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정말 한 많은 20세기를 보냈다. 못 먹고 헐벗었다. 많은 이들이 한 맺힌 생을 살다 갔기에 '한의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가장 극명하고도 가슴에 사무치게 남아있는 한이 있다면 무엇일까. 바로 '못 배운 한'이다.
그런데 못 배운 자신에 대한 한풀이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못 배웠으면 배우면 된다. 이를 위한 통로도 다양하다. 정규 학교도 있고 대학의 평생교육원이나 수많은 학원과 강좌도 있다. 어떤 곳에서든 열심히 공부하면 가슴에 응어리진 '못 배운 한'을 해소할 수 있다. 문제는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공부는 뒷전이고 좌우간 간판만 따면 된다는 식의 세태가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편법과 특혜를 가르치는 대학
지난 주 김연아가 학업보다 광고 등 상업적 이윤 추구 활동에 더 열심인 것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는데 그 칼럼은 비난, 비방을 넘어 욕설이 듬뿍 담긴 무수한 게시판 댓글을 나에게 선사했다. 대충 보니 국위선양을 했고 우리를 그렇게 기쁘게 해줬던 김연아인데 고작 그런 거 가지고 험담을 하냐는 것이다. 하여튼 건드리면 다치는 게 국가주의에 기반을 둔 팬덤 아닌가 싶다. (☞관련 기사 : 춤추며 맥주 마시는 선생님, 우리 김연아 선생님!)
나를 포함한 많은 국민이 김연아를 좋아하고 그에게 고마움마저 느낀다. 김연아는 그로 인해 넘칠 만큼의 보람도 얻었다. 부와 명예와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그가 더 많은 돈을 벌어도 전혀 문제 될 것은 없다. (한편으로 그의 지나친 상업적 활동이 혹시 이기수 고려대학교 총장이 고대 정신을 너무 '팍팍' 불어넣다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김연아가 금메달을 딴 것과 그가 대학 생활을 '학칙'에 근거해 학생답게 해야 하는 것 사이엔 아무런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아가 (타의 모범의 되어야 한다는) 공인이고 말고를 따질 필요도 없다. 국민이 좋아한다고 해서 4년간의 대학 생활을 대충하고 졸업장을 거머쥘 자격까지 얻은 것은 아니다.
내가 이 문제를 또다시 제기하는 이유는 학생 신분인 그가 중고생을 가르치는 교생 실습 기간에 다른 광고도 아닌 주류 광고에 출연했다는 점도 있지만 이것이 동시에 우리 사회 대학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업에 충실하지 않았음은 물론 출석일수도 제대로 채우지 않은 학생이 결국 졸업장을 따게 된다면 첫째 학칙 위반이고 둘째 형평성 문제이며 셋째 졸속 학위 수여에 더해 편법에 의한 학위 남발이다.
대학엔 엄연한 학칙이 있다. 대부분의 대학은 한 학기 출석의 3분의 2를 채우지 못하면 무조건 F 학점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통의 '명문대'인 고려대는 이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운동 선수 출신들이 사회에서의 사리판단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편법, 탈법, 특혜를 학교가 학생에게 가르쳐서 사회로 내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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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마저 마케팅 하는 김연아 기획사
김연아는 1, 2학년 때 학교를 1년에 한 번 남짓 '방문'했고 그의 매니지먼트 회사인 올댓스포츠는 그의 등교를 보도 자료를 뿌려가며 마케팅 기회로 활용했다.
그런 김연아가 지금 4학년이 되어 교생 실습에 나갔는데 이번에도 올댓스포츠는 김연아의 교생 실습을 마케팅 용도의 쇼케이스(새 음반이나 신인 가수를 관계자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갖는 특별 행사)로 삼았다. 교생 실습 첫날 기자들 앞에서 공개 강의를 하게 하자고 학교 측에 계속 요구해 결국 관철된 것이다.
나도 교생 실습 나가봤지만 교생 실습에 나간 학생이 공개 강의를 하는 것은 한 달간의 실습을 거쳐 마지막 날에 하는 것이다. 진선여고에 처음 나갔는데 그가 무슨 실습을 했으며 또 무엇을 배웠다고 학생들을 가르치는가. 교생 실습을 장난으로 아는가.
내가 이제까지 김연아에 대한 글을 몇 번 썼는데 비판적인 글을 쓰는 경우 비판의 종착지는 언제나 김연아의 매니지먼트 회사였다. 김연아의 활동은 고등학생 때 슈퍼스타가 된 그보다는 매니지먼트의 책임이 크다. 올댓스포츠는 김연아의 교생 실습마저 돈벌이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교생 실습을 나가면 늦은 오후 퇴근 시간까지 교사로서의 업무도 배우게 된다. 일지도 쓰고 청소 지도까지 한다. 그러나 김연아는 자신의 강의 시간을 채우고 일찍 퇴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상은 상업적 활동 때문 아닌가. 물론 '특별한 경우' 어느 정도의 배려가 있다. 그러나 김연아는 현재 태릉선수촌에서 합숙을 하는 국가 대표도 아니다. 개인의 금전적 이윤 추구를 위한 활동을 하는 그에게 적용될 배려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는 편법, 탈법 배우는 곳이 아니다
서구의 많은 대학 선수들은 운동과 학업을 '제대로' 병행하느라 고생을 한다. 결석을 출석으로 인정하는 경우는 대회 출전 기간뿐인데 이마저도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해외로 가는 청소년 선수들 경우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다. 시험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한국에 왔던 외국 선수들이 시합 전날에도 호텔방에서 시험 공부한다는 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프로 선수가 되는 경우 아무리 스타플레이어라도 예외가 없다. 학업을 병행할 수 없으면 자퇴한다. 마이클 조던(노스캐롤라이나 대학)도 그랬고 개인 종목인 골프의 타이거 우즈(스탠포드 대학)도 학교가 조금만 봐주면 될 듯했지만 자퇴했다. 한국의 대학들처럼 유명 선수라는 핑계로 봐주는 경우는 없다.
