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집시(Gipsy)와 보헤미안(Bohemian)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집시들이지만 그들의 예술만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들의 활동 무대인 술집을 중심으로 서점, 화랑, 살롱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의 규범과 통제를 벗어난 자유로운 예술 활동으로 예술가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의 공연 중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 중의 하나가 집시의 음악과 무용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플라멩코(Flamenco)’ 공연이다.
14세기부터 발전한 플라멩코는 집시, 안달루시아인, 아랍인, 유대계 스페인인의 민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19세기에 들어와 집시들이 직업적으로 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면서 플라멩코가 집시 음악과 춤의 대명사가 되었다.
보통 기타 음악(Toque)과 즉흥 춤(Baile)을 수반하는 노래(Cante)로 구성되며, 심오하고 장중하며 비장감을 동반하는데 죽음과 번뇌, 종교 등을 주요 테마로 하는 것이 정통 플라멩코이다.
중간조(中間調)의 플라멩코는 덜 심오(深奧)하나 음악에 동양적 색조가 가미되는 경우가 많고, 경쾌한 플라멩코는 사랑, 시골의 전원생활, 일상의 즐거움 등을 소재로 한다고 한다.
독무(獨舞)로, 혹은 군무(群舞)로 공연되는 이 플라멩코에서 남성들은 발끝과 뒤꿈치로 탁탁 소리를 내는 등 복잡하게 펼쳐지고 여성들은 발놀림보다는 손과 전신의 아름다움 표현에 치중한다.
공연을 보노라면 복잡한 리듬의 손뼉 치기, 손가락 튕기기(Finger Flick), 추임새가 수반되기도 하며, 종종 캐스터네츠도 등장한다. 이 플라멩코 공연은 유네스코에서 세계 인류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부르는데 보헤미아(Bohemia) 지방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집시와 관련된 음악들을 간추려보면,
헝가리(Hungary) 작곡가 리스트(Liszt)의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 스페인(Spain) 작곡가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의 바이올린 독주곡 ‘찌고이너바이젠(Zigeunerweisen)’, 독일(獨逸) 브람스(Brahms)의 ‘헝가리 무곡(Hungarian Dance)’, 체코(Czech) 드보르작(Dvořák)의 ‘슬라브 무곡(Slavonic Dances)’, 이탈리아(Italy) 푸치니(Puccini) 오페라 ‘라 보엠(La Boheme)’....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음악들이다.
1975년 영국 출신 록밴드 퀸(Rock Band Queen)이 발표한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도 있고, 불꽃 같은 정열의 여인 카르멘의 사랑을 다룬 오페라 ‘카르멘(Carmen)’은 프랑스 작곡가 비제(Bizet)가 남긴 불후의 명작으로 주인공이 집시 여인 카르멘이다. 보엠(Boheme)은 프랑스어로 ‘보헤미아인’ 즉, 집시처럼 방탕한 습관, 방랑자, 불량배 등 사람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던 말이라고 한다.
<정통 플라멩코(Flamenco) 공연 관람>
세비야(Sevilla)에서 관람한 정통 플라멩코
나는 2019년 9월, 20여 일간의 스페인 배낭여행 중 들른 곳이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의 중심도시인 세비야(Sevilla)였는데 이곳은 여러 가지 볼거리와 역사적인 명소들이 많지만, 집시 예술의 총화(總和)라 할 수 있는 플라멩코(Flamenco)의 발상지(發祥地)이기도 하다.
시내 관광 명소들을 둘러본 후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주인에게 정통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곳을 물어보았더니 가까운 곳에 정통 플라멩코 공연장이 있다며 약도를 그려주는데 ‘Casa de la Memoria(추억의 집)’으로, 저녁 7시 30분 공연이란다. 길을 물어가며 골목길을 헤매다 공연장에 도착했는데 시계를 보니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공연은 조그만 무대 앞에 3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관람석이 있는 조촐한 공연장인데 이미 발 들여 놓을 틈조차 없이 관객들이 들이차 있다. 그러나 용케도 가운데쯤에 빈 좌석이 보여서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곧바로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완전히 플라멩코의 춤과 음악에 빠져들고 말았다.
공연하는 예술인은 딱 4명으로 처음에는 무대와 출연자 인원을 보고 조금 실망도 했었는데...
공연이 시작되자 완전히 최정상급 기능보유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타리스트(Guitarist)와 노래하는 가수(Cante)가 각 1명, 무용수는 남, 여 각 1명으로 모두 네 명뿐인데도 완전히 청중을 압도한다. 화려한 의상도 아니고, 과도한 몸짓도 아닌, 절제된 동작과 춤, 노래, 화려한 기타 연주가 완벽한 앙상블(Ensemble)을 이루어 공연하는 내내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가슴을 쥐어뜯는, 피를 토하는 듯 비장한 어조의 노래, 온몸이 부서질 듯 강렬하면서도 절제된 동작의 몸짓, 현란한 발 구르기와 손가락 튕기기(Finger Flicks), 캐스터네츠, 그리고 리드미컬한 박수, 거기에 신들린 듯 얹어지는 현란한 기타선율과의 완벽한 조화는 청중의 숨을 멈추게 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약 1시간 30분 정도의 공연이 끝나자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멈출 줄 모른다. 공연 중에는 일체 사진 촬영이 금지이고 공연이 끝난 후 잠시 사진 촬영이 허락된다.
나는 몇 번 스페인 길거리에서 녹음에 맞추어 플라멩코를 추는 소녀들을 보았는데 전연 차원이 다르다. 그네들은 푼돈을 벌기 위해 어설픈 흉내만 내고 있었다는....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 바로 옆의 자그마한 방은 플라멩코 박물관으로 꾸며 놓았는데 주로 포스터와 무대 의상들이다.
숙소 주인 말대로 정통 플라멩코를 감상할 수 있어서 매우 만족... 나의 오랜 숙원(宿願)을 풀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