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년
세종 004 01/07/18(신유) / 이적 등이 사전을 심사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다
정사를 보았다. 경기 감사 이적(李迹)이 보고하기를,
“이제 일찍이 수확하는 곡식을 심사하고 아울러 과전(科田)으로 받을 사전(私田)을 심사할 것을 아룁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변계량이 계하기를,
“비록 모두 사전(私田)을 심사하라고 한다 해도, 누가 즐겨서 답험(踏驗)하고 검사하는 데 마음을 쓰겠는가. 정유년에 이미 이 법을 행하였으나, 이에 맞지 않으므로, 다른 위관(委官)을 시켜 다시 심사하였고, 그래도 맞지 않은 자에게는 다 형장 1백을 내렸으니, 만일 흉년이 들면, 사전도 아울러 심사하고, 풍년이 들면, 밭 임자에게 맡겨서 스스로 심사할 것을 허가할 것이요, 혹 <지시하는 대로> 못하는 사람은 죄를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고, 조말생은 계하기를,
“만약 흉년에 아울러 심사하고 풍년에는 전주(田主)가 스스로 심사하는 것을 허락하면, 이것은 흉년에는 납세를 정확하게 하고, 풍년에는 마음대로 걷게 하는 것이라, 실로 중정(中正)한 방법이 아니니, 행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경차관(敬差官)을 보낼 때에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을 한결같이 중정하게 답험할 것을 명하면, 사전에서 조세 받는 법이 거의 공평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계사(啓事)하는 여러 신하가 나가니, 원숙이 계하기를,
“이제 한 이랑[畝]을 건너서 하나는 공전이요, 다른 하나는 사전이라 한다면, 그 조세를 받는 데 있어서 많고 적은 것이 크게 서로 같지 아니하겠으니, 백성들이 원망할 것이며, 전주가 비록 마음대로 무리하게 거두어들인다 하여도, 소작하는 사람은 머리를 굽혀 가며 청종(聽從)하기에 겨를이 없으리니, 어찌 감히 스스로 호소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였다.
세종 005 01/09/19(신유) / 김점이 공·사전의 수확 실태 검사 방법에 대해 아뢰다
김점이 또 아뢰기를,
“올해의 공전(公田)의 수확 실태를 현지 검사할 때에 사전까지 함께 현지 검사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작년의 사전 현지 검사 위임관들은 모두 다 용렬해서 잘된 것을 못 된 것으로 하여, 대소의 신료들의 전조(田租) 들여온 것이 심히 적어, 서울의 쌀 값을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또 과전(科田)이, 이미 영구히 하사해 준 것인 바에야, 그 땅의 수확 실태의 현지 검사를 지주에게 맡기는 것이 만세를 두고 <변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겠사옵고, 만약에 부득이 하다면, 흉년에는 경차관(敬差官)에게 맡기고, 풍년에는 지주에게 맡기면 될 것입니다. 올해는 오곡이 퍽 잘되었사오니, 지주를 시켜서 현지 검사케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전과 사전은 다 나라의 땅이니, 수확 실태의 현지 검사에 다른 점이 있어서는 아니 되오. 내가 듣기로는, 옛날에는 공전의 현지 검사는 경차관에 맡겼기 때문에 허위와 소략을 초래한 일이 많았고, 사전은 지주에게 맡겼기 때문에 각박한 사례가 많았다는 거요. 올해는 공전과 사전의 <수확 실태의 현지 검사는> 다 경차관에게 맡기고, 경차관이 떠날 때에 재삼 타일러서 실제와 꼭맞는 검사를 하도록 힘쓰게 한다면야, 어찌 사전에서만 다 허위와 소략을 초래하게 되겠소. 하물며 주·현마다 위임관이 많지 않은데도, 오히려 맞지 않는 자가 생기는데, 전지(田地)를 받은 각품의 관원이 시키는 현지 검사하는 종들이야 어떻게 그들이 민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하겠소. 만세를 두고 <변치 않는> 법을 만들려고 한다면, 경차관을 시켜서 현지 검사케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오.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것은 오랫동안 전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 풍년과 흉년을 어찌 달리 보겠는가. 금년에 쌀이 귀한 것은 오로지 흉년이 든 까닭이오. 사전(私田)에서 걷은 조(租)의 소입(所入)이 적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리라.”
