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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송광사 까지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오랫만에 내딛는 발걸음이었으며,
"송광사 16국사 부도탑 순례"라는 이름으로
먼 먼 과거로의 순례를 떠나는 그런날이었습니다.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것인데
그날은 또 그렇게 명절을 앞둔 터라
벌초차량들이 몰리기 시작하여서 그러한지
갈길은 멀고 마음은 벌써 그곳에 닿아 있고
정작 차량은 빨리 움직여지지 않는 애타는 날이었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이리도 쉬이 만나는 만남은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
날씨는 한여름 뙤약볕이 채가시기 전이라 덥기만 하지만
마음은 저 하늘위에 떠 있는 구름처럼...
솜털처럼 가볍기만 하였는지...
늦었음에도 마음은 그리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반갑고 보고싶은 얼굴들..
오늘 처음 보는 얼굴들..
그리고 오늘 도움주시는 분들...
다들 모여 인사를 하고....그렇게 17국사 부도탑 순례는 시작되었습니다.
불일암 가는 길..
부도탑 순례라고...
시간이 없는 이유로...
절집은 후에 시간이 되면 들여다 본다는 이유로
불일암 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광원암을 제일 먼저 만났다.
가을이 서서히 오고 있음인지..
하늘은 점점 높아만 가고..
백일홍은 끝을 부여잡고 있는것만 같다.
암자의 바로 뒤에는 1234년에 입적한 진각국사의 사리(舍利)를 모신 부도(浮圖)인 원조탑(圓照塔)이 있다.
이 탑의 탑호(塔號)는 그 때 고려 고종(高宗)이 내렸고 이규보(李奎報)가 쓴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에는
그 위치를 ‘광원사(廣遠寺) 북록(北麓)’<광원암 뒤의 북쪽 언덕>이라 기록 되어 있다.
[진각국사의 비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지(月南寺址)에 세웠는데,
지금은 파손되어 비신 하반부만 남아있다<보물313호>]--- 송광사 홈페이지 원광암 소개에서...
그래,
우리가 먼저 찾은 것은 2대 국사인 진각국사 부도탑이다.
국사의 휘는 혜심(慧諶)이요
자(字)는 영을(永乙)이고 자호(自號)는 무의자(無衣子)이며,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요 이름은 식(寔)이니,
나주(羅州) 화순현(和順縣) 출신이다
스님의 태몽은 하늘문이 활짝 열리는 꿈을 꾸었고,
또 세번이나 벼락을 맞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스님은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스님이 되고자 하였으나
어머님의 반대로 사마시에 합격을 하고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어머님의 병환이 깊어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국사는 이때에 보조국사를 찾아가 어머님의 재를 베풀어 천도할 것을 청한 다음,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국사는 수선사에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으며,
무진년에 보조국사가 그에게 수선사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여러차례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1234년 봄 월등사에서
모든 고통 다가오지 못하는 곳에
상상 밖에 따로 한 건곤(乾坤) 있으니
그곳이 어디 있냐고 물어온다면
적정(寂靜)한 대열반(大涅槃)의 세계라 하리라
이리 말씀 하시고,
갑오년에 후사를 당부하시고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바쁘다”고 하였다.
마곡이 대답하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아프다”고 되풀이 하니,
마곡(麻谷)은 역시 무슨 뜻인지 몰라 멍멍하였다.
그리고 나서 스님은 미소를 머금고 가부좌를 맺은 다음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이것이 스님 생의 마지막이신 것이다.
작은 부도탑에는 그의 그런 치적은 알 수 없지만,
그의 비문은 월남사지에 있다고 한다.
스님의 부도의 승계는 포항 보경사의 원진국사부도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여러면에 이쁜 동물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연꽃 양련을 새기고..
올록 볼록 연밥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부처님의 세계란 그러한 것인지...
이곳에서 멀리 응시를 하니...
보조국사 지눌의 부도탑에서 바라다 보는 그자리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온산들이 감싸 앉은 그런자리...
연꽃모양을 하고 그속에....
스님의 부도탑이 조용히 앉아 계신다.
그날따라 왜그리 늦는 것이 많은지...
도착도 꼴지요....
따라가는 것도 꼴지요...
어이쿠 다른곳을 갈때도 또 꼴지이다.
그 광원암 한켠에 연밥을 따다 말리고 있었다.
어릴적 오빠는 늘...
