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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로테스탄트와 청교도
프로테스탄트
영국의 종교개혁에서 보는 청교도는 그 신앙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로마카톨릭교회에서 나와 새로운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일컫는 것으로 ‘개신교(도)’, ‘신교(도)’를 지칭한다. 이 신교도의 등장이 있게 된 출발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에 의해 분출될 기운이 잠재되어 오다가 1517년에 있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있게 되며, 쯔빙글리에 이어 칼빈에 의해서 있게 되는 개혁교회에서 완성을 보게 되고, 이후 개혁교회의 계승자에 의해서 있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란 용어가 생겨났다. 프로테스탄트란 ‘항의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로마카톨릭교회에서 항의하는 항의문인 루터의 95개 조항에서 보는 교회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항의한 데서 시작하여, 1529년 독일에서 열린 스파이어 회의의 판결에 루터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저항함으로 루터와 그를 따르는 개혁자들을 ‘프로테스탄트(저항자)’라고 부름으로써 생긴, 로마가톨릭교회의 세력에 맞서 항거한 데서 유래한 말로,1) ‘항거’를 뜻하는 라틴어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에서 유래한다. 로마카톨릭교회에서 프로테스탄트는 교회를 개혁해 나간 종교개혁자가 아니라 로마카톨릭교회를 반대하고 저항하며 반란에 있어 나간 자들이므로 프로테스탄트는 그들의 시각에서는 저항하는 ‘반대자’요 ‘항거자(대적자)’요 ‘반란자’이다.
이처럼 로마카톨릭교회에 대항하여 교회를 개혁해 나가는 종교개혁 운동은 독일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서 시작하여2) 스위스의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프랑스의 칼빈(Jean Calvin, 1509-1564),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John Knox, 1513-1572) 등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어 독일, 스칸디나비아 제국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됐고, 이민자들을 통해 북아메리카까지 확산되면서 많은 국가에 영향을 끼치며 ‘개혁교회’(Reformed Church)를 세워나갔는데, (1)루터에 의해서는 독일에 ‘루터교회’가 세워졌으며, (2)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서는 스위스에 ‘개혁교회’가 세워졌습니다. (3)그리고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혁 신학과 신앙을 영향 받은 존 낙스(John Nnox)에 의해서는 스코틀랜드에 ‘(개혁)장로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의 흐름은 (1)하나는 루터주의 신학으로, (2)또 하나는 칼빈주의 신학으로 있게 되는데, (3)칼빈주의 신학에서는 다양한 프로테스탄트가 형성되었다. 이는 루터주의 신학은 국가교회의 체제에 의해서 통제되는 형성에 있었지만, 칼빈주의 신학은 개교회에 의한 말씀의 권위에 의해서 신학의 이해가 다양성을 띠고 형성되어가는 발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서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트는 (1)크게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구분에 있었으며, (2)영국에서 장로교회의 장로주의 체제를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청교도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그들의 모범적 교회관으로 삼고 영국교회를 장로주의 체제로 만들고자 하였다. 따라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에 이르기까지 보는 프로테스탄트의 주류는 칼빈주의 신학을 따르는 입장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로마카톨릭교회는 교회의 머리(수장)로 교황을 두고 있으며, 교황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 위에 있어 성경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 성경을 해석하는 교황의 권위가 앞선다. 이러한 교황은 로마카톨릭교회의 중심에 있으므로 교황에 비중을 두며 의례를 중시한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에 비중을 두고 성경의 권위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의 신앙에 더 많은 중점을 두며 의례를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로마카톨릭교회가 성직자와 신도의 신분상의 차이를 두는 것에 반해 프로테스탄트는 그 차이를 두지 않으며 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모토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빛 아래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신학적 전통이다. 이는 다섯 가지의 모토에서 보게 된다.