하였다.
일을 아뢰는 신하들이 다 물러가자, 임금이 원숙에게 이르기를,
“지금 사헌부에서는 내자시(內資寺)의 손상 파괴된 물건들을 징수하려고 하는데, 만약에 깡그리 징수하자면, 이루 다 징수해 낼 수 없을 것이고, 죄 있는 자를 골라서 징발할려면, 손상과 파괴를 초래시킨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이 일을> 장차 어떻게 처리 하여야 하오.”
하니, 숙이 답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자주 관대하신 은혜를 내리셨으며, 거기다 지난날의 관리들은 고의로 손상과 파괴를 초래시킨 것이 아니오니, 그 정상은 용서해 줄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깡그리 다 징수한다면, 무죄한 자가 반드시 거기에 끼어들게 될 것이니, <무죄한 자들한테서까지> 다 징수할 바에야, 차라리 죄 있는 자한테서 징수하지 않느니만 못하오. 사헌부에다 징수하지 말도록 시키시오.”
하였다.
호조에서 각도 관찰사의 보고한 바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공전(公田)을 심사할 때에 아울러 사전(私田)도 심사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공전만 심사하는 것은 불가하다. 전자에 이 의논이 분운하므로, 익히 의논하여 정하였더니, 그 뒤에 여러 번 경차관(敬差官)이 답험을 불공평하게 한 실수로 인하여, 정승(政丞)이 생각하기를, ‘과전(科田)을 아울러 심사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나, 그러나 과전을 심사하지 아니한다면, 내자(內資)·내섬(內贍)에 소속한 밭도 역시 과전의 종류이므로, 마땅히 본사 관원으로 하여금 답험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과전도 아울러 심사하자는 의논이 어찌 조신으로 하여금 전조(田租)를 박하게 거두어 들여 가난하게 만들려고 함이었겠느냐. 종요로이 공사(公私)로 하여금 다 편리하게 하려고 함이었을 뿐이니, 경차관으로 하여금 아울러 다같이 심사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2 집 390 면
【분류】 *재정-전세(田稅) / *농업-전제(田制)
세종 010 02/11/05(기사) / 정부와 육조에서 여러 도의 수령과 한산인의 건의문을 검토하게 하다
정부(政府)와 육조에서 여러 도의 수령(守令)과 한산인(閑散人)으로부터 올려 보낸 여러가지 편의 사항을 함께 의논하여 올리게 하였으니,
1. 군자부정(軍資副正) 최옥량(崔玉良) 등이 말하기를,
“무릇 백성들이 배[舟]나 수레[車]의 이권으로 그의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따금 그것을 관청에서 가져다가 운전 또는 수송하는 일이 있는 것은 진실로 좋지 못한 것이니, 지금부터는 관가의 배와 수레를 더 만들어서 운수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관가의 배나 수레는 더 만들 필요가 없다. 만약 관가에서 운수할 물건이 있으면 민간에 그때 그때 품삯대로 내어 주고 쓰면 된다.”
하였고,
1. 전 대사헌(大司憲) 신상(申商)이 말하기를,
“각도와 각역(各驛)을 대(大)·중(中)·소(小)의 노선(路線)으로 등급을 나누어서 위전(位田)을 주어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여 왔는데, 혹 역리(驛吏)들이 다른 데로 가거나 죽는 자가 있으면, 소재지의 관에서 그 전세(田稅)를 거두어서 국고(國庫)에 넣게 되므로 역(驛)의 발전이 날로 쇠진하여 가니, 지금부터는 역리로서 만일 도망하거나 옮겨 가는 자가 있으면 역승(驛丞)을 시켜 그 전세(田稅)를 걷어 감사(監司)에게 신고하고, 그것으로 말[馬]을 사는 자금에나 또는 역의 공적 경비에 보충케 하여, 역리들이 자금을 꾸어다가 쓰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고,
1. 전 장령(掌令) 복간(卜) 등이 말하기를,
“농번기를 당하여 수령들을 교대하게 하면, 가는 자를 보내고 오는 자를 맞아들이는 데에 농사가 때를 넘길 염려가 있으니, 지금부터는 수령이 비록 임기가 찼다 하여도 만일 농번기를 당했거든 교대시키지 말자.”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은,
“기한이 찬 수령이라도 3월부터 6월까지 사이에는 교대하지 말라.”
