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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8) 없어진 서편지파들 역대상 7장 1-19절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신 지파들을 떠올려 볼까요? 제일 먼저 2-4장까지 할애하여, 주류자손, 비주류 자손까지 소개했던 유다였습니다. 그리고 6장으로 건너뛰어 레위인들을 살펴보셨지요? 그리고 다시 5장으로 돌아와서 요단동편의 지파들, 르우벤, 갓, 므낫세를 살펴보셨고, 시므온지파까지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지요? 지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유다지파와 레위지파는 돌아온 지파입니다. 물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먼저 악한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왔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 조상 유다와 레위의 삶이 악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 없을만큼 거룩하지 못함이 끼어있는 사람들이었지요. 유다는 인신매매범에 성매매범이었고, 하나님의 집을 뛰쳐나가 가나안 사람이 되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레위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됨의 표시인 할례를 사용해 사람을 속이고 죽인, 사기꾼에 살인범, 거기에 모든 것을 노략하여 강탈했던 강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끝이 아니었지요? 저 유다는 회개하고 돌아와 말씀을 붙들고 아버지의 집을 잘 섬김으로 주권자가 나오는 지파로 일어서게 되었고, 레위 역시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를 세워주시는 지파로, 또한 모두가 범죄하고 악을 행하는 중에도, 금송아지를 만들고 난잡한 춤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 끝까지 저들과 동조하지 않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는 이들로 구별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로 세워졌습니다.
또한 저 요단 동편의 지파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반 지파는 이래 저래 장자가 된 지파들이었습니다. 르우벤은 혈통상의 장자, 므낫세는 명분상의 장자, 갓도 레아의 몸종이었지만 실바의 장자였지요. 그런 장자들이 모여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하시고 짐승도 많게 하시고 전쟁에서도 이기게 하시고 지경도 넓혀주시는 힘도 주셨습니다만 확인해보신 대로 결국 우상을 숭배하여 사라지는 지파가 되었지요. 왜요? 저들은 처음부터 말씀으로 결정하고 말씀으로 확인하며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했던 장자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변경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기업이 아님에도 거기에 정착하고,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것을 거절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지파는 서편 북이스라엘이 망하기 훨씬 전에 망하고, 그 후손들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중에 특이했던 지파는 시므온 지파였습니다. 작은 지파였으나 둘로 나뉘었지요? 북이스라엘로 편입되어버린 지파 일부는 그렇게 멸망해 버렸으나, 골짜기 동쪽으로 그리고 세일산으로 믿음을 좇아 지경을 넓혀내었던 저들은 오히려 전쟁의 참화도, 포로생활의 고통도 겪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셨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우리의 길도, 남들이 우루루 몰려가는 길이 아닌, 믿음 안에서 때로는 멈추고 또한 때로는 과감하게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살펴보실 지파는 이제 나머지 요단 서편의 지파들입니다.
