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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3.17.PM2시)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설법심심(說法甚深)
어제는 업과심심 오늘은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설법심심(說法甚深) 보살문명품이 아주 의미심장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모든 경전이 다 보통 범인들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존재의 이치를, 진리를 깨달으신 분들이 당신들 눈에 환히 들어오고 마음에 잡히는 훌륭한 이치와 내용들을 일러준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쉽게 다가서질 않지만 그러나 모든 존재의 실상에는 그러한 이치들이 다 스며있다.
그렇게 있는 것을 우리가 알도록 하라고 자비로써 일러주는 내용들이다.
오늘은 설법심심(說法甚深) 설법에 대한 우리가 모르는 깊고 깊은 도리가 나온다.
불교에는 온통 설법이다. 전체 내용이 모두가 설법이다. 그저 설법가지고 모든 것을 다 하지 않는가.
부처님께서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으신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부처님 당신이 깨달으신 내용을 설법하셨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많이 강조하신 것이 설법이다. 설법을 통해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세상이치를 알고, 깨닫고, 그것을 또 우리가 일상생활에 실천수행함으로 해서 우리 삶이 더 유익하고 풍요로워지고 편안해지고 실수 없이 살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불교는 어떻게 보면 오로지 설법이다.
설법을 통해서 모든 이치를 우리가 안다. 그리고나서 실천하고 안하고는 각자의 문제다. 물론 당연히 실천을 해야 되지만 실천 이전에 설법이 첫째다.
예를 들어서 ‘보시를 많이 하면 복이 된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그것을 일상생활에 우리가 표현하자면 여러 가지 길이 또 있다. 그러한 것들을 낱낱이 일러주는 것이 설법심심이다. 설법에 대한 깊고 깊은 도리가 있는 것이다.
4. 설법심심(說法甚深)
1) 문수보살이 덕수보살에게 묻다
(법문의 열 가지 한량없음)
이시(爾時)에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문덕수보살언(問德首菩薩言)하사대 불자(佛子)야 여래소오(如來所悟)는 유시일법(唯是一法)이어늘 운하내설무량제법(云何乃說無量諸法)하시며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덕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여래께서 깨달은 것은 오직 이 한 가지 법이거늘 어찌하여 이에 한량없는 여러 가지 법을 설하시며”
부처님 당신이 한 가지를 깨달았지만 8만 4천 법문이라고 하는 법문이 저렇게 해인사에 기록이 되어서 팔만대장경으로 쌓여 있고, 우리가 오늘 이 순간 화엄경이라고 하는 방편을 빌려서 또 가지각색의 가르침을 들춰보고 서로 의논하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흔히 팔만사천이라고 하는데 어디 팔만사천 뿐이겠는가? 화엄경만 하더라도 10조 9만 5천 48자 이렇게도 표현한다.
그런데 깨달은 것은 오직 한 가지다.
현무량찰(現無量刹)하시며
“한량없는 세계를 나타내시며”
화엄경에 소개되고 있는 세계가 또 얼마나 많은가. 정말 무궁무진한 세계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들이 다 이야기되고 있다. 요즘은 허블망원경이 개발되어서, 그동안은 우리가 육안으로 기껏해야 우리 은하,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계를 알고 있었는데 망원경이라고 하는 것이 개발되면서 망원경을 통해 우리 은하보다 수천 수만 배 많고 많은 은하계를 볼 수가 있고 은하계가 무궁무진하게 많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름까지 낱낱이 붙여가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일찍이 2600년 전에 그 많고 많은 한량없는 세계를 이야기했다. 화엄경에 얼마나 많은 세계가 등장하는가?
화무량중(化無量衆)하시며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시며”
중생을 교화하는 것도 한량없다.
예를 들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일생동안 인도전역을 다니면서 교화활동을 하셨다 하지만 그래봐야 교통수단도 다른 것이 없고, 그저 오직 걸어다녀야 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지역의 한계가 있고, 만나는 사람들이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불교가 26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많고 많은 인류와 종족과 나라와 국가와 그런 민족들에게 전파가 되어서 하염없는 중생을 교화한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데까지도 많이 퍼져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고, 2600년 내지 7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이렇게 불법이 전파되어 왔다.
