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정치행로나 특히 집권기의 정책을 살펴보면, 그의 본성이랄까, 운명의 끝자락까지 다녀온 사람으로서의 ‘달관’같은 것을 찾게 한다.
그의 개혁정책이나 과거청산과 같은 구조악에 대한 정리작업은 개혁진보세력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무디고 온건한 방향이었다. 그 이유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신탁통치 극복이라는 시대상황, ‘보수원조’라는 자민련과의 연립정권이라는 한계, 보수언론과 거대야당 등 막강한 비토세력의 ‘발목잡기’가 크게 작용하였겠지만, 이와 더불어 김대중 개인의 퍼스낼리트도 적지않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는 밖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대단히 온유한 성격이고, 온건 합리적인 성향의 소지자이다. 뒤에서 상세히 검증하겠지만, 그는 야당과 국회활동에서 온건파에 속했다. 강력한 대정부공격에는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군사정권과 보수언론에 의해 ‘과격주의자’로 낙인되고, 국민에게 그렇게 이미지화되었다.
김대중은 10ㆍ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 왔을 때에 오랜 연금에서 풀려나 열린 서울신학대학의 강연에서 자신에게 덧씌워진 ‘과격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내가 과격하다는 평이 있는데, 나는 악에 대해, 국민을 괴롭히는 자에 대해, 도덕을 짓밟은 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과격하지만, 선에 대해,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양같이 온순하다” (주석 15)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과격하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나는 말한다. “만일 당신도 나처럼 당해보라. 굴복하지 않으려면 강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용수철은 누르면 누를수록 강하게 튕겨나오는 법이다. 누르지 않으면 튕겨 나올리도 없다. 누르는 데도 튕겨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용수철이 아니다.”(주석 16)
김대중은 ‘과격 이미지’와는 달리 대단히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다. 어려서는 겁이 많아 혼자서 변소(화장실)에도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한 연구자는 그의 리더십을 ‘완벽주의 리더십’이라고 진단한다.
김대중은 대지소심형(大志小心型)이다. 뜻이 크면서도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라는 의미이다. 완벽주의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직접 해치워야 적성이 풀린다. 이것이 완벽주의자가 갖는 자기 만족심리다. 김대중의 완벽주의는 국정운영에 여과없이 투사되어 모든 정책의 세밀 부분까지 직접 챙기는 경향이 강했다. 시행착오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가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완벽주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역기능도 있었다. 하는 일들이 미덥지가 않아 만기를 친람하게 되고, 결국에는 본인이 과부하의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다.(주석 17)
아이들을 좋아하는 자상한 모습.
언론사에서 가끔 역대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전)박정희의 압도적인 1위에 이어 김대중은 2위를 차지한다. 그로서는 다소 억울할지도 모른다. 쿠데타와 계엄령,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라는 강권통치를 통한 18년의 집권자와 민주헌정 질서의 5년 담임 대통령을 단순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공정한 틀이 되지 못하는 것은 틀림없다.
또한 군사정권 시대에 이루어진 경제 발전의 시혜를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살아 있고, 한국적인 지역갈등 구조가 여전히 꿈틀대고 있는 상태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의 의미가 얼마나 적합한 것인지에도 의문의 여지는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처지에서도 2위에 오른 것은 그의 민주화 투쟁의 경력과 대통령의 업적이 오버랩 된 위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0년이나 100년 뒤에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질런지는 사가의 몫이 될 것이다.
미국 마운트 러시모어의 ‘큰바위얼굴’에는 워싱턴, 제퍼슨, 링컨, 루스벨트 대통령 등의 얼굴이 새겨지고, 이들은 많은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한국에서 ‘큰바위얼굴’같은 것을 만든다면 역사의 평가를 통해 누구의 얼굴이 새겨질 지는 국민의 몫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봉화마을 부엉이바위나 사자바위에 국민의 존경과 흠모를 받는 백범 김구와 노무현 그리고 국가에 공이 큰 지도자들의 한국판 러시모어의 ‘큰바위얼굴’을 만들었으면 어떨까 제안하고 싶다.
인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평생 동안 추구해 온 자신만의 가치, 즉 ‘개념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