째 별인 염정성(廉貞星)은 형살(刑殺)을 주관하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은 일곱 별마다 도교적(道敎的) 색채의 이름이 있다. 국자의 맨 앞 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 거문성, 녹존성, 문곡성, 염정서, 무곡성, 파군성이라고 한다. 강감찬이 고거에 장원급제한 문신(文臣)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武將)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두 별이 등장한 듯 싶다. 중국에서는 문곡성(文曲星)의 화신(化身)을 판관 포청천(包靑天)으로 보았다. 그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온 셈이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못 생긴 얼굴
고려사에는 국난(國難)을 헤친 강감찬장군의 승전기록 뿐만 아니라 그의 신이(神異)한 행적들을 많이 적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그의 용모에 관한 것이다. 보통 강감찬의 외모는 키가 작고 추남(醜男)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 의하면 원래는 잘 생긴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날에 여자들로 인하여 큰 일을 그르칠까봐 마마신(神)을 직접 불러 얼굴을 얽게 하여 추남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탄생설화 그리고 여러 신이(神異)한 행적들 그리고 그의 빛나는 위업을 기려 무신(巫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최영장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낙성대 落星臺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2년간에 걸쳐서 이곳을 정화하면서 사괴석(四塊石)으로 409m의 담장을 쌓고 사당(祠堂)인 안국사(安國祠)를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낙성대(落星臺)이다. 안국사(安國祠)는 외삼문(外三門)인 맞배지붕의 안국문(安國門)을 거쳐 내삼문(內三門) 안에 건축되었는데, 사당 안에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다.한편, 1974년 6월 10일 안국사(安國祠)가 완공되자 서울시에서는 그 날짜로 공원(公園)으로 지정하였고, 공원 경내에 5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공원 입구에 큰 연못을 파서 구름다리를 놓았다.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거란을 물리치고 고려(高麗)를 구하는 등 구국제민(救國濟民)을 위해 일생을 바쳐 백성들의 흠모와 존경을받았다. 백성들은 강감찬을 기리기 위하여 당대에 사리탑 형식의 3층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강감찬 장군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 별이 떨어진 터 '라는 의미의 낙성대(落星臺)라 이름하였다. 근처 생가터에 있었으나 여기에 안국사(安國祠)를 세우면서 옮겨 놓았다.
3층석탑 三層石塔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 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된 이 3층석탑은 13세기 경에 조성된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는 4.48m이다. 이 석탑을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뒤 서울특별시는 안국사(安國祠)라는 사당(祠堂)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관악구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삼층석탑을 이 곳으로 이전하였다. 삼층석탑이 있던 옛터에는 따로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하고 '낙성대유지 (落星臺遺址)'라고 하였다.
이 석탑에는 ' 강감찬낙성대 (姜邯贊낙성대) '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석탑은 원래 강감찬장군이 태어난 봉천동 218번지 집터에 있던 것을 이곳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왔으며, 그 터에는 따로 유허비(遺墟碑)를 세워두었다.
석탑의 양식은 단층 기단(基壇) 위의 삼층석탑으로, 노반(露盤) 이상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기단석은 각 면(面)에 한 장의 면석을 둘러 면마다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다. 한장의 돌로 된 갑석(甲石) 한가운데에 옥신(屋身)받침이 있다. 탑신의 옥신석(屋身石)에는 각각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고,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며, 층급(層急)은 2단으로 매우 간결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倭軍)들이 이 석탑의 대석(臺石)을 비틀어 어기고 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추어 정기(精氣)를 줄이고 탑(塔) 안에 있던 보물을 훔쳐갔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그들은 탑(塔)만이 아니고 탑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血脈)을 끊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려와 거란(契丹) ..시대적 배경
거란(契丹)은 993년(고려 성종)부터 1019년(고려 현종)에 이르기까지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거란, 여진, 몽고 등 북방민족이 대두하여 중원(中原)의 한족(漢族)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고려는 건국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북방민족에 대하여는 서로 대립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고려는 특히 거란에 대하여는 같은 민족인 발해(渤海)를 멸망시킨 국가로 여기고 배척하였다. 이에 거란은 942년(고려 태조)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을 청하였으나, 태조 왕건(王建)은 이를 거절하였고, 나아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도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단정하여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 후 고려의 역대 왕은 이러한 태조의 反 거란정책을 계승하여, 정종(定宗)은 거란의 칩입에 대비하여 30만명의 광군(光軍)을 조직하였고, 광종(光宗)은 서북지역에 여러 성을 쌓아 거란에 대한 경계를 엄하게 하였다. 또한 이 무렵 발해의 유민들은 압록강 중류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우고 송(宋), 고려 등과 통교하면서 거란을 적대시(敵對視)하였고, 더 나아가 송(宋)과 협력하여 거란을 협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 거란은 배후의 강적인 고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거란국내가 안정되는 聖宗代에 이르러 986년에 먼저 정안국(定安國)을 멸망시키고, 991년에는 여진족을 공략한 후, 27년에 걸쳐 3 차례 고려를 침입하게 되는 것이다.