(1) 첫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그리고 ‘토타 스크립투라’(tota scriptura, ‘전체 성경으로’)라는 모토에서 본다. 여기서 ‘솔라’(sola)는 ‘하나의’ 또는 ‘유일한’을 뜻한다. 그리고 ‘스크립투라’(scriptura)는 ‘성경’이다. 해서, ‘하나의 성경’, 또는 ‘유일한 성경’을 뜻하는 것으로 ‘오직 성경’을 강조한다. 이 ‘솔라 스크립투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잘 말해주는 모토이기도 하면서 또한 종교개혁의 모토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에 있어오면서부터 계속하여 개혁교회가 신앙 하는 모토의 중심에 있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2) 둘째,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로’)이다. 여기서 ‘그라티아’(Gratia)는 ‘은혜’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를 뜻한다. 둘째 모토가 ‘솔라 그라티아’인 것은 오직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구원은 교회의 의식과 선행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이를 믿는 믿음에 있어야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3) 셋째,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로’)이다. ‘솔루스 크리스투스’에서 ‘크리스투스’는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실 뜻을 정하셨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그리고 다윗과 맺은 언약의 자손으로 오게 하시는 것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성육신이 있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며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다. 예수란 이름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심을 알리는 온 세상에 나타내신 유일한 이름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
(4) 넷째,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으로’)이다. 이 모토는 종교개혁운동의 주제이다. ‘솔라 피데’에서 ‘피데’는 ‘믿음’을 뜻한다. 이 모토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 오는 하나님의 의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교회가 ‘이신칭의’ 또는 ‘이신득의’를 강조하여 말하는 것은 그러한 까닭에서 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5) 다섯째,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에서 ‘데오’는 ‘하나님’을, ‘글로리아’는 ‘영광’을 뜻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경외심을 갖고 경배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대신에 나무나 돌로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형상을 본뜬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신우상을 배격하며 다른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롬 11:36).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 다섯 가지에서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로’),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는 종교개혁의 삼대정신이다. 개혁교회는 이 종교개혁의 삼대정신을 계승하며, 여기에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로’)와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를 더하여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의 성경해석과 설교 및 가르침에서는 이 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
청교도란 용어는 영국의 헨리 8세 때부터 있어온 국교회인 성공회의 역사에 의해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기에 등장하게 된 것이지만, 그렇게 청교도로 불린 청교도인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리는 ‘(개)신교’의 한 분파였다. 본래 프로테스탄트는 (1)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개혁에 있어 온 교회로 구교인 로마카톨릭교회와 구분되는 ‘프로테스탄트’, 곧 ‘신교’로 불리게 되며, 루터에 의한 ‘루터교회’와 칼빈에 의한 ‘개혁교회’를 통해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란 구별된 두 흐름에 있는 개혁교회의 특징에 있게 된다. (2)그리고 칼빈의 신학 사상을 계승한 칼빈주의자들에게서 한 뿌리이나 칼빈에 의한 ‘개혁교회’와 존 낙스에 의한 스코틀랜드에 세워진 ‘장로교회’로의 개혁파 구분이 있게 되었다. (3)그리고 원류(주류)의 개혁교회와는 성격의 차이가 나 서로 구별되는 프로테스탄트가 생기게 된다. ①장로주의를 교회정치 원리로 하는 장로교회와 ②감독주의를 교회정치 원리로 하는 영국국교회인 성공회, ③그리고 회중주의를 교회정치 원리로 하는 회중교회이다.
이러한 분류는 다음의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개혁의 과정을 겪는 것에서 있었다.
(1) 헨리 8세가 로마카톨릭교회와 단절하고 국왕을 수장으로 하여 국가와 함께 교회를 통치해 나가고자 하는 것에서 영국교회를 독립하여 국가교회로 삼으면서 교회정치 체제를 감독주의로 가져나가는 것에 영국 내에 있는 칼빈주의자인 프로테스탄트는 반구교반신교의 어정쩡한 모습을 띤 영국 교회의 개혁에 장로주의 체제에 의한 개혁교회의 신앙으로 해 나가고자 하는 저항에 있었다.
(2) 짧은 기간이지만 에드워드 6세의 교회 개혁을 거친다.3)
(3) 메리가 여왕이 되어 영국교회가 로마카톨릭교회로 회귀하면서는 영국국교회와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속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가져나갔는데,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서 스위스 취리히와 제네바, 스트라스부르크 등으로 망명하였고, 그 곳에서 신학을 배웠다. 특히 취리히는 쯔빙글리, 제네바는 칼빈이 있었던 곳이며,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언약 사상이 더 발전되고 보완된 곳이다.