아직 덜 여물어 여릴때 연밥을 따서 새파란 연밥알을 동생에게 주면서
알속에 있는 촉은 쓰니까 버리고 먹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많이 익은 연밥은 조금 더 단맛이나지만 물은 적고 껍질을 까지 버거우니..
오빠가 먹었다.
여름이면 꼭 따와서 집으로 가지고 와
내게 건네 줬었는데......
이제는 오빠도 나도 그러하지 못한다.
내려와 불일암으로 간다.
법정스님이 기거하시던 곳이라 세상에서는 갑작스레 그가 떠난 이싯점에 유명해진 암자다.
그저 잘 몰랐던 사람도...
법정스님을 알게 되고..
그저 그런사람도 법정스님의 불일암을 알게되었다.
무소유...
그가 늘 이야기하시고 실천하셨던...
그래서 그는 그가 저술한 책도 남기지 말라 하셨는데...
세간에는 사촌형님께 보낸 편지도 나돌아 다닌다.
그는 먼지가 되어 한줌의 재로 사라졌것만..
무소유....를 지향하셨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보고싶은 소유욕이 생긴것이 되어버렸다.
산에는....꽃이 피지만..
그 꽃은 진다고 해야 하지 않을런지....
이곳에서 불일암으로 오르는 그 대밭길에서 오늘을 기념하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즐거운 순례길이다.
묵언정진
묵언중이었다.
그런데 그 밖은 소란스러움이었다.
지나가는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와
새들도 놀래고
꽃들도 놀래고
서로의 마음도
갑작스레 눈을 마주치는것과 같이 놀랬었다.
그 방에서
"묵언"이라는거 안보이십니까?하시니
그 묵언이 밖에서 묵언하라는 뜻이었던가?
물론 묵언해주어야 하겠지만
그 소리에도 묵언할 수 있어야 함이아닐런지
그렇게 참아야함이지 않을런지
잠이 오지 않는 어느날...
잠을 청하려고 청하려고
숫자도 거꾸로 세어보고
동물 이름도 나열해보고
우유도 데워서 마셔보고
책도 거꾸로 읽어보고
아무리 아무리해도
머리속이 복잡하고
이상한 속상한 일들만 머리속에 더 많이
떠오르는 그런 날...
그것을 버리고 눈을 감을 수 있어야만
잠이 청해지듯이..
스님...
무례할지 모르오나
정작 마음에서 묵언이 되어야 하지 않을런지요
소란스러워 죄송했습니다.
그렇지만 죽비로 등을 후려치듯
그 목소리는 오히려 반감을 일으켰다면
스님...
알 수 있을런지요?
스님....죄송했습니다.
그렇게 죄송할 수가 없었던 마음...
조용히 앉아..
법정스님의 그 시간처럼
멈추어버린 시간처럼 앉아 있고 싶었다.
내가 오늘 순례길이라는것을 잊어버리고
그곳에 앉아도 되련가?싶었다....
그 의자에 책갈피가 있었다.
그리고 방명록도 있다.
무어라고 적으려고 하다 말고
책갈피 한장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스님의 사진과 함께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 왔듯이
언젠가는 혼자서
먼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엄연한 삶의 길이고
덧없는 인생사이다.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이리 적혀 있다.
그곳에 7세 자정국사 부도비가 있다.
자정국사께서 암자를 창건하여시었는데 세월이 흘러 숱한 일로 다 쓰러지고,
법정스님에 의해서 재건하면서 불일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문을 나서면서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대나무가 촘촘히 자라나는 그 사이로 참배시간과
묵언임을 걸어두었다.
세상과의 단절일런가?
그 문은......
8대 자각국사 부도비이다.
산모퉁이를 돌아서
그 산의 어디인지 모르겠다.
산속을 한참을 돌아 들었다.
어느새 비슷 비슷한 부도가 또 나타났다.
감로암 아래라고 하것만 산길을 돌아서 가다보니
그리고 암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다보니
그곳이 어디인가 싶기도 하다.
그의 흔적은 너무나 희미하다.
조계산 연구소에 따르면 충숙왕 29년경에 자정국사에 이어 국사로 부임하였던것으로
추정한다고 되어있다.
그 탑비에는...
염주를 의미하는 탑비가 새겨져 있다고
그날 달넘새님은 다른 탑비와 다른점을 찾아보라고 하였더니
지금 기억나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
16세 고봉국사 부도비이다.
일명 지숭(志崇)이며
호는 고봉(高峰)으로
성은 김씨이며, 진주사람이다.
