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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 이야기 (中)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왕검성 *해자(垓子 : 주 1)에 느닷없이 참방거리는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의 시선은 물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집중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가던 길을 멈추고 물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느라 거리는 사람들로 이내 가득해지고 있었다. 물 속으로 들어가버린 인영(人影)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사람들이 걱정스런 시선으로 웅성거릴 때에야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물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호동으로, 해자의 깊은 곳까지 자맥질을 하고 나온 참이었다. 한창 성장 중인 그의 목덜미와 어깨선이 젊은 활력으로 반짝인다.
고구려인들은 노천에서 옷을 벗고 씻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문화는 타국에서는 으레 음란한 것으로까지 받아들여지지만 고구려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주 씻지 않은 문화를 가진 족속들을 지저분하다며 경멸하는 편이었다. 더욱이 호동은 왕자의 신분이기에 감히 나서서 그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참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이렇게 냇가에서 씻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호동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옷을 받쳐들고 서 있던 자신의 젖형제를 불렀다.
"후우... 아무래도 안되겠군. 영!"
"넵, 전하."
호동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라는 호칭은 좀 그만 둘 수 없겠느냐?"
그러자 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긴 하겠지만, 전하라고 불리워도 괜찮지 않습니까."
"또, 또... 아무튼 여기서는 잘 씻지도 못하겠다. 두루마기를 가져오너라."
"대단하군요, 저 수많은 은근한 시선들... 왕자님께서 감당을 못하시다니,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하시던 일을 그만 두는 것은 정말 오랫만이군요."
"그러게나 말이다."
철저하게 동감하면서 호동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시선을 둔 곳에서는 수많은 시선들이 황급히 헛기침을 내며 딴청을 피웠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호동은 냇가에서 나와 신을 신고는 도성 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낙랑국의 수도인 왕검성의 내성 안쪽은 전체적으로 활발한 분위기였다. 압록수의 지류를 따라 형성되는 자연산 해자는 아침 일찍부터 탐색 겸 나들이에 나선 호동의 욕구를 충동질시켰고 그는 그 욕구에 충실하기 위해 돌연 옷을 훌훌 벗어 영에게 맡기고 냇가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지나가는 주민들이 호동에게 예를 표하면서도 그의 모습을 멍하니, 혹은 흘긋거리며 바라보곤 했다. 성으로 도로 들어온 호동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에 띈 대장간 앞에서 몇몇 철제품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딱히 특별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호동은 영과 의미심장한 눈길을 교환했다.
'흠... 역시 대장간 안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봐야 뭔가를 알 수 있겠는데.'
주변에 들릴것을 저어하며 호동이 속으로 중얼거린 그때였다.
"왕자니임!"
다급한 소리로 호동을 부르는 것은 성에서 나온듯한 시종이었다. 시종은 호동에게 공왕께서 급히 모셔오라는 전갈을 받았다며 호동을 재촉했다. 호동은 이내 방에 들어가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최리를 만나러 대전으로 향했다. 최리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를 맞았는데, 오전에 벌어진 노천가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최리는 호동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허허... 북국인들은 유별나게도 씻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려."
"황공하옵니다."
"아니오, 아니오. 그것보다 어떻소? 우리 성내의 모습이."
찻잔을 내려놓고 대뜸 최리가 질문했다. 호동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무엇보다 활기차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람들 또한 친절해 보였습니다."
최리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하오. 하지만 앞으로는 성내를 구경하려 하실 땐 혼자서 가시면 아니되오."
"황공하옵니다. 주의하겠사옵니다."
호동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심 찔끔 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표현하지 않고 고개 숙여 사죄했다. 최리는 그러한 호동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헛헛헛...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우리 려아(藜兒 : 공녀 가려를 말한다)가 왕자께 성을 구경시켜 드릴 테니 혼자서 가시지 말아달라는 것이외다."
호동은 저이 안심했으나, 거짓으로 얼굴을 살짝 붉혔다.
"괜한 수고만 끼쳐드리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얘야, 들어오너라."
