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요리사 길 걷고 있는 류방영 셰프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중국집들이 많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운영해온 집도 있고 새로 외지에서 들어와 오픈한 집도 있다. 중국집마다 요리가 비슷해 보여도 맛의 색깔도 다르고 재료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북성동 차이나타운에서 송월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중국집 신(Xin, 鑫)은 차이나타운에 새로운 맛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국요리 맛이 거기서 거기라는 편견을 바꾸고 맛의 고급화 전략의 중심에 류방영 셰프(61)가 있다. 그는 아버지도 요리사였고 그의 아들도 요리사로 3대가 요리의 길을 걷고 있다.
▲류방영 셰프
남구 학익동 세미동네에서 자란 6남매의 장남
TV에서 ‘중화요리 4대 천왕’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는 류방영 셰프. 그는 인천화교다. 그는 주안의 세미동네라 불렸던 학익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나중에 신기촌이 되었다. 100여 년 전 류 셰프의 할아버지는 산둥 태산에서 인천으로 건너왔다. 할아버지는 중국에서 먹고 살기 어려워지자 인천으로 이주해 농사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주안, 부평, 석바위 등에서 농사를 지었다. 당시 만해도 인천에 온 중국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배추, 당근, 가지, 호박, 샐러리, 중국부추를 재배해 도원동 깡시장에 내다 팔았다.
▲중국집 신(Xin, 鑫)
화교였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자에게 중국인으로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중국말을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어린시절 한국말을 배우지 못했다, 한국말이 서툴러 배달을 나가면 반말을 한다고 손님들에게 혼나는 일이 많았다.
류방영 셰프의 아버지도 요리사였다. 당시는 요리사가 인기가 없는 시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 부산, 인천 등의 큰 중식당의 조리장과 주방장을 지냈다. 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리사의 길로 뛰어들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장남이었기에 사회에 나가 빨리 기술을 배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류 셰프의 나이 14세 때였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충남 공주에서 친척이 하는 중국집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배달이었다. 중국집 주방의 군기는 셌다. 배달 나갔다 늦게 들어오거나 실수를 하면 호되게 꾸중을 듣고 국자로 뒤통수를 맞는 일이 허다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생을 어린나이에 감당했다.
“주방에서 혼나면 대낮에 별이 보일 정도로 맞았어요. 요즘은 맞으면서 일하는 사람 없잖아요.” 새벽마다 일어나 연탄을 가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낯선 외지에서 고생고생을 하고 2년 뒤 그는 인천으로 왔다. 70년대 초반이었다. 경동에 있던 ‘평화각’에 취업했다. 당시 경동은 인천의 명동이었고 평화각은 제일 잘나가는 중국요리집이었다. 평화각에서 그릇을 닦고 배달하며 홀에서 서빙을 했다.
70년대 평화각은 손님이 정말 많았다. 평화각 앞에는 그 당시 제일 인기 많았던 신신예식장이 있어 주말에는 결혼식 하객들로 넘쳐났다. 주말에는 10~20팀씩 받았다. 짬뽕, 잡채, 탕수육을제일 많이 주문했고 긴 나무쟁반에다 음식을 올려 서빙했다. 요즘 중국집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류 셰프는 TV에 나오는 중국요리 4대 천왕 중 유일하게 불판 출신이다. 불쓰는 것을 먼저 배웠다는 의미다. 그가 칼판, 면판 보다 불판으로 중국요리계에 입문한 이유는 무엇보다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도 왼손 쓰는 것을 경계하는 문화가 있어 칼판으로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류 셰프는 불판으로 요리를 시작했지만 면판, 칼판 요리를 다 배웠다. 칼판에서 냉채, 볶음 음식, 면판에서 하는 만두, 국수, 딤섬 등의 요리를 익혔다. 배달과 서빙으로 몸은 고됐지만 제일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주방장들의 요리를 유심히 보고 연습했다. 어떻게 하면 요리를 맛있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숙소에는 항상 칼, 도마, 재료를 갖다 놓고 그날 스승이 만든 요리를 연습하고 재현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는 1980년 명동에 있는 사보이호텔에 셋째 프라이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릴 줄 알아야 좋은 요리사
류 셰프는 1983년 프라자호텔의 유명한 중식당 ‘도원’에 입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도원에서 28년을 근무했다. 프라자호텔 입사 시험은 지원자들이 한 요리를 호텔 조리사들이 맛을 보고 채용하는 방식이었다. 프라자호텔 입사는 그동안 배우고 익힌 요리를 사회에서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요리를 하면서 만족은 없습니다. 만들고 나면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그래서 더 노력하는 것 같아요. 요리를 할 때도 준비를 잘해야 해요. 해삼은 해삼맛이 나야하고, 생선은 생선맛을 내야 하듯이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리는 기술이 요리에선 제일 중요해요.”