스탠포드 대학에 진학한 미셸 위는 학업을 위해 출전 대회 수를 최소화 했고 올해 6월 졸업을 앞두고 있다. 미국의 한 골프 전문가는 남녀 통틀어 올해 돌풍을 일으킬 선수로 졸업과 함께 공부의 부담을 덜게 될 미셸 위를 지목하기도 했다. 또 메릴랜드 대학에 재학 중이던 농구 선수 최진수는 한 과목에서 1점 차이로 정규 학점을 채우지 못해 다음 학기 출전권이 박탈됐고 그래서 결국 한국행을 택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망 운동선수들이 우리처럼 특례로 명문 대학에 입학하기도 하지만 학업을 게을리 할 경우 학교는 단호하게 대응한다. 학생 선수들은 스스로 시합 일정과 훈련 시간에 맞춰 시간표를 짜는 것이 기본이다. 어린 나이에 '탁구 신동'으로 불리며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일본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는 후쿠하라 아이는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가 학교 측이 전지 훈련 등 대표 팀 훈련에 학점상의 배려를 주지 않자 결국 자퇴했다. 본인으로서는 매우 안타까울 3학년 때 벌어진 일이다.
한국의 대학들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선지 '입학 장사'를 위해선지 많은 연예인들을 특례 입학 시키고 있다. 요즘 특기에 따른 다양한 전형 방식이 있으니 특례 입학까지는 좋다. 그런데 이들 연예인들이 수업에 안 들어가도 죄다 졸업을 시키고 있다. 심지어 4년 내내 수업에는 오지도 않는데 학교 홍보 행사에 얼굴을 비추는 조건으로 졸업을 하는 '유령 대학생'들도 있다.
일본은 어떨까. 일본의 연예인들도 다양한 전형을 통해 와세다 대학이나 게이오 대학 같은 명문대에 입학하기도 한다. 아이돌 스타들이 많이 다니는 호리코시 고등학교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도 연예 활동이 바빠지면 결국 휴학하거나 자퇴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연예인들은 '졸업'이 대부분인 반면 일본은 '중퇴'가 많다. 한국과 일본의 대학의 수준 차이는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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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대학은 열심히 공부하는 곳"
현재 최고의 인기인이면서 막강한 '삼촌팬'을 거느린 아이유는 올해 대학에 진학할 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방송에 출연해 "대학은 노력한 사람이 가야 한다"면서 "지금처럼 바쁘면 대학 생활도 소홀히 하게 될 것"이라며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대학은 더 열심히 공부하는 곳"이라고 말한 그는 대학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전교회장을 했고 중학교 때엔 전교 석차 20위권이었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능을 봐도 아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며 "나중에 잘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을 때 수능을 쳐서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친구들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화성악도 배우고 작곡 공부도 열심히 해서 더 멋진 사람이 될 계획이라고 한다.
특히 "대학을 가기 위해 데뷔한 게 아"니고 또 특례로 입학할 경우 대학 입학은 "부가적으로 얻는 특혜 같은 거라 고마운 줄도 몰랐을 것"이라고 설명한 아이유는 "뭔가를 배울 때도 비싼 걸 사놓으면 포기하기가 아까운 것처럼, 대학을 갈 때도 어렵게 들어가면 열심히 하지 않을까 싶다"며 자신의 노력으로 대학 진학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사실 그가 대학 진학을 마음만 먹었다면 입학은 물론 졸업까지 보장하며 장학금까지 주겠다는 대학은 아마도 줄을 섰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유는 '바보'인가.
'진짜'보다 좋은 '가짜', '가짜'보다 못한 '진짜'
아이유의 대학 입학 포기 (또는 연기) 선언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왜? 한국 사회는 개인의 능력이나 내면보다는 간판과 껍데기가 더 중요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품으로 승부하지 않는가. 가짜 명품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아닌가. 그러다 보니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 같고, 더 출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07년의 '신정아 파문'은 한국 사회에 거대한 '학력 위조 태풍'을 몰고 왔다. 장미희, 김옥랑, 이창하 같은 교수에서부터 윤석화, 최화정, 강석, 오미희, 최수종, 주영훈, 심형래, 다니엘 헤니 등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가짜'가 드러났다.
당시 변명도 다양했다. 철없던 어릴 시절 만들어진 가짜,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가짜, 매니저가 만든 가짜, 악의는 없었던 가짜, 사회에 기여를 많이 한 가짜가 등장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가짜'들은 지금도 '진짜'보다 더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짜'는 정녕 '진짜'일까. 학교에 제대로 나가지도 않고 거머쥔 졸업장은 과연 진짜일까. 수업도 별로 안 들어가고 보고서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교사가 되고 교수가 되면 과연 진짜일까.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다 가짜 아닌가. 그렇다면, 대학이 바로 한국 사회 가까의 근원 아닌가. 학교는 '가짜 진짜'를 만들어 내보내고 '진짜 가짜'들은 학교를 팔고.
유명 운동선수나 연예인을 학생으로 입학시켜 홍보의 도구로 여기는 대학이 많아졌고 이를 위한 편법적, 탈법적 특혜가 아무렇지도 않게 관행화 됐다. 결국 대학이 이 학생 아닌 학생, 즉 '유령 학생'들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이다. '입학 장사'다. 그러나 대학은 아이유가 말했던 것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