(4) 우리가 일반적으로 ‘청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본 뿌리가 제네바로 망명을 갔던 자들이기에 칼빈의 신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는 언약 사상이 있었다.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등극하자 그들은 제네바에서 돌아와 영국교회에서 열성적으로 로마의 잔재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는 로마카톨릭교회가 영국국교회에 대항하는 것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단절하고 영국교회를 국교회로 존재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국교회를 무너뜨리고 교황의 지배권을 회복시키려고 한 것에 반해서 영국 내에 있는 청교도로의 모습을 띠게 되는 프로테스탄트는 국교회로 있게 된 영국교회가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제대로 된 개혁에 있지를 못하다고 보았다. 이에 그들은 국교회를 자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교회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5)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 교회의 영적 ․ 윤리적인 문제들이 심각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에서 그 필요성을 더욱 느꼈다. 성직자들은 성도들을 목회하지 않았다. 이러한 원인을 청교도로 불리게 되는 칼빈주의자인 프로테스탄트는 교회정치제도의 문제라 생각했고, 실질적인 교회 개혁이 이루어 져야 성도들의 영적 ․ 윤리적 문제도 개혁되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칼빈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들이 시도하고자 한 교회 개혁은 칼빈주의에 의한 교회로서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서 시도해서 성공한 것과 같은 완전한 칼빈주의 제도가 정착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교 제도를 폐지하고 총회와 교회 당회에 의한 장로주의 정치로 전환하며, 다른 지역의 개혁 공동체에서 시행되는 것과 더 합치되는 예배와 더 많은 평신도 권한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과거의 관행에서 나온 일체의 제의와 장식품과 예식, 성물 사용을 금지하고, 과거의 전례들을 금지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른 영국교회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에 의해서 급물살을 탄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치리 문서」를 올린다. 카트라이트는 독일 개혁교회의 중심인 하이델베르크와 제네바에서 실제로 ‘개혁된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장로주의 체제의 정치가 영국 교회가 채택해야 할 정치제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를 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들을 박해함으로써 영국 내의 프로테스탄트가 개혁하려던 교회 정치제도 개혁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청교도로 불리게 되는 칼빈주의자 프로테스탄트가 원했던 것은 영국 교회의 정치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이상형은 장로주의에 의한 정치제도였다. 그러기에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망명지로 가 있던 그들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를 맞이해서 다시 영국국교회로 돌아와서는 감독주의 체제에 의한 구교의 답습에 있는 교회를 장로주의 체제로 바꾸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시도와는 달리 왕권 강화에 있고자 한 여왕은 감독주의 체제4)를 확고히 하며 장로주의 체제5)에 의한 개혁교회의 신앙을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것에서 청교도의 등장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영국에서의 청교도는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에 선 프로테스탄트가 로마카톨릭교회가 아니면서도 로마카톨릭교회적이며 로마카톨릭교회에 맞서면서도 비프로테스탄트의 성격을 띤 영국국교회에 결연히 맞서는 것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간 신앙인이었다.
하지만 영국교회에서의 프로테스탄트는 영국교회를 칼빈주의에 의한 장로주의 체제의 개혁교회를 세워나가는 데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로마카톨릭교회도 아닌 또한 프로테스탄트도 아닌 전혀 다른 반로마카톨릭적이며 반프로테스탄트적인 국교회인 성공회를 유지해 나감으로써 영국교회에는 프로테스탄트의 한 줄기에서 성격이 다른 네 지류로 흐르는 청교도가 형성되었다. 이제 다양한 성격으로 분파된 청교도를 살펴보는 것으로 들어갈 것이다.