▲류방영 셰프가 예능프로 출연진들과 함께한 모습
그는 서울로 직장을 다녔지만 집은 항상 인천이었다. 프라자호텔에서 근무하면서도 구월동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며 인천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14세 이후 주로 서울을 무대로 일했던 류방영 셰프는 3년 전 인천으로 돌아왔다. 차이나타운에 ‘Xin'을 개업하면서 부터다. 고향이자 어릴적 추억이 묻어있는 동네로 컴백했다. 돌아와 보니 차이나타운도 세월의 변화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인천화교 이기 때문에 인천에 애착이 큽니다. 어릴적 용현동에 살았지만 머리 깎을 때는 차이나타운으로 왔어요. 외할아버지가 중국이발소를 운영했었어요. 중국인이 하는 목욕탕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중국사람들이 많이 살아 재미있었어요. 화교학교에도 학생들이 많았고요. 그때만 해도 차이나타운에 오면 중국에 온 것 같았어요.”
50여 년간 요리를 해온 그는 옛날엔 있었던 중국요리 중 지금은 없어진 요리에 대한 기억도 많다. 그중에 하나가 ‘짜바귀’라고 불리는 닭튀김이다. 예전엔 닭튀김은 중국집에서만 팔았다. 주문이 들어오면 닭을 바로 잡아 닭피는 술국에 좋은 산라탕(酸辣湯)을 만들고, 닭은 튀김으로 팔았다. 손이 많이 가서 지금은 없어진 메뉴다.
그가 운영하는 신에는 100가지가 넘는 메뉴가 있다. 지금은 중국집의 새로운 요리들은 주로 홍콩이나 동남아쪽에서 많이 들어온다.
류 셰프는 진정으로 중국요리를 한다고 하면 돼지 한 마리를 해체하고 손질할 줄 알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돼지를 손질하면서 창자, 간, 위 등의 부위로 어떤 요리를 할지 생각하고, 그 부위로 요리를 만들어 낼 줄 알아야 중국요리 제대로 한다고 봤다. 양장피, 탕수육 등 요리 몇 개 하면서 중국요리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인천이 고향인 류 셰프는 차이나타운의 발전을 희망한다. 그는 차이나타운이 잘 돼야 화교들도 함께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차이나타운을 잘 조성되면서 유명 관광지가 된 것처럼 인천도 문화가 곁들인 차이나타운으로 발전하길 희망하고 있다. 짜장면과 공갈빵만 있어서는 차이나타운이 유명 관광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차이나타운에서 살고 있는 화교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류방영 셰프는 현재 대만 국적을 갖고 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이 그에겐 큰 어려움이다. 한국에서 3~4대를 살았으면 한국사람이나 마찬가지 인데 그냥 한국 국적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바다’에서 ‘셰프’로 세월의 변화 느껴
류방영 셰프의 집안은 3대가 요리사의 길을 걷고 있다. 기술만 있으면 어디가든 굶어죽지 않는다는 생각에 아들의 요리사 일을 적극 응원하고 있다. 류 셰프는 삶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이다. 뭐든지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류방영 셰프(오른쪽)과 그의 아들. 아들도 요리사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평생을 요리하며 살았다. 옛날엔 중국집 주방장을 일본어로 ‘이다바(いたば)’로 낮춰 불렀지만 지금은 전문직으로 사회적으로 선호하는 직업이 됐다. 삶이 힘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한길로 바퀴를 계속 구르며 달리다 보니 목적지에 다다른 느낌이다.
그는 서울의 유명식당에서 익힌 요리기술을 갖고 인천에 돌아온 만큼 차이나타운 중국음식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요리사는 많아도 큰 식당이 없는 차이나타운에 그의 활약이 변화의 새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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