최리가 소리쳐 가려를 부르자, 단아한 느낌의 유백(乳白)색 바탕에 화사한 분홍빛 매화무늬를 점점이 수놓은 *반비(半臂 : 주 2)를 걸친 가려가 시녀와 함께 내실로 들어왔다. 가려는 호동을 보자 이내 얼굴을 붉히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최리는 그런 딸의 모습을 흡족한 듯 바라보며 손짓해 호동의 옆자리에 앉혔다. 최리는 호동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소만..."
"아, 아버님..."
가려가 새빨개진 얼굴로 손을 내젓다가 호동이 그녀를 바라보자 귓볼까지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최리는 웃음 띤 얼굴로 호동을 바라보았다.
"실은 노년에 이르러 이 사람이 아들이 없기에 나랏일을 물려줄 사람이 없어 고심하던 터에 귀하 같은 대국의 왕자와 인연이 생겨 이렇게 부탁하오니, 낙랑국의 부마(駙馬)가 되지 않으시겠소?"
너무나도 뜻밖의 발언이라, 호동은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 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걸릴 줄 알았는데...'
그러나 이내 동요를 수습한 호동은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황감하옵니다. 하오나 소인은 지금 유랑하는 참이온데 한 나라의 왕자로서 어찌 부왕 몰래 식을 거행하겠나이까. 당장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최리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 걱정하실 것은 없소. 왕자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내 사절단을 귀국으로 파견하여 혼례 소식을 전해드리겠소. 아니면 혹여 노인의 불민한 딸이 눈에 차지 않으시는 것이오?"
호동은 슬쩍 가려를 보았는데, 그녀는 뭔가 대단한 선고라도 기다리는 마냥 눈을 꼭 감은 상태에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호동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낙랑국 공녀의 아름다움은 본국에도 소문이 자자한 것이온데 어찌 싫을 수가 있겠사옵니까. 그저 감합할 따름이옵니다."
그러자 가려는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호동이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내 볼에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숙였다. 최리는 가려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는 흡족한 듯 웃었다.
"그럼 내일 당장 사절단을 파견해야겠소. 그러자면 챙길 것들이 많으니 이 노인은 이만 자리를 비켜 드리오이다. 려아야, 네가 왕자님을 모시고 성 구경을 시켜드리거라."
"예, 아버님."
가려는 호동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그녀의 유백색 반비만큼이나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것이었다. 호동은 일순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따뜻함을 느꼈다는 것에 호동은 순간 두려움이 치밀었으나 그것의 정체를 차마 곱씹기도 전에 가려는 소녀처럼 배시시 웃으며 호동을 데리고 대전을 나와 내성 밖으로 향했다.
"이쪽이옵니다, 왕자님."
왕검성 주변에는 압록수의 지류에서 내려오는 자연적인 운하를 증축하여 성곽 근처로 연결시킨 저수지가 있었는데, 가려가 이 저수지를 매우 좋아하여 최리는 특별히 주변에 아름다운 나무와 수초를 심게 하였다. 그 뒤 그녀는 종종 이곳에서 비파(琵琶)와 *칠현금(柒絃琴 : 주 3)을 연주하였는데, 이러한 가려의 모습은 낙랑에서는 벌써 명물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호동에게 성 안내를 해 주면서 가장 먼저 데려간 장소는 자신이 즐겨 찾는 이 저수지였다. 한동안 호반을 따라 거닐던 호동과 가려는 따사로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에 나란히 앉았다. 가려의 얼굴은 상기되어 발그레 빛나고 있었다. 호동은 문득 이렇게 기뻐하는 가려의 모습에 자신도 놀랄 만큼 마음이 동요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 내가... 어떠한 미색(美色)을 보아도 이렇지 않았거늘...'
가려는 호동의 속마음은 모른 채 호반의 이모저모를 설명하며 들떠 있었다. 그녀는 대뜸 손뼉을 치며 시녀를 불렀다.
"옳지, 단아! 내 비파를 가져오너라."
"예, 아씨."
멀리 몸종이 비파를 가지러 둘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려는 호동을 보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는 은근한 눈초리로 그를 올려보며 말했다.
