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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7 | 그냥 7 | 2008-10-16 오후 4:07:47 |
이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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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내게 진실로 소중한 것들
<교사의 길을 선택하다>
그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직업들은 여러 가지였다. 군인(부모님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라는 말을 해왔다), 법관(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법학부에 한 학년을 다닌 적이 있다), 목사(나는 주일학교 지도교사였고, 필라델피아 침례교회의 그리스도교 공려회(미국에서 시작된 청년운동으로 그리스도교주의를 조장하기 위해 1881년에 결성된 젊은이들 모임)회장을 여러 해 지냈다), 공무원이나 정치인(일찍부터 나는 정치개혁운동에 관심이 있었다)등이 나를 유혹한 직업들이다.
필라델피아의 센트럴 공업고등학교 시절 - 1898년 인문계인 센트럴 고등학교 대신 공고를 선택한 이유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교육을 받는 게 유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나는 네명의 뛰어난 스승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이 학교 교장인 윌리엄L.세이어 씨는 성직에 몸담고 있던 분으로 시대를 훨씬 앞서가는 교육자였다. 그의 아들은 생물학 교사였고, 브래드버리 선생은 화학을, 패트리지 선생은 물리학을, 그리고 지버 선생은 수학을 담당했다. 이들은 나에게 과학적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심어준 선생들이다.
더없이 훌륭한 이들 스승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편견을 경멸하고, 도그마를 부인하고, 끊임없이 실험을 추구하는 자세였다. 101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공부하는 법을 배웠고, 어떤 과학 분야에서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탄탄학 학문적 기초를 쌓았다. 군인의 매력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거기에는 역사학자들이 많은 전쟁 영웅들에게 영광스러운 역할을 부여했던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군대에 대한 나의 관심은 1898년에 발발한 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에서 준비가 전혀 안된 미합중국 해군이 승전하면서 더욱 커져갔다. 1898년 5월, 미국 정부가 스페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을 때, 나는 열다섯 살 소년이었다. 몇 주간 소규모 해전과 군사 작전이 벌어진 뒤, 전쟁은 막을 내렸다. 군악대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대규모 군중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승전한 군대의 귀향을 환영했다.
이 행사에 나도 나름대로 기여한 바가 있다. 1898년 봄 필라델피아를 떠나 고향으로 가기 직전, 할아버지가 우리를 방문해 독립기념일에 사용할 폭죽을 구해달라며 5달러를 주고 간 일이 있다. 나는 불화살과 통형 폭죽, 그리고 빙글빙글 돌면서 별모양의 불꽃을 터뜨리는 폭죽 따위를 사서 모리스런에 속달로 보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로 중간에 문제가 생겨 소포가 독립기념일 당일에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전승 행사에서 쓸모있게 사용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친구들 여남은 명과 함께 마을 뒤쪽에 있는 언덕으로 갔다. 높다랗게 쌓인 폐탄더미 위로 올라가 우리는 폭죽을 터뜨렸다. 우리 나름의 환영식을 마치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광산 노조 지도부에 있는 사람과 만났다. 그는 우리에게 뭘 하고 오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그가 우리에게 뱉은 조소의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뭐라고? 애들 장난 같은 전쟁을 기념했다는 거냐? 부끄러운줄 좀 알아라. 머지않아 진짜 전쟁이 어떤 건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거다."
어린 시절 군대에 대한 동경이 또 한번 표출된 것은 1898년 9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알렉산더 대제,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 그리고 특히 한니발의 뛰어난 용병술을 찬양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우리 학교 프랑스어 교사는 A. M. 그리용이라는 프랑스인이었다. 그리용 선생은 언제나 학생들을 친근하고 다정하게 대해 인기가 좋았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나는 그리용 선생에게 역사시간 과제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위대한 업적에 관한 보고서를 쓰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내 말을 듣자 그리용 선생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내 눈을 정면으로 노려보면서, "인간 백정이야!"하고 꾸짖는 투로 말했다.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영웅을 백정이라 부르다니. 그러나 나폴레옹의 승리와 영광, 그리고 처절한 패배 뒤에는 프랑스 민중의 엄청난 물질적, 인간적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알게 되었다. 육사에 진학해 군인의 길을 걸었으면 하는 부모님들의 기대는 어느 해 겨울 얼음처럼 단단한 눈덩이에 눈을 맞는 사건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눈덩이는 혈관을 파열시키고 망막에 응혈을 남겼다. 해리 콜드웰 박사의 신속한 치료로 실명은 면했지만, 망막이 심하게 손상되어 오른쪽 눈의 시력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군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 해도 한쪽 눈만 가지고는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군인이 되는 신세를 면했다.
