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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문학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민문자
【문학의 집 서울】산림 문학관 음악이 있는 문학의 마당에 2009년 2월 20일 고 이형기 시인을 그리워하는 사람과 그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었다.
SBS 논설위원실장과 한국방송기자클럽 회장을 역임한 유자효 시인이 사회자로서 이형기 시인의 약력을 소개가 있은 다음 김정래 시낭송가가 <낙화>를 낭송하였다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강희근 교수로부터 이형기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내용은 강희근 시인의 이야기를 메모하여 기록한 것이다.
강희근 시인은 고 이형기 시인과의 인연은 월간『현대시』에서 만나서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창간하고 공동주간을 맡았다.
2006년 6월 상금이 300만원인「이형기 문학상」을 제정하고 1회 2회까지 하고 나니 힘이 빠진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진주시의 현재 시장이 ‘문학지 하나 하고 싶다.’라는 소식을 듣고 너무 좋았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진주사람 진주시에서 가져가는 것이 너무 좋았다.
지난해 2008년부터 예산 2000만 원의 《이형기 문학제 》가 시작되었다. 2009년에는 예산 4000만 원으로 6월 행사가 있다.
사실 이형기 시인의 시를 총괄적으로 볼 시간이 없었다.
교수로서 논문 한편도 안 쓰고 시집 한권 읽고 이형기 전을 썼다.
이형기 전(傳) / 강희근
1.
그는 이제 진주로 돌아왔다
대학을 다니러 서울로 갔고
직장에 매여 서울에서,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가 살았었지
대학이나 직장이 그에게는 그의 시가 들어가 살 단칸방이었다
단칸방에서 그는 그의 시와 아내와 딸
그리고 호구지책 같은 것과 비좁게 살았다
그가 언론인이었으나
그가 평론가이기도 했으나
그가 어찌하다 부업 같은 교수가 되기도 했으나
그는 비오는 네거리 우산살 아래에서도
부산의 광복동 단골 실비집 무한 광설의 풀밭에서도
그는 시인이었다
그는 한강 이남에서
제일로 큰 신문사의 꼭대기 편집국장까지 갔고
그는 문인협회의 한 당파로 상임이사라는 것까지 갔고
그는 시인협회의 잘 나가는 회장의 장부까지 손에 넣었으나
그는 금방금방 단칸방의 케케한 사진 액자 같은
가장으로 시인으로 돌아와 곧장 허무와 바둑을 두었다
단칸방의 벽에 막혀 어디론가 나가거나 더 이상
개량의 삽을 들 수도 없는 인간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거나 사랑에 깊이 들어가
한밤에 잠들고 새벽에는 깨어나 눈을 부볐지
그러다가 그는 혼자 병들고 혼자 켜놓은 랑겔한스섬 흔들리는
등불 비추며 절벽 아래로 걸어갔다
절벽이라고 쓰고 절벽 아래 돌아서 절벽의 등 뒤로 갔다
2.
그는 이제 진주로 돌아왔다
가난하게 살던 남강가 슬레이트집이 아니고
그의 이름으로 만든 기념사업회
그가 코흘리개로 자란 진주, 진주 시민의
시민들이 만든 문학제 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단칸방이 아니다
나라에서 제일로 번듯이 지은 진주시청, 크고 우람한 집
여기서 그는 바둑을 두지 않아도 되리
챔피언은 챔피언 벨트 내놓기 위해 있는 거라는
가위눌림 같은 것들
하루살이떼 같은 것들 못 말리는 것들에게
자, 우리 악수 합시다
나는 이제 집으로 왔소, 말하면 되리
“낙화, 내가 왜 그렇게 썼는지 모르겠어, 이별도 안 했는데….” 이형기 시인의 말이었다. 이 시는 조폭들의 주제가가 될 만큼 6, 70년대 널리 알려져 낭송되었다. 이형기 시인의 후기 시는 삐뚤어졌다.
진주농림학교에 입학하고 전공보다는 문학에만 관심을 가지고 몰두하였다. 1949년 제1회 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는데, 평소 문우로 가깝게 지낸 박재삼 시인이 차상을 차지하였다. 이듬해 서정주의 추천으로 『문예』지에 <비 오는 날>외 2편이 17세의 나이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정식 등단했다.
