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문학을 꽃 피웠던 조선조 중기의 시인인 송강 정철의 시를 감상하며 문학의 향연
5월에 빠져 본다.
1). 道逢丏子(도봉면자) 길에서 걸인을 만나다
夫篴婦歌 兒在背(부적부가 아재배)叩人門戶 被人嗔(고인문호 파인진)昔有問牛 今不問(석유문우 금불문)不堪行路 一沾巾(불감행로 일첨건)
어린애를 업고서 남편은 피리불고 아내는 노래 불러 남의 집 문을 두드리다 욕을 먹네.옛날에 문우하던 일 있어 지금 물어보진 않지만지나는 길에 눈물 적시는 건 참지 못하겠네.
1. 문우: 문우천의 준말. 한나라 정승 병길이 사상자가 길에 가득한 것을 보고서도 묻지 않다가,
사람이 소를 심하게 몰아 소가 혀를 빼물고 헐떡이는 것을 보고 ‘소를 몇 이정이나 몰고 왔느냐’고
물었다는 고사. 묻기가 죄스럽고 부끄럽다는 뜻.2.적(篴): 피리 적 피리를 불다3.감(堪): 견디어 내다4.면(丏) : 가리다의 뜻
2). 病中書懷(병중서회)병중에 회포를 쓰다
家懷湘楚 靑山遠(가회상초 청산원)身繫安危 白髮長(신계안위 백발장)每到五更 愁未睡(매도오경 수미수)臥看明月 下西廓(와간명월 하서곽)
집 생각에 저 남방의 푸른 산은 멀고안위에 몸이 매여 백발만 깊었네.매번 오경에도 시름으로 잠 못 들고서쪽 행랑 아래 누워 밝은 달 바라보네.
1. 상초: 초나라 상남. 송강의 고향이 남쪽에 있음으로 비유하여 이름.2.懷(회):품다 가슴에 않다
3). 醉後口號(취후구호) 취한 후에 읊다
塞垣何處 獨憑樓(새원하처 독빙루)欲向蓬萊 問消息(욕향봉래 문소식)萬事驚心 白盡頭(만사경심 백진두)夕陽無限 碧雲愁(석양무한 벽운수)
변방 울타리 어느 곳 홀로 누각에 기대었더니 봉래산 향하야 소식을 묻고 져 하네.만사에 놀란 마음 모-두 희어졌으니석양에 푸른 구름 시름만 그지없네.
1.독빙루 : 외롭고 쓸쓸한 누각2.봉래산 : 금강산
4). 夜坐聞雁(야좌문안)밤에 앉아 기러기 소리를 듣다
邊城獨雁 月俱來(변성독안 월구래)淚盡懷君 響更哀(루진회군 향갱애)天外建章 長入望(천외건장 장입망)老夫從此 不登臺(로부종차 불등대)
변성의 외로운 기러기 달과 함께 와서는임 그려 눈물 다하고서 울음 그쳐 슬 퍼라.하늘 밖 건장전이 멀리 조망에 들어오니늙은 몸 이제부터 대에 아니 오르리.
1.갱(更)은 다시의 뜻. 2.변성: 변방의 성.3.건장전: 임이 계신 곳 즉 임금이 머무는 곳.
5). 自歎(자탄)스스로 탄식하며
歸田不早 竟趨塵(귀전불조 경추진)除却人非 自誤身(제각인비 자오신)羸得鏡中 千丈白(리득경중 천장백)莫言圖畵 在麒麟(막언도화 재기린)
일찍이 전원으로 돌아가질 못하고 풍진을 쫓았으니인욕을 버리지 못하여 스스로 몸을 그르쳤네.얼굴은 해바라져서 거울 속엔 백발만 천장이니기린각에 그림 있다곤 말하지 마시게나.
1. 기린각: 전한의 무제가 기린을 얻었을 때 건축한 누각.
선제가 공신 11인의 상을 그리어 각상에 걸었다.
6). 到永柔縣(도영유현)영유현에 이르러
梨滿目干 戈獨掩(이만목간 과독엄)扉花時節 雨 霏霏(비화시절 우비비)迢遞塞天 愁玉輦(초체새천 수옥련)老臣危涕 日沾衣(로신위체 일첨의)
배꽃 피는 시절에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병장기 눈에 가득하니 홀로 사립문 닫았네.아스란 변방 하늘 임금님 걱정에 늙은 신하 눈물이 날마다 옷에 젓 나니.
