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元祖)’라는 말이 있다. 어느 한 지역에서 품질과 전통을 인정받아 널리 알려져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가 된 곳을 말하는데, 특히 음식, 먹을거리 분야에 있어서 이러한 관념이 명확히 자리잡고 있다. 원조는 그 집만의 독특하고 탁월한 제조방법에서 비롯된 맛이 있으며 이 맛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인정받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자식들 배는 곯리지 않겠다’는 희망으로 먹는 장사 시작해
심순녀 여사가 안흥찐빵의 원조 <심순녀 안흥찐빵>을 만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60년. 안흥찐빵의 탄생배경에는 19살에 시집와서 세간살이로 받은 강냉이 두 가마가 살림의 전부였던 심순녀 여사의 애절하고도 슬픈 가난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녀의 남편은 평생동안 안흥 바깥 출입을 손꼽을 정도로 안흥밖에 모르고 살던 촌부(村夫)였다. 자연,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며 생활을 꾸려나가는 생계유지는 심순녀 여사의 몫. 그때는 누구랄것 없이 가난한 시대로, 그녀는 오로지 다섯 남매를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뿐이었다고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 시절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줄줄이 딸린 자식들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위로 딸 넷을 두고 아들 태봉이를 낳았을 즈음에는 양말장사를 시작했어요. 각 집에 네다섯은 보통으로 낳아 기르던 시대니까 양말도 그만큼 많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지요. 근데 웬걸, 팔리지가 않았어요. 양말 팔러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양말 한 짝을 얼마나 기워 신었던지 양말 바닥은 온통 깁고 덧댄 자국이고 온전한 곳이라고는 발등만 남았더라니까요!(웃음) 그길로 양말장사를 접었지요. 집집마다 양말은 기워신어도 빨래는 해 입어야 하니까 비누장사를 해 보자 해서 비누장사를 시작했지요. 예상대로 비누는 잘 팔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거워서 목이 부러질것만 같더라구요. 그렇게 비누며, 고등어, 과일을 머리에 이고 강원도 고갯길이라는 고갯길은 안 다녀본 데 없이 들어가 팔고 돈대신 쌀이며 옥수수, 팥을 받아 나올 때에는 그 고생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렇게 시집 온 지 얼마 안 된 시골 새댁이 고생하며 장사를 알아갈 무렵, 그녀는 ‘아무리 고생해도 자식들 배고프긴 마찬가진데 먹는장사를 하면 자식들 배는 안 곯리겠다’ 하는 생각으로 음식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원주역 뒷골목에서 호떡장사하는 사람들이 즐비했는데 거기가서 호떡 만드는 일을 배워보려 했던 것. 하지만 “젊은 새댁이 뭐할라고 이런 일 하려 하냐?”면서 안 가르쳐 주더라는 것이다.
“호떡 만드는 법을 배우러 며칠동안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딱한 모습을 보다못한 한 사람이 넌지시 날 부르데요. 알고보니 안흥에서 물레방앗간 머슴살던 이였는데 그래도 고향사람이 좋다고, 그 사람이 밀가루를 물에 개고 술, 이스트(발효제), 설탕넣는 방법을 이래저래 하고 알려주데요. 그길로 가진 돈을 탈탈 털어 밀가루 두 포대에 설탕 한 봉지 사들고 안흥에 들어와 그대로 반죽을 했지요. 지금도 그 때 자고 일어나서 보았던 반죽모습이 잊혀지지 않네요. 아랫목에 묻어둔 반죽이 어느새 왕창 불어나있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화덕에다가 솥뚜껑을 얹어놓고 누르개도 없어 양재기로 눌러 구워 팔았지. 열심히 만들어 날개돋친듯 팔려나갔지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맛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크게 만들어 파니까 사람들이 신나서 사 먹은 거였더라고요. 그래서 밀가루 세 포를 또 홀랑까먹었어요!(웃음), 그래도 새끼들 멕일 수 있어서 기분은 좋았어요. 그리고 그 일로 하나 배웠지요. 먹는 건 어찌됐든 크고 배불러야 한다는 걸.(웃음)”
밀가루 가져다 장사해서 이득은 못 봤지만 무엇보다도 자식들 입으로 무엇 하나라도 들어가게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첫날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두었던 새하얀 밀가루 반죽이 자고 일어나 보니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모습이 그렇게도 든든하고 기분좋았다는 그녀. 그 모습에 매료되어 심순녀 여사는 밀가루 빵 장사를 하기로 결심, 인근지방에서 생산되던 팥을 삶아 소를 넣어 찐빵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심순녀 안흥찐빵>의 시초다.
