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주 ＜단편소설＞ 창작21 2010년 여름호 발표작

[창작21]

<단편소설> 창작21 2010년 여름호 발표작

새벽 종소리

 
윤 이 주
 

구름 한 점
초겨울 한 낮,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공중엔 그 흔한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헐렁한 봉우리들만이 하늘의 경계를 드러내며 한없이 무료하게 펼쳐져 있다. 그 하늘에서인지 구름과 새가 있었으면 싶은 허공에서인지 아니면 저 야윈 봉우리들에서인지 모르겠으나 눈 하나가 튀어나와 낡은 벽돌 건물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 눈이 집요하게 바라보는 곳, 그 곳은 바로 도청 농정국 산림과 사무실이다.
텅 빈 사무실을 촘촘히 엮어놓은 팽팽한 긴장감은 다름 아니고 저 남자의 침묵이다. 이제 곧 점심시간은 끝날 것이다. 발자국 소리가 다시 복도를 채우면 거미줄처럼 둘러치고 있는 이 가느다란 줄도 툭 끊어지질 것이다. 점액질의 육중한 소음 속으로 침묵은 새까만 알갱이가 되어 가라앉을 것이다. 지금은 바로 그 같은 일들이 막 일어나기 시작하려는, 점심시간이 끝나려는 때다. 그리하여 이 남자에게서 비롯된 촘촘하고 길다란 정지는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남자의 뒤통수께로 바짝 다가와 있던 눈이 전지(剪枝)된 가로수 위 전기줄로 벌써 내뺐는지 아니면 남자의 우부룩한 뒷머리 속으로 뛰어 들었는지 어느새 홀연 사라지고 없다.

늪
50세. 남자. 도청 산림과 6급 공무원. 무던한 아내와 열 살 아홉 살 연년생 두 딸 있음. 33평 아파트와 시골에 밭 800평 있음, 있음, 있음. 차는 은색…… 늪. 늪. 늪. 이면지에 낙서를 하던 최기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종이를 구겨 휴지통에 던져버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다. 어째서 밤마다 악몽 속을 헤매며 이젠 그것도 모자라 시도 때도 없이 환청이란 말인지.
다시 시작한 등산도 낚시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여섯 달 전 악몽을 꿀 때만 해도 그저 피로한 탓이려니 스트레스가 쌓인 탓이려니 했던 것인데 보름여전부터는 귀울음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두웅 둥 북소리 같은가 하면 종소리 같고 종소린가 하면 쉬이쉬이 호스에서 빠져나가는 물소리 같고 물소린가 하면 타타닥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도 기복이 병원 가는 걸 차일피일 미룬 것은 그저 지나가는 일쯤으로 여겼던 속짐작도 있었지만 과(科) 내부의 이런저런 바쁜 사정이 있은 탓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산불은 집중단속기간 중에 났다. 그 보다도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이 난 장소였는데 그곳은 도에서 자연휴양림지역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벌써 도로까지 닦아놓은 곳이었다. 화마(火魔)는 모감주나무와 그 위 이깔나무가 아름드리를 이루던 산을 꺼먼 광산처럼 바꿔놓고 말았다. 지난 한 달 내내 산림과 사무실만이 아니라 국(局) 전체가 금간 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하여 직원들은 그 얼음꽝이 꺼질까 주변으로만 빙빙 도닐었다. 그런 와중에 어느 틈으로 스며든 환청이 지금은 시시각각으로 모양새를 바꿔 기복을 잠입해 드는 것이다. 복도를 걷다가도 자판기 커피를 뽑다가도 혹은 식당 문을 나서다가도 그는 한동안 벽을 짚은 채 고개를 떨구곤 하였다. 기어이 어제는 기복이 박 이비인후과를 들렸던 건데, 초등학교 동창인 박은 난감한 표정으로 정신과를 소개하더니 내처 예약까지 잡았던 것이다. 출근하여 의자에 앉는 둥 마는 둥 시늉만 하고 사무실을 나갔던 기복이 이제껏 눈여겨보지 않았던 신경정신과란 데를 다녀온 것은 벌써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기복이 이면지 하나를 새로 집어든다. 숲과 인간이 공존하는 산림복지국가라는 굵은 고딕체 문구를 노려보다 다시 볼펜을 잡는다. 맨들맨들한 종이 위로 그의 머리 속을 빠져 나온 잡다한 상념들이 내달리거나 미끄러지고 있다.
한 시간 안팎의 면담을 끝내며 정신과의사 정은 기복이 중요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있는 것 같다,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 시급하다는 소견을 보였다. 중요한 사실이라니, 도대체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이란 게 무엇인지 기복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렇더라도 정녕 어딘가에 숨어 있는 놈이 있다면 어서 찾아낼 일이었다. 찾아내기만 한다면, 하는 심정으로 종이에 볼펜을 대보지만 최기복의 머리 속을 빠져나온 생각들 중에 의도적으로 피했던 사실은 없어 보였다.