거란(契丹)의 1차 침입 ..서희(徐熙)의 활약
993년에 거란은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서북면을 공격하였다. 이 때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西京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고려의 서희(徐熙)는 이에 반대하고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인다.
결국 고려는 宋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을 철수시키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약 280리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강동육주(江東六州)이다.
거란(契丹)의 2차 침입 ..
거란의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압록강 동쪽이 여진족을 몰아내면서 흥화진(興化鎭 ..의주), 용주(龍州 ..용천), 통주(通州 ..선천), 철주(鐵州 ..철산), 구주 (龜州 ..구성), 곽주(郭周 ..곽산) 등 강동6주(江東六州)에 성을 쌓아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서희(徐熙)의 외교적 승리이었다.이 처럼 강동6주를 차지하여 고려는 군사거점으로 삼으면서 송(宋)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청하는 등 송(宋)과의 교류를 계속하였다. 그러지 거란은 이에 큰 불만을 갖게 되고, 더욱이 거란은 강동6주(江東六州)의 전략적 가치를 깨닫고 그 것을 탈환하고자 결심한다.
기회를 노리던 거란 ...당시 고려에서는 정변(政變)이 일어난다.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죽이고, 현종(顯宗)을 추대하는 정변이 일어 난 것이다. 거란은 이를 구실로 1010년에 다시 고려를 침입한다. 그리하여 한때 개경이 함락되고 王은 전라도 나주(羅州)까지 피난가기도 했지만, 거란은 고려王의 친조(親朝)라는 실리(實利)도 없고, 그 실현도 애당초 불가능한 강화(講和) 조건에 만족하고 철수하였다.
이는 강동6주 등 요새를 함락하지도 못 한채 개성(開城)에 까지 깊숙하게 들어 온 상태에서 병참선이 차단되어 역습 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의 나주 피신 중에 양규(楊規)가 곽주(郭州)에서 적을 물리치고, 하공진(河拱辰)의 외교적 노력도 성공하여 고려는 항복의 치욕을 면하게 된다.그 뒤 거란은 고려가 국왕의 친조(親朝)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강동6주의 반환 요구도 고려에 의해 거절되자 1018년 다시 고려를 침입한다. 3차 침입이고, 강감찬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란(契丹)의 3차 침입 .. 강감찬의 구주대첩(龜州大捷)
1018년 거란은 소배압(簫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강동 6주의 반환과 고려 王의 親朝를 요구하면서 제3차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 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을 물리치게 되는데....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12,000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城)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가두어 둔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에 당황한 거란군은 고려군을 피해 산간지대를 통하여 개성으로 공격을 계속하였다. 강감찬은 추격전과 매복전을 전개하면서 적군을 괴롭하게 되고, 사기가 저하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거란군은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교과서에 실린 귀주대첩
이를 추격하던 고려군은 귀주(龜州)에서 전면 포위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적군이 귀주에 이르자 이 곳에 집결해 있던 강감찬 등은 일시에 공격을 가하여 적군을 거의 몰살시켰다. 침략군 10만명 중에서 생존한 자가 겨우 3천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소배압(蕭排押)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다라났다. 소배압에게는그야말로 한맺힌 압록강이었다. 소배압(蕭排押)이 패전(敗戰)하고 돌아와 거란의 성종(聖宗)은 진노하여 ' 네 낮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 '며 노발대발하였다. 소배압의 낯가죽이 실제로 벗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직(罷職)되어 귀양을 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듯하다.
귀주대첩 (龜州大捷) 이후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 오니 현종(顯宗)은 직접 영파역(迎波驛 ..지금의 의흥)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 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戰勝)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 ... 金으로 만든 여덟가지 꽃 장식)를 머리에 꽂아 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베풀었다.
결국 거란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019년 고려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고려는 北方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1029년에 개경(開京)에 나성(羅城)을 쌓았고, 1033~1044년에 걸쳐 전 국경선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였다.
강감찬의 다양한 면모
거란의 제3차 침입을 좌절시켜 고려 최고의 영웅으로 떠오르는 강감찬...그는 무신(武臣)이 아니라, 문과에 장원급제한 전형적인 문신(文臣)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이기도 하였던 아버지 강궁진(강궁진)으로부터 학문과 무예를 익힌 강감찬은 남들보다 늦은 36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탄탄대로를 달린다.거란의 2차 침입이 있을 때에도 모든 조정관리들이 항복을 건의하였지만, 유일하게 항복을 반대한 인물이 강감찬이다. 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며 전라도 지방으로의 몽진(蒙塵)을 건의하였고, 고려는 곧 국권을 회복하게 된다.