막내만 몰래 하나 주고 다른 자식들은 아무리 졸라도 못 줬던 기억이 아직도 아픔으로 남아…
찐빵을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할 때 값은 단돈 5원. 밀가루 한 포대 사다가 찐빵 쪄서 팔고 남은 돈으로 한 포 더 사고…, 이렇게 시작해 차츰 생활에 보탬이 되고 자식들 키우며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심순녀 안흥찐빵> 하면 세상사람 대부분 그 이름을 알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시골의 부업거리 점방 수준. 찐빵 팔아 버는 돈이래야 보잘 것 없었다고 한다. 찐빵 하나에 일곱 식구의 생계를 의탁하다보니 자식들이라도 배불리 먹이자고 시작했던 찐빵장사가 오히려 자식들 애간장 태우는 일이 되었던 게 지금도 가슴 아프다는 심순녀 할머니.
“집에서 빵을 쪄서 팔면 거기서 나오는 돈이 우리 일곱식구의 양식이었어요. 쌀도 팔아야 하고 아이들의 학비며 학용품도 사야 했던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빵이 곧 식구들의 양식이며 학비가 되다보니 마음껏 먹이지 못하게 돼더라고요. 학교를 마치고 다섯 자식들이 집에 오면 엄마가 팔고 있는 찐빵이 얼마나 먹고 싶겠어요? 하루는 넷째 년이 달라는 걸 안 된다며 매몰차게 물리치고는 막내 태봉이만 몰래 숨겨서 찐빵 하나를 먹였는데 넷째가 어떻게 그걸 알고 서럽게 울던지….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짠해와요! 지금으로는 별거 아닐지 모르겠지만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에는 그 20원이 20원이 아니더라니까네….”
지금은 시집가서 애들 엄마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그 때의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겠느냐면서도 못내 미안해 하며 가슴 아픈 표정을 거두지 못하는 심순녀 여사. 그녀의 얼굴에는 빵에 담긴 추억과 삶의 고달픔이 담겨 있다. 그 당시 어머니의 특혜 아닌 특혜를 받았던 막내아들 김태봉 대표는 당시의 추억을 이렇게 전한다.
“저의 기억에 남아있는 그 시절 어머니의 모습은 식구들이 다 자는 이른 새벽에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두었던 찐빵 반죽을 인 채, 연탄 두 장을 새끼에 매서 들고 축축한 새벽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지시던 뒷모습입니다. 어릴적 저는 ‘어머니는 잠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연탄화덕에 불 피워 장사를 시작해 밤 늦게서야 들어와서는 다시 앉을 틈도 없이 내일 쪄서 팔 찐빵 반죽을 만들고 단팥소를 끓이고, 끝도 없는 일을 새벽까지 하셨습니다. 저는 옆에서 들고 오신 전대를 풀어 1원짜리 하나까지 신나게 세어 맞추고 장롱 밑 전대에 넣어두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늦게까지 끝나지 않은 일을 하시던 어머니를 지켜보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사로잡아 인정받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1990년대 언론에 소개되며 유명세 탓지만 맛과 정신은 그대로
그렇게 어려운 시절에서 20여년이 흐른 1990년대 초 사람들의 발길이 산골오지였던 안흥면 인근에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대형 스키장이 생겨 유동인구가 늘어나자 42번 국도를 따라 안흥면을 지나던 외부 관광객들이 사먹기 시작해 찐빵은 입소문을 타고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뒤이어 방송사의 취재가 줄을 이었고 이로서 <심순녀 안흥찐빵>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방송에 출연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안흥찐빵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으니 돈 좀 많이 버셨겠다는 취재자의 농담어린 질문에 <심순녀 안흥찐빵> 김태봉 대표는 생각이 많아진 듯 이렇게 말한다.