아파트를 장만할 때 누이에게 빌린 돈은 이제 다 갚아가고 산불이 조금은 방해가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승진은 벌써 국내의 기정사실인 듯하다. 아이들은 잘 크고 마누라는 펑퍼짐하게 퍼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이들 과외지도로 버는 돈을 적잖이 살림에 보태고 있다. 조석으로 문안 전화를 넣어야하는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을 누르고 있다는 자신도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무엇인지 기복은 도통 가늠이 되지 않는다. 외려 정신과를 다녀온 후 귀울음은 더욱 집요해졌다. 소리들이 이젠 귀 밖으로도 빠져나가서 텅 빈 사무실 벽을 후려친 뒤 다른 소음까지 데리고 귀 안으로 파고드는 중이다. 심상치 않은 병이 든 모양이군. 크게 한숨을 내쉰 기복이  이면지를 밀쳐두고 지갑을 연다. 더듬더듬 신경정신과 정의 명함을 꺼내든다.
“최기복입니다. 오늘 바로 내려갔다 오려고 합니다. 다녀와서 선생님께 들르겠습니다. 예. 그래 보지요. 감사합니다.”
북소리라, 종소리라……. 의사는 새벽예불 의식으로 유명한 절을 소개하며 북소리와 종소리부터 실제로 대면해보라는 처방을 내렸다. 마침 그 절은 한 달여 전쯤 어느 신문기사에서 본 절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며칠 쉬었으면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기복이 총총히 복도를 빠져나간다. 1층 로비로 들어서던 두 명의 도로과(道路科) 직원들이 알은체를 했으나 기복은 그들이 자신의 옷깃을 잡아끈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별빛
눈을 떴다. 침대시트가 흥건히 젖어있다. 또 꿈에 발목을 잡혔을 것이다. 생생하기가 생시보다 더하던 꿈이 오늘은 웬일인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신 비지땀을 흔적으로 남겼다. 습관적으로 전화기를 열었다 접으며 기복이 침대 옆 디지털시계를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에 2:40이라는 초록 점들이 찍힌다.
엊저녁 해가 아직 꼬리를 남기고 있을 무렵 절 입구 마을에 도착한 기복은 모텔에 방을 잡고 근처 식당에서 된장찌개 백반으로 저녁을 먹었다. 여섯 시를 막 넘어가는 시각이었지만 해가 짧아져 주위는 벌써 여러 겹 어둠을 두르고 있었다. 담배 한 갑과 맥주 두 캔을 사들고 모텔로 돌아오던 그가 겨울 밤하늘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밖과 달리 방안은 후텁지근하여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는 맥주 두 캔을 연거푸 마셨다.  
밤 내내 활짝 열려있던 그 창문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다. 낚시 핑계가 잘 먹혀든 건지 아내에게선 아무 전화가 없다. 자신도 그저 주말 여행쯤으로 생각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소망해보지만 다시 눈을 붙이기가 무섭고 뜨고 있자니 환청뿐이다. 몇 달 새에 몸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얼굴 또한 늙수그레한 빛을 더해갔다. 새벽 예불엔 가야한다. 안 그러면 여기에서 더 지체해야 할 것이다. 이 작은 면내로 들어올 때부터 마음이 더욱 불안했다. 그저 종소리를 빨리 듣고 여기를 떠나고 싶은 맘뿐이다. 기복이 거추장스러운 바바리코트를 걸쳐 입고 방을 나섰다. 모텔 뒤 자잘한 자갈이 깔린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어 놓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앞 유리에 두터이 꼈던 성에가 얼추 벗겨질 무렵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상향으로 올리자 길 양옆으로 늘어선 소나무가 일시에 차를 향해 덤벼든다. 축 늘어뜨린 팔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아예 어깨까지 겯고서 막아선다. 온 몸의 털이 꼿꼿이 일어선다. 기복이 급히 불빛을 내린다. 어둠은 아주 두터워서 코앞만 간신히 드러날 뿐이다. 두렵다. 산불 사후처리를 위해 나간 곳에서 은행잎과 함께 바람에 실려와 구두 등에 얹혔던 컬러기사엔 없던 모습이다. 가을산행이니 템플스테이니 하는 기사와 함께 실린 풍경 사진은 참으로 아늑하기만 했다. 이 같은 무시무시한 어둠은 예상 밖의 일이다. 이처럼 두렵고 묵직한 숲은 처음이다. 커다란 짐승의 내장 속처럼 꾸불텅대는 길이다.
가까스레 찾아들어온 절 입구 주차장에 기복이 차를 세운다. 주차장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 역시 한 발짝 나서지 않고도 통째로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오 분전 세시. 아직은 귀신들의 시간, 정령들의 세상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토도톡 톡. 아람벌린 도토리 소리가 들린다. 어둠은 귀의 능력을 무한대로 늘려놓았나 보다. 도토리겠지. 이때까지 나무 위에 매달려 있을 도토리가 없다하더라도 그 소린 도토리가 익어 가는 소리거나 떨어지는 소리여야 한다. 도토리가 땅위로 내려앉는 소리는 잦아들 줄 모르고 귓바퀴를 자극한다. 두런대는 웅얼거림 같은 것은 아무래도 환청이라고 믿고 싶다. 저 소리는 바람 소리일 뿐이야. 계곡물 소리고 음……, 이건 흩어지는 나뭇잎 소리네. 깜박이는 별빛이 내는 소리고 이건 그저 숨소리다. 풀이나 바위 같은 것들이 숨을 쉬는 소리일 뿐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다. 그저 무언가의 숨소리들이라고 말야. 주르륵 눈물 한 방울이 기복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주 짧은 길이라도, 그것이 걸음으로 채 백 보가 안 되는 그런 길이라도 잊고 싶은 길이 있다. 차에서 내려 절 입구로 걸어들어 온 그 짧은 길이 기복에게 그랬다.
