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정교회 이야기]
1. 정교회가 걸어온 길
(1) 정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교회사에서 서방과 동방은 로마 교구를 중심으로 라틴어 권역에 속한 서방과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대 안디옥,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헬라어 권역에 속한 동방으로 구분된다. 처음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고대 말과 중세 초기에 이르러서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교회는 자신을 일컬어 ‘하나이며 거룩하며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 교회라고 불렀다. 이 교회는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양자 모두에게 사랑”의 모토 아래서 협력과 경생을 지속하며 성장해 갔다.
하나이던 교회가 분열될 조짐은 이미 지역적 분할에서 보여지고 이;ㅆ었다.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로마는 둘로 분리되어 통치되었다. 차남 호노리우스가 서로마지역을, 장자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를 차지하고 다스렸다. 서로마는 서쪽으로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북부, 북쪽으로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그리고 이탈리아와 로마를 포함한 영역이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로서 존재했다. 이러한 지역적 분할은 서방 기독교권역과 동방기독교권역의 다른 전통을 형성했다. 서기 800년, 카를 대제가 프랑크왕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하면서 옛 서로마권역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
반면에 옛 동로마권역에 속하는 지역들은 이미 4세기 무렵부터 비잔틴 제국을 형성하여 발전하면서, 453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당할 때까지 동방기독교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은 동방지역 교회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교회사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구분하는 요소에는 위와 같은 지역적 구분과 더불어 사용하는 언어에도 있다. 동방은 알렉산더 대제의 동방 정복이후 헬라어 문화권에 속하였고, 서방은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 문화권에 속하였다. 이러한 언어상의 상이점은 학문적 신앙적 발전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면서 1054년에 여러 이유로 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분리되기까지 독자적 발전을 이루게했다.
정교회는 지중해 동쪽 지역에 세워진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 왕국의 수도가 이전(330년)됨으로써 형성되었다. 이 지역에서 기독교 역사의 초기 8세기 동안 기독교회 안에서의 지적이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발전이 이뤄졌다. 예를 들면 그 시대의 모든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은 콘스탄티노플 혹은 그 인근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오는 선교사들은 슬라브 민족과 동유럽의 다른 민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고(불가리아 864년, 러시아 988년), 성서와 예배문서들은 각기 다른 지역의 언어들로 번역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예전, 전승 그리고 관습이 모든 지역에서 수용되었고 현대 정교회의 기본적 경향들과 정신들이 형성되었다.
로마의 대주교를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요 거룩한 위탁에 의한 우주적 교회의 머리라고 존중하여 왔던 로마 가톨릭과 달리 동방의 기독교인들은 교황을 단지 대주교들 중 선임으로서만 인정해 왔다.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때로 심각한 불화로 나타났다. 때로는 여러 가지 사소한 분쟁들을 겪으며 양 교회의 전통은 다르게 이어져 왔다. 가장 격렬한 논쟁 중 하나는 서방교회가 니케아 신조에 동방과의 협의없이 추가한 ‘휠리오크베’(filloque, 그리고 아들로부터) 조항과 관계된 것이다. 이것은 양자의 분열에 있어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또 한 가지, 9세기에 포티우스(Photius)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정한 것을 교황이 거부한 것도 중요한 분열의 원인이다. 동방과 서방 간 논쟁의 심화는 1054년에 서로 간에 파문장을 보냄으로써 정점에 이르렀다. 제4차 십자군(1204년) 때에 서방교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사건은 서방을 향한 동방의 적의를 증대시켰다. 리용 회의(1274년)와 플로렌스 회의(1438-39년)에서의 화해를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서방교회가 교황권의 무오를 선언(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70년)하였을 때 동방과 서방 사이의 간극이 더욱 넓어졌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이후에야 서로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