7장이 소개하는 지파들 역시 기록되어 있는 족보를 읽어나가면 여러 용사가 세워지고 번성하고 있지만, 결국 북 이스라엘에 소속되어 버리는 지파들, 남유다와 다윗을 떠나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던 사람들이었기에 포로기 이후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는 지파들입니다.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각각의 지파들에 대한 짧은 기록들을 살펴보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훨씬 강하고 번성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지파가 모였고, 남유다보다 자원이나 환경이 비옥하고 좋았던 것이지요. 경제적으로도 잘 살았고, 인구도 훨씬 많았고, 군사적으로 부강했으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습니다. 남유다처럼 왕조가 이어지질 못하지요? 늘 반역과 쿠데타로 왕조가 바뀌기를 수 차례, 사람이 세운 왕들이 다스리던 그 나라는 결국 남유다보다 먼저 앗수르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 온 열방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역대기의 주인공들, 포로귀환 공동체, 에스라를 비롯한 유다족속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폐허가 된 땅에서 서서 생각을 해보니 예전 통일 이스라엘이 그렇게 잘 살고 행복했던 시절이 너무나도 그리운 것입니다. 꿈만 같은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하나 되어서, 함께 제사 드리고 말씀을 배우며 모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가며 행복하게 지냈는데, 서로 나뉘어 살기를 350년, 그리고 겪게 된 70년 바벨론 포로기간 70년을 겪고 나서 보니, 북쪽 지파들에 관한 것이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7장에 일부 북쪽 지파들에 대한 족보가 기록이 되고 있지만, 대부분 끊어져있는 족보들이고, 심지어 어떤 지파는 아예 족보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이미 예습하시며 읽어오셔서 아시다시피, 스불론 지파라든지, 단 지파 같은 경우에는 아예 지파 전체의 기록이나 족보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3절에서 보시다시피 납달리 지파의 경우, 그저 한 줄에 네 사람 정도만 이름이 기록되고 있을만큼 기록이 족보가 남아있질 않고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바벨론에서 돌아와 보니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제사장 자손 일부, 그리고 레위인들 일부, 그리고 느디님이라고 불리우던 성전에서 일을 하던 이방 노예들 일부, 그리고 유다후손들 일부가 전부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부흥케 하시고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만, 오늘 당사자들은 참으로 막막했던 것이지요. 이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옛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힘세고 용맹했던 용사들이 다 없어지고,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성전에서 잡역을 하던 사람들 소수인데, 다시 예전처럼 회복하고 살아날 수 있을지 큰 기도제목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졌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의 기분일까요? 넉넉하고 부유했던 미국 남부 애틀랜타 땅이 전쟁을 겪고 나서 모두 황폐해져 버리고, 모두가 다 죽고 떠나고 홀로남아 있는 무법천지가 되어 있는 그 곳, 그곳을 버리고 떠나는 모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다시금 결심하며 굳건하게 서 있던 모습 말입니다.
그래요. 남은 것이 없을수록, 과거의 영광이 떠오르게 되는 법이지요. 그래서인지 오늘 본문은 저 요단 서쪽 지파들의 영광스러웠던 모습들이 잠시 소개가 됩니다. 그 힘 있던 지파들의 모습 잠시 살펴보시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함께 되짚어 보겠습니다.
그래요. 저 르우벤, 므낫세, 갓자손들의 처음 모습처럼, 그래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 속에 살던 복받은 시절의 모습들이 소개가 되는데, 짧게 짧게 살펴보시도록 합니다.
먼저는 잇사갈 지파(1~5절)입니다. 잇사갈의 큰 아들의 이름은 돌라인데, 그 후손들이 다 체격이 크고 힘이 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돌라의 아들들은 대대로 용사요, 다윗 때에 이르러서는 그 숫자가 2만 2천 6백 명이었다고 하지요. 또한 웃시라는 사람도 자녀들을 많이 낳았고 처자가 많았는데 삼만 6천명이었다고, 그렇게 잇사갈의 모든 종족은 모두 용감한 장사요, 그 전체를 계수하니 8만 7천명이었노라고 말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6~12절)입니다. 베냐민의 집안에서도 용사들이 세워집니다. 벨라의 아들들이 2만 2천 34명, 베겔의 아들들이 2만 2백명 그리고 여디아엘의 아들들이 1만 7천 2백명이었노라고 기록합니다. 요 베냐민 지파는 잘 아시지요? 여기도 거룩하지 못함이 끼어들었던 지파입니다. 이렇게 숫자가 많았던 베냐민의 젊은이들은 앗수르에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머지 이스라엘의 동족들에게 비극을 겪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지요? 예, 이 번성했던 베냐민의 청년들이 가나안의 문화를 배웁니다. 그 가운데 기브아에 있던 청년들이 그 동네 들어왔던 레위인과 상관하려다가 그 레위인의 첩을 죽게 한 바람에, 잘못을 인정하게 기브아의 청년들을 내어주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이스라엘 전체와 전쟁을 벌이지요? 이때 도망친 600명을 제외하고 베냐민 지파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잔인했지요. 베냐민지파에 의해서 자기 형제들이 죽임 당한 것을, 베냐민 지파의 성읍에 보복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만 한번 읽어볼까요?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사사기 20:47-48)
그래요. 이렇게 베냐민 지파는 남자들 600명만 남은 지파, 그래서 유명무실해진 지파가 가장 미약하고 작은 지파가 되어버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때 정신을 차리고, 북이스라엘에 따라가지 않고 남유다의 편에 남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주신 복이 사울을 왕으로 세워주시는 일이었고, 오늘 그 지파의 이름을 다시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곧 살펴보시겠지만, 저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어리석은 왕이 되는 것이 오늘 베냐민 지파의 아픔입니다.