"왕자님, 평소부터 소녀는 왕자님께 시작(詩作)을 청하고 싶었사옵니다. 재주 없는 음색일지라도 왕자님께서 풍경을 벗 삼는 셈 치시어 소녀에게 시를 한 구절 내려주시겠사옵니까?"
호동은 가려의 모습을 보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겠소만... 소문이란 원래 믿을만한 것이 되지 않소. 내 시작은 그리 쓸 만 한 것이 못되오, 공녀."
"대국의 왕자님께서 어이하여 소녀에게 공녀라는 호칭을 사용하옵니까. 소녀의 나라는 왕자님의 대국에 견주면 한참 작은 나라이오니... 원컨대 이름으로 불러주시오소서."
"그대가 원한다면 그리하겠소, 가려."
이름으로 불린 것이 부끄러운 듯, 가려는 얼굴에 홍조를 띄웠지만 이내 호동을 마주보며 살풋 웃음을 지었다.
"부끄럽사옵니다. 하오나 왕자님께선 소문을 믿지 말라 하시지만, 왕자님의 수려한 용모에 대한 소문이 왕자님께서 친히 납시어 이미 거짓이 아님이 판명되었사온데 그래도 소문이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옵니까?"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참으로 기쁘오."
"소녀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 또한 그리 생각할 것이옵니다. 소녀를 믿으시오소서."
가려는 몸종이 비파를 가져오자 그것을 받아들곤 정좌하여 연주자세를 잡았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은 현을 타기 전부터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호동이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가려는 수줍은 듯 손가락을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오면 소녀, 변변찮은 연주이지만 시작하겠사옵니다."
호동의 시선을 확인한 그녀는 현을 골라 몇 번 조율하더니 이윽고 본격적인 연주를 시작했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현 위를 맵시 있게 누비면, 현은 몸을 떨며 노래를 시작한다. 그녀의 감은 눈 위에 그늘을 뚫고 들어온 햇살의 파편은 이윽고 불어온 바람에 의해 찬연히 부서져 간다. 어디까지가 햇볕이고 어디까지가 그늘인지 알 수 없이 사방이 아득한 가운데 어지러이 노닐던 물새의 모습도, 아름답던 운하와 호반도, 주변을 활기차게 걷던 많은 사람들도 모두 아득함의 뒤로 물러나 있었다. 빛은 이미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그녀의 뒤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으며 그 휘황한 빛에 주변의 모든 정경이 사라져 호동의 눈에 비치는 것이라곤 비파와 그 끄트머리에서 하늘거리는 손가락, 그리고 가려의 모습이 있었을 뿐이었다. 아득한 햇빛 속에 오직 호동과 그녀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음악이 있었다.
호동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 그가 쏟아낼 수 있는 글자 나부랭이들은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도 그녀의 음악의 흐름을 끊어먹는 불협화음 내지는 시끄러운 쇳소리쯤으로 여겨졌다. 그것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구(詩句)가 될 수 없었고, 연주를 끝낸 후 어리둥절하여 호동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뭔가를 구상해 내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의 자애로움이 충만한 그 순간에 어울릴 수 있을 시구를 만들어낼 능력 따위는 그에게는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그녀가 호동을 부르지 않았다면 호동은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햇살에 녹아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자님... 어디가 편찮으시옵니까?"
정신을 차려보니 걱정스레 물어보는 가려의 얼굴이 보였고, 호동은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난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니오. 괜찮소. 괜찮소..."
호동은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미간을 질끈 눌렀다. 그러자 가려는 호동에게 다가와 불안한 어조로 조심스레 물었다.
"혹여 소녀의 연주가 왕자님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호동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오, 당치 않소. 가려의 비파는 내가 들었던 어떠한 비파 연주보다도 황홀하고 아름다웠소. 그대의 비파 때문이 아니오. 믿어주시오."
가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옵니다. 소녀는 혹여 귀를 어지럽혀드린 것이 아닌가 해서... 다행이옵니다."
호동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 해가 저물어 그의 객실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 뒤에 구경시켜 준 성곽들과 오솔길 등은 그의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호동은 마련된 객실에서 간단한 서찰을 적었다. 서찰을 봉투에 넣은 그는 창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전서구의 발목에 서찰을 묶었다.