1. 위체: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림.
7). 酒席口號(주석구호)술자리에서 읊다
今夜江南 露洗天(금야강남 로세천)碧虛千里 月輪懸(벽허천리 월윤현)移樽更向 門前設(이준갱향 문전설)去去留留 摠黯然(거거유유 총암연)
오늘 밤 강남에 하늘이 맑게 개여천 리의 푸른 허공에 달 바퀴 매달렸네.문 앞으로 술자리 다시 옮겨 가는 이, 오는 이 모두 다 슬프구나.
1. 설은 진설(음식을 상에 차려 놓음)의 뜻. 2. 거거류류: 거류의 뜻. 가고 가고, 머물고 머물고.
8). 隣人送菊(린인송국) 이웃 사람이 국화를 보내다
隣翁寄置 在曲欄(린옹기치 재곡란 )明月下我 黃金花(명월하아 황금화 )花不分明 香滿堂(화불분명 향만당 )世間誰是 知音子(세간수시 지음자 )
이웃 늙은이의 기이함을 곡란에 두고밝은 달 아래 노란 국화를 보내주어.꽃은 분명치 아니해도 집안 향기 가득한데세상엔 누가 있어 지음이 되랴.
1.세간 : 세간은 혹 세한이라고도 한다.2.곡란: ①기이한 노인들이 산다는 천국을 의미함. ②경기도 군포시의 한 지명 곡란에 사는 기이한
노인이 보낸 노란 국화를 보고 그곳이 천국이라 표현한 것임.
9). 送人入頭流山(송인입두류산 ) 두류산 들어가는 이를 보내며
頭流山在 白雲表(두류산재 백운표 )獨往神傷 吾未從(독왕신상 오미종 )手弄天王 峰上月(수롱천왕 봉상월 )淸光須寄 喚仙東(청광수기 환선동 )
두류산이 흰 구름 밖에 있느니그대는 가고 나는 못 가 마음 상해라.천왕봉 위의 달을 손으로 만져 지거든맑은 빛일랑 선동을 불러다 꼭 부쳐 주시길.
1. 선동의 동자는 심부름하는 아이(童과 같은 의미).
10). 雪後登嶽(설후등악) 눈 온 뒤에 산에 오르다
掃雪獨登 蒼玉屛(소설독등 창옥병)眼前銀海 極茫茫(안전은해 극망망)猶嫌遐眺 礙三角(유혐하조 애삼각)更上一峰 天地長(갱상일봉 천지장)
눈 쓸고 홀로 푸른 옥 병풍에 오르니눈앞의 바다 끝없이 아득하네.그래도 멀리 보임이 삼각산에 가릴까 봐다시 한 봉우리 오르니 천지가 장구하네 그려.
1. 옥병은 악에 대한 비유. 2. 유혐 : 그래도 의심이 간다는 뜻.
<송강 정절은 누구인가>
송강 정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1536년 중종 31년~1593년 선조 26년) 살다간 당대 최고의
시인이며 철학가이고 정치가이다. 묘소는 충청북도 문백면 봉죽리 환희산에 있다
국문학사에서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칩암거사(蟄菴居士). 아버지는 돈녕부 판관 유침(惟 沉)이다.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된 누이를
보러 동궁(東宮)에 자주 드나들어 명종(明宗)과 친했다. 1545년(인종 1년)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가 1551년(명종 6)에 풀려났다. 이후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았다.
양응정· 임석천·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에게 수학하고, 이이· 성혼· 송익필 등과 교류했다.
156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명종으로부터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으나 처남을 살해한
경양군(景陽君)의 처벌 문제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를 고집하여 명종의 뜻을 거슬러 말직에
머무르다 1567년에 지평이 되었다. 이어 곧 북관어사가 되었으며 1568년에는 이이와 같이
독서당(讀書堂)에 피선되고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호남어사 등을 지냈다. 1571년 부친상을,
1574년 모친상을 당하고 주로 경기도 고양에서 지냈다.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일로부터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분쟁에서 서인의 편에 가담했다.
분쟁에 휘말려 고향인 전라도 창평에 내려와 있다가 1578년에 조정에 다시 나와 장악원정. 직제학.