다양한 성격으로 분파된 청교도
영국 내의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 시작된 청교도는 영국국교회에 대항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에 의해 이전의 청교도와는 성격이 다른 청교도의 모습을 띤다. 정성구 교수6)는 청교도는 (1)장로교 청교도 (2)감리교 청교도 (3)침례교 청교도 (4)회중교 청교도 (5)성공회 청교도 다섯 가지 계열이 있다고 보았다, 이 다섯 가지 계열에서 장로교 청교도가 있는데, 칼빈주의 신학 사상에 의한 장로주의를 추구하는 청교도로 다른 네 가지 계열의 청교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먼저 성공회 청교도는 영국교회가 본래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신앙에 있는 교회인 것을 로마카톨릭교회와 단절하고 독립하여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로 있게 될 때 이 안에 남아 있는 로마카톨릭교회를 개혁하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있는 자들이 장로주의 또는 회중주의 등 교회 정치체제에 대한 자신들의 이상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공회란 새로운 교도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국교회 밖에 있는 청교도의 특징은 교회 정치체제가 회중주의를 추구해 나가기 때문에 회중교회를 세우는 회중교 청교도로 있기도 하고, 회중주의의 청교도는 세례의 신학적 견해에 대해 (재)침례의 입장에 있어 침례교회를 세워나가는 침례교 청교도로 있기도 하며, 회중주의 청교도에 의해서 감리교회를 세워나감이 있었으므로 감리교 청교도도 있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교파에 의한 청교도의 계열은 장로교 청교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회중주의를 추구하는 교파이다.
한편, 정성구 교수는 미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칼빈주의에 있는 유럽에 있는 기독교가 여러 가지 계열이 있으니 칼빈이 개혁하고 난 다음에 (1)화란(네덜란드)에 돌트 총회를 통해서 개혁교회가 크게 일어났으며 (2)프랑스에는 스위스에서 칼빈이 세운 제네바아카데미를 통해 신학 교육을 받은 자들이 돌아와 프랑스 교회를 개혁해 나간 위그노파들이 큰 고난을 받으면서 세상에 흩어졌고 (3)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가 개혁 장로교회를 세웠으며 (4)영국으로 가서 청교도로 있게 되는 꽃을 피우고 (5)1620년부터 1700년 어간 미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청교도로 다섯 계열이 들어왔으나 18세기와 19세기에 활개 친 자유주의자들로 인해 거의 다 타락을 하여 자유주의로 흘러 가 흩어졌는데, 두 계열의 교회가 그래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돌트 신경의 진리를 계속 파수한 화란 개혁교회 성도들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이다. 이들에 의해서 오늘의 미국 장로교회가 이루어졌는데, 다행히도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이 자유주의 신학으로 물들어 타락해 가던 시대에 진리의 파수하며 신앙을 지켜 온 화란의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가 들어옴으로써 신앙의 계열로 보면 카버넌트의 전통을 이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청교도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는 영국국교회인 성공회에 의해서 있게 된 청교도는 특징을 달리하여 분류가 되는 여러 종류의 분파가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살펴본다. 정이철 목사7)에 의하면 (1)분리파(분리주의자) 청교도 (2)비분리파(비분리주의자) 청교도 (3)국교회파(국교회주의자) 청교도 (4)독립파(독립주의자) 청교도 넷으로 분류된다.
(1) 하나는 ‘분리파 청교도’(분리주의자 청교도, Separatist Puritans)이다. 이들은 ‘비국교도 청교도’라고도 불린다. 이 청교도는 (a)영국국교회 안에서는 장로주의 체제의 교회로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b)감독주의 체제에 있는 영국국교회는 여전히 로마카톨릭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 영국국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영국국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용납되지 않아 견딜 수 없어했다. 그러기에 그들 대부분은 성직을 박탈당하거나 스스로 그만두고 물러났다. (c)그들은 영국국교회 밖에서 자신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그들 중 소수인 일부는 영국국교회를 탈퇴하여 그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영국장로교회를 세웠다. (d)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이 네덜란드 난민이었던 재세례파와 열광적 개혁주의자들, 반율법주의자들과 합류를 하였다. 그들은 시민 불복종을 설교하였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는 엄중한 조치가 취해졌으며 일부는 화형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분리주의자인 분리파로 불리는 이 청교도 중에 영국국교회와는 전혀 새로운, 그렇다고 영국장로교회도 아닌 전혀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세울 것을 시도한 이가 있었다. 그가 로버트 브라운으로, 분리파 청교도가 시도해 나간 회중주의 교회, 곧 회중교회를 세웠다.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1550~1633)은 로버트 해리슨과 함께 1581년에 영국 최초의 회중 정치제도의 교회인 회중교회를 세웠다.8) 이들에게 이러한 사상을 갖게 한 것은 바로 ‘교회언약’이다. ‘교회언약’은 개인 언약의 확장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스스로 언약관계를 맺은 자들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하나의 교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언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이들은 최초로 ‘교회언약’이라는 서약 절차를 거쳐 교회를 세워 교회서약에 따라 교회 직분자들을 세웠다. 