하였고,
1. 용인 현령(龍仁縣令) 선화(宣和)가 말하기를,
“각도에 있는 역승(驛丞)의 말은, 역이 많으면 10여 역(驛)이나 되는데, 이제 3, 4개월만에나 또는 5, 6개월만이 까닭없이 자주 교체하므로, 비록 일을 할 마음이 있는 자라도 관사(舍)를 수리한다든가 역리를 살도록 돌보아 주려는 방안을 어느 겨를에 할 수가 없으니, 수령(守令)의 예에 의하여 그들 성적의 우열을 고사하여 자주 교대하지 아니하여 그 폐단을 없애게 하라.”
하였는데, 또 여러 사람의 의논은,
“여러 도의 역승(驛丞)을 적당히 증설케 하고 《육전(六典)》에 의거하여 그들의 포폄을 고사하기를 수령(守令)의 예(例)와 같게 하라.”
하였고,
1. 통진 현감(通津縣監) 신주(辛宙)가 말하기를,
“《육전(六典)》에 빈민의 부채를 본전과 이자 외에는 더 받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제 채주가 본전과 이자 외에도 오히려 독촉하여 더 받아들여서, 빚진 자로 하여금 그의 살림을 다 팔아 주어도 마침내 그 빚을 갚지 못하여, 경작하던 밭으로 해마다 충당 하여 갚다가 나중에는 송곳을 꽂을 땅도 없게 되니, 원컨대, 이것을 엄금하기를 바란다.”
하였고,
1. 전 감무(監務) 김간(金墾)이 말하기를,
“무릇 부역의 경중은 경작하는 토지의 많고 적은 데에 기준하고 있는데, 신이 사는 음죽현(陰竹縣)에서는 국가에서 농사를 짓는 공전(公田)과 농군들이 경작하는 사전(私田)을 합하여 본현의 개간한 토지 장부의 숫자가 나오게 되는데, 부역은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게 되니, 원컨대, 부역을 적당한 양으로 감하여 민생을 살리게 하라.”
하였고,
1. 연안 도호부사(延安都護府使) 정복주(鄭復周)가 말하기를,
“무릇 경작할 만한 황무지를 부호가(富豪家)에서 널리 점령하여, 다만 입안(立案) 만 하여 놓고 여러 해가 되어도 개간하지 않으니, 비록 다른 농민이 개간하려 하는 자가 있어도, 자기가 이미 입안한 토지라 하여 공연히 개간하는 것을 금지한다. 백성들은 그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고발하여 다투지 못하게 되니 지금부터는 비록 입안(立案)을 받았다 하여도 자기가 개간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른 백성들에게 개간하도록 허가하여 주고, 이에 어긴 자는 엄하게 다스리게 하라.”
하였고,
1. 판원주목사(判原州牧使) 조계생(趙啓生)이 말하기를,
“인삼(人蔘)은 험악한 산중의 인적이 없는 곳에서 나는 것이므로 채취하기도 심히 괴로운 것이며, 말리어 손질하기도 또한 어려운 것인데, 제용감(濟用監)에서는 수납할 때에, 혹은 몸이 작다거나 혹은 빛이 나쁘다 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그 폐단이 심히 크다. 원컨대, 제용감에 명하여, 임금에게 진상하는 것 외에는 비록 몸이 작거나 빛이 나쁘다 하여도 말리는 법대로 한 것이라면 일률적으로 수납하여 민폐를 제거하게 하라.”
하였고,
1. 함길도 절제사(節制使) 조비형(趙備衡)이 말하기를,
“도내 어민들이 고기와 미역을 채취하는 것을 전에 관찰사(觀察使)와 절제사(節制使)들이 이미 그것에 대한 세를 받게 되고, 각읍 수령들도 또한 받게 되어, 혹 1년에 봄 가을 두 때로 나누어 여섯 번이나 납세하고 있으니, 심히 까닭없는 일이다. 타도의 예에 의하여 다만 사재감(司宰監)에 바칠 것만 받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부 세를 면제시켜 변방 백성을 구휼해 주라.”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다른 도의 예에 의하여 다만 한 번만 받도록 호조(戶曹)에 전달하기로 하자.”