그동안 설법을 통해서 우리가 그렇게 쉽게 깨달아지지는 않는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백 명 중에 한 사람 아니 천 명에 한 사람, 만 명의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게 워낙 오랜 세월이고 워낙 많은 숫자이니까 만분의 일만 우리가 추수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중생인가. 한량없는 세계를 나타내고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고
연무량음(演無量音)하시며
“한량없는 음성을 연설하시며”
지금 세계 각각 나라에 불교가 전파되어서 별의별 말씀과 별의별 음성으로 소개가 되고 설법이 된다.
시무량신(示無量身)하시며
“한량없는 몸을 보이시며”
부처님의 모습도 나라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낸다. 꼭 적절한 모습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서 태국이라든지 중국이라든지 일본이라든지 기타 불교국가 인도라든지 이런 데 가면 곳곳에 불상을 조성해서 파는 곳이 많다. 그런데 보면 꼭 그 나라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모습을 불상으로 조성해 놓았다. 그림을 그려도 그렇고 불상을 조성해도 그렇고 그것이 아주 신기하다.
저는 건강할 때 성지순례를 가면 꼭 불상을, 그 불상이 좀 무거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상을 꼭 사서 모셔왔다.
지금 여기도 여기는 대만에서 조성한 불상을 어떤 스님이 갖다 줘서 이렇게 모시고 있다.
참 여러 가지 한량없는 몸을 보이시며
지무량심(知無量心)하시며
“한량없는 마음을 아시며”
중생들의 각양 각색의 마음, 생각 이런 것을 전부 다 아시고
현무량신통(現無量神通)하시며 보능진동무량세계(普能震動無量世界)하시며
“한량없는 신통을 나타내시며, 한량없는 세계를 두루 능히 진동하시며”
감동을 준다. 한량없는 세계를 두루 진동했다.
시현무량수승장엄(示現無量殊勝莊嚴)하시며
“한량없이 훌륭한 장엄을 나타내 보이시며”
부처님의 삶이란 단순했다. 정말 단순했다. 그리고 인도 사회에서 그 당시 불상을 조각하든지 사찰을 건립하든지 해도 지극히 단순하다. 건축재료도 부족했고, 그저 돌과 흙뿐이었다. 그저 흙을 이겨서 벽돌을 만들어서 그 벽돌을 쌓아서 탑도 쌓기도 하고, 전각을 쌓기도 하고, 요사를 짓기도 하고, 수행처 법당 이런 것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술도 많이 발달하고 또 그 건축 재료도 아주 좋아서 부처님의 도량을 장엄하는데 여러 가지 훌륭한 장엄을 많이 쓴다. 얼마나 값비싼 멋진 재료들, 금이니 은이니 무슨 보석이니 등등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아름다운 것들을 쓰는지 모른다.
제가 꿈에도 그리던 대만성지 순례를 여러 해 전에 했다. 어떤 스님들 모임에서 순례를 갈 때 내가 기어이 고집을 부려서 ‘대만성지 순례를 가야 배울 것이 있다’ 하고 대만으로 한 번 모시고 갔다.
거기 중대선사라는 절에 갔는데 37층짜리 건물이다.
대만은 북쪽 대만이 있고, 남쪽 대만이 있고, 중간 대만이 있다고 해서, 중대라는 도시가 있고 중대선사라고 하는 사찰도 있다. 거기에 이 37층짜리 건물을 세우면서 얼마나 고급스러운 건축 재료를 썼는지 부처님께 올리는 일이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니까, 한껏 썼다.
얼마를 들였는지 액수를 알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액수를 들여서 최고급 건축 재료를 썼다.
거기에 참배하는데 안내하는 사람들이 따라다니면서 ‘절대 손을 벽에 짚지 말라’고 늘 주의를 주었다. 한층한층 우리가 올라갈 때마다 그 주의를 계속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손을 대면 손자국이 나고, 그것을 또 누가 사람들이 닦아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주의도 주는데 자세히 보니 얼마나 고급스러운 자재를 썼는지 조심스럽기도 하고 환희심도 났다.
37층을 낱낱이 다 구경을 못했지만 부처님께 공양을 한껏 한 절이다. 이 지상에서 준비할 수 있는 모든 최고의 좋은 자재를 다 써서 그렇게 부처님께 올리고 그렇게 장엄을 했다. 경전의 말씀 그대로 한량없는 훌륭한 장엄을 나타내 보였다.