횃소리를 남기고 전서구가 날아간 뒤에도, 호동은 멍하니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불안해진 영이 그에게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틀림없이 전서구는 보내졌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라는 마음속의 자위는 영에게 있어서 어떠한 확신도 주지 못했다. 괜찮으신 것일까. 행여 대업(大業)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닐지... 답답해진 영 또한 잠시 주변을 살피고 오기로 결정하고는 객실 밖으로 나갔다.
한편 호동은 영이 들어온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의 뇌리엔 낮에 보았던 가려의 모습이 떠나가질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이 정체모를 감정은 무엇일까. 호동은 두려움과 희열이 교차하는 가운데 결국 붓을 들어 베필에 일필휘지(一筆揮之)했다.
그 음률은 천상을 흐르고 (音律流天上)
그 자태는 구름을 누비나니 (姿態雲天翔)
비장한 마음을 다져보지만 (秘藏之心商)
가 버린 허전함은 무엇인가 (問空虛者往)
호동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기 32년, 대무신(大武神) 15년, 5월.
압록수의 지류를 따라 국내성에 입성한 낙랑국 사절단은 대무신왕을 만나 호동과 가려의 혼인을 고했다. 대무신왕은 이에 대해 낙랑국의 호의에 감사의 인사로 패물들을 하사했고 그것으로 시작한 외교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사절단은 이틀의 일정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대무신왕은 이미 호동으로부터 두 차례의 전서구를 받아 호동의 계략과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으로 대단합니다. 어찌 보면 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형님."
"...잘 되기를 바랄 뿐이네."
국내성 북문 왕궁의 중심부인 대전(大殿)옆 침전(寢殿)의 한 방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었다. *붉은 비단 휘장(주 4)으로 반쯤 가려진 실내에서 대작(對酌)을 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이들은 양쪽에 붙어있는 쪽구들에 앉아 각상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 중 휘장 가까이에 앉은 인물의 생김새가 비범하다. 제법 턱수염이 자라나온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내는 붉은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금실로 정교하게 아로새겨진 오조황룡(五爪黃龍)무늬가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상투에는 금장식이 번쩍이는 가운데 그의 쪽구들 한켠에 놓인 소골(蘇骨)에 덧씌워진 화려하게 타오르는 형상의 금제 골조형 *해(주 5)장식과 금으로 만든 꼬리깃 형태의 장식깃이 이 사내의 직위를 말해주고 있었다. 바로 대무신왕 무휼(無恤)이었다.
시녀가 곡아주(曲阿酒)를 내어왔기 때문에, 무휼은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술을 따르는 시녀의 건너편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제야 솜털이 턱 주변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스물 댓 정도 되어 보이는, 강인한 턱선이 젊지만 상당한 실력의 무예를 지니고 있는 듯 보였다. 무휼과 마찬가지로 상투의 장식은 금이었지만 평상적인 조미관(鳥尾冠)으로서 깃털 또한 무휼의 그것과는 달리 자연산이었다. 도포 역시 붉은색이었지만 금실의 장식은 없었으며 그 무늬는 호동의 그것과 같은 주작이었다. 시녀가 바깥쪽 휘장 밖으로 나가자, 무휼은 호리병을 기울여 곡아주를 잔에 받아 입술을 적신 후 상대편 사내를 보며 낮게 말했다.
"그래, 각 노부(奴部)의 반응은 어떤가?"
건너편이라지만, 단지 한바닥이 아닐 뿐 거리는 가까웠기에 반대편의 사내 역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가의 세력이 넓어지는 일에 어찌 반대하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영토가 넓어진다면 자신들의 권력 또한 늘어나는 것일 테니까요."
"그렇군. 그렇다면 아우님께선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단순히 형님의 아우로서의 해석을 말입니까, 아니면 비류나부의 일원인 해색주(解色朱)로서의 해석을 말입니까?"
무휼은 미소지었다.
"어느쪽으로도 상관은 없네. 그렇지만 스스로의 입장표현을 그렇게 남처럼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태도라고 볼 수는 없겠는데."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겠사옵니까, *태왕 폐하(주 6)."