 
팽나무
경내를 종소리와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감싸고 있다. 어디로 갈 줄 몰라 서성대던 기복이 마침내 연꽃 모양의 식수대 옆에 자리를 잡고 선다. 다행히 종루도 가까운 곳이다. 대웅전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아주 밝아진 기복의 두 귀는 소리를 머금고 있는 물의 미세한 떨림을 알아채고 어둠에 적응한 눈은 그 파문을 읽어낸다. 일렁이는 소리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던 기복이 자박거리는 걸음소리에 얼굴을 든다. 바삐 종루를 향하던 여승 둘이 나란히 합장을 하고 머리를 조아린다. 엉겁결에 그도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인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드니 신심이 깊은 불자인 듯 이 감감 새벽에 탑돌이를 하는 이가 눈에 들어온다. 종루로 향하는 두 여승이 그이와도 목례를 나눈다. 
 식수대 옆 팽나무에 기대어 기복이 종루를 올려다본다. 두 여승이 나누어 낀 하얀 장갑이 눈에 들어온다. 하긴 장갑이라도 껴야 할 날씨다. 겨울 초입치고는 한겨울 날씨만큼 매서운 새벽이다. 마침내 여승 하나가 북 앞으로 나와 선다. 그저 서있을 뿐인데도 북 앞에 나와 선 여승의 뒤태는 사람 마음을 흔들 만하다. 여승이 가만히 양팔을 벌리더니 천천히 들어올려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타악탁 탁탁. 한 마리 커다란 나비가 날갯짓을 시작하는 것만 같다. 한 쌍의 나비가 서로를 따르듯 여승 둘이 들락날락 법고를 두드린다. 커다란 북과 노니는 그 모습이 마음을 흔든다. 기복은 소리를 들으러 온 본래 목적을 잊고 근사한 공연을 보듯 넋이 빠져있다. 법고 위를 날아다니던 나비가 빠르게 시계방향으로 몸을 틀더니 이윽고 날개를 접는다. 법고 옆에서 가만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여승 하나가 범종 앞으로 나와 선 것도 바로 그때다.
 타종이 시작되려는 찰나다. 기복은 바짝 긴장하며 소리에 집중한다. 두웅. 바로 그때 기복을 가려주고 있던 팽나무가 부르르 온 몸을 떨었다. 참으로 괴이하게도 기복의 몸 역시 우웅 울음소리를 내었다. 기복은 화급히 팽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다앙. 두 번째 타종이 이어졌다. 기복이 가까스레 팽나무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종루를 바라본다.
새벽 산사의 날씨는 살을 에듯 차가웠지만 무거운 당목을 매단 줄을 놓았다 쥐었다하는 여승의 움직임엔 변화가 없다. 줄의 속도를 흩뜨리지 않고 어느 틈엔가 당목을 놓아버리는 간단한 동작에서 서로 다른 음들이 울려 퍼졌다. 눈앞에서 들은 게 아니었다면 종소리에도 음계가 있다는 걸 믿기 어려웠으리라. 여승은 종을 만들고 매단 사람들의 마음까지 싣는 모양 느리게 종을 울려댄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있지만 기복의 몸은 이미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몸을 지탱하기 어렵다. 몸 안 어디에 당목이 있는지 온 몸이 당좌가 되어 밖으로 소리를 내지른다. 저 멀리 환한 빛 세 개도 종소리를 타고 있다. 천지간에 어둠이 놓여있어 하늘의 별인지 암자를 밝히는 불빛인지 가늠이 어렵지만 그리 높지 않게 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늘의 별은 아닐 성싶다. 종소리를 타고 있는 빛이 몸 속 깊은 어딘가를 건드린다. 다시 귀가 울지만 신통하게도 두렵지는 않다. 귀 안을 잔잔히 채우며 들어오는 소리가 있다. 맑고 깊은, 무엇보다 또렷하게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다.
“아침을 알리는 의식이랍니다.”
나지막한 말투지만 이미 등줄기에 굵은 소름이 돋았다.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이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여음을 남기는 종소리 틈바구니로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법고와 범종, 저 목어와 운판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신도가 아니라도 사람들 마음을 깨치고 들어오지요. 그 중 이 범종 소리를 청도팔경 중 제 1경으로 친답니다.”
생생한 목소리의 위력에 이끌려 기복이 몸을 돌렸다. 누군가 옆에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눈뜨고도 꾸는 꿈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옆에는 머리부터 목까지 죄 목도리로 가리고 있어서 겨우 눈과 콧등만 보이는 여자가 서 있다. 그녀의 말투는 누군가를 많이 닮은 듯했다.
