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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
“화투가 뭔가.”
“꽃 싸움이지.”
세원은 툭툭 던지며 하나하나 보다가 송학과 공산명월, 단풍, 비는 꽃이 없다. 매조와 벚꽃, 등나무, 창포, 모란, 홍싸리, 국화, 오동꽃이 있다. 오동 외는 좀 일찍 피는 꽃들이다. 일본 남쪽의 개화를 이르는 것 같다. 마지막 섣달은 비 오는 날 우산 쓴 사람이 홍색 도포를 걸쳤다. 중국 사람으로 보인다. 일 년 열두 달 넉 장씩 48장이다.
“민화툴 치자.”
“손안에 드는 게 귀엽고 예쁘다.”
홍단 청단 초단 3단과 난초, 단풍, 비 3약이 있다. 보름달 든 다섯 광은 20끗이고 꽃이나 새 그림 9개는 10끗, 홍청초단 띠 10개는 5끗이다. 합치면 240이고 그 외는 모두 피이다. 알이 24장이고 껍질이 24장이다. 둘이 치면 120을 넘어야 하고 셋이면 80, 넷이면 60을 넘겨야 이긴다. 약을 하면 약값을 받아 더 빨리 날 수 있다. 판에 몇 장 깔고 손에 든 것과 판 엎어 둔 것의 숫자가 같으면 맞아떨어진다.
“8장 펴서 10장씩 들고 쳐보자.”
윗동네 훈장에게서 중용을 배우고 김진국은 대학을 읽었다. 서당에서 내려와 가운데 척곡 집으로 들어간다. 배운 걸 목청껏 외우다가 쉬면서 어른들 심심풀이로 재수나 점괘 뜨던 화툴 만졌다. 둘이서 토닥토닥 본 대로 장난삼아 치니 꽤 재밌다. 매일 그렇게 한 판 놀았다. 야산이어서 나무하기 좋다. 한 짐 해 놓고 또 펼쳤다.
“청소깝이 무겁다.”
“마른 졸가린 큰골로 가야 해.”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해석이 안 되면 어느새 머리 위로 ʻ탁ʼ하며 회초리를 내리친다. 한복을 단정히 입고 오른발을 왼 허벅지 위에 굽혀 가부좌 개고선 콧등에 걸친 동그란 안경으로 내려본다. 이마가 얼얼하며 콧등이 찡하다. 조그만 대나무가 맵다. 하도 만져 손 기름 떼가 좔좔 흐른다. 속이 답답한가. 장죽에 담밸 꾹꾹 눌러서 성냥을 썩 그어 댕겼다. 다황 냄새가 확 풍긴다. 노인 냄새와 담배 연기가 맵싸하다. 방안에 콕콕 찌들었다.
진국이도 재밌는가 하자면 선뜻 달려들었다. 복습은 되나마나 하고 판을 깔았다. 광을 갖고 오면 좋다. 그게 눈에 잘 들어온다. 약을 하면 더 보태지니 괜찮다. 할 때마다 긴장감이 돌아 눈치까지 보며 쳤다.
“광이 몇 개여. 가져오는 재미가 좋아.”
“솔과 벚꽃, 공산명월, 오동, 비로 숫자가 잘 불어나.”
미주알고주알 주절댔다.
들에서 일하다 돌아올 시간이 되면 그만뒀다. 낭랑하게 배운 내용을 읽고 해석한다. 내일 외우라 하니 어렵다. 습자지 좌측 훈장 글자를 따라 쓰자니 비뚤배뚤하다. 김시후 선생은 잘못 읽는 대목을 어찌 그리 잘 아나. 서예도 똑바른 글자가 까치라기 하나 없이 매끈거렸다. 날아갈 듯 깔끔한 게 멋진 글씨다. 보고 써도 그리 안 된다. 비슷하지도 않다. 글씨가 기러기 날아가는 것 같다. 자로 잰 듯 줄 맞춰 썼다.
상투를 틀어 올려 눌러쓴 망건 아래로 하얀 머리칼이 곱게 흘러내리는 백발의 선생이다. 너무 똑바르게 행동해서 음식은 먹을까. 화장실은 가나. 꼼짝달싹하지 않고 오래 앉아 배기니 저러다 다리에 쥐 내리면 어쩌나. 나이 들면 정신이 흐려진다는데 어쩜 이리 맑을까. 우리 선생님은 초롱초롱하시다.
배움이 끝이 없다. 획 많은 한자를 그리 잘 아실까. 틀린 부분을 꼭꼭 집어내는 게 놀랍고 신기하다. 노래하듯 높였다 낮췄다 잔잔하게 이어가며 해석할 때는 침을 꿀꺽꿀꺽 삼킨다. 공맹의 도를 한몸에 터득해 실천하는 선생이다. 한문학을 막힘없이 통달하다. 중국 고대 삼황과 주나라, 한나라 역사와 조선의 성리학에 두루 해박하시다.
“저리 꼬장꼬장하고 정갈한데 돌아가시면 어쩌노 아까워서.”