하였다.
1. 전 교수관(敎授官) 이윤(李潤) 등이 말하기를,
“신이 사는 강원도의 각 지방 관(官)에서는 매호당 신세포(神稅布)를, 그 전에는 백성의 생활 정도를 구별하여 어쩌다가 굵은 베로 10여 자씩 거두거나, 때로는 종이[紙]·돗자리[席]·실[絲]·삼[麻] 따위 물건으로 하였으나, 지금은 생활 정도도 구별하지 아니하고 베 1필식을 정례로 받는데, 반드시 35척이 되어야만 되니, 가난한 자는 괴롭게 여긴 것이다. 지금부터는 옛날 예에 의거하게 하라.”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매호에 1필씩은 받아야 되겠으나, 그 중에 환과 고독(鰥寡孤獨)들은 모두 면제해야 한다.”
하였다.
1. 죽산 현감(竹山縣監) 양질(楊秩)이 말하기를,
“지금 관(官)에서 떠돌아 다니는 궁민(窮民)을 위하여 보리와 밀 두 가지를 걷어서 혹은 종자용으로 주고, 혹은 구제용으로 하려고 민간에다가 분배한다고 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떠돌아다니는 백성에게 만일 관에서 꾸어준 미곡이 있어서 일족되는 사람에게까지 나누어 물리게 될 경우이면, 이제부터는 그 보리와 밀로 꾸어다 먹은 미곡을 갚게 하라.”
하였고,
1. 은계도(銀溪道) 역승(驛丞) 윤제(尹諸)가 말하기를,
“여러 벼슬아치들이 바쳐야 할 진헌세포(進獻細布)를 자기가 마련하여 바치지 아니하고 그 관사(官司)의 노비(奴婢)를 시켜 구하여 바치게 하므로, 그 폐단이 적지 아니하니, 청컨대, 여러 벼슬아치들은 자기가 마련하여 바치도록 하라.”
하였고,
1. 전 현령 김사의(金思義) 등이 말하기를,
“해마다 얼음을 떠서 저장할 때가 되면 반드시 경기(京畿) 백성을 시켜 빙실(氷室)을 고쳐 짓게 하는데, 재목 값이 비싸서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럽게 여기니, 청컨대, 사람이 거처하는 집 모양으로 빙실을 지어서 관리를 시켜 지키게 하면, 넉넉히 수십년 동안까지 오래 갈 터이며, 매년마다 고쳐 짓는 폐단이 없을 것이라.”
하였고,
1. 양주 도호부사(楊州都護府使) 전직(全直)이 말하기를,
“외방에서 공물을 상납할 때에, 관리들이 흔히 자기 의사만으로 퇴하고 받지 아니하므로, 먼 길에서 싣고 왕래하는 괴로움과 민간(民間)에서 두 번 거둬들이는 폐단이 적지 아니하니 지금부터는 여러 관사(官司)에서 퇴한 공물을 호조(戶曹)에 보고하여, 호조에서 퇴송할 만하다는 것을 핵실한 뒤에 퇴송하도록 일정한 법식을 만들게 하라.”