종루를 향해 서있던 여자가 잠시 고개를 돌려 기복을 바라보았다. 순간 하마터면 기복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두 다리에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주저앉았을 터였다. 그녀의 눈맵시에 기복은 수십 해를 단박에 건너뛰어 이름하나를 솟구쳐냈다. 순임 누이? 당장이라도 여자를 밝히고 싶은 맘이 간절했지만 아닌게아니라 새벽의 이 의식엔 무언가 탈속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어서 의식 안으로 사람을 이끄는 벗어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낮은 한숨인지 빗소린지 무언가 연신 귀 안으로 흘러들어 온다.
“여의주를 문 목어는……”
눈에 심지를 돋우고 뚫어지게 여자를 바라보던 기복이 다시 종루를 올려다보았다. 목어는 퇴색이 깊어 흐릿했지만 물고기가 물고 있는 여의주는 타는 노을처럼 붉다. 그의 귀를 파고들던 빗소리는 바로 목어소리였다. 손마디마디의 섬세함이 살아나야만 하는지 목어를 치는 여승은 어느새 흰 장갑을 벗고 있었다. 앞뒤로만 움직이는 그 손목과 희디흰 손가락이 뚜렷하여 그 촉감까지도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여의주를 문 물고기는 대자재(大自在)를 얻은 물고기를 뜻하지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대자재…….나무관세음보살.”
합장을 한 여자가 불경을 외며 반배를 했다. 목소리는 뚜렷했으나 입술도 입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 옆에 서있다는 것 외에 그녀를 설명할 길이 없다. 손을 내밀면 만질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서있지만 손을 내밀기가 두렵다. 목이 타들어 가는 이 갈증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목어의 갈라진 배를 훑으며 여승이 의식을 끝냈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여승이 목어와 마주 걸려있는 둥그런 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운판…….”
여자가 짧게 탄식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뭇 중생들과,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넋들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이랍니다.”
여자의 나직한 말소리가 중간중간 끊어졌다. 기복이 다시 여자를 바라보았으나 여자는 미동도 없이 옆에 서 있었다. 운판에서 나오는 가늘고 높은 음이 오랫동안 경내를 감싸고돌았다. 운판을 두드리는 의식이 끝나자 은은한 종소리와 가벼운 목탁 소리가 대웅전에서 다시 들려왔다. 두 여승이 차례로 종루를 내려서는 것을 보며 기복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정말 여자를 돌려세울 차례였다. 그러나 경내엔 대웅전으로 향하는 비구니들의 기다란 줄만 보였다. 그 행렬이 마치 막아 세울 수 없는 물처럼 유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처사님, 예불에도 드시지요.”
종루 위의 여승 중 하나였다. 은테 안경을 낀 젊은 여승이 기복에게 잠깐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 기복 역시 고개를 조아리며 ‘고맙습니다’했지만 그 소리는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그대로 입안에 갇혔다.
잠자코 여승을 따라가 당도한 대웅전 문 앞에서 기복이 걸음을 멈췄다. 가지런히 놓인 수십 켤레의 고무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 콧등에다 제각각 간단한 표식을 해둔 고무신이 소박하고 정겹다. 맘에 젖어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꾸깃꾸깃하던 마음이 부드럽게 펴지고 있다는 걸 기복은 알았다. 법당 문밖으로 빠져 나온 시리고 맑은 소리를 따라 기복은 조용히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구석기둥 옆에다 몸을 놓았다. 은테안경을 낀 젊은 여승은 어느덧 무리에 섞여 들어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불경소리 틈틈이 들리는 요령 소리에 맞춰 여승들이 섰다 앉았다하며 느리게 불경을 외었다.
이때 기복은 그저 자주 빛 커다란 방석 위에 무참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엔 불상이니 탱화니 여승이니 모두 흐려져 뭉개질 뿐이었다. 누군가를 찾아보고 싶었으나 여승들의 뒷모습은 한결같았고, 무엇보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것마저도 죄스러운 맘이 들었다. 일어서고 앉고 하는 예불의 의식과 무관하게 그는 그저 방석 위에 몸을 내려놓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몸이 조금씩 앞뒤로 흔들리더니 그예 기둥에 머리를 대고 마는 것이었다. 토옥 톡 토토토토톡……. 독경의 곡조가 바뀌고 있었다. 빠르고 경쾌한 소리였다.
기복의 눈앞에 저 멀리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오직 멀리 보이는 작은 구멍으로 서둘러 그를 데려가는 것이 그 독경의 임무인 듯했다.

채마밭
이토록 햇살이 눈부신 한낮일리 없는 길을 기복이 걸어간다. 절로 향하는 기복을 언제 그랬냐는 듯 소나무들이 한없이 명랑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이 한낮의 활기가 무엇 때문인지 기복은 이미 알고 있다.