읽어 외우고 해석하며 다음은 화선지에 붓글씨로 써본다. 먹 가는 걸 가르쳐준다. 힘을 주지 않고 설설 문질러 보드랍게 한다. 좌우로 타원을 그으며 갈다가 반대로 젓는다. 붓도 털이 빠진 게 있나 확인하고 먹을 알맞게 골고루 묻힌 뒤 꾹 눌러 천천히 조심해서 획을 그어나간다. 가로 처음은 칼로 자른 듯 추녀 기왓장처럼 하고 끝은 누에머리 같게 누른다. 우측 삐침 파임은 말발굽처럼 땅에 닿도록 붙여야 좋다. 세로로 내리긋는 건 독수리 머리 같고 끝은 뱀 꼬리처럼 바르게 맺는다. 반듯한 게 꿈틀거리는 것 같아. 누에가 뽕잎 갉아 먹듯이‧‧‧.
고개 넘어 법전과 다덕, 춘양에서 오고 아랫마을 친구들도 모여들었다. 진국이와는 한 마을 앞뒤 집이어서 우리 사랑과 마루에서 만난다. 읽고 해석하고 쓰는 건 마루에서 하다가 화투놀이 할 땐 방으로 들어간다. 오래 못 한다. 늘 아쉽다. 가끔 땔나무하고 농사철 바쁠 땐 부모님을 도와 모내기와 보리타작, 감자, 옥수수 거두기를 돕는다.
“화투에 새도 보여.”
“솔에 두루미와 매화의 휘파람새, 등나무엔 두견이지.”
“또 보이던데”
“공산명월 기러기와 오동꽃의 봉황새, 비에 제비같이 생긴 새가 열 끗에 날아드네.”
“얼른 하곤 제 자리에 갖다두자.”
인조반정 때 노소 정쟁을 피해 내려와 머문 곳이 이 주위로 깊은 골짜기 여기까지 들어와 살았다. 산촌이어도 자녀들이 계속 벼슬자리에 올랐다. 한학자들이 많았으며 그 후손 훈장님도 훌륭한 선생으로 오래 우릴 거뒀으면 한다. 조선 말엽엔 일인들이 한강에 운양호를 대고 한양 왕궁을 드나들며 외교권을 하나하나 빼앗아 갔다.
건너에 사는 김영식은 아버님이 관리로 있었는데 일본의 간섭이 심하고 을사늑약이 되자 고종 왕궁을 떠나 척곡으로 내려와 살았다. 동성학원을 짓고 주위 젊은이들을 모아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훈도 방과 학생들 교실이 있고 기숙도 했다니 이 깊은 산중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어찌 알고 선교사가 찾아와 전도를 시작했다. 유학이 뿌리 깊고 불교와 선교, 도교, 무속, 조상신을 믿는 산골에 자리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쟁인 말이 많아.”
“뭘 자꾸 안겨줘서 귀찮구만.”
멋쟁이다. 키 크고 훤칠하며 노랑머리가 남다르다. 기골이 장대하다. 영어를 하다가도 우리말을 떠듬떠듬한다. 두 필의 말을 타고 다니는데 뒤따르는 사람은 한국 요리사이고 통역을 한다. 말에 무얼 가득 싣고 이 고울 저 마을로 다니면서 하나님을 알린다. 차도가 나 있지 않은 곳이 많아 아예 말로 다닌다. 영식의 집 사랑채 방을 두 칸 빌려 머물다 간다. 아버님이 개화에 앞장섰다. 며칠 동안 학원 학생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 전도했다.
「앤드류」로 미국 북장로 소속이다. 부산, 대구를 거쳐 안동에 자리 잡고서 경북 북부 지역을 다니며 선교 활동을 맡았다. 여러 해 하다 보니 한국말도 조금씩 늘었다. 한국 이름을 「안대선」으로 부른다. 영식은 신기해서 주위를 맴돌았다. 쿡이 식사 준비를 하는데 냄새가 맛있어서 살펴봤다. 버너를 켜서 음식을 만들었다. 가열해 불을 붙이니 펑 하면서 댕겨졌다. 버너가 신기도 해라. 기름진 냄새가 배고프다. 과자와 처음 본 오렌지를 얻어먹었다.
학생들에게 쿠키를 먹이고 주민들에게도 나눠 주니 선교사 오길 기다린다.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믿으시오 설교할 땐 예수님상이다. 쫓아내긴, 또 오라며 아쉬워한다. 고물고물 말과 당나귀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안대선 예수님, 가는 듯 돌아오세요.”
얼마 뒤 교회가 세워졌다. 바로 학원 옆이다. 정사각 설교단을 만들고 본당엔 남녀를 구별하는 삼베 천을 가운데 막았다. 목사는 설교하면서 좌우 성도들을 볼 수 있다. 세원과 진국은 가끔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갔다. 무언가 알고 싶고 외국 선교사의 말 탄 모습과 어눌한 설교가 듣고 싶었다. 사탕과 빵 맛을 봤으면.
“잘랑잘랑 워낭소리가 좋아.”
“미국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고소한 비스킷을 먹자.”
마을 건너 언덕바지에 교회가 덩그러니 앉았다. 외딴 밭 가장자리다. 사각 탑 종각에서 줄을 당겨 뎅그렁 종소리가 울린다. 골짝 저 위와 아래까지 쟁쟁 퍼진다. 「엔드류」가 올 땐 아이들이 우우 몰려든다. 말에서 내려 아는 사람 이름을 부르며 인사한다. 아이들 이름도 불러주며 머릴 쓰다듬는다. 마을 사람들이 구경나오면
“안녕하십니까.”
