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5월 14일, 저지시티 시장-시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윤여태(Michael Yun) 후보와의 유쾌한 만남
제1회 전 미주 한인 청소년 체육대전이 끝난 다음 날인 8월 13일, 뉴욕대한체육회의 이사장이자, 청소년 체육제전의 공동후원회장을 맡은 윤여태 후보와 만나게 되었다. 아직 행사의 감동과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윤 후보는 인터뷰를 잡기 위한 전화통화를 했을 때 약속장소에서 ‘머리가 크고 머리카락이 하얀 사람’을 찾으면 된다며 자신의 외모 덕에 ‘백두산’이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웃었다. 과연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던 유쾌하고 막힘이 없는 윤 후보와의 만남은, 지난 며칠간의 무더위에 무기력해지려던 내 생각과 일상에 시원하고 통쾌한 활력을 주었다.
“초기 미국의 개척자들은 미국 이민사를 총과 배짱으로 일구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제 개인 이민사도 저의 배짱과 더불어 몇 번의 기막힌 인복으로 덕분에 주요 턴닝 포인트를 맞아 이루었다고 봅니다.” 거침없이 이야기를 시작한 윤여태(Michael Yun) 후보는 그 왕성한 활동만큼, 직함도 다양하다. 전날 폐막식을 치른 전미 한인 청소년 체육대전의 의의와 참가한 청소년들의 단합되고 자신감에 넙치던 모습을 전하며 진정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는 윤 후보는 뉴욕 대한 체육회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외에도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고 현 허드슨 카운티 한국전 참전용사회 후원 기금 모금회장, 저지시티 에브리씽 페스티발(Everything Jersey City Festival) 위원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커뮤니티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또한, 저지시티의 예술 문화 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윤 후보는 매년 4월, ‘한인작가 작품전시의 달’로 지정해 저지시티 시청 내의 루텐더 갤러리에서 한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고등학생들의 작품도 시상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저지시티의 센트럴 애비뉴 주변으로 다수의 벽화와 조각상을 설치한 ‘Public Art in the Heights’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 윤 후보가 처음 브루클린으로 도미한 것은 1979년,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였다고. 불과 2년 뒤,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정직함, 그리고 타고난 주인의식을 발휘해 개인사업을 시작, 초반의 어려움을 딛고, 1982년 부터 저지시티 하이트 지역에서 31년째 성공적으로 개인 사업을 하고 있으면서, 민주주의와 주류 정치사회에 시민 지도자로서 활발히 봉사하고 참여하며 커뮤니티가 실제로 개선되는 크고 작은 일에 수고를 마다치 않고 활동을 벌여왔다.
현직으로 저지시티 미 경제인협회 회장을 비롯하여, 저지시티 하이트 주민 연합회 공동회장 등, 다수의 미국 협회 직함과 또 다른 다수의 한인회 단체장 직을 맡아 일하고 있다. 그런 윤 후보가 다른 한인 정치인들과 가장 다른 점은, 그의 출마 지역인 져지시티에는 한인 유권자가 극소수라는 사실과 1993년 부터 9년간 저지시티에서 미동부 최초의 한인 부시장을 역임하는 동안, 지역 내의 흑인 단체 등 타 인종, 다양한 그룹들과의 다방면으로 쌓으면서 주민과 대화하고 공조하며 상생하는 목표를 가지고 강인한 주인의식으로 정치 일선에 투신하였다는 점이다. 그런 그가 저지시티가 당면한 치안과 교육 그리고 비효율적인 시 행정 개선이라는 일차적 목표와 한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넘어선 정치적 자립을 이루어 우리의 후손이 이 땅의 객이 아닌 주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는 이차적 목표를 이루기를 염원한다며 그의 출마의 변을 발표했다.