차는 절 주차장에 세워져 있을 것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공포스러운 눈들을 뚫고 길을 내딛던 새벽의 한기는 어디에도 없다. 새벽부터 주차되어 있던 외지 차량번호를 가진 차를 수소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럴 수 있지, 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암갈색의 겨울 산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어이, 최기복, 누군가 자네를 찾고 있는 거라고.
종무소에서 알려 준 곳은 절 앞 채마밭이다. 거기에 최기복을 찾는 이가 있다는 얘기다.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넘어 뵈는 산벚나무 길을 따라 채마밭이 펼쳐져 있다. 저 밭에 순임이든 누구든 분명 최기복을 찾는 이가 있다는 말일 터이다. 긴 밭이랑 앞에는 청상추, 적상추, 쑥갓, 이라고 푯말이 붙어있다. 그러나 실한 먹거리가 되었을 채소는 없고 이랑 군데군데 잡풀 몇 놈이 고개를 내놓고 있을 뿐이다. 밭을 옆에 끼고 나있는 산벚나무 길을 더 올라가자 시금치가 예닐곱 이랑, 갓 새순을 틔워 낸 열무가 두 이랑, 배추가 대여섯 이랑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밭이 나온다. 무슨 비결인지는 알 길은 없으나 이 겨울에도 채소는 실하게 자라고 있다. 이 밭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밭은 끝없이 펼쳐져 있으니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길을 따라 옮겨온 걸음이 싯퍼런 무청과 더펄거리는 배추가 한 가득 펼쳐진 밭에 이르러서야 멎는다.
밭은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다. 멀리서 밀짚모자를 쓴 여승 하나와 맨머리 그대로 겨울 햇살을 받아내고 있는 여승이 무와 배추 사이를 가르는 시금치 이랑을 정답게 타며 밭일을 하고 있다. 이쯤에서 몇 번 헛기침을 해야겠지. 그러나 목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꿈은 이래서 어렵다. 슈퍼맨처럼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가도 아무 것도 아닌 소리 하나 지르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 짓도 안 해도 일이 성사되기도 한다. 맨머리 여승이 바지를 털며 일어서서는 밭고랑을 디뎌오고 있다. 새벽에 종을 치던, 그를 새벽 예불로 이끌던 여승이다. 젊은 여승의 은테 안경이 번쩍 빛난다. 아무래도 여승에게 다가가기란 보통의 남자들에겐 퍽 어려운 걸음이란 생각이 든다.
“윤순임씨를 찾아온 분이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군기가 꽉 잡힌 군인처럼 답해놓고 기복은 퍽 무안해졌다.
“혹여 스님을 찾는 분이 계시면 이 걸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쪽지 한 장만을 건네고 돌아서려는 여승에게 기복이 급히 몇 마디를 더 보태보는데.
“스님이라구요? 순임 누이가 스님이 되셨습니까? 누이는 살아 있지요? 어디 있습니까? 스님, 스님.”
기복을 바라보는 여승의 눈가가 붉게 물든다. 젊은 여승의 얼굴에 순임이 겹쳐진다. 기복은 이미 고랑을 밟아가 시금치 이랑을 타는 여승을 그저 바라보다가 하릴없이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밀짚모자를 쓰고 작무(作務)를 하던 여승이 고개를 들어 주차장으로 향하는 기복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 쪽지를 건네고 돌아와 꾹꾹 울음을 눌러 참는 젊은 여승의 등을 토닥인다. 오그라져 펴지지 않는 손으로.
 
질주
접혀진 누런 한지를 펼치자 약도가 나온다. 약수암. 필체는 틀림없는 순임의 것이다. 순임을 다 잊으려면 그녀의 필체마저 잊어야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 해나 편지를 주고받던 그 가슴 저린 필체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잊은 줄 알았다. 잊으려고 했다. 시동을 거는 기복의 얼굴에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키 어려운 표정이 뒤엉켜 있다.
미쳐 날뛰는 용처럼 길이 전후좌우로 요동치고 있다. 이런 길을 내달리던 때가 있었다. 그랬던가. 잊지 못했던가. 그저 잊었다고 생각했던가. 터무니없어 지워버렸던가.
시장 뒷골목을 맨발로 헤매 다니며 불러대던 이름이 귀에 쟁쟁히 들어와 박힌다. 잊었다고 생각한 그 이름이 뒤죽박죽 뒤섞여 사무실 책상 위에도 올라서고 아내의 잠옷에 걸쳐지기도 했다. 그렇지, 문득문득 숨을 쉬기가 힘겨웠지.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지금처럼 문득문득 가슴이 답답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방직공장 옆으로 흐르던 시커먼 개천에다 목놓아 순임을 불러내놓곤 하였다. 기어코 길을 달려가 그녀의 흔적을 찾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작은 소읍의 음산한 동산 위를 수도 없이 넘나들던 긁히고 파인 상처투성이였던 젊은 몸이 그 모든 걸 잊기 전까지 한결같이 너무나 험상궂게 일그러진 길들 위에 그가 서 있었다. 얼마나 그 길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가.