웃으며 일일이 인사했다.
“하나님을 믿으시오.”
“우리 살람 천국 갈 수 있습니다.”
화투를 제법 잘 친다. 그동안 많이 늘었다. 상대가 뭘 들고 치려는지 잘 안다. 재치가 있다. 눈치가 빨라졌다. 둘 다 장가들고 집안일을 해야 했다. 글방에 다니면서 학문을 익히라 했더니 는 게 화투이다. 건너 교회는 어쩌다 간다. 여학생들이 모이니 가는 것 같다. 하기야 거기서 만나 부모 간에 다리를 놓게 돼 혼사가 이뤄졌다. 이 골짜기를 눈뜨게 한 동성학원과 교회다. 이 골 저 골에서 모여 북적였다.
그래도 둘은 시간만 나면 저녁에 만나 두드린다. 초단 붉은 띠는 여러 갠데 왜 셋만 하는지 궁금하단다. 비 띠는 안 친다. 그냥 있는 거다. 등나무 띠와 난초 띠, 홍싸리 띠이다. 모란에 나비가 날고 홍싸리 꽃에 멧돼지가 뛴다. 비는 가랑비 이슬비 소낙비 할 때 비를 말한다. 비 내리는 날 버드나무에 개구리 오르는 그림이다. 서예가 「오노도후」를 그린 것으로 일본 왜색을 조금 바꾼 것이다. 사람과 개구리가 나온다. 오동을 똥이라 이른다. 난초를 초, 단풍을 풍, 오동을 동하다가 경음이 되었다.
노름은 돈이나 재물을 걸고 주사위나 투전, 골패, 마작, 화투, 트럼프 등을 사용해 따먹는 내기이다. 가마득한 옛날부터 도박이 있었다. 미국 콜로라도주 동굴 벽화에 주사위 던지는 게 보인다. 로마 바실리카 대리석에 선이 보이는데 노름으로 추측된다. 이집트 티우와 세나트에 도박이 있었다. 성서에도 옷을 서로 가지려고 로마 군인들이 제비뽑기하는 게 있었다.
“예수 옷을 나도 한 조각 가져보자.”
도박 잘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동양에는 인도나 중국에 보인다. 카드를 사용한 것과 사기에 도박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 투전은 숙종 때 장현이 시작해서 영조 때 크게 번져 전국으로 유행했다. 도박이 도둑질보다 큰 피해를 남긴다며 법으로 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상집에서 노름하면 관에서 눈감아줬다. 노름은 놀에 음이 붙어서 이어진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심성이 노름에 강하다. 발을 들이밀면 깊이 빠져드는 무서운 뻘밭이다.
조선 말기에는 아문 청방에서 관원들이 즐겼다. 왕의 행차 전날 밤은 종로 바닥에서 밤새 벌어졌다. 공금을 노름꾼에게 빌려주고 장려했다. 뒤에 대주는 사람이 있었다. 현금을 얻기 위해 집이나 전답 문서, 가축, 농산물을 헐값에 잡힌다. 설주는 가산을 반값으로 받아 현금으로 바꿔준다. 분전노도 셈 노름을 했다. 노름꾼은 산신에 빌기도 한다. 골패 중 수패를 땅에 묻고 백일기도를 올려 끼를 받아야 휩쓸 수 있다. 육임한 놈이 되려 애쓴다. 수패가 오기를 바란다.
굴러다니는 돈은 잃을 염려가 있다. 따로 보관하니 금기도 한몫한다. 까치집 가장 굵은 나뭇가질 뽑아 강물에 넣고 거꾸로 밀어 올려서 돈 따길 빈다. 종류가 많다. 기구인 주사위이고 만지작거리는 여러 가지 작은 것이 있다. 기계로는 룰렛과 슬롯머신, 빙고, 빠칭코, 전자오락이며 닭싸움과 소싸움, 경마에도 내건다. 바둑과 장기도 가벼운 내기가 된다. 다양하다. 쌍륙이 있다. 다이스도 생겼다. 각종 경기도 내기를 했다.
중국에서 유행한 야바위는 운이 아니라 속임수다. 1-6 숫자에 골패를 섞어놓는다. 돈 놓고 배로 따 먹기다. 아주 쉬워서 그저 먹을 것 같다. 해보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번번이 잃는다. 십인계도 야바위다. 1-10 숫자에 돈을 댄다. 대통에 넣고 흔들어 맞는 숫자가 판돈을 가져간다. 더 어렵다. 바가지 안쪽에 숫자를 쓰고 맞춰야 한다. 잃으면 바가지 썼단 말이 생겼다. 야바윈 뻔히 보고 눈뜨고 속아 귀신 곡할 노릇이다.
오락적 성격의 노름은 심심풀이로 하다가 크게 된다. 일상적 권태감이나 정서불안으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바뀐다. 생활의 활력을 얻는다. 그래서 공산국가나 식민지에선 정책적으로 조장하기도 했다. 유럽 모나코나 미국 네바다주는 도박을 인정하고 우리나란 호텔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개장한다. 딸 거라 매달리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많다. 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인터넷 카지노에 빠져 살림을 어렵게 하는 사람이 있다.