한국현대시의 축은 이형기 시인, 김수영 시인, 김춘수 시인이다.
이형기 시인은 가장 본질적인 현실, 실존적인 문제, 인간 삶에 대한 구조적 모순에 대한 도전으로 가장 본질적으로 세계와 전쟁을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시인을 들라면 나 강희근은 이형기 시인 밖에 없다. 50년대의 장용학의 『요한 시집』을 읽고 ‘이렇게 훌륭한 소설가가 있는가, 실존주의 시 구절, 사색, 마술적인 청년, 이런 문인이 어디 있는가.’ 전쟁을 겪고 난후 쓴 소설로 상당한 호소력이 있었다. 나는 시의 위기를 느꼈다.
문학의 왕자라는 시인 ‘우리나라 시인은 다 무엇 했나.’ 했는데 이형기의 시집『풍선심장』은 인간 삶의 근본적 체험으로 시를 썼다. 이형기 시인은 소설가에게 지지 않는 시인이다.
풍선심장 / 이형기
심장을 만듭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어
색칠을 합니다
원래의 심장은
지난 여름 장마 때
피가 모조리 씻겨 빠졌습니다
그리고 장마 뒤의 불볕속에서
내 심장
빈 껍데기만 남은 그것은
허물처럼 까실까실 말라버렸습니다
이제는 쓸모가 없게 된 심장
구겨 뭉쳐 쓰레기통에 내버린 심장
한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심장을 달랍니다
드리고 말고요
어렵잖은 일입니다
당신의 맘에 꼭 드는
예쁘장한 심장
어두운 가슴속에
감추어 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째째하게 혼자
독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 둥둥 하늘에 띄우는 심장
떠다니다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심장
오늘 나는 그 풍선 심장에
곱게 곱게 색칠을 합니다.
요마가 가슴에 날아와 ‘이형기 너 속지마.’
성서에서 마귀가 ‘너 저 도시의 세상을 줄 테니 내 말을 들어라.’ 라는 구절이 있다.
이형기 시인의 시는 악마주의 시이다. 이 세상의 현실을 악마가 단절시키려 하는 것, 이형기 시인의 시는 챔피언의 시다. 챔피언은 무너지기 위해 있는 것, 시는 복수하는 것은 없다.
인간의 꿈과는 반대로 돌아가는 세상이다.
이형기는 비수를 품고 완전무장한 시,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로운 시를 썼다. 늘 세상은 부정적이고 인간에게 차갑고 개미 쳇바퀴 돌듯 하는데 대항해서 쓴 시이다. 작위적으로 시를 썼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시 유형의 중심은 김수영은 현실 축, 김춘수는 언어의 축, 이형기는 실존의 축에 있다고 본다. 다른 모든 시인은 이 세 사람의 시 유형에 들어간다.
오탁번 시인이 분류한 시 유형은 김소월의 서정파, 한용운의 현실파, 정지용의 예술파가 있다.
금년 4회 이형기 문학상 수상자는 이형기 시 만큼 치열하게 쓰는 시집을 가진 시인이 될 것이다. 5월에 심사하고 6월에 문학제는 열린다.
강희근 교수의 말씀이 끝나고 제자 최춘희 시인이 시낭송을 하고 이형기 시인과의 일화를 소개하였다.
노을 길 / 이형기
자 가자 해가 지고 있다
하늘에 펼쳐지는 장엄한 출발 제전
하루살이가 떼 지어 날은다.
그리고 땅위엔 쇠똥구리들
쇠똥 말똥 뭉쳐진 덩어리
지구를 하나씩 영차 영차 굴린다
밤으로 밤으로 하루살이도
지구도 모두 밤으로 가는 길
찬란한 노을 길
최춘희 시인은 1990년 <현대시> 신인상에 뽑혀 등단한 후에 심사해 주신 이형기 시인을 찾아서 동국대 국문과 교수실로 인사를 드리러 찾아갔다.