로버트 브라운의 지도 아래 그들은 한 무리로 연합하여 주님께 헌신하며 주님의 율법과 통치를 지키고 성도끼리 서로 교제하며 무질서와 악을 금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돕고 순종하겠다는 것 등을 서약하였다. 이들이 가진 교회관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의 교제 공동체를 형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들어가고 세례를 통해 그 체결한 언약을 확증함으로써 한 무리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의하여 분리파 청교도에게서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의한 그리스도의 피로 약정되는 하나님의 언약 체결 외에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언약의 체결을 가져나가면서 그 교회의 순결을 가져나가는 것에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는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브라운은 “하나님의 백성은 믿는 자들의 무리로서 하나님과 자발적 언약을 맺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들어가며 하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당신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한다. 이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청교도가 어떤 신앙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며, 또한 이후의 청교도가 지녀온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함께 잘 말해주는 것이 된다. 청교도 신앙에서 유난히 엄격함과 철저함이 율법주의 성격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루고자 1607년에 상대적으로 관용한 네덜란드로 갔으며, 1609년에는 레이던에 정착하여 ‘라이덴 잉글랜드 분리파 교회’(English separatist church at Leiden)를 세웠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과 적응되지 못함으로 1620년에는 다시 더 나은 곳을 찾아가고자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를 지도자로 하여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의 사우샘프턴에서 102명이 메이플라워(Mayfpower)호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출발하여 미국 메사추세츠9) 남동부에 위치한 플리머스(Plymouth)에 자리를 잡고 겨울을 보냈는데 인원 중 절반이 사망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 메이플라워 맹약(Mayfpower Compact)10)을 체결하였으며 서약자는 41명이었으며 이들 중 35명이 회중교회 청교도이다. 이렇게 플리머스에 정착한 분리주의자 청교도를 ‘플리머스 분리주의자’(Plymouth separatist)라고 한다.11) 이후 1630년부터 1643년에 걸쳐 있어온 영국 출신의 이주민들에 의한 청교도의 대이동은 대략 20,000명에 이른다.
(2) 그리고 또 하나는 ‘비분리파 청교도’(비분리주의자 청교도, Conformist Puritans)이다. 이 청교도는 분리파 청교도로 불리는 분리주의자 청교도와는 달리 영국국교회에 그대로 남아 국교회의 목회자 신분도 유지하면서 충돌 없이 조용히 변화를 가져와 서서히 장로주의 체제에 의한 영국국교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장로파 청교도’이다. 비분리주의자 청교도가 이처럼 영국국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교회를 개혁할 뜻을 가진 것은 비록 로마카톨릭교회의 잔재가 영국국교회에 남아있더라도 교회의 표지(慓識)12)가 남아있다면 분리는 할 수 없다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분리주의자 청교도를 이끈 지도자는 존 윈스롭(John Winthrop)이었다. 하지만 비분리주의자 청교도의 의도대로 영국국교회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시기 영국 정부와 대주교 윌리암 라우드(William Laud)가 청교도를 강하게 탄압했고, 청교도의 모든 양상을 뿌리 채 뽑는 청교도 말살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악화되는 경제사정에 시달리던 많은 청교도는 견디지 못하고 이들 또한 뉴잉글랜드로 향하였으며, 새로운 땅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것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떠나는 배에서 존 윈스롭이 설교한 ‘기독교적 사랑의 한 모형’(A Model of Christian Charity)에서 언급하고 있는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13)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도시 건설에 있는 공동체의 특징은 기독교 사랑에 기초를 둔 신앙의 이상향이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그 몸을 매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는 것은 곧 경건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경건한 사회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칭찬거리가 되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들이 계속 정착촌을 세워 갈 때 하나님은 이를 뉴잉글랜드에 주신 축복으로 만드실 것이며, 우리는 언덕 위의 도시기 되어 만인의 눈에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경건한 사회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 마지막 시대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청교도 운동에 의한 신앙이 분리주의자 청교도에서 보는 율법주의적인 것에서 비분리주의자 청교도에서는 경건주의적인 특성을 보게 된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둘이 혼재하며 혼합되는 특성으로 발전하는데, 율법 준수와 경건한 생활의 유지가 경제적 성공을 이루는 축복의 길이요 관문인 것으로 여겼다. 이렇게 존 윈스롭(John Winthrop)을 지도자로 하여 오늘의 보스턴을 건설한 청교도가 비분리주의자 청교도이다.