해색주 역시 마주 웃었다. 잔에 술을 채운 그는 술잔을 들어 짧게 예를 취한 후 단숨에 비웠다.
"우선 현재까지는 매우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낙랑국 공왕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가려라고 했던가요? 호동의 서신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아무래도 그 녀석, 철저하게 미인계로 몰아붙일 모양이더군요. 뭐,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싸워서 이길 생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호동의 무예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녀석이 정말로 가려라는 공녀와 혼인을 하여 낙랑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추측이지요."
해색주는 다시 술을 잔에 채웠다. 그러자 무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그 아이를 그리 가르치진 않았어. 무예실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그 아이 또한 엄연한 고구려의 왕자. 화살 한 번 쏘아보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처리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네. 무엇보다, 낙랑은 우리와는 문화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와 그리 오랫동안 화친을 맺을 수는 없을 테니 차라리 낙랑의 실정을 조사해서 정벌을 용이하게 하는 쪽이 우리에게 훨씬 이로울 것이라는 것쯤은 녀석도 잘 알 테지."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주조술이 넘어오면 바로 실용 철기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야장(冶匠 : 주 7)들을 미리 선발하고 있지요."
무휼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우린 호동이 기술을 터득해 국경을 넘어오는 것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로군."
"가까운 시일 내에 낙랑국을 합병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 형수님께서 원자를 생산하시오면 왕실은 안정권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자 무휼은 조금 불편한 심기가 되었다.
"그렇지도 않아. 나는 오히려 옹주를 생산하면 좋을 거라 생각하고 있네그려. 지금 호동이 주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되네. 이런 때에 덜컥 적통 원자가 나온다면 국가가 양분될 수 있어. 주민들뿐만 아니라 호족들 또한 그렇지 않은가? 모두를 위해서도 차라리 옹주가 낫겠지 싶어..."
무휼은 근심을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술잔을 들었다.
"자, 그런 것들은 모두 잊으세. 아이는 하늘이 점지해 주는 것. 지금 걱정해 본들 무의미한 일이야."
"그렇긴 합니다, 형님."
형제는 잔을 기울였다. 알싸한 곡아주의 향취가 입맛에 당긴다. 어느덧 초승달이 구름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서기 32년, 대무신(大武神) 15년, 5월 중순.
따사로운 햇살 아래, 인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왕검성 대전(大殿) 뒤의 별채를 *서옥(壻屋 : 주 8)으로 개조하는 공사가 한창인 것이다. 공사랄 것도 없는, 단순히 살림 몇 구 들여놓는 정도였지만 최리가 직접 나서서 작업을 진행했다. 어제 도착한 고구려에 다녀온 사신들은 대무신왕이 보낸 여러 혼례물들을 바쳤고 최리는 대단히 만족하여 일사천리로 혼사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뭣들 하고 있는 게냐!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끝내야 하느니라!"
한편, 호동은 홍포(紅袍)를 걸치고 조미관을 쓴 채로 왕검성 대전 창가 구들에 앉아있었다. 해질녘이 되어야 서옥에 출두하여 예식을 치를 수 있었으므로 완성되지 않은 별채를 보러 간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영 또한 오늘은 제 9품 관등 조의(輩衣)답게 무사의 절풍(折風)을 쓰고 담청색으로 물을 들인 삼베 포(袍)를 걸쳤다. 영은 예식복에 주름이 탈까 차마 앉지 못하고 서 있었다. 호동은 그런 영을 보며 한마디 던졌다.
"그러지 말고 그냥 앉는 것이 어떻겠느냐?"
영은 뾰루퉁해서 대답했다.
"싫사옵니다."
"어차피 다시 풀을 먹이면 되지 않겠느냐? 힘들지도 않느냐?"
"...전 어느 분처럼 두루마기가 비단이 아니라서요. 구겨진 거 펴는 작업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옵니다요."
"예복 지어 입으라고 준 비단들은 다 어디다 보내고 딴소리를 하는 것이냐."
"저도 장가는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위해서 좀 아끼고 있습죠."
