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제자훈련은 하나님의 영에 의한 본질적 변화에 따른 열매를 나타내는 훈련이 아니라
거짓자아가 주체가 되어 보상과 처벌(당근과 채찍) 이라는 틀 속에서 모든것을 말씀때로 판단하고
실천하고 추구하도록 훈련받고 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더 누리기 위해서는 교리와
믿음체계에 따라 내 생각과 행동을 새롭게 하고 금지조항을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주입된 신앙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관념적인 앎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 아니라 관계적이 앎인 ' 하나님의 지식' 으로 주님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그분의 모양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복음인데 ' 형상이 없는 모양대로'가 오늘날 생명력을 잃고 종교화된 기독교의 현실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안에 없다면, 우리는 거짓자아로 하나님과 분리된 채 도덕적 측면에서만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안까운 사실은 새언약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과 같은 신율법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복음을 누리지 못한 채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영적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가 더 노력하고 헌신하고, 무언가를 바쳐야 한다는 식으로 믿고 있다. 말씀의 깊이가 있는 사람, 더 많이 기도한 사람, 더 많이 헌신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복음을 특별한 사람에게만 국한시키는 제한적 복음으로 만든 것이다.
기독교는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성경이 완성되었기에 더이상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성령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환영하지는 않는다. 아직고 개발도산국과 후진국에서는 여전히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중요한 신앙프로그램이었던 제자훈련은 자기부인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더 배우고 알도록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그 결과 영적 체험은 위험하고 적대시 하게 되었다. 말씀에 대한 인간적 차원의 열매는 맺었지만 말씀에 대한 하나님 차원의 열매는 없다.
이러한 흐름은 자신이 말씀에 대한 무엇인가를 깨달음으로 어떤 상태에 이르는 것을 영성이라고 착각한다.
정신세계에서 영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거짓자아의 영성이다. 깨어남은 영의 세계의 것이 정신세계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교리와 믿음으로 체계화 시켜놓았다. 스스로 선행하는 것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것으로 거룩해지기 위해 스스로 만든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탈육신적으로 더 나은 자신이 되고자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규칙에 따르는 행동의 변확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 즉 존재의 변화이다. 내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도덕적, 윤리적으로 말씀대로 사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신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적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거짓자아가 만든 정신세계에서의 관념과 이념으로 영적 실재에 대한 인본주의적 신앙 체계를
만들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을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의 교리와 거짓자아의 믿음체계로 만들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새영을 누리는 삶보다는 죄를 범하지 않는 윤리와 도덕에 초점을 둔 신앙체계를 만들어버렸다.
한마디로 교리를 위해 삶이 존재하는 믿음체계를 만든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것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이 삶을 사는 것은 전혀 다른것이다. 전자는 신념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체험에 관한것이다. 하나님의 영과의 하나됨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힐때 가능한것이다.
기독교내에서 당근과 채찍에 근거한 세상적 가치관에 기초한 율법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려면 외적 행동과 금지조항을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미 주신것을이루기보다는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종교가 되었다. 하나님의 영안에 거하기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빼기' 보다 가능한 모든것을 '더하기' 하는 종교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소정의 훈련을 받거나 하나님께 헌신해야만 미래를 보상 받을 수 있다는 식의 신앙체계를 만들어버렸다.
그렇다면 헌신과 노력이 필요없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헌신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받아내거나 스스로 더 거룩해지기 위한 헌신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성취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짓자아를 포기할때 얻어지는 것이다.
교리와 믿음체계를 지키는 것이 신앙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교리와 믿음체계에 있지 않고하나님의 생명의 흐름과 나눔에 있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는 교단의 교리와 믿음체계를 지키는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것은 진정한 체험이 아니다. 진정한 영적 체험은 자신을 포기할 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본질이 거짓자아를 뚫고 나타날때 체험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고 증명하거나 확이하지 않아도 그렇다고 믿어지고 알게 되는 것이다. 외적체험은 자신을 의지적으로 쳐서 복종시키는 만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애씀은 대부분 노력하지 않거나 외부환경에 의해 방해를 받으면 언제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교리와 믿음체계를 지키는 외적체험은 내적체험과 하나가 될때 비로소 온전해 진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엡4:1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것이 교리공부라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은 영적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새언약의 일꾼으로 주의 말씀대로 생각하고 느낌으로 주의 뜻을 나타내느 자이다.
외적체험의 주된 목적은 내적 체험을 통하여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이다. (17절)
거짓자아로 무엇인가를 추구해서 해석하고 이해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그것이
진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와 합한 내 영과 몸(새각, 감정, 신체)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부터 듣기 위해서는 타락한 혼이 자기 경험과 지식에 기초한 생각과 감정을
선택하여 만든나 즉 거짓자아를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는 것으 곧 죽음이라고 여기며, 죽기를 두려워하기때문에 일평생 매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히2:15)
오늘날의 교회는 온 세상에 하나님이 생명인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곳이 아니라 교리와 믿음체계를
전하고 수호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거짓장아에 기초한
행위보상적 사고방식과 신앙생활이 판을 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된 가운데서 스스로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서평: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내려는 나름대로의 방식들이 한국적인 종교와 어울려 여러가지
규칙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주님안에 호흡하지 못하고
이런규칙 저런규칙을 만들어 하나님을 옭아멨다
교회들 사람이 운영해야 되서 이런저런것들을
더하기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하나님이 역사했으니 다 알지 못했도 초보의 신앙에서 이제 벗어나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