(3) 그런데 영국국교회 내에서 교회 개혁을 꾀해 나간 청교도에는 비분리파 청교도인 ‘장로파 청교도’외에도 ‘국교회파 청교도’가 있다. 이들은 영국국교회에 남아 성직자 신분을 유지하는 길을 택한 청교도들 가운데 소수로 매우 특별한 노선을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전과 같이 장로주의 체제에 의한 교회를 세우는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들은 영국국교회의 제도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았으며 여왕과 감독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고자 하였다. 대신에 영국국교회의 신자들이 스스로 자기를 개혁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이 청교도는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에 의해서 펼쳐나간 청교도이다. 퍼킨스는 영국국교회에 '행위언약'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율법을 순종하는 행위에 있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는 언약 개념을 만든 것이다. 그럼으로써 첫 사람 아담부터 모든 사람은 노력과 행위로 자기 구원의 자격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학적 패러다임을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하나님께 반응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사상이 사람들에게 주입되니, 영국국교회 감독들의 그늘에서 안주하던 사람들이 달라졌다. 독립적이고,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신앙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자세가 확산되어 1640년대에 잉글랜드의 일반 시민들이 국교회를 강요하면서 독재를 행하는 국왕 찰스 1세에게 반기를 들고 시민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국교회 청교도들로부터 확산된 사상이 아니었으면 국민들이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혁명은 불가능했다.
(4) 영국국교회 내에서는 ‘독립파 청교도’도 있다. 네덜란드에서 분리파 청교도 개혁운동을 하던 헨리 제이콥스라는 청교도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영국국교회로 복귀하여 국교회 안에 청교도 교회를 세워나가는 운동을 했다. 그 청교도는 국교회의 성직자이면서 국교회 감독의 통치를 받지 않고 스스로 통치하는 분리파들이 시작한 회중교회를 국교회 안에 세웠으며, 윌리암 퍼킨스의 신학을 따른 것에서 비분리자 청교도인 ‘장로파 청교도’와 다르며 또한 ‘국교회 청교도’와도 성격이 달랐다. 그러나 국교회 내에 있은 독립파와 국교회 청교도들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합해졌고, 이들이 1640년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회중주의 정치와 행위언약 사상 등을 주장하는 독립파로 활동하였다. (*)
* 본 글에서 참고문헌 및 자료의 각주는 생략하였습니다.
* * 다음 세 번째 글은 3. '청교도 신앙이 끼친 긍정적인 장,단점의 영향과 바른 신앙을 지향해 나가는 성경 이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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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의식과 선행에 의한 구원관을 비롯한 갖가지의 비성경적 신앙을 가진 로마카톨릭교회에 맞서 루터는 1517년 95개조의 항의문으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든 이후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얻게 된다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을 외쳤으며, 이 믿음은 신자들이 직접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있게 된다며 “오직 성경에 의한 믿음”을 말함으로써 교황에 권위를 두는 로마카톨릭교회와는 달리 성경에 권위를 두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에서 개최된 신성 로마제국의 의회에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월 17일에 도착하여 출석하였으며 4월 19일에 의회 앞에서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말하며 개혁에 대한 그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확고히 하였다. 이런 루터에 대해 황제 칼 5세는 의회 마지막 날인 1521년 5월 25일에 루터를 악명 높은 이단으로 규정하며 루터의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은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내용을 담은 ‘보름스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한 신성 로마제국의 16선제후(신성 로마 황제<독일 왕> 선출에 참여할 권리를 지닌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곧 봉건영주)들과 14자유도시들이 향후 종교개혁을 불허하는 스파이어 회의의 판결에 항의해 ‘반대서’를 발표한 사건에서 ‘저항자’(항거자)란 뜻의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는데, 이 용어는 이후 쯔빙글리,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와 그들에 의해 세워져 시작된 개혁교회의 신앙을 따르는 ‘(개)신교도’를 한데 아우르러 총칭하여 부르는 용어가 되었다.