영은 능청스럽게 웃자, 호동은 피식거리며 다시금 창 밖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이외에도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지만, 영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호동은 정말 아무 말이 없었던 것이다. 오직 가려 공녀와 있을 때에만 그는 웃음을 짓고 있었을 뿐... 어느 누가 봐도, 호동은 확실하게 가려 공녀에게 빠져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왕검성 주민들은 모두 그들을 축복했지만, 영으로선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초의 목적을 잊고 사랑에 빠진 사내의 전정은 너무나도 어둡다. 그것이 일국의 왕자라면 더더욱. 더군다나 호동은 아직 태자가 아니기 때문에 태자의 자리를 굳힐 수 있을 입지를 낙랑을 정벌함으로서 만들어야 할 텐데도 말이다.
'정녕... 어쩌시려고 저러시는지...'
영은 걱정이 앞섰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대로 창밖을 내다봤다. 서옥은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인부들이 분주하게 토기며 평상용 목단이며 휘장에 쓰일 비단포(布) 따위를 옮기고 있었다.
왕검성은 혼인 준비로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부터 시작된 서옥 꾸미기는 이윽고 끝을 보게 되어, 호동은 저녁노을과 함께 혼사를 치렀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혼인 풍습으로 서옥(사위집)제가 있었는데, 신랑이 해질녘에 신부의 집 문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절하며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도록 청한다. 신랑이 이렇게 두세 번을 거듭하면 신부측은 문을 열어 신랑을 맞이하여 미리 지어 놓은 사위집에 기거하도록 허락하고, 그 후 신부가 아이를 낳으면 남편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본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독특한 혼인 풍습이다.
호동이 대전 문 밖에서 읍하며 성명을 밝히자, 가려의 양 볼엔 홍조가 가득했다. 부리나케 문을 열려 했지만 시녀들이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말렸다. 세 번째의 읍이 이루어지고서야 최리는 웃음 띤 얼굴로 문을 열었고 호동보다는 영이 장가에 들어가는 것인 양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사위를 맞는 잔치가 시작되었는데, 최리는 호동에게 정성들여 빚은 청주(淸酒)를 권하며 가려를 부탁했다. 이윽고 외실 휘장이 걷히며 가려가 들어섰다. 얇게 짜 가는 팔의 선이 반투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담홍(淡紅)색 바탕에 청초한 자줏빛 초롱꽃 무늬들이 수놓아진 화사한 저고리 소매가 이채롭다. 그 위에 담청(淡靑)의 선을 댄 유백색(乳白色) 반비를 덧입었는데, 반비의 등심엔 화려한 주작의 무늬가 마치 살아있는 듯 홰를 치는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으며 틀어 올린 단아한 흑발에 고요히 자리한 타오르는 불꽃의 금장식 또한 이채로웠다. 그녀는 사뿐히 다가와 호동의 앞에 섰는데, 호동은 물론이요 주변에 있는 모든 이가 가려의 황홀함에 시선을 빼앗겨버려 식장은 일순간 침묵의 정적에 휩싸이고 말았다.
"왕자님 만세! 공녀님 만세!"
잠시 후 누군가의 외침으로 이 정적은 깨졌고, 모두가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그제서야 다시 식장은 잔치 분위기로 되돌아왔다. 가려는 호동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나 손으로 살포시 가린 꽃잎같은 입술은 환희로 빛나고 있었다. 호동 또한 그러한 가려의 모습을 그윽하기 그지없는 시선으로 대하고 있었으며 영은 그러한 두 사람의 태도를 보고는 결심을 굳혔다.
'할 수 없군...'
서기 32년, 대무신(大武神) 15년, 5월 중순.
왕검성은 호동과 가려의 혼인식을 축복하고 있었다.
