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일본 교육을 받았다. 키가 작아 맨 앞줄에 앉았다. 선생님은 칼을 차고 교실에 들어왔다. 칼집 끙이 교단에 끌리는 것을 보면서 기초 공부를 했다.
교탁 옆 벽에 걸린 지도엔 우리 나라와 일본이 같은 빨간 색이었다. 나란히 평면지도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쳐자볼 적마다 눈길을 끌었다. 대견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8월 15일 정오. 항복문을 읽는 천황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가 장농 깊숙한 곳에서 소나무로 시작되는 조선어 독본을 꺼내 주셨다. 우리 나라와 일본이 한 색깔이 아니며 또 세계의 한 가운데 자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뒷날 밖에 나가서 공부하며 초등학교 시절에 겪은 어이없는 일에 끌리는 바가 있어서 이리노이주 스프링필드라는 농촌 도시의 한 초등학교엘 불쑥 들어가본 적이 있다. 평면지도는 없었고 교재로 쓰이는 지도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구본이었다.
평면지도와 둥근 지구본,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기준인 자기 본위(自己本位)는 자기가 알파요 오메가라는 자기 중심주의 사고방식을 가르친다. 일본이나 독일의 경우다. 독일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 일부러 찾아가 살폈더니, 역시 교실 안의 평면 지도 한가운데엔 독일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서독이 나뉘어졌던 때이건만 동서독 구분없이 한 색의 독일이 세계의 한가운데 있었다.
둥근 지구본을 빙빙 돌려가며 남이 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에서 늘 남을 의식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르치는 나라는 놀라운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
필자의 착각은 이로써 모두 깨어난 것이 아니다. 그린랜드는 대단히 큰 땅덩이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앗다. 둥근 지구본 오무려진 부분을 같은 면적의 경도로 폈을 때 실제보다 큰 지도면적을 지니게 된 것 뿐이었다. 그 뿐인가. 아이슬랜드는 추운 곳인 줄로만 여겼으나 그곳에도 꽃이 피고 봄이 온다는 사실을 뒷날 실감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의 출발 기점이 자기에서 시작되고, 자기에게 돌아오도록 귀착점을 기대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훈련시킨 나라는 2차대전 패배라는 값비싼 실패를 경험하였다. 이것은 개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타인에게 제3자일 수 있다는 위상을 훈련시키면 아집과 독선에서 그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다.
본론을 이야기하자. 프랑스 태생의 미국 가톨릭노동자 피터 모린(Peter Maurin)이 쓴 「푸른혁명」(Easy Eassy, Green Revolution)의 시작에 『그리스도는 환전상들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셨다. 하지만 오늘날엔 아무도 감히 그들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지 못한다』는 구절이 씌여진 사실에서 필자는 눈을 한동안 뗄 수 없었다.
넉넉한 사람의 야심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하던 땅이, 그들의 무덤까지 완전하게 덮어준다고 성 암브로시오는 말했다. 개신교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 가톨릭에서도 성전의 돔을 하늘 높이 치켜올리는 데 여념이 없다.
7%에 이른 쫓겨난 직장인들이 무료점심식사 대열에 식판을 들고 기나긴 줄을 서고 있건만, 교회는 이 절박한 문제를 제쳐두고 사제로 하여금 돔을 높이는 문제에 대해 더 자주, 그리고 열심히 입을 열도록 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 25년 동안 너무 힘겹고 벅차게 살아왔다. 역곡 제1성당, 역곡 제2성당, 인천신학교 건립 후원 그리고 일산 백석교회 동네로 이사해 살면서 내가 혹시 「위대한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가끔 생각되어 기도 속에 눈썹을 뽑아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다윗에게 성당 건립을 미루라고 타일렀다. 「내 집은 다음 대에 지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타일렀다. 지금 교회가 할 일이 과부의 한푼까지 모아 돔을 높이는데 쓸 때인가. 왜 평신도는 모두 이런 일에 침묵하는가.
오두막 같은 하느님의 집이 거대한 신축건물 한 구석에 갇히듯 놓여있어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스페인의 경우, 기독교의 힘은 사라센의 압력을 끝내 버텨냈으며 오늘도 건재하고 있다.
가장 절박한 현실 문제를 하느님은 언제나 오늘 해결할 문제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것이 참 신앙의 지름길이다.
진실로 절박한 거리의 문제를 제쳐두고 다른 문제에 열심이면, 참신앙이 냉담하지 않을 수 없다. 참신앙과 「2차헌금」과는 별개의 문제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교회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야 한다.
♣ 고침
방주의 창 2월 13일자 내용 중 「자기가 기준인 지구 본위」를 「자기가 기준인 자기 본위(自己本位)」로 바로잡습니다.
유경환(클레멘츠·한국아동문학교육원 원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