1370년(공밍왕 19) 20세에 출가하여
선선(禪選) 과정을 거친 다음 여러 곳을 편력하다가
나옹 혜근(懶翁 惠勤)을 만나 법을 받았다.
머리카락이 두 치나 자랐고,
풀피리를 잘 불었으며,
표주박 한 개를 가지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의 진영에서 보니
그는 정말 머리가 두치나 되는듯 하다.
풀피리를 잘 불어다고 하더니
그의 부도앞에는 무성하니 잡풀이 자라있다.
아마도 그분은 그것들이 피리가 될런가?
바람에 나부끼고 흔들리는 모습이 피리를 부는듯 보이기도 한다.
풀피리를 불며, 표주박을 들고 다니며
세상 이곳 저곳을 떠돌았을까?
흰수염 가득한 그의 진영을 보니
참 선선해 보이신다.
조선시대 대가 희옥 융묘탑
이곳은 16국사가 아닌데 어찌 들렀느냐하니
이곳에 버섯을 보았다고 잠시 들를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욕심이런가
그곳에 버섯은 벌써 어느 이름없고 욕심없는 사람에게 가버렸는지
작년에 보였던것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탑비는 16국사의 탑비를 닮아 있었다.
조선시대를 지나 어느해인지 몰라도
어쩌면 16국사 이후에 그도 17대를 이어갔었을까?
이 조계산 한자락에 그의 부도탑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인조2년 남한산성 축성 때 전라도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공을 세웠고
인조 6년 송광사 사천왕상을 다시 세웠으며
초서와 시운에 능해 친필 현판인 삼청각 시(三淸閣 韻) 한 수가
우화각 천정에 보전되어 왔으나
융희 2년(1908) 무신년에 일군이 억지로 뽑아가 버렸다고 한다.
두 친동생과 함께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승군 장 이었다고 송광사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제법 산길을 올라갔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정상에 가깝게 올라가는 듯만 하였다.
한참을 올라가서 암자의 터가 보이고
숲에는 온통 참나무가 많더니
가마터가 보였다.
그곳에서 참숯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부역이었을까?
종이 부역이 아니라면 숯을 만드는 부역도 있었다는 것인가?
절간의 이곳 저곳에 숯으로 열흘이고 방안을 데울 수 있었을 것 아니었던가?
그곳을 지나 숲을 헤치고 가다보니 원감국사 부도탑이 나타났다.
6세 원감국사 부도비이다.
휘는 법환(法桓)이었는데, 뒤에 충지(冲止)로 개명(改名)을 하시고
자호(自號)는 복암노인(宓庵老人)이고 속성은 위씨(魏氏)이며
정안(定安) 도초현(道艸縣) 출신이라고 한다.
모든 경서를 눈으로 한번 보기만 하면 다 외우고
17살 적에 사원시(司院試)에 합격하였고,
19살 때에는 춘위(春闈)고시(考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였다.
원오국사(圓悟國師)가 단원사(禪源社)의 법주(法主)로 있었을때,
스님께서 곧바로 그 곳으로 찾아가 원오를 은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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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날 계원(桂苑)에 꽃이 피니
그윽한 향기 소림(小林)에 풍겨오네!
오늘에 익은 열매 감로(甘露)와 같아
무한(無限)한 인천대중(人天大衆) 함께 먹도다.
스님께서 감로사에서 어느 선덕이 있어 간청하니
읊어 주신 시이다.
오늘이 따뜻한 봄날은 아니어도
그윽한 향기도 있으며, 익은 열매들이 가득하였다.
우리도 그곳에서 여럿이 모여 같이 담소를 하며
나누어 먹지 않았던가?
병자년(丙子年)에 선사(禪師)의 승계(僧階)를 받았으며,
기묘년(己卯年)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진가(進加)받았다.
14년 동안 정혜사(定慧寺)에 계시다가
갑신년(甲申年) 3월 8일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올라가
괴연(塊然)히 앉아 선정(禪定)에 들어 가셨다고 한다.
마치 토목(土木)으로 만든 우인(偶人)과 같아서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새들이 무릎 위에 앉아서 놀았다.
지리산 암자 순례를 하면서 나는 상무주암에 가보았지 않았던가.
상무주암!
머무름이 없다는 뜻이었지 않았나?
그곳에서 세상은 머무를것이 없는듯 하였고
어렵게 찾아갔던 그 산행길이 아직도 선하것만
원감국사께서도 그곳에서 선정에 드신것이다.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 하는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禪不在靜處 亦不在?處 不在日用應緣處 不在思量分別處)
보조국사 지눌이 하신 말씀이지만
선이란 무엇이었는지
아무곳에도 있지 않다는 것인지
이곳에서도 무소유였던 것인지?