-계속-
-雷蛇-
*해자(垓子) : 일반적으로 성의 주변에 깊은 도랑을 파 적군의 성벽타기를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한다. (주 1)
*반비(半臂) : 옛사람들이 즐겨 입던 두루마기(袍) 중 여성형의 발전형으로서 여성 특유의 넓고 유연한 저고리 소매를 부각시키기 위해 도포의 소매를 과감히 잘라 저고리의 소매를 드러내게 한 겉옷이다.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중국 수나라와 통일신라시대의 문헌이지만 이전부터 이러한 형식의 옷은 존재했으리라 생각한다. 통일신라 이후에 예단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고려, 조선조를 거치며 다양하게 세분화한다. 현재엔 날개옷(북한 사투리) 등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주 2)
*칠현금(柒絃琴) : 동양풍의 현악기 중 하나로 거문고의 모태가 된 악기이다. 형태, 주법 등 많은 면에서 동양만의 독특함을 지닌 악기이다. (주 3)
*붉은 비단 휘장 : 고구려 사람들은 유난히 붉은색을 좋아했다. 붉은색은 왕족의 도포색이었으며, 궁술 과녁의 색이었다. 이 붉은색 휘장 역시 왕족의 침실에만 허락된 것으로 일반 호족들은 흰 비단 휘장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휘장 문화는 고구려에서 처음 발견되는 방식으로 유동적인 생활 패턴을 가진 유목 민족의 고급형 생활양식이다. 휘장과 쪽구들, 수레 문화는 유사시에 항상 전쟁터로 출동하기 위한 고구려인들의 상무적(尙武的)인 풍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와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신을 신고 생활하는 입식 생활 방식과 문이 아닌 간단한 휘장으로서 해결한 것이다. (주 4)
*해 : 고구려 사람들의 독특한 천문관을 보여주는 상징물 중의 하나로서 우리들이 나중에 부르게 되는 속칭 "햇님"의 시초물이다. 검붉은 빛의 세발 까마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 해는 전 동양권 대륙을 통틀어 고구려에만 남아있는 독특한 천문의 해석 방식 중의 하나이다. 해와 반대되는 궤도엔 추후에 "달님"으로 불리게 되는 둥근 두꺼비 형상의 달 또한 존재하며 이들은 황룡사상과 연계되어 자신들을 대륙의 중심으로 생각하던 고구려인의 천손(天孫)사상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주 5)
*태왕 폐하 : 중원에 황제가 있었다면, 북방 대륙의 패자인 고구려는 그 군주의 호칭을 태왕(太王)이라 불렀다. 이것은 황제의 아랫단계가 아닌 중원의 방식을 천하게 여기는 호방한 고구려인들의 선택이었다. 항간에서는 태왕이라는 호칭을 국수주의라고 비난하지만, 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황제와는 다른 고구려식의 군주의 호칭일 뿐이다. 오히려 태왕이라는 호칭을 국수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중국 사대주의에 빠져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무서운 유교의 힘이다. (주 6)
*야장(冶匠) : 대장장이를 이른다. 보다 직업적인 개념으로서 주장(鑄匠), 도장(刀匠), 공장(工匠) 등이 있지만 통틀어서 야장이라 이른다. (주 7)
*서옥(壻屋) : 사위집이라는 뜻으로 고구려의 대표적인 혼인풍습이다. 항간에선 데릴사위제니 모계중심 가족제니 하는 오판을 받고 있지만, 그것들과는 그 개념이 미묘하게 다른 유목사회 특유의 혼례 방식이다. 추정적으로는, 동북방 모든 유목사회에서 시작된 교접 풍습이 문화적으로 발전한 것이 서옥제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서옥제는 본문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개 구성적인 위치를 가지는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혼인(교접)에 대한 인식이 현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서옥제에서의 신랑은 일단 해질녘 신부집으로 출동해 두세 번을 읍(꿇어앉아 절하며 외침)하여 신부와 동침할 수 있도록 애걸한다. 신부측의 허락이 떨어지면, 신랑은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신부와 동침했으며 편의에 따라 본가에 왕복하거나 신부집에서 동거했다. 신부가 아이를 낳아 무사히 영아기를 보내면, 신랑과 함께 시가(媤家)로 들어가 살았는데(오늘날의 ‘장가 간다’ 라는 말의 어원이 바로 이 서옥제이다), 이를 본 중국 사람들이 처가살이하는 데릴사위로 착각하여 잘못 서술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서옥에는 신랑이 있다는 표식인 전백(錢帛)이 있었는데, 이것의 용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신랑측에서 바치는 패물이라던가, 신부측의 혼수라던가 하는 내용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주 8)
첫댓글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고 갑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