비명과 아우성, 통곡이 열린 문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창문을 올리지만 막을 길이 없다. 다시 귀울음이 시작되었다. 순임의 목소린가, 권투도장 샌드백을 후려치는 소린가, 알 수 없는 소리들의 집이 되어 귀가 울고 있다. 그 여자를 다시 만나 부둥켜안는 날이 온다면 가늘고 흰 어깨를 덥석덥석 물어뜯어 붉은 핏줄기를 모두 빼내고도 싶었다. 그녀의 가는 몸을 멍석 위에 짓이기고 싶었다. 딸자식들의 고혈로 아들놈들을 건사하던 세상의 부모들 앞에다 제 시퍼렇게 멍든 심장과, 누군가를 향해 한없이 길어져 온 몸을 휘감고도 남을 손가락들을 모두 뽑아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순임의 입술을 향해 이마를 향해 뺨을 향해 가슴을 향해 다리를 향해 머릿결을 향해 한없이 길다랗게 뻗어나가던 그 손가락을 말이다. 시뻘건 불꽃이 박힌 두 눈알을 뽑아 누군가에게 통째로 바치고 싶었다. 그녀의 야윈 어깨를 닮은 그녀네 집 누덕누덕한 멍석 위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이 동네방네 포달을 부렸던가. 그 아득한 고샅길 위를 휘돌아 나온 법고소리가 다시금 난폭하게 귀를 때리고 있다.
국장의 깐질깐질한 잔소리가 들려온다. 동료들이 보내는 남루한 눈초리, 아내의 무구한 눈빛, 그 뒤에 흐르는 이상한 경계. 어둠속에서 사나운 개들이 컹컹컹 짖어댄다. 단단한 의혹이 와장창 박살이 난다. 기안서가 우르르 쏟아진다. 회식을 끝내고 돌아오며 토악질을 한다. 성난 용처럼 굽이치는 시커먼 길들이 보인다.
이정표도 없는 길을 그가 달리고 또 달린다. 가지 무침이 먹음직스런 밥상 앞에서 막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 시장통을 헤매다 쇠가위를 사는 그. 서류더미를 싹둑싹둑 자르는 그. 젊은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시장 뒷골목의 막걸리와 순대국 냄새. 누군가의 손에 입 맞추는 그의 입술. 바람 불고 비 몰아치는 거리에다 쏟아내던 토사물. 그런 날들이, 그렇다, 분명히 있었다.
방치된 복숭아밭을 집어삼키고 길가 음식점 간판을 박살내며 길이 요동치고 있다. 이정표를 지나치던 기복이 급히 차를 세운다. 약수암. 이정표를 바라보는 기복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사진 한 장
이 들끓는 맘으로 인해 꿈이 깨어질까 두렵다. 화를 애써 누르고 분을 삭이며 기복이 오르막길을 들어선다. 누군가 야무지게 닦아 놓은 길섶으로 흙과 눈이 뒤섞인 채 밀려나 있다. 흙 길이 단단하고 굳다. 잘 매조진 평평한 공터에 자리잡은 작은 귀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머금고 있던 눈물이 한 방울 주르륵 흘러내린다. 순임을 만날 수 있을까. 자동차 문을 열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숨이 가쁘다. 아니 숨이 너무도 차분히 골라진다. 이제 한 발, 걸음을 디뎌야 한다. 귀틀집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누이…… 순임 누이?”
단단해 뵈던 나무문이 가볍게 열린다. 녹슨 이름 하나가 힘겹게 뱉어진다. 그녀를 향해 이름을 불렀던 게 얼마 만인가. 그러나 한눈에 들어오는 집안 풍경 어디에도 순임은 없다. 서쪽 작은 창 아래에 낡은 책상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다. 낡은 책상 위에 놓인 몇 권의 노트에 손을 대어본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책상과 노트에 기복의 손자국이 선명히 새겨진다. 한참을 망설이던 손이 엎어져 있던 작은 액자를 들어올린다. 부들부들 손이 떨리고 그 떨림은 곧 온 몸을 휘감고 만다.
순임의 웃음에 감염된 젊은 그가 금빛가루 같은 웃음을 뿌려대고 있는 칠십구년 팔월 어느 날이다. 단발머리 순임도 온몸이 나른할 정도로 해사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그녀가 기복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사가 눌러 놓은 시간 속에서 그녀와 기복은 더없이 푸르다.
그날도 순임을 만나 밥을 먹고 늘 그랬던 것처럼 순임이 다니는 공장 근처 공원에서 어슬렁거리며 노닐다 뭔 맘으로 비싼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다를 게 뭐였나. 그저 안녕이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모든 연인들의 그 말이 저희처럼 다 아리고 쓰릴 거로구나 짐작해 보던 그런 날일뿐이었다.
방직공장 정문 앞에서 기복은 그날도 돌려세워졌다. 휴가를 떠난 동료들 몫까지 해내야 할 일이 많다며 순임은 공장 앞까지 따라간 기복에게 ‘안녕’이라고 했다. 그 ‘안녕’이라는 말이 유난히 그날따라 기복의 맘을 무겁게 했지만 늘 그렇듯 그건 짧은 만남이 주는 아쉬움이라고 생각했다. 미싱을 타며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던 순임을 잠시 더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고등학생인 기복이 뭘 어쩔 수 있었을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터미널로 향했을 뿐이었다.