野人, 강감찬
구주대첩을 마치고 최고의 영웅이 된 강감찬..그 후의 행보가 더욱 눈에 띈다. 개경으로 돌아 온 강감찬은 모든 공직(公職)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현종은 만류하였고, 강감찬은 거듭 사의(辭意)를 밝혀 마침내 1년 후에 공직을 떠난다. 물론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잠시나마 문하시중(門下侍中)을 맡기는 하였지만, 그는 사실상 10년동안 야인(野人)으로 살았던 것이다.
아마 나라를 구한 영웅(英雄)이 계속하여 조정에 남았다면 어떤 명목으로든 비명횡사(非命橫死)를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강감찬은 대전략가(大戰略家)인 동시에 정치(政治)의 본질(本質)을 꽤뚫어 보았던 대정객(大政客)이기도 하였다. 강감찬 " 장군(將軍)"은 이러한 강감찬의 다양한 면모를 덮을 수 있다.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다 준 강감찬(姜邯贊)은 전란(戰亂)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낙향(落鄕)한 뒤에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고 구선집(求善集) 등 저술에도 힘써 몇 권의 저서를 남겼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감찬은 이후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下賜)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ㅇㄹ 이루지 못했다.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올랐으며, 1032년에 일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이었다.강감찬이 죽자 덕종(德宗)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게 하였다.
강감찬의 묘
강감찬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자리하고 있다. 1963년 강감찬의 후손들이 국사봉 뒷쪽 기슭에서 묘지석(墓誌石)을 발견한 후, 1964년 분묘를 만들고 1967년 비를 건립하였다. 강감찬장군의 묘(墓)는 오랫동안 실전(失傳)되어 오다가, 1963년 후손들이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서 '姜邯贊'이라 쓰여진 묘지석(墓誌石)를 발견한 후, 분묘를 만들고 비를 건립, 조성한 것이다.
실전(失傳)된 이유는 소현세자(昭顯世子) 강빈(姜嬪)의옥사(獄事)가 그 이유인데, 강빈의 아버지 강석기(姜碩期)는 강감찬의 17대손이고, 강빈(姜嬪)은 그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때 인질(人質)로 심양으로 잡혀갔다가 1645년 인질에서 풀려나 귀국하였는데, 귀국 직후 인조(仁祖)의 후궁' 조소용'과 반목(反目)하던 중 독살을 당하였다. 이때 강빈이 세자를 죽였다고 무고당하여 이듬해 3월 왕명으로 사사(賜死)되었다. 옥사(獄事)가 일어난 이후 강감찬의 후손들은 멸문(滅門)의 화(禍)를 모면하기 위하여 변성명(變姓名)도 하고 묘(墓)를 돌보 수 없게 되어 그렇게 300여 년이 흐른 것이다.
강감찬의 설화
강감찬이 한양판관으로 새로 부임하였을 때 경내에 호랑이가 많아 관리와 백성이 많이 물려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잠시 생각에 몰두한다.그는 아전(衙前)을 불러 " 내일 새벽에 삼각산에 올라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려 오너라"고 하였다. 아전이 다음 날 새벽에 올라 가 보니 과연 늙은 중이 바위에 앉아 있어서 그를 강감찬 앞에 데려 왔다.
강감찬이 중을 보고 꾸짖기를 ' 너는 비록 금수(禽獸)이지만 또한 영(靈)이 있는 동물인데 어찌 이와 같이 사람을 해하느냐. 너에게 5일간의 말미를 줄터이니 무리를 인솔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라. 그렇치 않으면 굳센 화살로 모두 죽이겠다 "하니 중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할 뿐이었다.
이 이상한 광경을 보던 아전(衙前)이 강감찬에게 영문을 물으니, 강감찬이 늙은 중을 보고 " 본 모양으로 化하라! "하니 그 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한마리의 큰 호랑이로 변하여 난간과 기둥으로 뛰어 오르니, 그 소리가 밖에 까지 진동하였으며, 아전은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강감찬이 '그만 두어라 ' 하니, 호랑이는 다시 늙은 중으로 돌아가서 공손히 절하고 물러갔다. 다음 날 아전(아전)이 동쪽 교외로 나가 살펴 보는데, 늙은 호랑이가 앞장 서고 작은 호랑이 수십마리가 뒤를 따라 강을 건너 갔다고 한다.
문곡성의 화신 文曲星의 化身
한편 강감찬은 문곡성(文曲星)의 화신으로도 불려졌다. 어느 날 감식안(鑑識眼)이 뛰어난 중국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하여 여러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사신(使臣)의 눈에는 딱 한사람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는 맨 앞줄에 서 있었는데, 허름한 옷에 키도 작고 얼굴이 못 생겼다. 그렇지만 사신은 불현듯 그 쪽으로 가서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기를 ' 문곡성(文曲星)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 몰랐었는데, 여기 동방(東方) 고려에 있으시군요 '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강감찬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