오름길에 보지 못한 참나무의 버섯이
이렇게 옹기종지 자라고 있었다.
아자방이 있었다고 했던가?
석달 열흘동안 불을 때지 않아도 따뜻한 방이 있었다고 했던가?
어느 암자터에서 스님을 무엇을 보셨을까?
유난히도 스님은 우리것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셨다.
어느 암자처였든지 축대가 얼기설기 쌓여 있다.
이제 3대 청진국사 부도비로 왔다.
송광사지에 청진암터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하니...
휘는 몽여(夢如)이고
시호는 청진(淸眞)이며
탑호는 적조(寂照)이고
이름은 소륭(小融)이라고 한다.
그는 출생지도 그릐 활약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
그날 해설사님께서는 어느 도둑이 이곳에서 배회하다 들키어
한동안 늘 이 부도를 지켜야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주신다.
지금도 곧 무너질듯 힘이 없는데...
도둑까지 맞을뻔 하였으니..
그속에는 이미 모든것들이 도굴되고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무소유 였을까?
왜.....!! 머리속에 맴을 도는 것인지....
송광사 산내에 있다싶이 하는 부도탑들을 둘러보고
부도암으로 내려오다 보니
어여쁜 상사화가 담장밖으로 고개를 내미는듯 하다.
오랫만에 보는 상사화라 그러한지
친정어머니 꽃백일홍 다음으로 좋아하시던 꽃이어 그런한지
유독 눈길이 간다.
온밭 가득 부도들이 즐비히다.
이리 생긴 부도도...
저리 생긴 부도도..
이런 문양도 저런문양도...
모두 이곳에 어울러 있는 듯 하다.
처음에는 그저 담장밖으로 까치발을 하고 들여다보고
내려오려 했는데 기여히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 저곳 참 희안하니 많이 보았는데,
어찌 사진을 올리려하니 급히 먹은 밥이 채하듯이
급히 찍은 사진들은 다 그러했다.
사진은 2007년도 사진임.
1세 보조국사 탑이다.
왜 그 모양새가 다른것들과 달랐을까???
게으른 중생은 그저...
그 기회를 놓치고...
동그란 몸통도 날아 올라갈듯한 옥개석도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순례길의 나그네가 마지막으로 가야하는 곳이
보조국사 지눌의 탑이었는데,
잠시 해우소에 간사이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여름날의 뙤약볕도 아닌데 꾀가 나는 것인지
그만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대웅전앞 백일홍은 지친듯 보이고
중생도 지친듯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들어간곳으로 나오거늘...
오늘은 산속을 헤매이다 나온 것이 되어버렸다.
그저....
그곳에 다녀왔소 하듯 절집의 문을 찍고
부도들의 순례길을 다음으로 이어갔다.
햇살은 너무나 따갑지만 오늘 걸은 이길을 언제 다시 걸어볼수 없을 듯 하니
더욱 감사하고,
이런 순례길에 너무 정신없이 다녀와 마음이 허허로움 또한 마찬가지이고
돌아와 이리 정리하면서도 메모하지 않아 머리속에 기억이 좋지 못한 것 또한
안타깝고
저 산에 봄날이 오면
다시 발길을 할 수 있을까?
마음을 놓는다....................
산에는 꽃이 피고 또 진다.........
2013.8월 순례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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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광사 옛고찰이 아담하고 좋으네요 어쩌다 부도가 난겁니까
불교 문화가 오래토록 보전 되고 기록 되기를 빕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순례 하시느라 고생 했습니다.
음??부도라뇨????
아직 여전히 승보종찰로 건재하고 있는뎅.....있는뎅...있는뎅~~~!!!
조계산 그 아래 말이지욤.......
선암과와 쌍벽을 이루면서~
송광사 16국사 부도.......................라길레 ㅋㅋ.
ㅋㅋㅋ 부도는 승탑을 말합니다.
스님들이 돌아가시고 나서 사리등을 넣어서 만드는 스님의 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휴~~해누리님 머리가 좋은거 맞네요...
어찌 저런 문화재를 다 머리속에 넣고 다니는지?....
암튼 대단하네요~~문화재 지킴이 라고 불러드려야 겠어요...
흐미...!!!!
넘들이 들으믄 욕해요~!! 저는 새발에 피여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