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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립공원 - 경기 광주의 남한산성(522m)
산행일자 : 2014.9.9(화)
산행날씨 : 맑음
산행거리 : 약5.9km
산행시간 : 2:56분(08:54~11:50) -간식.휴식시간포함
산행인원 : 4명(우리부부.동생부부)
산행형태 : 원점회귀
교 통 : 자가운전
산행코스 : 남문-영춘정-수어장대-서문-북장대터-북문-남한산성여장-현절사-주차장
*네비주소
남한산성파출소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01-2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57)
*차량운행경로(약55km)
부천 - 서울외곽순환도로(100) 시흥IC - 성남IC - 성남 - 남한산성주차장
(성남IC에서 약10km지점)
주요지점별 산행시간(약3시간)
08:54 남문(지화문)
09:12 영춘정. 현위치번호(1-1 영춘정)
09:21 제6암문
09:22/36 수어장대
09:46 서문(우익문) . 현위치번호(2-8 서문매표소)
09:52 제5암문 . 현위치번호(2-7 연주봉옹성)
10:20 북장대터
10:25 북문(전승문) . 현위치번호(2-6 북문)
10:44/56 제4암문
11:11/26 남한산성여장
11:29 제3암문
11:45 현절사
11:47 산성보건진료소
11:50 주차장
주요지점별 산행거리(약5.9km)
남문(지화문) - 0.7km - 영춘정 - 0.4km - 수어장대 - 0.6km - 서문(우익문) - 1.1km - 북문(전승문)
- 1.5km - 남한산성여장 - 0.1km - 제3암문 - 1.0km - 현절사 - 0.5km - 주차장
南漢山城
사적 제57호. 둘레는 약 8,000m.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晝長城)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624년(인조 2)에 왕이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 공사를 끝마쳤다. 4문(門)과 16암문(暗門), 성가퀴[女墻: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 1,897개, 옹성(甕城), 성랑(城廊),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으로서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이들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다. 지금은 장경사(長慶寺)만 남아 있다. 그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칸 반, 하궐(下闕) 154칸이었다. 1688년(숙종 14) 좌덕당(左德堂)을 세웠다. 1711년(숙종 37)에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우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右室)을 두었다. 1624년에 세운 인화관(人和館:客館)을 1829년(순조 29)에
수리했다.
관청으로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과 군사기관으로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두었다.
또한 종각·마구(馬廏)·뇌옥(牢獄)·온조왕묘·성황당·여단(塾壇) 등을 두고,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僧徒廳)을 두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이밖에 현절사(顯節祠)·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영월정(迎月亭)·침과정(枕戈亭) 등이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를 하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산행사진
남문주차장에서 남문으로 진행하는 도로(차량진입은 금지)
남한산성도립공원안내도
남문(지화문)
남문의 이정표
성곽에서 바라본 남문
영춘정으로 오르는 성곽길
계단길도 있고 바로 우측에 우회길도 보인다.
앞쪽으로 보이는 영춘정
영춘정의 현위치번호
영춘정과 이정표
진행할 청량산(수어장대)방향
고즈넉한 성곽길
계단길
제6암문입니다.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빌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명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대 암문의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을 "서암문파적지"라 부른다.
이정표
수어장대 부근의 이정표
수어장대
수어장대
수어장대와 청량당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제3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는 5개의 장대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안에 남아있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2년(1624) 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ㅇ;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희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희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의희는 죽을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 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전쟁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
수어장대
수어장대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가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장대로서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5개의 장대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이 사진은 1892~1893년 사이 이폴리트 프랑뎅이 찍은 수어장대의 모습으로
1900년4월14일 부터 11월 12일까지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의 공식엽서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어장대
수어장대
수어장대
수어장대
수어장대
서문 가는길
서문의 이정표
서문(우익문)
서문은 산성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지점에 위치하며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있다.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형의 홍예식이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판문을 설치하였다.
판문의 문짝에는 방형철엽을 서로 겹치도록 부착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두리는 석재로 위,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있고
양측벽에는 장군목을 끼워 빗장을 지를수 있도록 장방형 홈을 파 놓았다.
서쪽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3년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서문
서문의 현위치번호
제5암문 가는 길에서
전망대
제5암문
제5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m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길이 150m정도의 연주봉옹성이 연결된다.
개구부 외부는 홍예식이고 내부는 평거식이다.
통로의 길이는 5m정도로 천장은 장대석 5매로 덮여있다.
제5암문 부근의 이정표
제5암문 부근의 현위치번호
연주봉옹성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 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이며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근래의 발굴조사결과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하였다. 연주봉옹성의 둘레는
315m이고 전투시에 성내로 출입할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성벽이
만나는 위치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
연주봉에서의 조망
연주봉에서의 조망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
제5암문앞에서 막거리 한잔후 출발
북장대터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정표
이정표
북장대터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다. 이곳은 북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장대라 불린다. 북장대는 인조2년 남한산성 수축시에 단층누각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수어청에 소속된 5명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남한산성의 장대는 18세기 초에 붕괴되었고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는 다시 수축하지 않았다.
한성봉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북장대터
이정표
북문가는길
북문가는길
북문의 현위치번호
북문
북문
제4암문으로 가는길
복원된 성곽
이어지는 성곽길
앞장서서 가는 동생부부
제4암문 가는길
제4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1km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도달하게 된다.
이 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들게 만든 홍예문이다.
제4암문/이곳에서 약20분간 휴식후 출발.
올라가는 계단길
계단길을 오르다가 뒤돌아본 조망
동장대터 방향으로 진행.
남한산성 여장
여장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로 축조한 평여장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에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사이에는 활을 쏘기위한 타구가 마련되어 있고
남한산성 여장규모는 길이 4.2m 높이1.3m 폭 0.8m 내외가 일반적이다.
남한산성 여장에서 바라본 남한산 정상방향/약15분간 휴식후 출발.
제3암문으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남한산성 여장"방향.
동장대터의 현위치번호
동장대터의 이정표
제3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편이다.
이 암문은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m
높이가 2.65m에 달해 문루만 없을뿐 성문의 역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3암문
현절사로 내려가다가 만난 이정표
현절사
현절사
현절사
산성리 일대모습
산성보건진료소
한옥체험주택을 지나며
완도집에서 산닭백숙으로 점심식사.
완도집.
산행기끝/북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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