이런 윤 후보의 일상사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따뜻하고 불심이 깊으셨던 어머니와 엄하시지만, 공정하셨던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서 책임감을 제일 우선으로 여기며 자라났고, 항상 가정적이고 우애가 좋은 가족이었다고. 결혼 후 단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모범답안 같은 부인 이야기에, 심지어 부인과 어머니 사이의 고부간은 너무도 다정하고 가까워서 여행을 가더라도 항상 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갔으며, 그의 아내는 ‘다시 태어나도 같은 시어머니를 만나 다시 모시고 싶다’고 할 만큼 모두가 친근하고 다복한 이야기였다. 그런 윤후보가 인생의 예상치 못한 어려운 순간에 만난, 자신에게 도움을 베풀어준 몇 명의 낯선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인복이 모두 어머니의 공덕인 것 같다고 말하는가 싶더니, 그만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토록 당당하고 거침없던 사람이 한순간에 울컥 말끝을 맺지못하고 젖은 눈길을 돌리는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윤 후보의 진솔하고 순수한 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윤 후보는 1984년 부모님을 초청이민으로 모셔, 함께 살면서 백림사와의 인연을 시작해 지금껏 이어오고 있는데,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신 곳도 백림사이다. 올해에도 백중 입제일에 절을 찾았고 회향 일에도 어머니를 뵈러 갈 것이라고 했다. 평소 단호하신 어머니는 항상 몸소 실천하는 모습으로 자식들을 교육하셨는데, 그때부터 ‘내가 변해야 자식이 변하고, 그래야 세상이 변한다’는 가르침과 함께 항상 강조 하셨던 ‘지나침 없이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정도)’이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했다. 2010년에 있었던 혜성스님의 ‘선서화 초대전을 저지시티 시티홀에서 열기도 했다.
80년대 초, 차로 운전해서 떠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던 날은 추운 날씨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거리에는 차들이 다니지 못할 정도로 눈이 쌓였었다고 한다. 처가가 있는 방향으로 향해 화이트 스톤 다리를 막 건넜을 때, 갑자기 차가 고장 나 움직이질 않았다고 한다. 간신히 한밤중이 되어서 처가에 전화를 걸 수 있었고, 처남에게 픽업을 부탁하니 ‘지금 집에 불이 나서 데리러 갈 수가 없다’고 했다고. 인적도 없는 곳에 택시든 차든 한 대도 지나지 않는 길목에서, 발만 동동구르고 있었는데 불현듯 기다란 흰색의 리무진 한대가 서더란다. 운전자가 사정을 묻더니, 목적지가 어디든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고. 비싼 리무진 요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괜찮다고 했더니 걱정하지 말고 타라고 했다고 한다. 안도 반 걱정 반으로 처가 근처까지 와서 보니, 정말로 불이 난 처가를 진화하기 위해 소방차가 즐비하게 와있더라고 했다. 그래도 덕분에 올 수 있었기에 감사한 마음에 사례 하고 싶다고 하자, 그 운전자는, ‘나도 당신처럼 어려웠을 때 도움을 받았다. 그러니 당신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라’는 말을 남기고 그냥 사라졌다고 했다. 그 자신도 이민자였던 리무진 운전자는,그렇게 윤여태 후보의 기억에 자리 잡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현재 집의 벽에 걸어 놓고 있는 돌아가신 월산스님이 쓰신 ‘시방세계공일가(十方世界共一家)’ 와 일맥상통한다고. 윤 후보는 이 문구를 ‘인종, 나이와 직업을 떠나서 다인종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 선구자와 같이 살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고 풀이하면서 당부를 했다. “미국 경제 중 80%가 스몰 비즈니스를 통해 일자리 창출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인들이야말로 스몰비즈니스로 미국 경제에 이바지하는 바가 무척 큽니다. 또 한인 만큼 교육과 같은 미래에 투자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이민자가 아닌, 당당한 이 땅의 주인으로, 미국 시민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의 이웃과 조화를 이루며 주인답게 행동해야겠지요.” 마지막으로 “If they can do it, we can do it better. And Whatever good for Korean, it’s good for American.”이라며 우리의 권리인 정치 참여에 많은 관심을 둘 것을 부탁했다.
윤여태 후보의 선거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201-589-1678과 voteyun@gmail.com으로 연락하면 된다.
(9월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