두번째 직업으로 엔지니어가 되려고 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토목기사였고, 작은아버지 역시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모리스런 광산과 산림 지대, 그리고 건설 현장에서 여러 해를 보낸 경험 때문에 나는 건축 일과 야외에서 하는 작업에 자연스럽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버보인으로 성공하기를 바랐다. 고등학교시절 토론회에서 장원을 한 사건이 변호사 쪽 기질을 뒷받침해주기는 했지만, 대학에서 1년간 법률 공부를 한 뒤부터는 부정 부패와 싸우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내 인생에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 사람은 바로 필라델피어 그레이스 침례교회의 목사로 있던 러셀 H. 콘웰 박사였다.1896년 우리 가족이 대처로 이사한 뒤, 나는 이 교회의 주일학교에 들어갔다. 주일학교 교사인 윌리엄 C. 거스는 독실한 침례교도였다. 그는 자기가 맡고 있는 <황금률을 지키는 성경 모임>에 소속된 여남은 명의 아이들 전부를 그레이스 침례교회의 교인이 되도록 설복하는 것을 자신의 인생 목표로 삼은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예배에 참석하고, 그리스도교 공려회에도 가입하고, 나중에는 주일학교를 맡아 가르치기도 했다. 이 교회 부목사인 펠프스 박사는 나에게 목회자의 길을 걷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뒤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나를 그레이스 침례교회와 관련된 모든 모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나아가 기독교 자체에 대한 인연을 끊게 만들었다.
그레이스 침례교회는 콘웰 박사가 창립하여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 집단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콘웰 박사의 야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육신의 병을 고쳐주셨다. 그분의 뜻을 따라 똑같이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명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결국 그는 템플 대학이라는 교육기관과 사마리아 병원이라는 의료기관을 교회 부속기관으로 설립하기 위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1900년대 초, 펜실베이니아의 정치는 매튜 스탠리 퀘이와 보이스 펜로즈라는 두 명의 상원의원이 좌지우지했다. 이들은 각종 후원정책을 입안하고 배분하는 방식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전체를 장악해 나갔다. 펜실베이니아 주에는 교육사업과 사회봉사사업을 하는 사설 단체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 모두 주 당국으로부터 공금의 지원을 애타게 필요로 하는 실정이었다. 퀘이와 펜로즈는 주의회를 설득해 한 단체에 1만 달러, 다른 곳에 2만 5천 달러, 그리고 또 다른 단체에 10만 달러.... 이런 식으로 모든 단체에 공금을 지급하도록 로비를 벌였다. 공금을 받는 단체들에는 지역사회의 '유지'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있었다. 결국 이들 단체에 지원금을 보냄으로써 수천 명의 유지들로부터 호감을 얻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러셀 콘웰 박사도 유지에 포함되었다. 템플 대학과 사마리아 병원은 공익사업단체였는데, 운영 자금에 늘 허덕이고 있었다. 퀘이-펜로즈의 정책 덕분에 이들 두 단체는 공금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링컨 스테펀스는 그의 저서 [도시의 치부]에 실린 '필라델피아,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장에서 악명 높은 제5선거구에서 샘 맬러니의 주도하에 자행된 선거부정에 관해 소상히 언급하고 있다. 맬러니 일당은 투표인 수를 불릴 목적으로 마을 공동 묘지의 묘비에서 무작위로 이름을 추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치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부정 투표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신문에서 이들의 범행을 대서특필한 직후, 제5선거구라는 말은 정치적 부정을 가리키는 용어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워튼 스쿨 3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필라델피아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도시를 좀먹는 정치집단을 축출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 와중에 제5선거구의 일당들이 우리 학교 정치학 교수인 레오 S.로 박사를 폭행하는 사건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로 박사가 나를 불러 말했다. "이번 학기 정치학 과제물로 제5선거구의 실태를 다뤄보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샘 맬러니와 인터뷰를 한 끝에 필라델피아의 정계를 부정으로 물들인 제5선거구에 관한 보고서를 써 제출했다.