화투는 임란 무렵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유럽 카드인 카르타에서 본받았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과의 무역에서 갖고 들어왔다. 비슷하게 만든 것이 「하나후다」이다. 12종 48장으로 19세기 대마도 상인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흘러들어왔다. 우리나라 것은 붉은색이 많으며 광이나 청단 홍단은 써넣었다. 민화투와 육백, 삼봉, 짓고땡, 섰다, 고스톱, 나일론뻥 등이 있다. 전직 대통령 이름도 들어간다. 싹쓸이할 때다. 일본 화투는 검은색이 많다. 진천에는 화투타령 민요도 부른다. 열 사람까지 칠 수 있다.
만든 일본에서는 주춤하다. 우리나라도 해방 전후 심하다가 한때 한산하더니 또 유행하기 시작한다. 담배 걸고 하는 것에서 돈 놓고 고주망태 술 내기로 들어간다. 깊은 밤엔 눈을 가늘게 뜨고 큰돈이 오간다. 아침나절에 부스스 일어날 땐 결판이 난다. 누군 따고 개평도 주며 인심을 쓴다. 많이 잃은 사람은 조용하다. 그 집은 뭣이 없어졌다며 야단이다. 광이 텅 비었다.
세원도 처음은 진국과 재미로 하다가 더 나갔다. 그냥 하는 게 싱거워서 적은 돈을 건다. 내길 하는 것이다. 따고 잃는 게 비슷하다가 어떨 땐 많이 잃어 맘이 허전하다. 아랫동네 사랑방에서 같이 끼여 했다. 친구도 함께 갔는데 나는 또 잃었다. 잘 안 된다. 부화가 오른다. 왜 나만 이리 질까. 빌려서 하다가 그마저 다 털렸다. 옆에서 구경만 할 수 있나. 자꾸 꾸게 된다. 돈 잃고 그만두는 게 대단한 사람이다. 없다 하고 누워 자는 사람도 놀랍다.
청천벽력이 내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낮에 잔칫집 돼지고길 들고 꼭 체해서 숨을 쉬지 못했다.”
삼살을 맞았다 하고 어떤 이는 식도에 걸려 붙었기 때문이란다. 또 기도로 들어가 막았다 한다. 어이없이 큰일을 당해 어안이 벙벙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아침에 멀쩡하던 정정한 아버지가 어찌 이렇게 되나. 감당할 수 없다. 조상은 돌볼 수가 없었나. 몸부림치고 땅을 쳐도 소용없다. 몸을 흔들어도 눈을 뜨게 해도 일어날 기미가 없다. 소리쳐 불러도 기척이 없다.
“아직 한창 살 나이 50에‧‧‧.”
삼우가 끝나고도 온통 서운해 견딜 수 없다. 세상이 꺼지는 것 같다. 너무 슬퍼 울기만 하니 아내와 친척들이 위로한다. 운명이니 보내 드려야 한다며 모친을 위로하라고 이른다. 딸과 아들도 아버지가 슬퍼하니 같이 운다. 세원은 몇 며칠을 그렇게 통곡하며 지났다. 아들을 글방에 보내 곱게 키우려던 아버지, 일 시키려 하지 않고 잘못이 있어도 용서하며 웃으시던 아버지.
“영자 백자 아버님,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먼 산은 못 간다. 우리 밭 가에 모시자. 건너다뵈는 밭 언덕에 쉬시게 하자. 보고 싶을 때 찾아가야 한다. 학원과 예배당 바로 앞이다. 머리는 밭쪽으로 발은 앞산을 향했다. 가족들이 오면 앉을 수 있도록 자리 잡았다. 바로 길가이다. 백합 나리꽃을 군데군데 심었다. 세원은 아버지 없는 세상이 아득한가. 아침저녁으로 찾아간다.
집안일을 건사해야 했다. 하던 농사도 계속 이어 힘들지만 지어야 한다. 어머니와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저물어 들어오곤 했는데 고되다. 아들 덕희를 글방에 보내려 해도 이젠 주위에 없다. 춘양 쪽으로 가야 한다. 글 배우다 농사짓는 나 같은 어중간한 사람을 만들 수 없다. 학교도 멀리 떨어져 있다.
“어중제비가 될라.”
내가 배우던 대로 덕희를 가르쳤다. 잘 따라 읽고 쓰며 해석했다. 명석함이 돋보였다. 글씨는 나보다 더 잘 썼다.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할 땐 대견하다. 해보지 않던 농살 지으려니 힘에 부친다. 농사 절기도 남 하는 걸 일일이 보거나 물어야 했다. 저녁으로 모여 노름을 한다. 가재도구를 하나씩 가져다 잡혀 밑돈으로 바꿨다. 재미로 시작한 것이 커져만 갔다. 농가월령가를 불러라. 간이 점점 부풀어간다.
밤만 되면 끌리듯 노름방으로 가진다. 가족들이 이상히 여기고 닦달을 한다. 어머니께 고개 숙여 미안하다. 다시 안 하겠다 다짐을 했다. 허공엔 화투장이 날아다닌다. 며칠 조용하다가 모이면 그냥 심심풀이로 치다가 소용돌이에 물줄기 빨려 들어가듯 그 짓으로 바뀐다. 아내가 살살 갈 만한 곳을 찾아 밖에서 불러낸다. 끌려 집으로 가길 여러 번이다. 어머닌 아들 세원 때문에 눕길 자주 한다. 말려도 소용없다.