“돈요? 많이 벌었죠.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고 시작한 어머니의 <심순녀 안흥찐빵>은 정말로 우리 식구들이 더 이상 밥 굶을 걱정하지 않게 만들어 줬죠. 연이은 방송출연에 사람들이 멀리서 찾아와 줄을 서서 빵을 사갔고 ‘찢어지게 가난하고 고생만 하던 심순녀 씨 출세했다’느니 ‘돈방석에 올랐다’느니 부러움도 많이 샀죠. 그러나 사람의 이목과 부러움이 집중된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안흥찐빵으로 안흥이 알려지자 하나둘씩 찐빵집이 늘어났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우리에게 찐빵만들기를 배우고 도장받아가며 찐빵집을 내기 시작했고 횡성군에서는 찐빵을 횡성군 특화사업으로 지정해 지원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찐빵이 돈이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만들어 팔기 시작한 사람들과 어머니는 찐빵을 바라보는 시각부터가 달랐지요. 사람들과 제조방법과 경험도 공유하고 지역 경제도 활성화시켜 보자는 취지에서 어머니가 초대회장, 제가 총무를 맡아 ‘안흥찐빵협회’도 만들어 시작했지만 어머니와 사람들은 언제나 동상이몽(同床異夢)일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있어 찐빵은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상품이기에 앞서 배고픈 자식들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한 빵, 그 자체였기에 그러한 마음으로 재료를 구하고 정성을 다하여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더하기빼기에 능숙한 사람들이 만든 찐빵은 아무리 기술과 노하우를 전해줘도 애초부터 어머니의 <심순녀 안흥찐빵>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가격 매겨진 찐빵제품일 뿐이었습니다.”
노하우보다는 정직한 마음과 정성을 담아라
심순녀 여사에게 안흥찐빵 맛의 비결에 대해 묻자 조용히 식품재료 창고에서부터 팥 가공실, 성형실, 숙성실을 차례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숙성된 찐빵 반죽에 단팥 소를 넣어서 찜솥에 넣고 찌는 과정을 보여주며 찐빵 만드는 일에 뭐 특별한 비결이 있겠느냐면서 수줍게 웃는다. 굳이 비결이 있다면 ‘정직한 재료와 만드는 정성’이라는 ‘당연하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비법을 말씀 해주신다. 아닌게 아니라 재료 창고에는 가을에 수매하여 쌓아 둔 국내산 팥들이 가득 쌓여있다. 작년에 가마당 27만원 하던 팥 값이 올해는 많이 뛰어올라 67만원에 수매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어서 팥 가공실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어 왔어요. ‘찐빵을 사서 며칠을 두었는데도 찐빵 안의 팥이 쉬질 않았다’면서 혹시 여기에 방부제 들어간 것 아니냐고 묻데요. 그 때 내가 알았어요. ‘아! 사람들은 팥이 쉬지 않게 하려고 무언가를 넣는구나!’ 하고요. 난 그때까지만 해도 난 방부제가 뭔지도 몰랐어요. 여름에는 단팥이 금세 쉬는 게 문제였지요. 저라고 왜 그런 문제가 없었겠어요? 그날 만든 빵은 그날 다 판매하고 판매 될 만큼만 만들어 파는 거예요. 그것밖에 다른 수가 있나요? 그리고 팥을 볶을 때 되게 볶아야 돼요. 슬쩍 볶아서 대충 넣으면 금세 쉬어서 못 써요. 여름이건 겨울이건 땀을 비 오듯 쏟으면서 솥에다가 되게 볶아야 해요. 우리 아들한테 들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공된 팥소를 사서들 쓴다고 해요. 그래서 닷새고 열흘이고 쉬지들 않나?(웃음)”
옆에서 듣고 있던 김태봉 대표가 어머니의 말씀에 한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요즘 다른 사람들은 어머니가 만드셨던 <심순녀 안흥찐빵>과 차별화 시키려고 여러 가지를 만들어 내더라고요. 쑥 찐빵이니 호박찐빵이니 하고 오색(五色)찐빵을 만들어 파는데 보기도 좋고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으니 참 좋겠지요. 색을 내는데 쓴다는 쑥이니 호박이니, 그 재료가 정직하면 건강에도 좋고 영양도 좋겠으나 그렇지 못할 바에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 어머니와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희 <심순녀 안흥찐빵>에는 색깔 있는 찐빵은 없습니다. 투박하나마 원래 선보였던 그대로 하얗고 동그란 찐빵만을 만들고 있습니다.”
