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입니다
우리는 갈 곳이 없습니다!
형님 !
우리는 진주를 거점으로 서부경남에서 천여 년을 살아 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 말기
진주를 거점으로 민란이 일어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연동에는
150여 년 전에 정착한 듯합니다.
고조부모님께서 연동에 처음 정착하시고,
증조부모님께서 씨를 많이 뿌리시고
춘포 할아버지께서
각고의 노력과 지혜로움으로
영남 유림의 중추적 역할을 하시매
경상도를 움직이는 양반(지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으세 서
우리는 중시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중시조의 아내 우리 김악이 할머니와 증조모님께서
평소
예기치 않고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이 추석이 지나고 추수가 끝나기 무섭게
겨우내 좌반을 튀기고 강밥과 유과와 엿등을 만들고
감을 감나무위에 올려놓고 가마니와 섬으로 덮어 홍시를 만들어 두었으며
술을 담아 큰방에 이불을 둘러 쒸워 놓아야 했고,
무엇이든 맛난 것들은 먹지 않고 남겨두어야 했습니다.
봉제사 접빈객이 우리 모두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고 준비였습니다.
지금도
"손님 주끼다 그거 먹으모 안 된다"고 하시는
어머님 목소리가 귀에 쟁쟁 합니다
제사를 올리면
은혜를 입은 이웃들도 찾아오시고
고모들은 며칠 전부터 오세서 시장도 봐주시고 제물 준비도 해주시며
큰일을 도우셨지요.
집에 있는 가족들은 무우밥을 해 드시면서도
당대 최고의 덕목인
봉제사 접빈객을 잘하시어
고조부모님과 증조부모님과 조부모님 아버님 어머님의 4대에 걸친 100년 이상의 희생으로
우리는 반상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증조부님(감바 어른)은 남원 진주 대구에 이르는 서부 경남에서 제일로 믿고 신용 할 수 있고 분명한 분이 셌고
증조모님(감바띠)은 30명이 넘는 여성(연동 가까운 일가에 딸이 20여명이고 며느리 식모 합하면 30명이 넘었다고 함)들을 총 지휘하시고 엄격과 자애로 분명하시고 작은할머니도 계셨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과 봉사가 삼가현감에게도 알려져 연동 동네 입구에 효열비가 있음.
조부님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한번 들은 것은 잊어먹지 않으며 통역을 할 정도로 언어에 밝았으며, 사리가 분명하고 지혜로워 경상도의 모든 서원에서 초헌관으로 모시고 싶어 하고, 종친회장, 향교전교, 문화재 보수 연상재 설립 가회중학교 설립 등을 하셨으며 스승 중재어른을 모시고 경북의 도산서원 하회마을 등을 여행하시고 서울 유도회도 관여하시어 전국의 덕망 있는 친구들과 만년에 동성회를 만들고 청원정를 해인사 홍유동 입구에 지었으며, 손자들도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몽치미를 던지시고 늦잠 자는 이에게 세숫대야로 물을 퍼붓는 등 불 같은 성미로 얼굴 전체를 떨며 화를 내시지만, 어른이 게실 때에는 아무리 자식들이 잘 못해도 화를 내는 일이 없었으니 나도 못아래 여덜마지기(진주숙부님 논인듯) 논문서로 연을 만들어 혼이 났지만 알집할매 등 뒤에 붙어 벌을 면 한 적이 있음.
조모님 어릴 때부터 여성 가정교육을 잘 받으시어 바느질 음식등 집안의 큰일을 잘 치루었으며 큰 손자 경수를 극히 사랑했음.
아버님 47년 6월을 교직에 게시며 수만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시고 덕과 신의와 사명감으로 집에 큰제사가 있는 날도 출근 하였으며 우리 형제들도 아버님의 습성을 받아 남에게는 잘해주고 가족에게는 잘해주지 못하는 버릇이 있음.
어머님 집안 30십여 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제각기 취미(홍시 좋아하시는 분, 단술 좋아하시는 분, 술 좋아하시는 분등)를 꿰뚫어 알고 게시며 맞춤형 친절을 베푸시고 한밭산소 석물, 사저미산소 석물시 하루 세 번 이상 머리에 음식을 못 일어 날 만큼 이시고 날랐으며 만논매기 열 마지기 타작등 너무 많은 일을 하시고 돌아가시매 다들 일에 치여 일찍 돌아가셌다고도 하기도 하며
어록을 남기셨지만
내 죽으모 제사지내 줄 손자라고
제일 좋아하시고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께서도
제사 지낼 때 큰 고기 올려 줄 것이라고
아버님과
형님과
동걸이에게는 사랑을 더 많이 주셨습니다.
아버님은
초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증조모님께서 아예 업고 다니셨고
형님은 !
웃집감나무에 올려놓았던 감홍시하나
오징어 하나 갈치구이 하나라도 더 받아먹었고,
동걸이는 어머님께서
손수 깎으신 곳감하나 돼지고기 한 점
아이스크림 하나라도 더받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독자인 조부님은 다 받으셨고
가풍을 이어갈 장손인 아버님께서 그의 모두를 받으시고
또 종손인
형님께서 상속을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윗때 형제 7남매중 여섯 분
우리형제 형님을 제외한 다섯 명은
그것이 시루에 맞는 관습적으로 당연 한 것으로 받아 드리며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를 전부 형님께 드렸습니다.
말은 쉽지만 2013년을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보기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그것은
할아버지
아버님처럼
가문을 주축으로
천년 제사를 모시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감사하며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종손의 소임과 함께 주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정경수 형님 !
아버님께서
저세상으로 가시기 전에 아셨는지
변화하는 형님을 보시고
진주장에 가세서 도포를 사다가 모든 남자들에게 입게 하시고,
여인들도 개량 한복이 아닌 전통 한복으로 입게 하시고 ,
중요한 선산과 집은 죽오 종회를 만들어 상속 하셨지요.
종교의 자유는 말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제사만큼은 옛날처럼 형님께서 모시지요.
우리는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님 어머님 게실 때처럼
사이좋게
제사를 모시고
화투도 치고,
윷도 놀고
같이 운동도하고
구경도 같이하며
춘포 후손들이 함께 즐거운 삶을 살도록 부탁드립니다.
우리 후대는
그들에게 맞기고
연동에서 태어난
우리들만큼은
추석에 같이 모여
제사를 모시지요.
아버님 어머님 먼저 가시고
이제는 내나이 만큼 58년 동안
형님의 제일 측근에서 산사람으로
부탁드립니다.
형님 제사를
옛날처럼 모시지요
추석 전에는 아버님 제사 !
추석 !
추석 후에는 어머님제사 !
갈 곳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