집을 잡혔는가. 남정네 몇이 집 주윌 둘러본다. 대판 난리굿이 벌어졌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달 지났냐 이게 뭐냐. 어머니는 울부짖고 아낸 앙탈을 부린다. 딸들과 아들 덕희는 구석에서 눈물만 뚝뚝 흘린다. 이제 여러 대 살던 기와집을 날리게 됐다.
“우리 어디가 사나.”
하며 방바닥을 친다. 얌전한 게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고이 키웠더니 이따위 짓이냐.
“집이 이렇게 망하는구나.”
“남 말만 들었지 내 집이 이럴 줄이야.”
빈집 농막에 들어가 가재도굴 주섬주섬 놓고 밥을 끓여 먹었다. 논밭도 다 물 건너가고 때 꺼릴 얻어 목숨 부지하는 수밖에 없다. 얼굴을 덫 씌웠는가. 철판을 깔았는가. 정신 못 차리고 계속된다. 할 짓이 없는가. 잃어버린 걸 찾아야 한다는 맘뿐이다. 세원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 하늘이 노랗다. 할 때마다 잃으면서도 따야지 부나비처럼 달려든다. 본전 생각이 사람을 애끓게 한다. 그것만 있으면--- 생각할수록 천 길 낭떠러지다.
하얗게 서리 내린 추운 겨울날 아침에 밥을 지으려니 가마솥이 없어졌다. 시꺼먼 고래만 보인다. 시어머니와 딸, 아들 아침을 먹여야 한다. 깨진 오지그릇에 물을 붓고 선밥을 지어 먹었다. 남편이 아니라
“웬쑤다.”
옹기에 밥을 지었다. 수저도 없어 손으로 먹는다. 아들 덕희는 다음날 새벽에 집을 나갔다. 풍비박산 난 집에 어찌 사나. 마침 친구가 와 보라는 시오리 남짓한 금정광산으로 넘어갔다. 아버지에게 한글과 한문을 배우고 일본 거주민들이 사용하는 주판으로 덧셈 뺄셈을 익혔다. 봉화군 내에도 변변한 학교가 없어 서당에서 사서오경을 읽는 게 고작이다. 이제 겨우 소학교를 세워 모집하는 곳이 생겼다. 우구치 광산은 큼직하다. 좁은 골짝마다 판자촌이 즐비하다. 전국에서 일꾼들이 모여 좁은 산골 북새통이다.
사무실 청소하는 급사 일을 했다. 잡다한 일들을 시키는 대로 닦고 쓸며 날랐다. 춘양과 서벽을 지나 한배령을 넘어 깊이 들어가는 협곡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다. 이런 곳에 귀한 납과 금이 나나. 그걸 어찌 알았을까. 우선 일본말을 배워야 했다. 듣고 말하며 익혀나갔다. 조금씩 입이 터지며 쉬운 것들부터 외웠다. 말하고 손으로 열심히 썼다.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도움이 된다. 한글과 한자, 주산을 배운 게 바탕이다. 하루 사는 게 터득하고 익혀야 하는 것들이다.
친구 방에서 자고 먹고 지내다 좀 먼 산기슭 언덕배기 모난 방을 얻어 끓여 먹고 다녔다. 남포를 가져오라면 화약고에 내려가 폭약을 매다 올렸다. 사무실 소장실을 반짝일 정도로 닦았다. 건너편 가까운 사택에도 심부름 갔다. 땔감 석탄을 올리거나 장작을 날랐다. 마타리 쌀 포대와 부식을 배달하기도 하면서 도왔다. 착하고 부지런함을 보여야 한다. 말 익히고 생활을 비슷하게 따라 해냈다. 어린이가 언행을 익히듯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은 얼굴 모습과 손짓 몸으로 전달하니 그럴듯했는가 통했다 어렴풋이.
얼마 뒤 청사진을 굽고 측량기계를 다루는 옆 부서 조수로 옮겨갔다. 황금이 쏟아지는 커다란 회사의 내용을 조금씩 알게 됐다. 토목공사 책을 읽고 야금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았다. 종사자들이 이골 저 골짝에 수천 명이나 옹기종기 살았다. 엄청나다. 서울에 없는 것을 여기선 구할 수 있다니 대단한 곳이다. 금자 든 금곡과 금산, 금정, 김제, 김해 등 지명은 쇠나 황금이 나온다. 삼각 다리 측량기계를 매고 하얀 긴 자를 들었다. 주위 산천과 갱도를 측량하면서 기술을 쌓아나갔다. 하는 모든 걸 눈과 귀, 손으로 퍼담았다.
저녁마다 변전소 앞 넓은 터에는 유랑극단이 찾아온다. 돈이 들끓는 곳이다. 간주도 잘 나오지만 왜 간장과 된장, 과자, 옷가지, 생필품 등의 일본제품을 선물로 준다. 돼지고기는 쌀 배급 시에 자주 나온다. 살만한 곳이다. 대대로 힘겨웠던 두멧골 삶의 땅이 철철 넘치는 곳으로 바뀌었다. 차 다니는 걸 보는 게 어렵다. 여긴 일본 화차가 험한 고갤 오르내린다. 봉화나 영주에 나르면 철도로 부산까지 그리고 일본 배에 순금을 실어 가져간다. 목탄차가 연기를 뿜으며 신작로를 달린다. 오를 땐 골골 병신, 내리막길은 술술 귀신이다.
