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의 추억
최보일
입추를 지나면서 그 야단스럽던 8월 한더위를 보내고 조금은 한시름 놓은 듯하다. 아침저녁으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 가을의 문턱에 서서 차 한 잔을 마주하며 뜨거웠던 지난 여름날을 되돌아본다.
지난여름 두어 달은 더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얼마나 뜨거웠던지 백 년만의 폭염이라 일컬었다. 8월에 들어서자마자 1907년 기상관측 이래 111년 만의 신기록을 세웠다고 매스컴마다 연일 떠들썩하게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1942년 대구의 40도 기록을 강원도 홍천이 깨면서 41도를 기록했단다. 뒤이어 서울이 39.6도, 의성이 40.4도, 경산이 40.3도를 기록하는 등 역대 지역별 최고 기온 기록이 연신 깨어져 나갔다. 다른 지역에 비해 여름 기온이 낮아 살기 좋은 곳이라 자부했던 이곳 부산도 8월 5일엔 마침내 37도를 기록하는 등 참으로 여름 한 철을 보내기가 이토록 힘들었던 때가 일찍이 없었다. 밤은 밤대로 한 달이 가깝도록 30도 가까운 열기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지는 등 그야말로 한반도 전체가 찜통에 빠진 듯했다.
질병관리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폭염에 탈진하거나 건강 이상으로 입원하는 사람들이 2,300명으로 예년에 비해 폭증했는가 하면, 이 동안 3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로 이어졌다. 연전에 터키의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게아를 여행하다가 겪은 42도 불가마 같은 악몽을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연일 경험했다. 포르투갈이 47도를 기록하여 사하라 사막 수준이 되고 유럽이나 북미도 비슷하다면 더위는 세계적 추세임에 틀림없다. 그동안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들지 않고 갈수록 환경오염이 극심하여 닥치는 자연재해인 만큼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아내는 마른 몸인데도 체질상 찬바람을 싫어하여 신혼 초부터 집에는 에어컨을 두지 않고 살아왔었다. 반대로 소양인인 나는 체온이 높고 땀이 많아 평소 여름나기가 보통 힘들지 않다. 예사로 생각했다가는 온열 환자나 사망자 반열에 오를 가능성도 없지 않겠다 싶었다. 어차피 올해는 지나갔고 내년에는 꼭 에어컨을 장만하리라 해마다 하던 다짐을 또 해본다.
실은 8월 초에 해운대 바닷가나 내원사 계곡을 찾을 마음도 먹었지만 오며가며 보게 될 무질서와 혼란이 무더위를 더 재촉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고전적 방법으로 은행이나 대형마트 같은 데도 눈치가 보이고 해서 그것도 어려웠다. 서울은 도시철도 경로우대로 춘천이나 천안은 물론 인천공항에까지 진출하여 피서한다는 보도이다. 부산은 지하철을 타고 범어사에서 다대포까지 왕복했다는 동네 노인네들이 생겼단다. 한 번 해볼까 했지만, 지공도사로서의 위신을 고려해서 그마저 포기했다. 나름 기발한 착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인근의 부산대나 금정도서관 등지에서 책이나 읽으며 피서를 해보았다. 그러나 청년들의 입시·취업 경쟁이 저리도 힘들게 빈자리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한가롭게 신문이나 뒤적이며 자리를 축내고 앉았다는 것이 체면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갈 곳이 마땅찮았다. 하지만, 궁하면 통하는 법! 범어사 뒤 사뱃골 언덕을 넘어 계명봉을 돌아오는 동안에는 그래도 바람결이 있는 듯했다. 두세 시간 숲길을 걷다보면 땀은 비 오듯 흘러내리고 더위도 잊은 듯 몸은 한결 가볍다. 이열치열 체력단련도 한 터라 집으로 돌아와 찬물에 샤워 후, 맑은 차 한 잔을 대하며 더위를 이기는 일거양득의 피서법을 실천해왔다.
며칠 전 고향 교회로부터 교회 설립 110주년 기념 출향성도 초청주일 초청장이 왔다. 1884년 동방의 고요한 나라 이 땅에 알렌·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첫발을 내디뎠고,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08년 한반도 남단의 곤양교회가 문을 열었다. 나는 이 교회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청년시절을 보내고 성년이 돼서야 직장 따라 부산으로 옮겼다. 그 후로 고향의 부모님이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셨고 임종을 맞으셨던 곳이다. 차 한 잔을 마주하다보면 꿈결로 가보는 고향이지만 언제나 그리웠고, 그곳으로 향하는 수구초심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뉴월엔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조차 달고 이 무더위 뙤약볕에 질주할 마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아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내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봉명산을 떠올리게 되고 그윽한 오솔길을 그리워한다. 그 산자락에 1500년 역사의 다솔사가 터 잡아 있고, 뒤편 양지 바른 곳에는 겨울에도 푸르른 녹차밭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백여 년 전, 사주 효당 최범술은 강진의 정약용과 초의선사의 맥을 잇는 분이었다. 그는 초의가 시로서 다도를 설명한 책 <東茶頌>을 편찬하였고, 그로부터 약 60여 년간 차 문화를 일구어 왔었다. 어쩌다 봄 소풍이라도 갈라치면 요사채 그늘진 곳에는 어김없이 녹차를 말리는 향긋한 냄새가 아지랑이와 함께 피어올랐던 기억이 난다. 이곳의 작설차를 맛본 사람들은 그 풍미가 왕의 녹차라던 하동 화개차나 보성차보다도 위에 있다는 얘기들을 했다.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조국현실을 노래했던 만해는 반도의 남단 다솔사에서 회갑연을 맞이했다. 한용운․김범부․김범린․변영만․변영로․변영태․박영희 등 당대의 조선을 대표하는 지식 애국자들이 모여 한 잔 차를 사이에 두고 국난의 해결책을 모색했었다.
나의 경우, 완전 발효차인 중국의 고급차 보이차나 흑차에서는 해맑은 맛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반 발효차인 홍차 계통의 영국의 얼그레이나 스리랑카의 실론티를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향기로 말하자면 차라리 인도의 아쌈차나 다즐링, 중국의 항주 용정차처럼 담백한 덖음 차를 선호하는 편이다. 하동의 쌍계사녹차나 보성녹차 같이 곡우 이전에 딴 잎으로 쪄서 말린 우전차라면 고향 차답다.
111년 만에 급습한 기록적 무더위를 겨우 보내놓고, 110년이 넘은 고향 교회에서 보내 온 소식으로 잠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 가을에 한 잔 차를 마주 대한다. 백년도 넘은 세월 전에 나라를 걱정하며, 한 잔 차를 나누었던 우국지사들을 생각하면서. (2018. 8. 9)
첫댓글
최교장님, 멋진 글(수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고향은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인데, 인근에 팔공산 동화사와 갓바위, 불골사, 영천 은해사 등이 있습니다. 초, 중학생 때 소풍을 갔던 곳입니다. 고향 생각이 나고, 어린시절이 그리워집니다. 다솔사를 한 번 가본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그냥 절 구경만 하고 나왔습니다. 최교장님의 글을 읽어보니 다솔사가 애국지사들의 모임 사찰이었네요. 다음에 가면 사전 지식을 갖고 꼼꼼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최교장님의 안내가 있으면 더 좋고요. 난 차(茶)를 즐겨 마시지 않아 잘 모르는데 차(茶)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네요. 종종 좋은 글 게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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