승지 등을 지냈다.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행뢰사건(行賂事件)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탄핵을 입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강원도에 1년 동안 머무르면서
〈관동별곡〉과 시조 16수를 지었다. 1581년에 병조참지 대사성을 지내다 노수신에의 비답(批答)이
논핵(論劾)에 가깝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갔으나 곧 전라도
관찰사를 제수받아 1582년까지 1년간 역임했다. 도승지 예조 참판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그곳의 시폐(時幣)를 상소로 올렸다.
1583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기주실의'(嗜酒失儀)하고 '강편기극지인'
(剛偏忌克之人)이라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가가 올려지는 등 논핵을 당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84년에 대사헌을 제수받고 총마(寵馬)를 하사받아 총마 어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했다. 이후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다. 1590년(선조 23) 좌의정이 되고,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다. 1591년 이산해의 배후책동에 빠져 건저(建儲)를 하려 하다가
왕의 뜻을 거스르고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국사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가 빗발쳐 파직된 뒤에 명천· 진주· 강계 등지로 유배생활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석방논의를 해 5월에 풀려났다.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했다. 관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다가 1593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으로〈송강집〉 7책〈송강가사〉과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사미인곡〉
·<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 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작가의 말>
송강 정철은 1536-1593을 살다간 조선 중기의 최대 시인이다. 그가 살던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동서의 당파싸움의 회오리에서 서인의 거두로서 당파싸움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의 한시 속에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장진주사>가 녹아 있다고 생각된다.
큰 누이는 인종의 부인이요 둘째 누이는 계림군의 부인이니 당시 최고의 권력에 서 있었다.
어려서부터 궁궐을 출입하며 나이가 같은 계림군(후에 명종)친하게 지냈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그의 큰형이 유배도중 죽고 어린 그도 부친을 따라
관북 정평 연일 등의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27살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에 나가 정사를 돌보았으나
순탄치는 않았다. 43살에 진도군수로 있을 적에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표적이 되어
고향으로 낙향하여 지은 관동별곡에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었더니’…. 라는 글로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으며. 다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로 나가면서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라는 글에서는 벼슬에 나가는 장부의 마음이 엿보인다.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하다가 선조의 미움으로 명천 진주 강계 등으로 유배를 다녔고 그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유배에서 풀려나 의주로 몽진 중인 선조를 피접하였으나 동인의 득세로 모함을 받아
강화도 송정으로 귀양을 가 생(生)을 마치니 그때가 선조(宣祖 27년 계사(癸巳)인 1593년 12월 18일로
58세이다. 다음해인 선조(宣祖 28년 갑오(甲午)1594년 2월에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신원리 뒷산에
장사(葬事)를 지냈고, 후에 현종(顯宗)7년 을사(乙巳1665)에 우암 송시열에 의해, 지금의 자리인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의 환희산에 이장하였다. 송강 정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강의
신도비는 1684년에 문정공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오위도총부부관 김수증이 전서하고 글을 썼으며,
비의 높이가 2.5미터이고 폭이 1.5m이며, 신도비각은 15평으로서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꽃들이 화창한 이 봄날에 문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 답을 송강
정철에게서 찾으려고 인근 진천군 문백면에 있는 그의 사당과 묘소를 대여섯 번 방문을 하였으나
그 답을 찾지 못하였다.가사와 한시를 떠나 나는 그 답을 모른다. 다만, 그의 글을 사랑하고 아끼며
연모할 뿐이다.주옥같은 가사문학의 꽃인 송강의 글은 이태백과 도연명과 두보의 글에서 영향을 받아
송강은 꽃과 술과 시를 사랑한 로맨티스트이지 정치가는 아닌 듯하다. 750여 편의 한시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장진주사 등, 시조 107수가 전하고, 유고로
송강가사, 송강집,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가 있다.
송강은 평생을 시와 술을 즐겼으며,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어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집 뜰에
있던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평생토록 애용했다고 하며, 술을 좋아하는 송강에게 이 잔으로
하루에 한 잔씩만 마시라고 선조 임금이 준 은 술잔을 송강은 사발만큼 두들겨 크게 늘려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은잔과 함께 유명한 일화이다.
화창한 봄날 문학(文學)이란 무엇인가를 동호인(同好人)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여
꽃과 별과 달과 자연을 사랑하는 그러한 문인의 길을 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몇 편의 한시를 통하여 그 향기가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천학(淺學)한 필자의 글이
강호제현(江湖諸賢)들께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늘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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