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타 9 - 센슈공원을 찾아 정원을 구경하고 옛 구보다성의 야구라 망루에 오르다!
2022년 10월 31일 아키타역( 秋田駅) 동구에 있는 도요코인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는 옛날 구보다성
에 조성된 센슈공원 을 보기 위해 걸어서 구보다성의 해자로 구보다성의 해자로 오테몬노호리
(大手門の屈) 라 부르는 연못을 구경하는데.... 연못에는 니가타현 다카다성 처럼 온통 "연꽃" 입니다.
연못, 옛날 성의 방어시설이었던 해자 중간에 분수 가 오르는 것은 해자의 물은 고인지라 산소
를 빨아들여 녹조 를 방지하기 위함인가 본데..... , 연못 모서리에 오테몬을 지나
성벽을 끼고서 한 블록을 더 걸으니 왼쪽에 입구가 보이니 동문인 구로몬(黑門 흑문) 입니다.
아키타 秋田(추전) 는 일본 동북지방으로 간토 마쓰리가 열리고온천이 유명하며 쌀과 술 의 고장인데다가
견직물인 아키타 하치조 에 순 은실을 꼬아 만든 장식품인 은선 세공 과 이코마 옷칠기 가 유명합니다.
여기 산 언덕에 자리한 센슈코엔 千秋公園(천추공원) 은 17세기 초 에도막부시대
에 이 지방의 영주인 사타케 씨의 거성이었던 구보다성터 (久保田城跡) 에
자리잡은 공원인데 입구에는 사타케 자료관 佐竹資料館(좌죽자료관) 도 있습니다.
넓은 터를 지나 올라가니 정원 이 보이는데.... 정원 한 가운데에 고케쓰 (胡月池 호월지) 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 오래된 나무들이 많으면 작은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 잉어 들도 많이 보입니다.
찾집 옆에 나가사키몬 터 를 지나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오래된 소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우라몬터를 지나 혼마루 에 동상이 서있는걸 보니 사타케 요시노부
(佐竹義宣) 이니 여기 아키타시 는 16세기 센고쿠(전국) 시대에는 구보타 라고 불렸습니다.
혼마루 주변을 구경하고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언덕 최상부에 자리한 구보다성 오스미 야구라
망루 (御隅櫓 어우노) 로 찾아가서는 안으로 들어가니 다행히 요금은 받지 않는다기에
윗층으로 올라가서는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적을 방어하는 요새를 구경하면서 내려옵니다.
히타치국 오타 (현재 도쿄 북동쪽 이바라기현) 성주 사타케 요시노부 는히데요시 사후에 동서 18만 대군
이 일본의 주인 자리를 놓고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중립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미움을 사니 아키타 로 영지를 옮기고는 이 자리에 구보다성 久保田城을 쌓으면서 번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오타(이바라기현) 의 성주 사타케 요시노부 는 히데요시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시모쓰케국
과 무쓰국 까지 세력을 넓혀 55만석으로 200여명 다이묘 중에서 8위 를 차지했으며,
1591년 본거지를 오타에서 미토 로 옮기는데.... 북으로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
또 남으로는 사가미국(가나가와현 오다와라) 호조 우지나오 의 압박을 받아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던 중에 일본을 거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1590년에 호조씨 가 오다와라에 5대에
걸쳐 백수십년간 또아리를 틀고 큰 세력을 이룬지라 히데요시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가미국 오다와라 정벌 을 개시하니 출진해서는 오시성 전투 에 참가해서 전공을 세웁니다.
이후 사타케 요시노부 (佐竹義宣) 는 도쿠가와, 마에다, 시마즈, 모리, 우에스기 가문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대장 으로 불렸으며..... 히타치노쿠니
54만석 영지 를 획득하는 데에 성공하니 일본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대영주 가 됩니다.
1599년 임진왜란에서 철수한 가토 기요마사등 일곱 장수들이 미쓰나리를 습격 하자 사타케씨는 우키타
히데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고 미쓰나리를 구출 하는데....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의 은총으로
임진왜란 때 전쟁 감독으로 조선에 파병되어 위세를 부린게 조선 파병 무장들의 미움 을 샀기 때문입니다.
1600년에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는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의리 를 중시
하여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쓰나리의 서군 측에 선다는 입장을 표명
하였으나.....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 는 후환을 염려해서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섭니다.
이 때 사타케 요시노부는 아버지와는 싸울 수는 없으니 마음을 바꾸어 도쿠가와씨의 동군이
기후성을 함락시키자 이에야스에게 축하 사자 를 파견하고 자신의 휘하에 있던
사타케 요시히사의 군대가 도쿠가와 히데타다 쪽으로 나아간 일 외에는 중립 을 유지 합니다.