“시인으로 뽑아 주었으면 시나 쓰지, 여기는 왜 왔느냐, 여기 올 시간이 있으면 시를 열심히 써라.” 하시며 평론집『시와 언어』에 사인을 해 주셨다.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과정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고 친구와 함께 인사드리러 갔더니 “시인이 시나 잘 쓰면 되지, 쓸데없는 짓 했다.” 고 하셨다.
다른 잡지에서 최춘희 시인의 시를 보고 “참 좋았다.”라고 격려 편지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겉으로는 냉정하셨지만 보통 문예지에 나오는 제자들의 작품에도 관심을 가지고 친필로 격려를 해주셨다. “시인은 풀어져야 살지, 뭉쳐 다니면 안 된다.”라고 도 하셨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시간관념이 철저하고 속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었다고 했다.
1947년생인 유자효 시인은 이기형 시인과 14살 차이가 나는데 많은 고교생들이 이형기 시인의 시를 다 외우던 학교 다닐 때의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완전히 이형기 시인의 시를 모방하기도 했었다고 했다.
신춘문예 마지막 두 사람의 심사에서 이형기 시인은 유자효 시인을, 평론가 아무개 씨는 다른 분을 장원으로 내세웠는데 이형기 시인이 평론가 분에게 양보를 해서 장원이 안 되었었다고 인터뷰 갔을 때 그때 기억을 하고 들려주신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형기 시인도 신문사 편집장을 하신 분이고 라이나 마리아 릴케도 기자를 하다가 집어던졌다. 시를 쓰는데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형기 선생님 생존해 계실 때 는 계시는 것만 해도 격려가 되었었다.
이형기 시인의 부인 되시는 조은숙 선생의 말씀이 있었다.
“투병생활 할 때 32평에 살았는데 집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 가지 않는다고 성화를 대고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남편이 그립지도 않습니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로 뇌졸중으로 쓰러진 시인의 간병에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하는 연민의 정을 금할 수 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성악가 이영화 테너의 아름답고 감미로운 선율에 모두 긴장을 풀었다.
저무는 날에 / 김남조
날이 저물어 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 간다
사람의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 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지던 그 마음도세월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
이 품안에 눈감는 것
나의 사랑도 저물어간다
무지개 (차길준 詩. 임준희 曲)
비개인 오후 무지개를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네
사랑했던 그 사람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안녕하신지
앞산너머 무지개를 바라보며
사라의 추억들을 떠올리네
사랑했던 그 사람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안녕하신지
단 하나의 사랑을 위하여
아낌없이 몸을 던지던 나의 젊은 날의 꿈이여
목숨같은 사랑을 위하여
눈물로 피운 대지의 꽃들이여
저 추억 속의 무지개가 지나간 후에
이제야 그대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되었네
사랑했던 그 사람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안녕하신지
이형기 시인의 약력
1933 1월 6일 진주출생
1948 제1회 개천 예술제 백일제 장원
1950 월간『문예』에 시 <강가에서>등 추천 등단
1951 최계락 시인과함께 <이인二人>발간
1953-79 연합신문입사, 동양통신, 서울신문 기자, 대한일보 정치부장, 문화부장,
국제신문 편집국장 역임
1956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62 『현대문학』에 평론을 연재하면서 평론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
1963 시집 《적막강산》간행
1971 시집 《돌벼개의 시》출간
1975 시집 《꿈꾸는 한발(旱魃)》출간
1976 평론집 《감성의 논리》출간
1979 부산산업대학(경성대학교) 교수
1980 평론집 《한국문학의 반성》출간
1981 시집 《풍선심장》출간
1985 《보물섬의 지도》출간
1985 시선집 《그해 겨울의 눈》출간
1986 동국대학교 국문과 교수
1987 평론집 《시와 언어》출간
1990 시집 《심야의 일기예보》출간
1994년부터 2년 동안 한국시인협회장
1998 시집 《절벽》출간
2000 시선집 《존재하지 않는 나무》출간
2005년 2월 2일 작고
수상 한국시인협회상,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등
첫댓글 이형기 시인의 추모 모임이 있었군요. 기억할 만한 훌륭한 시인 가운데 한 분이지요. 진주시에서 기념행사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민 시인 행사장 찾아다니시느라 수고가 많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