그 밤이었다. 모깃불을 피워 둔 마당 한 가운데 평상이 놓여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자 마루에 놓인 진공관 TV가 보였다. TV 앞에 푸르게 일렁이는 누이가 보였다. 옥수수 하나를 집어든 채 그대로 굳은 모습이었다.
안돼…… 이건 대면하고 싶지 않다. 이건 싫다. 누구 맘대로 여기에 날 놓는 거냐. 난 싫다. 기복이 두 눈을 부릅뜨려한다. 이 꿈 속을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아무리 치켜뜨려고 해도 눈이 떠지지 않는다.
야간학교를 마치자마자 공장을 그만두고 시골집으로 내려온 누이가 오 년 동안의 공장 생활에서 건진 것은 고등학교 졸업장과 TV 뿐이었다. 그 텔레비전 앞에 누이가 돌처럼 굳어있다. 기자의 다급한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공장은 아직까지 불길에 휩싸여 있습니다. 인명 피해가 심각합니다. 하늘에서 끓는 쇳물이 쏟아진다. 기자는 여러 번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을 읊어댄다. 이름 하나가 벌써 수십 차례 튀어 오르며 기복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있다. 하늘에서 다시 얼음물을 쏟뜨린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뻣뻣하게 굳어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다. 몇 시간 전 순임과 헤어지던 공장 앞엔 졸음에 겨운 수위 하나와 거칠 것 없는 햇살만 있었다. 지금 거기엔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이 활활 타오르는 불에 미쳐있다. 저기 내가 있었는데, 내가 저기서 오는 길인데…….
“기복아, 너 내년에 고 3이잖아. 미래를 위해 잠깐 이별하는 거야. 약속했잖아. 대신 내가 편지는 하루에 두 통씩 써서 보낼게. 나는 더욱 착실한 수출역군이 될 테야.”
“난 누나를 만나야 공부가 더 잘되는데, 왜 그걸 모를까, 쳇. 수출역군이 왜 그걸 몰라?”
기복이 짐짓 농으로 아쉬움을 드러내지만 순임은 그저 웃을 뿐이다.
“이 사진은 내가 가져간다. 눈에 다 넣으면 곧 부쳐 줄게.”
순임이 공장 문으로 뛰어간다. 문 밖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안녕’하며 손을 흔든다. 기복 역시 안녕, 하며 손을 흔든다. (저런 천치 같은 놈. 기복아, 어서 순임 누이를 붙잡아, 거기 가면 안 돼. 안 된단 말야!)
버스를 몇 번씩이나 갈아타고 간 뒤에 잠깐 만나는 너무도 짧은 만남이었다. 칠십 구 년 팔월 어느 날 역시 특별히 다른 건 없었다. 그날도 순임의 맑은 미소를 데리고 집을 돌아오며 깜박깜박 졸기도 했다.  
기복이 오두막을 뛰쳐나온다. 죽음보다 더 큰 배신은 없다. 기복은 순임을 지웠다. 너무 오래 지워 그녀가 형체 없이 흩어져버린 것인가. 그 해엔 많은 일들이 뉴스에 오르락거렸다. 흰 꽃으로 장식한 차를 따르는 길다란 장례 행렬을 보며 알 수 없는 적의로 몸부림 쳤던 사람이 비단 자신뿐이었을까. 단지 순임만이 아니었다. 그는 맞닥뜨리는 모든 일들을 지우기 바빴다. 말수는 적어졌고 이마엔 늙은이처럼 깊게 주름이 패였지만 무언가를 견뎌냈다. 나중엔 견딘다는 생각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손아귀를 벗어난 사진 한 장이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잡풀이 우거진 버덩으로 사진이 내려앉을 때까지 여전히 그는 꼿꼿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다.
― 기복아, 누나야. 사진 참 잘 나왔네. 내가 널 아주 많이, 많다는 말이 감당할 수 없는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이 사진을 너에게 보낼테니 너는 부디 학업에 매진하기를 바래. 
순임은 사진을 곧 부치려 했던 것 같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사진은 진작 기복이 가지고 있었을 거였다.

나무 나무 나무
나뭇잎에 덮여 발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지? 꿈속의 그인지 꿈밖의 그인지 누구의 의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복이 갈피를 못 잡자 마치 카메라가 멀리서 풍경을 찍듯 봉긋한 숲과 그 아래 귀틀집 그 아래 도로까지 원경으로 나타난다. 그는 귀틀집 뒷산을 오르고 있다. 작정한 걸음이 아닌 듯 움직임은 더디고 동선은 일정치가 않다. 때로는 산과 함께 뿌연 이내에 가려져 형체가 사라지기도 한다.