현시무변종종경계(顯示無邊種種境界)이닛고 이법성중(而法性中)엔 차차별상(此差別相)을 개불가득(皆不可得)이니이다
“끝없는 갖가지 경계를 나타내 보이십니까? 그러나 법의 성품 가운데는 이 차별한 모습을 두루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설법심심이다.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불자여, 여래께서 깨달은 것은 오직 이 한 가지 법이거늘 어찌하여 이에 한량없는 여러 가지 법을 설하시며, 한량없는 세계를 나타내시며,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시며, 한량없는 음성을 연설하시며, 한량없는 몸을 보이시며, 한량없는 마음을 아시며, 한량없는 신통을 나타내시며, 한량없는 세계를 두루 능히 진동하시며, 한량없이 훌륭한 장엄을 나타내 보이시며, 끝없는 갖가지 경계를 나타내 보이십니까? 그러나 법의 성품 가운데는 이러한 차별한 모습을 모두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덕수보살의 답이다.
2) 덕수(德首)보살의 답
가. 물음에 대한 이익을 찬탄하다
시(時)에 덕수보살(德首菩薩)이 이송답왈(以頌答曰)
그때에 덕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불자소문의(佛子所問義)가 심심난가료(甚深難可了)하니
지자능지차(智者能知此)하야 상락불공덕(常樂佛功德)이니라
불자(佛者)가 물은 뜻
매우 깊어 알기 어려우니
지혜 있는 이가 이것을 알아서
부처님의 공덕을 항상 즐기도다.
상락불공덕(常樂佛功德)이니라.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즐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도리를 안다.
아주 싱거운 소리, 얕은 이치, 크게 공부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상식적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은 또 무슨 새삼스러운 재미가 있겠는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서로가 다 아는 내용이다.
옛날에 어떤 스님은 ‘법문한다’ 하면 일반 신도들을 앉혀놓고 세상 이야기를 하는데, 스님이 되어가지고 세상을 알고 보니 신기하고 재미가 있던지 내내 세상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세상이야기는 세상사람들이 더 잘아는 데도 더 잘 아는 사람 앞에서 공자 앞에 문자 쓰듯이 꼭 그렇게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내가 한자리에 앉아서 듣고 있자니 어떻게나 부끄럽고 민망한지 몰랐다.
‘저런 이야기는 저 사람들이 더 잘 아는데 그런데 왜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한 구절이라도 우리가 확실하게 알지를 못하고 설사 애매모호하더라도 경전 한 구절을 읽어드리면 읽어드리는 사람은 설사 모른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또 아는 수가 있지 않은가.
불자들은 그래야 된다.
내가 전하기는 전해도 사실은 제대로 다 알아서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설사 자기가 모르더라도 전하다 보면 전해 받은 사람은 알 수가 있다. 전해 받는 사람이 무상심심미묘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느끼고 알게 되어서 ‘아 불법이 참 이런 것이구나’ 하고 환희심을 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불법 안에서 행해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 공자앞에서 문자쓰듯이, 공자가 문자를 더 잘 안다. 공자같이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고 있다면 그것은 앞뒤가 안맞지 않은가.
스님들이나 또는 불자들이라도 불교를 가지고 이야기 할 때는 가능하면 세상이야기를 하지말고, 설사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불법을 가지고 전해줘야 한다.
전해주는 그것이 무슨 그릇이 됐든지 상관없다. 속에 담긴 내용을 우리가 전해줄 수가 있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면 그것이 훌륭한 것이다.
그러자고 하는 것이다.
저도 화엄경이 좋아서 화엄경 화엄경 하지만 화엄경을 다 알아서 전하는 것이 아니다. 전해주다 보면 그 가운데 알고 전해주는 것도 있고 모르고 전해주는 것도 있다. 알고 전해주든 모르고 전해주든 그것은 전해주는 사람의 책임이고, 전해 받는 사람은 보석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받으니까 그것이 이익인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어야 된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이 썩 자신이 없다손 치더라도 ‘아 이것은 경전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 그런데 ‘듣고보니까 참 신기하기도 하고 내용도 좋은 것 같아서 전해주노라’고 ‘우리 한 번 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면 되는 것이다.
불자(佛者)가 물은 뜻
매우 깊어 알기 어려우니
지혜 있는 이가 이것을 알아서
부처님의 공덕을 항상 즐기도다
‘아 이것이 부처님의 공덕이구나’ 그런 내용이다.
나. 비유(譬喩)
앞의 설법심심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내용이다. 보살문명품은 그 조직과 경전을 결집한 형태가 아주 특별하다.