하였고,
1. 창평 현령(昌平縣令) 송복(宋復)이 말하기를,
“옛적에 나라에서 노인(老人) 기르는 법이 네 가지가 있었으니, 삼로오경(三老五更)의 제도가 첫째요, 자손이 나랏일로 죽었으면 그의 아비나 할아비를 길러 주는 것이 둘째요, 치사(致仕)한 노인을 기르는 것이 세째요, 백성들의 늙은이를 기르는 것이 네째이다. 우(虞)나라 때에는 연례(宴禮)로 하였고, 하(夏)나라 때에는 향례(享禮)로 하였고, 은(殷)나라에서는 식례(食禮)로 하였고, 주(周)나라에서는 여러가지 법을 정리해서 겸하여 시행하였던 것인데, 1년 사이에 무릇 일곱 번이나 행하게 되었다 한다. 마시는 것으로 양기(陽氣)를 기르기는 봄과 여름에 하게 되고, 먹는 것으로 음기(陰氣)를 기르는 것은 가을과 겨울에 하게 되고, 대악(大樂)을 합주(合奏)할 때에는 반드시 양로(養老)하는 행사에까지 미치게 하므로, 봄에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춤을 합하여 출 때에도 양로의 일을 행하고, 가을에는 태학에서 배운 것을 잘하고 못한 것으로 나누어 주면서 소리를 합하여 노래하게 할 때에도 양로의 행사를 하게 되며, 늦은 봄에 천자(天子)가 학교에 가서 볼 때면 또 행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왕도(王道)로서 소중하게 여기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므로, 청컨대, 유사를 시켜 양로하는 예(禮)를 세워서 서울이나 지방에서 모두 매년 봄 가을 석전(釋奠)한 뒤에 70, 80 이상의 노인을 모아서 귀하고 천한 것을 관계하지 말고 향연하도록 하여, 성상(聖上)의 양로하는 은혜를 넓히도록 할 것이요, 또 그들로부터 좋은 말을 구하여 정치에 시행하도록 하면 인륜이 두터워질 것이며, 풍속도 바르게 될 것이요, 천도가 순하게 되고 음양이 고르게 될 것이라.”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예관(禮官)을 시켜 옛날 법제를 상고하여 시행하라.”
하였고,
1. 회양 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 노상(盧相)이 말하기를,
“당태종(唐太宗)이 일찍이 침(針)·구(灸)도 제자리를 옳게 잡지 못하고 실수하면, 그 해가 사람을 죽이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 하여, 조서를 내려 죄인들에게 등에 매질을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제 관리들은 아전이나 백성들의 조그마한 과실로 인연하여 문득 등에 매질을 당하게 되어, 그 때문에 죽는 자가 흔히 있으니, 금후로는 일절 엄금하라.”
하였고,
1. 양양군 도호부사(襄陽郡都護府使) 변처후(邊處厚)가 말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대소 관리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분묘(墳墓)에 대한 보수(步數)가 다 일정한 규례로 정하여 있어서, 남이 그 산에 수목을 벌채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인데, 무식한 무리들이 지상물의 이익만을 탐내어 고총(古塚)을 파서 없애고 백골이 드러나게 갈아 엎으니, 지금부터는 엄중히 금지하게 하라.”
하였고,
1. 전 사재감(司宰監) 한정경(韓定敬)이 말하기를,
“무릇 요역(役)을 정하기는 모두 경작하는 토지의 다소로 기준을 삼고, 토지가 기름지고 척박한 것은 구분하지 아니하므로, 대개 균평하지 못한 폐단이 더러 있게 된다. 청컨대, 매년 농작의 감수된 것을 답험(踏驗)한 뒤에 일제히 그 실수(實數)에 의하여 <요역을> 작정하도록 일정한 법식을 정하라.”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군정(軍丁) 뽑을 때에는 인구의 다소에 의하고, 잡역(雜役)은 그 해의 농작의 답험한 실수에 의거할 것이라.”
하였다.
1. 안변 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 김맹성(金孟誠) 등이 말하기를,
“지금 사대부의 집에서 노복(奴僕)을 시켜 장사하기를 힘쓰고 있어, 염치 관념이 없어져 가고 사자(士子)의 기풍이 날로 쇠퇴해 간다. 원컨대, 사헌부 관원을 보내어 조사 적발해서 엄중히 징계하여 선비의 버릇을 바로잡게 하라.”
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조사(朝士)의 노복으로 장사하는 자는 그 지방 관찰사에 명하여 엄하게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상 19가지 조목을 모두 그대로 따랐다.
세종 010 02/11/07(신미) / 예조에서 《원·속육전》에 실린 판지를 관리들이 받들어 시행할 것을 아뢰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원(元)·속육전(續六典)》 안에 실려 있는 여러 해 동안 내린 판지(判旨)를 서울에서나 지방 관리들이 받들어 시행하지 아니하니, 그 받들어 시행하지 않는 조건을 삼가 기록하여 올리오니, 청컨대 지금부터 더욱 명백히 거행하도록 하고, 이에 어긴 자는 논죄하소서.