2)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두어 종교개혁시대를 열기 전에도 종교개혁을 시도한 자들이 있었다. 스위스 콘스탄츠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한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72-1415), 1415년 콘스탄틴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고 사후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불태워진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7), 성직자가 아닌 신도로서 설교를 하는 까닭에 이단으로 정죄받은 프랑스의 페트루스 발두스(Petrus Waldus, ?-1197), 종교재판후 화형 당한 이탈리아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Hieronymus Savonarola, 1452-1498). 이 4명은 루터보다 100여년전, 혹은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중세 로마카톨릭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며 개혁을 시도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처형당하거나 박해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행한 종교개혁의 시도는 훗날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두는 밑거름이었다.
3) 헨리 8세와 그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세이머(Jane Seymeour) 사이에 태어나 1547년 9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에드워드 6세는 프로테스탄트인 외삼촌 소머셋 공작(Duke of Somerset)과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렌머, 노섬벌랜드의 섭정으로 영국교회를 개혁해 나간다. 헨리의 수정법안들을 삭제하고, 6개 신조법령을 철회하였으며, 이단법을 파기함으로써 신앙의 자유에 있게 하고, 우상숭배의 행위인 모든 성상을 파괴시키고 신앙의 미신적인 행위를 금하였고, 예배의 의식을 단순화하고 예배 시에 복음서와 사도서신을 영어로 낭독하게 하였으며, 신도에게도 이종성찬(떡과 포도주)을 허용하였으며, 새로운 연보법(chantries act)을 통과시켜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함으로써 카롤릭교회의 재정을 압박하였고, 신부들의 결혼을 허용하였다. 또한 ‘제1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1549)를 작성하였으며, 개정판 제2 기도서(1552)에서는 ‘제단’ (altar)이란 말 대신에 ‘상’(table), ‘신부’(priest)란 말 대신에 ‘성직자’ 또는 ‘목사’(minister)로 고쳤으며,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으로 주일성수를 명령하여 엄격히 지키게 하였다. 또한 성경의 출판과 판매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1553년에 42개신조(the Forty-two Articles of Reoigion)를 작성하여 영국교회의 교리가 되는 공식 신조로 삼았다. 에드워드 6세의 이러한 교회 개혁은 개혁주의 노선을 따른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로마카톨릭교회적인 요소를 모두 배제시킨 것은 아닌 영국교회만의 독특한 성격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조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터 마터(Peter Martyr), 오키노(Ochino), 마틴 부써(Martin Bucer)등이 영국으로 망명해 왔으며, 영국교회는 이들을 초청하여 개혁신학을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4) 영국국교회의 정치체제는 왕을 수장으로 한 ‘감독주의’이다. 이것은 왕을 국가와 교회의 수장으로 하여, 왕 밑에 대주교(Archibishop)와 감독(Bishop)을 두어 다스리고, 감독들은 성직자 임명 등의 절대적 권위를 가진 완전한 계급주의 교회 정치체제이다.
5) 프로테스탄트의 ‘장로주의’는 회중인 성도에 의해서 회중의 멤버 중에서 장로를 선출하고, 선출된 장로는 장로들의 모임인 장로회(당회)를 구성하는데, 장로회를 구성하는 장로는 교훈장로(목사)와 치리장로로 구분된다. 이러한 장로의 관계는 수직에 의한 상하의 계급 관계가 아닌 평등하니 동등하다. 그리고 장로와 성도의 관계 또한 상하의 수직에 의한 상하의 계급 관계가 아닌 평등한 동등 관계이다.
6) 총신대학교 학장 및 총장 역임. 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7) 미국 미시간 주 남동부, 휴런 강 연안에 위치한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목사, 바른믿음대표.