비여지성일(譬如地性一)에 중생각별주(衆生各別住)호대
지무일이념(地無一異念)인달하야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비유하건대 땅의 성품은 하나로서
중생들이 각각 달리 살지만
땅은 하나다 다르다 하는 생각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비유하건대 땅의 성품은 하나로서
중생들이 각각 달리 살지만
땅은 우리나라라고 쳐도 좋고, 지구라도 쳐도 좋다. 땅의 성품은 하나다. 그런데 중생들이 사람은 사람대로 사는 방법이 있고, 다른 동물들은 동물이 사는 대로 방법이 있다.
각각 달리 살지만 전부 땅에 의지해서 산다. 땅속에서 사는 동물들은 땅속에서 살고, 땅 위에 있는 생명체들은 땅위에서 살고, 설사 조류가 날아다니면서 산다 해도 늘 날아다니는가? 잠깐 날다가 결국은 땅 위로 돌아온다.
땅은 하나다 다르다 하는 생각이 없듯이
땅은 아무 마음이 없다. 새가 이렇게 날다가 ‘왜 내려오나? 날면 계속 날지’ 땅은 이런 소리를 안한다.
쥐가 쥐구멍을 파서 살면 땅은 쥐구멍을 뚫는 것에 대해서 가타부타 하지 않고, 또 사람이 욕심을 많이 내서 건물을 높이 짓고, 크게 짓는다 하더라도 땅은 거기에 대한 가타부타 생각이 없다. 다 자기 그릇대로,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인연대로, 땅은 ‘하나다,다르다’ 하는 생각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부처님의 법은 하나다. 그런데 거기서 무당은 무당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고, 자기 나름대로 불법에 대해서 아는 대로 또 설명을 하고 그런다. 하물며 불교 안에서 별별 소견을 가지고 자기 배운대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제약이 없다.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는 워낙 광대무변하니까 이왕이면 정법에 가깝게 하면 좋겠지만, 그러나 이치적으로 볼 때 그렇게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설법이 가능하다 그런 내용이다. 그다음에 또 한가지 비유는
역여화성일(亦如火性一)이 능소일체물(能燒一切物)호대
화염무분별(火焰無分別)인달하야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또 불의 성품은 하나로서
능히 온갖 사물을 태우지만
불꽃은 그런 분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또 불의 성품은 하나로서
능히 온갖 사물을 태우지만
불은 어떤 사물도 다 태운다. 나무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종이도 태우고, 심지어 물도 태우고, 석유, 기름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물도 태울 경우가 있다.
불꽃은 그런 분별이 없듯이
불꽃은 똑같다. 물이 타는 불꽃이나 기름이 타는 불꽃이나, 나무가 타는 불꽃이나, 건물이 타는 불꽃이나, 무슨 들불이나 산불이나 불꽃은 그런 분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로다. 불꽃은 여러 가지 불의 양상이 있다 하더라도 온갖 사물을 태우는 데는 양상이 다르지만 불이라고 하는 성질은 하나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하나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하나인데 거기에 얼마나 여러 가지가 있는가? 여러 가지 법을 설하신다. 한량없는 세계, 중생 교화 음성, 한량없는 몸을 보이고 한량없는 마음을 알고, 신통을 나타내고 등등 무수히 많다.
불의 성품은 하나로서
능히 온갖 사물을 태우지만
불꽃은 그런 분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또 하나의 비유
역여대해일(亦如大海一)에 파도천만이(波濤千萬異)나
수무종종수(水無種種殊)인달하야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또 큰 바다는 하나로서
파도는 천만 가지로 다르지만
물은 가지가지의 다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제가 비유를 잘 드는 말이다. 큰 바다에 물이 출렁거린다. 그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느냐, 세게 불어오느냐, 약하게 불어오느냐, 거기에 따라서 파도가 천만 가지다. 물결은 천만가지다. 그러나 그 물이라고 하는 것, 더구나 젖는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가지가지 다름이 없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런데 거기에 물결이 각양각색 큰 물결 작은 물결, 흐린 물결 맑은 물결 참 여러 가지 물결이 있다.
우리들 마음도 결국은 하나인데 본 밑천은 하나다.
거기에 또 한가지 밑천을 이야기하자면 하루에 24시간이라는 밑천도 한 가지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밑천이 있고 똑같이 동일한 밑천이다. 우리 한마음의 능력이 똑같다는 것과, 하루 24시간이라고 하는 조건이 똑같다는 것이다.