“미소간장 된장 나올 때가 기다려진다.”
측량기술을 습득해 항 내외 거미줄 같은 지도를 그려낸다. 청사진으로 만들어 작업하기 좋은 굴진 방향과 차돌 금맥을 찾아낸다. 진급도 하여 사원급 대우를 받았다. 화약고 주위 사택도 얻었다. 허름한 농가에서 고생하던 가족을 데려와 부양하며 함께 살았다. 떠도는 아버지도 모셔와 사랑방을 쓰게 했다. 염치없는 세원은 아들 덕희 덕분에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다.
“못 난 애비다.”
“다시는 안 할 게.”
“용서해다오.”
억장 무너진 김의성 세원의 아내는 꼴도 보기 싫다며 대면도 안 하려 한다. 덕희가 아버지 아버지 하니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도 남남처럼 조면으로 지낸다. 덕희 아내 며느리가 죽을 지경이다. 사랑에 따로 차려 드려야 하고 마음 써야 한다. 손자 신보를 할아버지 방에 재웠다. 처음은 안방에 가겠다며 떼쓰는 걸 달래어 보냈다.
“오란다고 무슨 염치로 기대나.”
“죽던가 나가던가.”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을 길거리로 내몬 뻔뻔한 사람이다. 말이 사택이지 여기까지 온 데는 아들 덕희의 눈물겨운 집이다. 그 고생을 어찌 다 말할 수 있나. 일인 밑에서 인정받아 사는 게 쉽나. 언어를 익히고 싹싹하게 그들 비위를 맞춰야 한다. 수학이 들어가는 그 어려운 측량기술을 어찌 익혔을까. 놀라운 일이다. 토목공학책에 잔잔한 일본 글과 한자가 빼곡하다. 기하와 도면이 거미줄 같은데 그걸 읽었나.
해방이 찾아왔다. 썰물처럼 일인들은 떠나갔다. 그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번창하던 광산은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다. 갱도 수레인 광차가 레일 따라 쉴새 없이 제련소와 돌 더미로 나르는 북적거리던 곳이 그만 조용하다. 연기를 푹푹 뿜으며 소리 내어 오르내리던 목탄차도 간 곳이 없다. 사무실과 그들 사택은 휑하다. 급히 떠나느라 가재도구들이 마구 나뒹군다. 길거리 행상인이 늘어섰는데 끊겨 조용하다. 일인 집과 사무실을 뒤져 막 쓸어 담아 가져갔다.
잘 있어라. 잘 가거라. 하는 인사도 없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총독부의 명령과는 달리 무장을 해제한 군경을 먼저 철수시키고 민간을 뒤따르게 했다. 보호막이 없어진 일인들은 서둘러 조심조심 부산 세화회를 찾아갔다. 정한 여비만 소지하게 해 빈 털털이로 돌아가야 했다. 사무실과 주택에 용품과 비품을 그대로 남겨뒀다. 서로 챙기느라 분주하다. 빨리 서두른 사람은 한 살림 톡톡히 챙겼다. 애국 청년들에 의해 폭행도 생겼다. 겁에 질려 야반도주하는 일인들은 갈팡질팡 헤맨다. 낮엔 숲에 숨었다가 어두워지면 남으로 남으로 부산을 향해 걸었다.
일본인들이 일하던 사무실과 살던 집을 살펴봤다. 텅 빈 불 꺼진 사무실은 무엇을 담았던가 아름드리 푸른색 유리그릇들이 굴러다닌다. 그것도 어디 쓰려고 무겁게 들고 가는 사람이 있다. 종이와 책자가 밟혀 찢어진 것이 희뜩거린다. 며칠 뒤에 가보니 빈 책장이며 그릇들, 사무용품도 다 가져갔다. 사택을 들어가니 문짝은 떨어지고 나동그라져 부서졌다. 입은 옷만 걸치고 금품만을 챙겨갔다. 그 많은 세간살이는 다 어디 갔나.
벌써 여러 사람이 다녀갔다. 많이 가져가다 떨어뜨리고 깨뜨렸다. 부엌 그릇들이 박살 났다. 아기자기한 집안에 그들도 자녀 키우며 살던 보금자리다. 마당엔 백일홍과 봉선화가 예쁘게 폈다. 키운 사람은 가고 없는데 꽈리가 발갛게 터질 듯 익었다. 하나 따 입에 물고 뽀드득뽀드득 비볐다. 다 따먹지 못한 복숭아가 발갛게 익어 덜렁거린다. 떠난 주인이 다시 오겠나. 꽃들은 산들바람에 방글방글 웃었다.
변전소는 윙 소리가 났다. 오르면 왼쪽 화약고와 그 위 가운데가 사무실이다. 왼편에 덩그런 제련소가 맥없이 조용하다. 소화 몇 년이 뚜렷하게 보이는 갱도가 건너편 우측에 뻥 뚫렸다. 레일이 구불구불 기면서 여름 햇볕에 뜨겁게 달았다. 인부들도 따라갔는가 적막하다. 가스 불을 들고 다닐 만한데 아무도 없다. 서성이던 사람들이 가뭇없다. 카바이트 간드렛불이 어른거리는 듯하다가도 깜깜한 갱도엔 찬 바람만 나왔다.