저 1600년의 서군과 동군의 전투는 일본 전국에서 30만 이상의 군대가 전쟁을 벌였
으니...... 주 전장인 교토 동쪽 세키가하라 외에도 전국의 수십곳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아버지와 자식이 또 형제끼리 서로 상대방 진영에 가담해 적군 이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진영에 참가한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지만.... 그 외에도
일본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전쟁에서 어느쪽이 이길지 모르니 양쪽에 나누어
참가 해서는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 를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던 이유도 컸습니다.
이에야스 동군의 승리로 전투가 끝난후 사타케 요시노부 는 이런 애매한 태도 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질타 를 받고는 히타치노쿠니 미토의 54만석 에서 교토나 에도(도쿄) 에서
먼 변방인 여기 시골 벽촌인 데와노쿠니(아키타) 구보타 의 21만석 으로 삭감 전봉 되었습니다.
죽거나 아니면 영지를 모두 빼앗기고는 중신들과 사무라이들은 낭인(실업자) 으로 전락할 위기
에서 벗어난 사타케 요시노부 는 아키타의 구보타성과 가쿠노다테성, 오다테성 을 거점으로
삼고 무쓰국 옛 다이묘들의 유신들과 사타케 가문의 옛 가신들을 등용하여 개간 정책을 폅니다.
사타케 가문의 살기 위한 이런 처절한 노력으로 에도 중기에 구보타번의 실제 고쿠다카
는 45만석 을 상회하였으나...... 다른 가문의 가신인 시부에 마사미쓰 를
중용한 것이 사타케 가문에 오래동안 충성을 다했던 오랜 가신들의 반감 을 사게 됩니다.
이에 사타케 요시노부 는 자신에 대해 암살 기도를 한 가신들을 숙청 하였으며 1614년 죽은 히데요시
의 아들인 히데요리의 거성 을 공격한 오사카성 전투 에서는 도쿠가와군 측 에 참전 하였습니다.
오사카 겨울전투 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군도 10만 이상을 병사들을 모았으니 그 중에 기무라 시게나리
등에게 고전 하여 이마후쿠 전투에서는 새로 등용한 가신인 시부에 마사미쓰가 전사 하기도 하였습니다.
1621년 적자가 없던 사타케 요시노부는 넷째 동생 요시나오를 양자 로 맞이하였으나.....
5년후 폐적 하고 둘째 동생의 아들인 요시타카 를 양자 로 들여 후계를 잇도록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언덕길을 내려와서는 우즈미몬터를 지나 성의 안뜰에 해당하는 혼마루
(本丸 본환) 에 이르러 조금전 올라갈 때 얼핏보고 지나쳤던 동상 을 다시 살펴 봅니다.
조금전에 올라갈때는 구보타번 초대 번주 사타케 요시노부 (佐竹義宣) 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까이 다가가서 이름을 읽으니 사타케 요시타카 (佐竹義隆) 라.... 그럼
초대번주 요시노부 가 아니라 사타케 가문의 20대 당주로 구보타 번의 2대 번주 인데?
요시타카의 처음 이름은 이와키 요시타카 (岩城吉隆) 로 에도 도쿠가와 막부시절 1620년 요시노부
의 동생인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시나노(나가노현) 나카무라 번 1만석 영지를
다스렸다는데..... 3년후에 요시타카는 유리군 가메다 번의 초대 번주 로 전임되고
1626년 백부 인 "사타케 요시노부의 양자" 가 되어 이름을 사타케 요시타카 로 바꾸었던 것이지요.
7년후 백부인 요시노부가 사망하자 가문을 계승하여 여기 구보타번(아키타현) 번주 가 되었으니.... 그 둘째
번주 요시타카 인 모양이네요? 그는 요시노부의 둘째 동생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의 양자 가 된후
우여곡절 끝에 구보타번 번주가 되어 "중흥" 을 이룩한지라.... 초대 번주 대신에 동상이 서있는 모양입니다?
요지오 이나리 신사 를 찾아 붉은 도리이를 구경하고는 옆에 하치만 아키타 신사 를 지나서
그 아래쪽에 자리한 이 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구보다성 표문(表門)" 을 구경합니다.
남문 이라고 불리는 표문(表門) 은 언덕을 올라 오다가 가파른 급경사에 지어졌으니 앞쪽에 지그재그로
통로 를 만들어 방어망 을 형성한 걸 보는데..... 근처에는 종루와 마쓰시타몬 터 가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