8) (1)회중교회에 대한 다양한 표현의 용어 : 일본에서는 회중교회를 ‘조합교회’(組合敎會)라고 번역한다. 회중교회는 또한 모든 사제권 제도의 권위로부터의 자유,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 개인적 판단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 자유는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 권위와 연합된 자유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자들이 모여 구성한 교회야말로 정치적으로 자유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자유교회’라고도 한다. (2)회중교회를 세운 회중파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 회중교회를 세운 회중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세 부류 중 하나였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필립 나이(Philip Nye, 1595-1672), 예레미야 버로우(Jeremiah Burroughs, 1600-1646), 윌리엄 브리지(William Bridge, 1600-1670), 시드락 심슨(Sydrach Simpson, 1600-1655) 등 5명이었다. 비록 참석자의 숫자는 적었으나 올리버 크롬웰의 지지를 받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교회정치와 관련한 회의에서는 장로회주의자들과 자주 충돌했다. 회중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동의했다가 나중에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 1658)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3) 회중교회의 회중주의자와 침례교회 : 회중주의는 특히 침례교회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데, 1611년 혹은 1612년에 토머스 헬위즈(Thomas Helwys), 존 머튼(John Murton)이 영국 런던에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침례교회는 회중교회보다 더욱 급진적이어서 회중정치 외에도 침례와 종교의 자유 및 정교분리룰 주장했다. 이후 침례교는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의 설교로 크게 부흥한다. 미국에서는 노예제도 문제로 1845년에 남침례교가 분열하였으나, 미국 내지 선교에 진력하여 북서쪽으로 확장하여 지금은 로마가톨릭에 이어 미국 최대 교파다. (4)회중교회의 교회정치 체제인 회중정치를 채태한 다양한 교파 : 회중교회의 회중정치는 회중교회 외에도 침례교회, 재침례교회(아나뱁티스트), 형제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퀘이커교, 유니테리언 등이 회중정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의 특색을 보면 본래의 칼빈주의자들에서 벗어나 교회 정치체제만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심지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성을 띠는 것으로 바뀌었다.(5)회중주의자의 주요인물 :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이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존 윈스롭(John Winthrop),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외에도 유명한 대표적 청교도 인물로 존 오웬(John Owen, 1616-1683년),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등이 있다.
9)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미국 북동부지역에 위치한 6주(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의 하나.
10)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와 같은 이름으로 쓰여 있는 우리들, 하 나님이 은총에 의하여 영국과 프랑스와 아일랜드의 경이로운 최고 통 치자이신 우리 국광이요 신앙의 수호자인 제임스 왕의 충성스러운 신 하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증진 그리고 우리들의 국왕 및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북부 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건립하려고 항해를 시도하였던 바, 본 증서를 통하여 우리들의 보다 더 바람직한 질서 수립과 보존 그리고 전술된 목적들의 촉진을 위하여 엄숙하게 상호간에 하나님과 서로의 면전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시민적 정치 단체로 결속한다. 이에 바탕하여 식민지의 일반적 복지를 위하여 가장 적합하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정의롭고 공평한 법률과 법령과 결정 그리고 관직을 수시로 제정하고 구성하고 조직하기로 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최고 통치자 제임스 왕의 영국 과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의 치세 18년; 그리고 기원후 1620년 11월 11일 코드 캡에서 우리들의 이름으로 여기 서명한다.”
11) 플리머스 분리주의자 청교도들의 관심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속에서 경제적 번성과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며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데 있었다. 그들은 ‘메이플라워 서약’을 맺고 자유가 최대한도로 보장되는 사회를 신대륙에 건설하고자 했다. 분리주의자들이 미국에 남긴 영향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 사상은 무질서와 방탕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양심을 가치 판단 기준으로 두면서 절대적 의미의 진리가 사라지고 상대적인 것이 진리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에는 인간의 죄성을 간과하는 잘못이 있었다.
12) 참된 교회의 표지로 칼빈은 (1)하나님 말씀의 참된 선포, (2)성례의 바른 시행을 주장했다. 여기에 마틴 부써는 (3)교회의 신실한 권징을 추가하였다.
13)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잇는 하나의 몸과 같습니다.…이 몸의 각 부분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그 중의 하나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부분도 함께 고통을 당하고 영광을 받으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기뻐합니다.…우리는 ‘언덕 위에 세워진 하나의 도성’(a city upon a hill)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우리들에게 쏠려 잇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약속을 잘못 이행하면…온 세계에 하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이 조항들의 엄수를 게을리하고 하나님을 속이고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재물을 위한 큰 사업들을 추구함으로 우리의 육욕적인 목적들을 추진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 대하여 진노를 발하사 그런 사람에게 보복하심으로 우리에게 언약의 파기에 대한 대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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