자주 드나들며 심부름했던 오른쪽 산기슭 소장 사택 출입문은 돌쩌귀가 빠져 옆으로 스러져 있다. 유리창은 곳곳이 깨지고 떨어져 어두컴컴 뚫렸다. 갈 때마다 친절하던 가족들은 잘 가고 있을까. 측량 부서로 보내준 소장이 무사히 갔으면 한다. 흥청망청하던 간주 날과 쌀 배급소 앞의 긴 줄의 사람들은 다 어디 있나. 주말에 받는 돈 봉투가 그리 좋을까. 쌀과 배급선물을 지고 들고 갈 때가 좋았다.
그것도 얼마 못 가 육이오 전쟁이 터졌다. 이리저리 피란 다니기 바쁘다. 이 골짝에 인민군이 들이닥쳐 총소리 대포 터지는 게 고막을 찌른다. 서벽 쪽으로 넘어간다. 금정에서 한배령을 넘자면 목탄차 다니는 굴을 지나야 한다. 고드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곳을 지나니 눈이 하얗게 쌓였다. 갈 곳이 있나 아무 데나 들어가 쉬면서 포탄 소리 멎길 기다렸다. 도력의 고드름과 흰 눈을 먹었다. 집집이 사립문을 흔들면 대답이 없다.
잘못 다녀 인민군 지역으로 들어갔다. 뿔난 사람인가 했는데 똑같은 사람이다. 머물다 보면 군경이 지나가는가 하면 어느 날 밤은 인민군과 같이 잔다. 밤중에 들이닥쳐 같이 잔 모양이다. 벽에다 기대놓은 검은 총들이 수두룩하다. 전투병은 집 주위에서 경계하며 자고 군관들은 방에 들어와 가족과 함께 잤다. 아침이 되니 모두 나갔다. 복작일 땐 어디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알 수 없다. 장정 남자들은 붙들려갈 수 있고 노인과 아녀자들은 이리저리 보호를 받는다.
그들이 빠르다. 피난민은 다녀도 멀리 못 간다. 뱅뱅 돌 뿐이다. 빠르게 뛰거나 행군을 했다. 또 차량으로 이동하니 신속하게 움직인다. 적군에게 보호받기도 하고 군경이 안내해서 위험지역을 빠져나가기도 한다. 하룻밤 사이에도 빼앗았다간 뺏기곤 한다. 그 속에 있었을 땐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혼란에 빠진다. 엉망진창이다. 죽음이 눈앞을 얼찐거린다. 덕희는 아들을 목에 걸치고 피란 다녔다. 그런 속에서도 부서진 차에 올라 핸들을 이리저리 돌렸다.
길 가운데 아이 주검이 놓였다. 거두지 않고 버려져 있다. 산기슭엔 구덩이만 파고 묻지 않은 시신 뼈가 보인다. 늑대가 뜯어 먹었다. 곳곳에서 시체를 본다. 다니다 굶주려 쓰러질 수 있고 유탄을 맞을 수도 있다. 적군으로 오인돼 폭행이나 총살을 당할 수 있다. 부역에서 도망하다 붙들려 몽둥이로 맞는다. 너무 맞아서 구차하다며 어서 죽여 달라는 사람도 있다. 입은 채로 자는 듯 누워있다. 총 걸친 군인들이 길거리를 사납게 쏘다녔다.
또 부역하고 내통했다 해서 지서로 붙들려간다. 한적한 강가에 나무를 세워놓고 눈을 감싼 뒤 묶어서 사살하는 걸 자주 봤다. 가족들이 시신을 거적때기에 담아 가져가는 몸서리쳐지는 전쟁의 참상이다. 계엄을 내리면 그렇게 되는가 보다. 제주도 4.3사건이나 여순사건들이 그렇지 않았겠나. 전시가 무서운 세상이다. 전쟁은 막아야 할 일이다. 죽이다 보면 죄스러움이 사라진다. 증오가 이글거리고 넘쳐난다. 그럴 땐 악하고 무서운 게 사람이다.
농사를 지을 수 있나. 한가히 씨 뿌리고 가꿀 수 없다. 추수도 못 한다. 도망 다니기 바빠 사는 게 말이 아니다. 가족을 지키려 애쓰다 붙들려 인민군 부역으로 끌려가고 국군으로 징집된다. 먹을 게 없어 풀잎을 뜯고 뿌릴 캐며 열매를 주워 먹는다. 피난 가도 머물 곳이 없다. 좀 덜하면 집으로 돌아온다. 굶주려도 내 살던 집이 편하다. 칡뿌린 어찌 그리 곧게 들어가나 괭이질이 힘들다. 도토린 잠시뿐 다람쥐 가져가고 눈에 묻혀버린다. 송기로 솔밭은 쑥대밭이다. 고갱이가 다 부러졌다. 굶주린 부모는 부황이 나고 아이들은 배가 불거졌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덕희는 가족을 끌고 전란을 피해 다니다 상동으로 갔다. 그래도 전에 살던 척곡으론 들어가지 않았다. 그곳은 생각하기도 싫다. 아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지만 다 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여 저기 떠돌다 찾아간 곳이 중석을 캐는 상동광산이다. 측량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딸들과 금정 아래 조제에 머물렀다. 사는 게 아니다 숨 쉬니 살아있다. 살을 꼬집어 봐야 안다. 어찌 지났는지도 모른다. 얼떨결에 여기까지 왔다.