그리고 므낫세 지파(14~19절)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용사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마길이라는 사람은 정실부인이 아닌, 소실, 첩을 얻는데, 그것도 아람사람, 이방여인을 아내로 얻어서 자식을 낳지요. 또한 둘째 아들이라고 한 슬로브핫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낳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이 딸들이 대단한 딸입니다. 하나님께 찾아와 딸들에게도 분깃을 달라고 이야기하는, 그러나 다른 지파가 아닌 아비족속에게 시집을 가야한다는 조건으로 기업을 허락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지파(20~29)입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 중에 초반에 가장 비참했는데 그래도 복을 받고 힘을 얻은 지파가 있다면 바로 이 에브라임지파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함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0절부터 23절까지요.
“에브라임의 아들은 수델라요 그의 아들은 베렛이요 그의 아들은 다핫이요 그의 아들은 엘르아다요 그의 아들은 다핫이요 그의 아들은 사밧이요 그의 아들은 수델라며 그가 또 에셀과 엘르앗을 낳았으나 그들이 가드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내려가서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 하였음이라 그의 아버지 에브라임이 여러 날 슬퍼하므로 그의 형제가 가서 위로하였더라 그리고 에브라임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집이 재앙을 받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브리아라 하였더라”(대상7:20-23)
에브라임이 누구지요? 네, 야곱의 아들, 므낫세의 동생입니다. 야곱이 손을 어긋얹어 축복하면서 형보다 크게 될 것이라고 해서 요셉이 서운해 하기도 했던 아들이지요. 그런데 그 삶은 축복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축복을 입고 나서 욕심을 부렸던 때문일까요? 에브라임의 아들들이 가드 토인들의 가축을 빼앗으려고 했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왜 에브라임 자손들은 가드사람들을 쳐들어갔을까요? 다른 이유는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다. 가드사람들의 짐승을 빼앗으러 갔다고 하는데 요셉의 아들들이 도둑질 할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을테니, 아마 자기들 나름대로 가나안에 대한 정복의 꿈을 안고 하나님의 말씀도 없이 쳐들어갔던 것으로 보이지요? 아마 아버지를 잘 둔, 아버지 빽만 믿고 방자한, 교만하고 오만한 후손들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드는 애굽이나 이스라엘 같지 않았지요? 그들의 실력이 먹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저 가드는 훗날까지도 유명세를 떨친 저 골리앗의 선조뻘 되는 거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에브라임 자손들이 그 싸움에서 패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에브라임이 살아있을 때여서, 여러날 그 죽음에 대하여 슬퍼했노라고 기록이 됩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그 자식의 이름에 담겨지게 되는데, 그 이름이 뭐라고요? 브리아, 재앙이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그 브리아, 그 재앙의 후손으로 누가? 예,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태어납니다. 레위 자손의 모세를, 에브라임자손 여호수아가 그 뒤를 잇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다고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회막에 머물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 여호수아를 통해 출애굽의 임무를 완수하게 하시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시지만, 요단강도 말리고, 여리고도 무너뜨리고, 해와 달도 머물고, 가나안의 모든 전쟁도 이기게 하셨지만,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급격히 이 에브라임 지파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지파, 여호수아가 죽고, 여호수아를 알던 장로들이 다 죽은 뒤로는, 그죠?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 떠난 세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 분배 때부터 얼토당토 않게 땅이 좁다고 불평을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의무없는 권리만 주장하던 저 요셉자손, 에브라임 지파는 북이스라엘로 떠나가고 결국 앗수르에 의해 지워지는 지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참 안타깝지요? 신앙의 걸출한 인물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져도 계속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예배중심의 삶이 전수되질 못하면 이렇게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것을 또한 이 에브라임 지파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아셀자손들이 기록 됩니다(30~40). 우두머리요, 정선된 용감한 장사요, 방백의 우두머리들, 출전할만한 자들을 계수하니 2만 6천명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싶은 지파는 납달리 지파(13)인데, 여기는 족보가 단 한 줄뿐입니다. 이유는 용사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자료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자료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앗수르와 전쟁을 하면서, 모든 자료들이 불타서 없어지고, 사람들도 다 없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때다.”