만고에 불변하는 그 두 가지 큰 조건이 똑같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 밑천이다.
모든 사람이 다 갖추고 있는 밑천이 그렇게 한가지인데 우리가 천차만별의 삶을 살아간다.
왜 그러겠는가?
누가 이러고 저러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부모를 어떻게 잘 만났다, 잘못 만났다, 가방끈이 길다 짧다 그것은 아무 조건이 안된다.
오로지 각자 스스로 자기 관리, 자기 마음 씀씀이 거기에 따라서 다를 뿐이다.
조건과 밑천은 똑같다.
한마음이라고 하는 밑천이 있다. 남자 마음, 여자 마음인 다른가? 절대 다르지 않다.
여자 24시간과 남자 24시간이 다른가? 절대 다르지 않다. 똑같이 24시간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하루에 24시간에서 4시간만 자고 20시간을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스무 시간을 자고 네 시간을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이치를 우리가 자꾸 성인들에 의해서 들어서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자녀들 또는 손자들의 교육 방침에 대한 조언도 된다.
큰 바다는 하나로서
파도는 천만 가지로 다르지만
물은 가지가지의 다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역여풍성일(亦如風性一)이 능취일체물(能吹一切物)호대
풍무일이념(風無一異念)인달하야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또 바람의 성품은 하나로서
온갖 사물에 능히 불지만
바람은 하나다 다르다 하는 생각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바람의 성품은 하나다. 그런데 일체 사물에 능히 불어온다. 바람이 세면 큰 나무가지도 부러지기도 하고, 자동차도 날아가고 기와도 날아가고 지붕도 날아가고 사람도 날아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바람은 ‘하나다, 다르다’ 하는 생각이 없다.
똑같은 바람인데 조건에 따라서 그것이 참 고마운 바람이 될 수도 있고, 아주 나쁜 바람이 될 수도 있고, 큰 피해를 주는 바람이 될 수도 있고, 한번씩 파도 같은 것을 뒤집어서 뭔가를 새롭게 정화를 시키는 일이 되기도 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다.
바람이 하나이듯이 하나의 부처님 깨달음에 의한 법인데 여러 가지로 팔만사천 근기에 팔만 사천의 처방전의 가르침이 있다.
역여대운뢰(亦如大雲雷)가 보우일체지(普雨一切地)호대
우적무차별(雨滴無差別)인달하야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또한 큰 구름이
온갖 땅에 널리 비를 내리되
빗방울은 차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비유가 너무너무 적절하다. 큰 구름이 일고 그 구름에 따라서 비를 쏟아붓는데 빗방울은 차별이 없다.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다.
역여지계일(亦如地界一)이 능생종종아(能生種種芽)호대
비지유수이(非地有殊異)인달하야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또 땅덩이는 하나로서
능히 갖가지 싹을 내되
땅은 다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땅덩이는 하나로서
능히 갖가지 싹을 내되
지금 마침 봄날이 되어서 땅에서 별별 싹이 올라온다. 올라오면서 벌써 꽃을 피우는 것도 있고, 키가 1센티미터도 채 안되고 기껏해야 1밀리미터 2밀리미터 정도 되는 식물인데도 벌써 꽃을 피워서 자세히 봐야만 그 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여러 가지의 모습을 나타낸다. 저 상사초는 아주 일찍이 싹이 트고 무성하고 지금도 한 30센티미터씩 벌써 자라고 있지만 아직 꽃은 피우지 않는다.
참 각양각색이다.
갖가지 싹을 낸다.
땅은 다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땅이라고 하는 한 가지 조건에서 그렇게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서 그야말로 인과 연과 그런 결과 이런 것들에 의해서 온갖 식물들이 다 다르게 자기표현을 하고 있다.
부처님 법도 그렇다.
부처님 법은 하나인데 부처님 법에서 무당들은 무당짓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서 또 무당하고 유사한 짓을 하고 평생을 살다가 간다.
내가 가끔 스님들에게도 그런 법문을 하는데 국자가 수십년을 국을 떠다나르지만 국자는 국맛을 모른다.
‘불교에 좀 신심을 내고 공부하라’ 이 암시를 내가 늘 준다. 그래도 요지부동이다.
마지못해서 그저 강의 시간에 오긴 오지만 도대체가 뭔가 깨달음이 있고, 느낌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내가 유심히 살핀다.