정치 개혁에 대한 관심에서 나는 플랭클린 스펜서 에드먼즈 선생의 서기 역할을 자원했다. 에드먼즈는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였는데, 내가 살던 지역구의 시의원 당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회의에 참석해 회의록을 기록하는 등, 그의 '두뇌집단' 일원으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했다. 필라델피아의 정치를 현장에서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나로서는 꽤나 관심이 가는 일이었다. 자유주의 성향을 지닌 에드먼즈 선생은 미국적 삶의 방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뒤엎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 차원의 현실정치를 처음으로 접하는 애송이 대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적 공바이 열기를 띠면서 개혁운동진영에서는 일군의 목회자들에게 깨끗한 정치를 위한 목회자위원회의 결성을 촉구했다. 러셀 콘웰 박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콘웰 박사가 목회자위원회에 합류하면서, 그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그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억나는 바가 없지만, 주일날 그가 그레이스 침례교회의 강단에 서서 한 말은 아직까지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위원회에서 자기 이름을 빼겠다고 하고,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도시들 가운데 가장 깨끗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창 피가 끓는 청년개혁가가 받았을 충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나는 그 길로 걸어나와 다시는 교회 문턱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그 어떤 종교조직과도 인연을 끊었다.
그 뒤, 내 나름대로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 나는 기독교 교회는 필라델피아 뿐만아니라 서구 문명 전체를 통틀어 반동과 부패의 온상이었고, 현재도 그렇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역시 권력구조에서 종교조직이 차지하는 반동적 역할을 강조해 줄 뿐이었다. 세속의 거물들과 교계의 거물들이 결탁하여, 민중의 눈을 가리고 착취와 강탈을 일삼을 뿐이었다.
이 사건은 내 청년 시절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일로 목회직은 내가 꿈꾸던 직업에서 배제되었고, 대신 교직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교직에 대한 인상이 나에게는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십대 중반에 이미 필라델피아 사회복지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고, 그레이스 침례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지도교사를 한 적도 있었다. 1903년 워튼 스쿨의 학부생으로 있을 때, 나는 템플 대학의 신학생들에게 사회학을 가르쳤다. 미래의 목회자들에게 앞으로 활동할 사회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게 하기 위해 신학대학 학장이 특별히 내린 결정이었다. 템플 대학의 신학생들은 사회 문제에 관한 한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머리 속에서는 어려운 신학논쟁이 들끓지만, 그들의 발은 땅을 딛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비슷한 나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인간사회가 존재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형성하는 데에서 경제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풍문으로만 전해듣고 있는 청년들에게 사회과학의 기초를 가르치는 것은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러한 교육체험은 나에게 커다란 행복이었다. 나는 학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지식을 전수하고, 그들의 창의력을 자극하는 세 가지 차원으로 교수행위를 바라보았다. 학생들 역시 나의 수업을 좋아하고 거기서 많은 것을 얻는 것 같았다. 워튼 스쿨을 졸업한 뒤, 나는 바로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사회학과 교육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이런 과정들이 교직을 나의 천직으로 선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교직을 선택한 이상, 말과 글로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려면 모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하고, 또 학문을 깊이있게 하려면 적어도 2개 국어 이상의 외국어 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에서 그리용 선생에게 배운 프랑스어 기초지식이 탄탄한 데다, 역시 그리용 선생이 프랑스의 스페인어 교과서를 수입해다 프랑스어로 가르치는 스페인어 강의도 들은 바 있었다. 대학 4년 동안 나는 외국어 실력을 갖추기 위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을 수강했다. 그리고 영문학과 전공 과목을 수강함으로써 모국어 구사력을 강화했다. 쉘링 교수와 웨이건트 교수 밑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게 나로서는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교실에서 여남은 명을 앉혀놓고 하건 커다란 강당에서 수많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하건, 사람들에게 다가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것을 납득시키느 문제였다. 이것을 위해서는 수줍음을 떨치고,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고, 자의식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붙들어 둘 만한 묘사와 분석, 설명, 결론 제시를 할 수 있어야 했다. 또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질문에 답변하는 자질, 간단 명료하고 합리적인 답변을 할 수 있는 자질도 필요했다. 수줍음과 자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템플대학의 밀러 교수가 가르치는 4년 코스 화술과정에 등록했다. 낮에는 워튼 스쿨에 다니고 야간을 이용하여 이 강의를 들었다. 이렇게 해서 1905년 6월, 나는 경제학과 수사학의 학사학위를 동시에 취득하였다.
이 같은 예비작업은 그후로 10여 년에 걸친 대학 강사생활과 반세기에 달하는 대중강연에서 나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나를 지도한 많은 스승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유익한 지도와 채찍에 대해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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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무엇을 가르칠지를 결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내일은 아무래도 조금 힘들거 같아요 모래 상큼하게 다시 와서 읽어드릴께요 히~ 이제부터가 재미있을거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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