소나무가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초록 구렁이처럼 매끄러운 졸참나무가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내려보고 있다. 서어나무, 개서어나무, 팥배나무까지 가지가지 나무들로 꿈틀대던 숲이 따뜻하게 그의 등을 토닥인다. 전나무 역시 넉넉한 품으로 그를 말없이 안아들였다. 아름드리 산벚나무와 팽나무가 잠시 듬직한 어깨를 빌려준다. 비탈길에 서있는 단풍나무는 가볍고 경쾌하기까지 한 몸짓으로 그를 위해 지금 아름다운 춤을 선물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는 산을 좋아하던 사나이였다. 산림과를 택한 것도 그 같은 이유가 있을 테지만 오래 전에 그는 마음 속 깊은 오지에 그 모두를 묻어두고 이제는 그곳이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환영은 처음에 아내에게서 나타났다. 노산(老産)이던 아내는 두 아이를 모두 어렵게 출산했다. 첫째 아인 산도를 빠져 나오지 못해 위태로웠고, 둘째 아인 태가 목을 감고 있었다. 그때마다 광채가 나는 손이 아내의 배를 쓰다듬었다고 했다. 그러나 병원은 물론이요 아내나 그 역시 그것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응당한 자신들 복인 줄 알았다. 누군가의 끊임없는 기원과 소망 따위를 떠올릴 틈도 없이 그는 앞으로 앞으로만 걸어나갔다. 압도하지 않으면 압도당할 뿐이라고 삶을 경쟁적으로 소비했다.
정신병이라니, 누군가 보내오는 신호를, 깊은 염원을 정신병으로 간단히 진단하는 게 우리들 매양 하는 짓인가. 입술 안으로 짭쪼름한 액체가 스며든다.
어디에선가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물은 길을 내지 않고도 흐른다. 바위틈이나 나무 혹은 땅 속 어딘가로 숨어 흐르다 제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보이지 않아도 흐른다. 흐르는 곳이 바로 길이다. 그 길을 막지 않으려는 듯 이곳은 어떤 물길도 내지 않았다. 떨어져 쌓인 참나무 잎 위로 작은 물길이 나있다. 어딘지 저는 아는 곳을 향해 물이 흘러간다. 이 물이 가 닿는 가장 낮은 곳으로 물처럼 흘러가겠노라 순임은 다짐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죽은 게 아니다. 그러면 되었다. 그녀는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살아있다. 다만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순임의 손길이 닿았을 나무 하나 하나와 샛길들 그리고 작은 귀틀집을 이제 고만 용서하고 싶다. 그의 옷깃에 달라붙은 바람에도 고스란히 순임이 들어 있는 것만 같다. 느릿느릿 숲을 내려오는 그를 무심한 듯 초탈한 듯 숲의 나무들이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물과 같이
막 양곡(暘谷)을 빠져 나온 불덩이가 순식간에 어둠을 걷어올릴 찰나다. 본존불이 인자한 눈빛으로 법당 안을 굽어보고 있다. 법당 밖 마당으로 고요한 발자국 소리가 꽃잎처럼 흩어지고 있다. 법당 안에는 기둥에 기대어 잠든 최기복 뿐이다. 기복의 귓가로 흘러들던 물소리가 이제 그의 몸을 모두 채웠는지 눈으로 빠져 나온다. 그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누군가 본다면 그래 탈속의 세계지 했을 법한 눈물이 기복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돌담 밑으로 나뭇잎 한 장이 굴러가다 하얀 고무신 앞에 멎는다. 발등에 얹힌 나뭇잎을 어렵사리 주어드는 조막손이 보인다. 그이 하얀 고무신 콧등에 새겨진 작은 표식도 들어온다.
福
. 나뭇잎 냄새를 맡고있는 여승의 머리와 목엔 회색 목도리가 둘러져 있다. 어디선가 본 듯 낯익은 모습이다. 마루를 내려서며 하얀 고무신을 신던 여승이 넌지시 그녀를 바라본다. 이 은테 안경 너머에 반짝이는 저 눈빛도 낯설지 않다. 걸음걸이며 속삭이는 말소리도 그러하다.
“스님, 바람이 차가워요. 들어가세요. 연지스님, 내일은 꼭 타종을 하셔야해요. 제가 도와드릴께요. 스님.”
“무엇이 저 분을 이리로 이끌었을까? 이 아침이 참 친근하고 놀라워.”
여승의 오그라진 손을 잡고있던 젊은 여승이 돌담 밖으로 고개를 삐죽이 빼고 이리저리 살피며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잡는다. 젊은 여승에 의지해 담 밑 화단 가를 느릿느릿 걸어가던 여승이 큰바람에 흔들려 잠깐 중심을 잃자 목도리가 기어코 땅으로 떨어졌다. 외인은 출입이 금지된 그 안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글쎄, 기둥을 의지해 일어서던 기복이 그 소리까지 들었는지 그건 알 수 없다. 문을 열고 밖을 나서는 그가 제 눈 안으로 파고드는 게 동살만이 아니었다는 걸 눈치챘는지도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까맣게 잊었던 한 시절을, 잃어버린 고리 하나를 그가 떠올려 낸 것이 그에게 이롭고 이롭길 바랄 뿐이다. 그가 이제 더 이상 환영이든 환청이든 그저 헛것으로만, 도려내어야 할 상처로만 생각지 않기를 당간 끝에 올라앉은 눈은 바라는 것이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