사람은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을 총알이 꿰뚫었을 때?
아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다.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다.
그쵸? 몸이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는 이가 없을 때가 정말 죽는 것이지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분명히 한 사람도 아니고 한 지파가 이 세상을 살아갔는데, 그에 대한 아무 기록이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면 참으로 속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많은 사람들이 거의 대개 이 납달리지파와 같이 살아갑니다. 열심히 살았으나 기억되지 못하는 인생,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인생말입니다. 그래서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이름으로 뭐라도 하나 남겨두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분명 납달리 지파의 후예들도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돈을 벌기도하고 자녀들을 많이 낳기도하고 업적들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사람들이었고,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납달리 지파는 이름이라도 서넛 남아 있는데, 스불론처럼 단처럼 그 이름조차도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언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소멸되었는지, 그 땅은 예수님 당시, 가장 먼저 사역지로 정하실만큼 흑암과 암흑의 땅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마귀의 시험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던 장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곳, 확인해보겠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5-16)
스불론, 단, 납달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야곱의 후손들이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의 정체성, 존재 목적과 가치를 알지 못한 채, 세상과 동화되어 세상에 흡수되며 소멸되어간 기업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은 어떠해야할까요?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하는데, 세상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해주시는 이름이 되어야합니다. 오늘도 그 손에 이름을 새기시고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인생이었으나,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그 기록이 남겨지지 않는 이름이 되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오늘부터 더욱 하나님께는 물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종으로 기억되는 복된 분들이 다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로마가 행했던 형벌 중에 가장 무서운 형벌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기록말살형’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물론 존재 자체를 역사에서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비석을 파내고, 그 사람의 동상을 부수고, 그 사람이 쓴 책을 불살라버려서 아예 애시당초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산 것 자체를 부정하고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납달리 지파에게 남겨진 것은 이 세상에서 모든 자손들의 이름이 지워지는 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잇사갈, 므낫세, 아셀 많은 용사들이 세워졌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 힘있게 번성하여 존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이 다 북이스라엘 행을 택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과 금송아지를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아닌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지요. 그리곤 저 바벨론 포로 이후, 주전 500년 즈음에는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줄 남은 납달리 지파처럼, 그리고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스불론과 단지파처럼 그 기억이 소멸되고 잊혀진 사람들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중요합니까?
이 땅이 주목할 만한 용사를 세우고 이 땅이 흠모할 만한 탁월한 리더십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용사요, 하나님의 리더십입니다. 세상적인 외모가 아니라 신앙적인 중심입니다. 전쟁에 나갈 용사를, 성을 세울 리더십을 세우는 것보다, 하나님의 용사를,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할 일꾼들을,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은밀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해나갈 진실한 청지기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요. 교회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얼마나 세상적으로 힘이 있고 성공한 사람들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늘 나라의 인물로 세워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가요? 바로 제가요! 여러분이요!
오늘 우리의 마음에 더욱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 예배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회복하시고, 주님께 속한 자, 하나님께 합한 자가 되어서 우리의 사명을 힘껏 감당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는 복된 분들, 그리하여서 이 세상에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책에 오늘 그 이름이 또렷하게 기록되고 칭찬과 명성을 얻으시는 복된 종들,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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