콩 볶듯 시달린 긴긴 3년간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아버지 세원은 어쩌나. 전쟁통에 서로 살기 바빠 챙기지 못하자 간 곳을 알 수 없이 헤어졌다. 다 무사해야 할 텐데. 측량기술을 잘 배워 요긴하게 써먹는다.
미군이 필요로 하는 중석이어서 개발이 빨랐다. 필라멘트를 만드는 광석이다. 미군 부대도 가까이 있다. 사택을 얻어 살게 됐다. 힘 좋은 트럭이 중석을 실어날랐다. 지날 땐 연료 타는 냄새가 난다. 그게 좋아 한참 서서 맡았다. 도로에 차들이 이었다. 고개 넘어 금정에서 금광 인부들이 많이 왔다. 살기 좋은 골짜기이다. 휘발유 냄새가 향긋해 좋다. 칠량리에 사택이 늘어섰다. 집집이 전깃불을 켜고 연탄으로 밥 짓는다.
사택 골목을 지나며 미역 사라는 장수가 낯익었다. 시아버지다. 모셔서 점심을 따뜻이 차려드리고 건강과 근황을 물었다. 고단한 듯 쉬다가 기댄 채 잠들었다. 울진에서 미역을 떼와 짊어지고 다니며 판단다. 같이 척곡에 살 때 힘들었다. 못된 난봉꾼 나 때문에 고생 고생하는 가족들을 볼 때마다 죄책감으로 견딜 수 없었다. 벌 받아야 한다. 고달픈 보부상 길을 택했다. 울진이 여기서 어디라고. 험한 고갤 수없이 넘나들어야 했다.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서 다녔다. 해산물이 얼마나 무겁나.
눈붙이라고 한참 뒤 이웃에서 돌아오니 신발이 안 보인다. 깨끗이 정돈하고 떠나셨다. 미역 몇 다발과 손주들 과자 살 봉투를 남겼다. 급히 찾았지만 간 곳이 없다. 신작로를 이리저리 뛰었지만 묘연하다. 그 뒤 떠돌이 상인들에게 물어보고 다니는 등짐마다 알아봐도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퇴근한 남편도 아버질 못 봐 허전한가 시무룩하다. 저녁도 드는 둥 마는 둥 거른다.
“아버지, 조제 어머니도 용서하실 거여요.”
“들어오세요.”
“보고 싶습니다.”
몇 해 뒤 아버지 세원의 소식이 날아왔다.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젊은이가 가져왔다. 그리 멀지 않는 저 아래 영월 화원 산골이다. 중동에서 걸어 걸어 들어가는 외딴곳이다. 달랑 한 채뿐인 길갓집이다. 사랑에서 며칠째 앓다가 돌아가셨다. 수발드는 사람 없이 혼자 지나다가 가셨단다. 아침마다 문 열고 나오는데 기척이 없어 보니 조용히 누워 주무시듯 감았다. 며칠 전부터 입맛이 없다며 음식을 시답잖게 들었다. 전날은 열이 좀 있다며 울컥거려 못 해 먹었단다. 안고 몸부림치며 서럽게 울었다.
“아버지 이리 돌아가시면 안 돼요. 안 돼.”
“어머님도 찾아보라 했어요.”
염하고 뒷산에 모셨다.
“찾아올 수 없는 외진 곳에 사셨습니까.”
“손주들을 잘 키우겠습니다.”
“노름에 발들이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봉분을 안고 또 울었다. 한자와 한글을 가르쳐주시던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이 자르르 살아 흐른다. 아는 사람 없는 외딴곳 사랑채에서 쓸쓸하게 지나다 돌아가셨다. 며칠씩 다니다가 돌아와 혼자 지내는 게 안 돼 주인이 가끔 마루에 걸터앉아 얘길 걸었다.
“가족은 어디 사나요.”
“혼자여.”
“어쩌다.”
“집문설 잡히고 도지 받은 광의 볏섬과 쌀 콩 깨 곡물을 다 꺼냈제. 간장이며 된장 단지도 저 날랐어.”
“산기슭 농막에 사는데 솥까지 빼 와서 노름으로 날렸지.”
“거리에 나앉아 굶어 죽은 줄 알았는데 상동 칠량에 살고 있제.”
“난 사는 게 아녀. 벌써 죽은 몸이구만.”
방엔 옷가지와 침구, 취사도구가 윗목에 널렸다. 목침을 볼에 대니 새콤한 아버지 냄새가 난다. 마른 명태와 양미리가 있다. 팔다 남았는가. 명탤 질겅질겅 씹으니 짭조름한 게 눈물도 섞여 넘어갔다.
“세자 원자 아버님 척곡일랑 잊으세요. 화원 꽃밭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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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도박 한 번은 꿈구는게 인간..
재밋게 읽었서요
노름꾼은 무엇이 씌었는가봐요.
끌려가듯 자꾸 간답니다.
부엌 무쇠솥까지 잡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