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론슨 브라운(62)은 수화기 건너편에서 자신에게 비영리단체 이사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여성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전화를 건 여성은 레슬리 론슨 브라운의 리더십 스킬이 단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레슬리 론슨 브라운은 다른 봉사활동을 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수화기 반대편 여성은 포기하지 않고 애원했다. 레슬리 론슨 브라운은 ‘아, 이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겠구나’ 생각하고 사무실 의자 위에 올라갔다. 그렇게 하면 키가 커진 것 같아서 자신감이 배가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듯 ‘이사직을 맡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단신이고 (당시 금발로 염색했던) 레슬리 론슨 브라운은 “갈색 머리칼에 키가 큰 여성이 낼 것 같은 낮은 옥타브로 ‘이사직을 맡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거절의 짧은 한마디를 내뱉기가 때로는 몹시 힘들다.
연구 조사에 따르면 자선재단 기부나 설문조사 참여를 부탁하거나 낯선 사람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주는 일처럼 도움을 요청하거나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을때, 거절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게 싫어서 마지못해 응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메일이 아니라 직접 얼굴을 보고 부탁하면 거절하기가 더 힘들다.
게다가 일단 거절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이어지는 다음 부탁에는 수긍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캐나다 온타리오 소재 워털루 대학교 경영학과 부교수인 바네사 본스 박사는 “사람들은 거절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거절에 따르는 불편함을 무릅쓰기 싫어서 비윤리적인 요청마저 받아들인다. 올 초 ‘성격과 사회심리학 회보’에 발표한 논문 4편 중 1편에서 본스 박사가 이끄는 연구진은 대학생 25명에게 낯선 사람 108명에게 도서관 소장 도서 아무 페이지에나 ‘피클’이라고 적어 넣어 책을 훼손하라고 부탁하게 시켰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저항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것이냐고 되물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부탁을 받은 낯선 사람 가운데 절반가량은 책을 훼손하는 데 동의했다. 실험에 참여한 대학생 25명이 예상한 비율(29%)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 Emily F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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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스 박사는 “우리는 사회적으로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끼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며 “거절은 관계와 유대감을 해친다는 인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거절하면 상대방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우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거절을 받은 상대방이 마음이 상할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거부를 당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부정적인 정보는 긍정적인 정보보다 대뇌 피질의 전기적 활동량을 속도와 정도 측면에서 급증시킨다. 부정적인 기억은 긍정적인 기억보다 강렬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에서 비롯된다. 마음에 상처가 됐던 경험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다시는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대다수 사람들이 거절을 당해도 그렇게 상처 받지 않는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주장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남들이 우리를 야박하게 평가하리라고 믿는 ‘엄격 편향(harshness bias)’ 때문이다. 본스 박사는 “거절한 후에 나타나는 결과는 실제보다 우리 머릿속에 훨씬 더 나쁜 것으로 각인돼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거절하기를 모두가 어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이지 않고 툭 치면 툭 나올 정도로 반사적으로 거절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거절을 잘 못하는 유형의 성격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남을 즐겁게 하려는 사람(pleaser)은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에게 항상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동네북(doormat)은 갈등을 극도로 싫어한다. 본스 박사는 이런 유형이 특별히 여성이나 남성에 더 많이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몇몇 전문가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거절을 잘 못한다고 추정한다. 여성은 성장 과정에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타인의 시선을 걱정하는 존재로 교육 받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거절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심리학자로 활동하는 주디스 실즈 박사는 “가끔 거절을 해줘야 내가 할 일과 우선순위, 프로젝트를 보호할 수 있다”면서 “거절을 못하면, 남의 일과 관심사에 파묻혀 휘둘리게 된다”고 말했다.
실즈 박사는 거절이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동료 집단으로부터 받는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 책에 피클이라고 쓸 수 없다고 저항하라!) 실즈 박사는 “나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탁은 때때로 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 Emily F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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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상대방에게 거절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고, 거절하고 난 후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효과적인 거절 방법은 뭘까?
미리 연습하는 것이 첫 번째 비결이다. 누군가 어떤 부탁을 해올 것 같을 때 대답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다. 완곡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거절하는 연습을 하자. 어쩔 수 없는 외부적인 상황을 둘러대면 죄책감을 덜 수도 있고 거절에서 비롯되는 어색한 순간도 줄어들 수 있다.
예상치 못한 부탁을 받았을 때는 그 자리에서 바로 답하지 않는다. ‘좀 생각해보고 답할게’와 비슷한 종류의 대답을 미리 준비해두자. 본스 박사는 즉석에서 하겠다고 하지 말고 살짝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죄책감에서 한 발 물러나서 예의바른 대답을 고민해본다.
상대방이 거절 의사를 알아듣지 못했을 경우에는 포기하지 않는다. 정중한 거절의 표현이 전달될 때까지 반복하라.
기사 첫 부분에서 사무실 의자에 올라가야만 거절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던 레슬리 론슨 브라운은 이제 능숙하게 거절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분명하게 한계를 정할 줄 아는 사람’으로 통한다. 그녀는 당뇨병과 유방암으로 투병하면서 자기 자신을 먼저 챙기는 법을 배우게 됐다.
일리노이주 위튼에서 요가・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는 그녀는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는 시간을 늘려서 나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며 “해야만 한다고 의무감을 느꼈던 일들을 반드시 다 하지 않아도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이제 그녀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으면 ‘이 일을 하면 내가 기쁨을 느낄까?’를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 대답이 ‘아니’라면 부탁을 거절한다. 레슬리 론슨 브라운은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마치 돈처럼 현명하게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부탁을 해오는 사람들을 거절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했다. 바로 거절 의사를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때까지 ‘미안한데, 못 하겠어’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말한다. “결국에는 상대방도 지쳐서 포기하고 그만 물어보게 된다.”
레슬리 론슨 브라운은 “그리고 상대방이 받을 충격을 덜어주겠다는 생각으로 ‘내년쯤에는 될지도 모르겠다’는 말은 제발 덧붙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방은 ‘옳다구나, 내년에 다시 찔러봐야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