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쓴 이(By): parsec (먼소류)
날 짜 (Date): 1998년01월16일(금) 20시17분11초 ROK
제 목(Title): ...
마이클 크라이튼의 "스피어"란 소설이 생각난다. 이 보드를 들락거리고 있으면, 자세히 뜯어 보면 모순 투성이인 성경이라는 문서 집합이 그것을 읽는 사람의 생각을 증폭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 같다는 느슨한 생각을 하게 된다. 비판적인 사람은 그 속에서 수 많은 모순을 찾아내며 즐길 수 있는가 하면, 반체제적인 사람은 반체제를 보고, 권력 순응적인 사람은 권력에의 순종을 발견한다. 관용적인 사람은 용서를 배우고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온갖 비방과 욕지거리를 성경에서 배운다. 물론 내가 각각의 사람이 원래 어떤 성격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나 자신과 몇몇 활동적인 게시자들의 성향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같은 맥락에서 나에게 분명해 보이는 것은 성경이 사람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 같으며 오히려 그것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神"이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우주에 투영시킨 데 지나지 않는다는 나의 기본적인 생각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예수가 설파한 사랑과 용서의 정신은 많은 사람들이 본받기 힘든 반인간적인 가르침이다. 그것이 훌륭하고 뛰어난 가르침이라는 것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첫째 나 자신이 그것을 실천할 만큼 대범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한다고 가정했을 때 내게 돌아올 많은 직/간접적인 손해들을 고려할 때, 그리고 만일 그 정신이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해서 실천되었을 때 과연 사람들이 더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 떠오른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성질에 비해서 너무나도 이상주의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에 입문한 많은 사람들도 그것이 제시하는 높은 기준에 비추어 자신의 한계가 너무도 낮은 것을 은연중에 알아채고서는 그 당혹감을 숨기려고 절망적인 몸부림을 치는 것 같이 보인다. 사랑과 용서의 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상숭배에 대한 비난, 근거없이 타종교나 세속에 대한 고발과 비하, 또는 자신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는 그 핵심 정신은 뒤로 감춘 채 교리적인 기준만을 광고하고 다닌다. 마치 비합리성에 대한 맹신이 신앙의 본질인 양 착각하고 합리성에 기반한 사고능력을 배제하는 것이 신을 변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안개를 뿌림으로써 자신이 그 가르침의 제자로서 자격미달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는 것일까? 오히려 그 안개가 자신의 무자격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한다면 세상은 분명히 서로에 대한 죄로부터 구원될 것이고, 그와 동시에 지상은 천국이 될 것 같이 생각된다. 예수도 말하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신이 그들 가운데 거할 것이라고 했다. 신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곳이 천국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모범을 보였다고 성경이라는 문서는 주장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 얘기는 모범으로서의 예수가 죽음으로서 그의 가르침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가르침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이야기로 보인다. 부활 사건을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로 증명하려는 온갖 시도는 내가 볼 때 성경의 기록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일 뿐이다.
그것을 우화와 비유로 볼 때만이 예수의 부활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를 더 적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교의 신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 것은 신이 어떤 구상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살아 있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면 그의 삶을 통해 인간에게 가르친 것을 통해서만이 신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폴의 말도,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자아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곧바로 사랑과 용서라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먼소류처럼 온갖 불이익에 대한 고려와 회의적이고 실증적인 자세를 가지고서는 결코 그 이상주의적인 가르침의 세계를 일구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을 내 몸으로 실천할 때 하늘은 새 하늘이 되고 땅은 새 땅이 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전의 이해타산적인 눈으로 보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성서에 나오는 천국과 자옥의 신화를 믿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에고가 그것이 실현될 수 없는 이상임을 항상 일깨워주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불신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성경을 과거의 현실로 인식하는 태도는 그 이야기들이 가진 수 많은 불합리함과 모순을 눈에 보이게 드러냄으로써 성경 속의 신을 목석으로 만든 우상과 별 다를 것이 없는 존재로 만든다. 성경이 신화와 우화, 비유, 그리고 시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 신화의 저자들이 꿈꾸고 표현하려 했던 이상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이상은 많은 사람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는 희망과 같은 것이어서 성경이라는 증폭장치를 통해서 그것을 일깨울 수 있다고 본다. 신을 나무, 돌, 그리고 글자 속에 고정시키려는 모든 행위는 인간의 꿈을 죽이는 행위와 같다. 신의 이름조차도 정확히 발음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아브라함이 꿈꾸었던 인간을 위한 신의 시대라는 이상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2000년 전쯤의 어느 유대교 랍비도 유대교를 사람이 한 발로 서 있을 수 있을 만한 시간 동안에 설명해 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네 이웃에게도 하지 말라. 나머지는 주석이다. 이제 가서 배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