‘구들장 방식’으로 만들어 품질인정받아 ‘신지식인’돼
<심순녀 안흥찐빵>에 또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 ‘구들장 방식’이라는 숙성방식이다. 38~42℃ 내외의 숙성온도에서 두 번에 걸쳐 발효 숙성시키는 이 방식이 안흥찐빵의 차진 맛을 만들어낸 비결. 늦은 저녁, 그날 장사를 끝마치고 돌아와 늦은 밤에 다시 내일 쓸 반죽을 만들어 방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두고 다음날 아침까지 숙성시키던 그 방법은 현재 아들 김태봉 대표가 재현하여 발전시켰다. 심순녀, 김태봉 모자는 구들장 방식 숙성법의 노하우를 인정받아 2007년 3월, 신지식인협회로부터 모자(母子)가 함께 신지식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고 2010년에는 ‘2010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 식품부문에서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상을 수상하였다.
원주의 상지대학교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가업인 <심순녀 안흥찐빵>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아들 김태봉 대표는 당시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하며 어머니가 만드셨던 빵과 자신이 만드는 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가난한 시절, 자식들의 배고픈 허기를 채워주는 빵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에 지나 풍요로운 세상이 와, 더 이상 허기를 채워주는 빵은 필요치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물질적 풍요는 우리에게 ‘정신적 허기’라는 새로운 결핍을 가져왔습니다. 고픈 배를 채우는 빵 만들기가 어머니의 사명이었다면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마음을 담아 현대인의 정신적 허기를 메워주는 빵을 만드는 것이 저의 새로운 사명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심순녀 안흥찐빵>을 ‘안흥찐빵 원조’라고들 말을 합니다. 그러나 빵에 있어서 진정한 원조(元祖)가 있을까요? 있다면 자식들에게 빵을 만들어 먹인 세상의 모든 어머니, 그분들 모두가 그들의 자식들에게 빵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빵을 만드는 마음과 과정은 어머니께서 그러하셨듯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삶의 한 형태이고 사는 모습 그 자체일 때 가장 순수하고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원조 정신이란 이윤 창출만을 목적으로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를 추구하는 거대 기업이 되기 보다는, 고객과 함께 하려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을 다하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당당한 자부심, 이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원조의 진정한 마음이며 자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순녀 안흥찐빵>이 유명세를 타자 안흥 읍내에 찐빵집이 우후죽순 생겼고 대형설비를 갖춘 식품회사까지 들어와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찐빵을 찍어내듯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시사철 쉴 새 없이 만들어 냉동 창고에 냉동 보관하다가 날이 추워지면 대량으로 저가에 판매합니다. 그런 찐빵은 아무래도 배고픈 허기는 다소 채워줄 수 있을지언정 어려웠던 시절의 추억과 어머니의 자식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엔 어딘가 모르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쌀쌀한 겨울 저녁, 뭔가 마음속이 허하고 쓸쓸한 이여! 당신은 배가 고픈가? 아니면 마음이 고픈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심순녀 안흥찐빵을 먹어보자. 출출함을 몰아내는 것은 물론, 가슴 따듯한 우리네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까지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월간외식경영ㅣ글·사진 ‘원조코리아’ 심상용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