그런데도 정말 ‘국자가 국을 떠다나르지만 국맛을 전혀 모르고 무심히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본다.
땅덩이는 하나로서
능히 갖가지 싹을 내되
땅은 다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다
부처님의 법은 하나인데 우리가 인연을 잘 지어야 되고 업을 잘 쌓아야 된다.
어릴 때 같이 강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수십 명 한 방에서 공부하고 그랬는데 지금 몇 십년이 흐른 뒤에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전부 다르게 산다.
절 집안에 사는 사람도 있고 안 사는 사람도 있고 절집안에 살아도 그야말로 희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전부 다르다. 우리가 길을 잘 내야 되고 길을 잘 들여야 된다. 길을 잘 들여야 되고 습관을 잘 들여야 된다.
부처님의 법은 하나인데 그렇게 여러 가지 식물의 싹을 다르게 내듯이 다르다. 봄이 되어서 밖에 나가서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이러한 이치도 한 번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여일무운에(如日無雲曀)에 보조어시방(普照於十方)이나
광명무이성(光明無異性)인달하야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마치 해가 구름에 가리지 않아
시방을 널리 비추나
광명은 다른 성품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태양이 구름에 가리지 않아서 오늘같이 이렇게 맑은 날, 환하게 세상을 비춘다. 그래서 그 태양의 광명은 다른 성품이 없다. 똑같다. 그런데 그 태양빛을 받는 사물의 조건에 따라서, 어디에 있느냐, 그 조건에 따라서 다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다.
부처님의 법은 태양의 밝은 빛과 같다.
경전에는 태양의 밝은 빛과 부처님의 법을 연관시켜서 많이 이야기 한다.
유여천일출(猶如千日出)이라,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의 가르침을 펴는 것은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서 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것과 같다.
그렇게 밝게 밝게 비추건만 사람들은 외면하고 눈을 감아버리고, 눈을 떠도 한쪽 눈만 뜨고, 또 조금 떴다가 감아버리고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좀 오래 뜨고 그 밝은 빛을 받아들이고 하면 좀 좋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들이 더러 있다.
역여공중월(亦如空中月)을 세간미불견(世間靡不見)이나
비월왕기처(非月往其處)인달하야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또한 하늘에 있는 달을
세간에서 모두 보지만
달이 그곳에 간 것은 아니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태양의 비유가 나왔으니 달의 비유가 당연히 나와야 한다.
하늘에 있는 달을
세간에서 모두 보지만
달이 그곳에 간 것은 아니듯이
하늘에 있는 달을 보지만, 달은 그곳에 오지 않는다.
달은 그냥 무심히 비출 뿐이다. 그런데 그 빛을 받는 사람과 또 사물들은 각양각색의 다른 영향으로 그렇게 달빛을 받는다.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비여대범왕(譬如大梵王)이 응현만삼천(應現滿三千)호대
기신무별이(其身無別異)인달하야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비유하건대 대범천왕이
삼천세계에 가득 차게 나타나지만
그의 몸은 다르지 않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대범천왕은 삼천 대천 세계를 주관하는 천왕이다.
비유하건대 대범천왕이
삼천세계에 가득 차게 나타나지만
그의 몸은 다르지 않듯이
하나의 몸인데 곳곳에 나타난다, 그런 뜻이다. 그의 몸은 다르지 않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도다
부처님의 법은 온 우주에 가득차게 있다. 온 우주에 조금도 빈틈없이 가득차게 있다.
그 법을 우리가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깨닫느냐, 또 그것을 얼마나 넓고 깊고 받아들이느냐 여기에 따라서 사람마다 다 수용하는 것이 각각 다르다.
각각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르게 수용했으므로 그 표현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화엄경 같은 훌륭한 성인의 가르침을 만난 것은 보통 복이 아니다. 부처님 영향력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일 중에 최고 행운아로서 부처님의 훌륭한 법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아시고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란다.
이것은 보통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된다.
오늘 화엄경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다.
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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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모두 성불하십시다.
첫댓글 _()()()_
🙏🙏🙏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부처님은 무량신통으로 한량없는 형상으로 한량없는 설법으로 한량없는 몸을 보여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신다.
지혜있는 이가 그 뜻을 알고 이해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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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덩이는 하나로서 능히 갖가지 싹을 내되 땅은 다름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도 이와 같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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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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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