1. 홍무(洪武) 25년에 사헌부에서 수판(受判)된 일인데, 무식한 사람이 농우(農牛)를 갖다가 달단()이나 화척(禾尺)에게 팔았으나, 판 자나 사는 자를 모두 소를 몰래 잡아 먹는 죄에 처할 것이고,
1. 영락 17년에 의정부에서 수판(受判)한 것인데, 화척(禾尺)이나 재인(才人)들이 농업에는 종사하지 아니하고 활쏘고 말타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양민(良民)과는 혼인도 하지 아니하고 저희끼리 한 떼를 이루어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기를 한결같지 아니하며, 소나 말을 도살하여 양민(良民)에게 손해를 끼치게 하니, 청컨대, 이들을 각 지방에 나누어 두어서 평민과 혼인도 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직업에 안착하여 살도록 하고, 그래도 옛날 버릇을 고치지 않는 자는 그가 기르는 축산을 몰수하고 아울러 이정(異正)·장(長)까지 죄를 주라 하였고,
1. 홍무 25년 사헌부에서 수판(受判)한 것인데, 의관(醫官)을 두는 것은 본시 병을 구(救)하려는 것이니, 당연히 귀천을 논할 것이 없이 와서 병을 신고하면 바로 가서 치료하여 줄 것이요, 만일 제 몸을 무겁게 여겨 가지 아니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사실을 고발하게 하여 엄중히 법으로 다스리라 하였고,
1. 홍무 27년에 내린 왕지(王旨)인데, 무릇 귀양가서 일하는 사람이 연한이 있을 것이니, 서울과 지방 관리들이 법조문도 살펴보지 아니하고 그대로 역사를 시킨다. 금후로는 중앙이나 지방의 담당한 관사(官司)에서는 귀양간 자의 죄명 및 역사를 시킨 연월과 석방한 월일을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고,
1. 홍무 28년 사사(使司)의 수판(受判)인데, 수령들에게 명하여 친히 산과 들을 검찰해서 개간하여 경작할 수 있는 토지는, 그 근처에 있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그 토지의 주인이 되게 하고, 만일 산에 불을 지르는 자가 있거든 그 주인을 시켜 잡아다가 관청에 고발하게 하여 중한 죄로 논하도록 할 것이며,
1. 홍무 26년 사사(使司)에서 수판(受判)한 것인데, 각도에 인민으로서 항산(恒産)이 없어서 도망한 자는, 그 집 어른은 장(杖) 1백 도(度)에 처하고, 받아들여 살기를 허락한 자도 같은 죄에 처하고, 동리에서 도망한 사람이나 새로 들어와서 접(接)하여 살게 한 사람의 성명과 수효를 보고하지 아니한 자는, 지방 별감(別監)이나 이정(異正)·장(長)에게 장(杖) 70도에 처하게 하고, 수령으로서 명심해서 수사하여 본거지로 보내주지 않는 자도 죄를 논한다.
1. 홍무 27년 사사(使司)의 수판(受判)인데, 나라에서 3년간 먹고 살 저축이 없으면 나라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인데, 각도의 수령들이 농사를 권장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아니하여, 공사(公私)의 경제가 궁곤하게 된다. 관찰사는 때때로 고찰하여 떠돌아다니는 자가 있거든 모두 귀농하도록 해야 한다 하였고,
1. 홍무 30년 사사(使司)의 수판(受判)인데, 선군(船軍)은 물 위에서 생명을 붙이고 사는 것이니 심히 불쌍한 일이다. 이 뒤로는 선군(船軍)은 매 호당 부역을 전부 면제하여 주라 하였고,
1. 영락 5년 의정부 수판인데, 말[斗]과 되[升]를 서울에서는 경시서(京市署)에서,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매년 봄 가을의 가운데 달로 전례에 의하여 공평하게 검사하는 일을 시행할 것이라 하였고,
1. 건문(建文) 4년 의정부 수판인데, 부모가 연세가 70이나 되고 아들 3형제를 두었다가 모두 징병된 자는, 그 중 자식 한 사람을 병역에서 면제시켜서 그 부모를 봉양하도록 하라 하였고,
1. 영락 5년의 일인데, 공전(公田)이나 사전(私田)에 조(租)를 받아들이면서 표준이 균평하게 검정되지 아니한 말[斗]이나 되[升]를 가지고 받아들이다가 소작인의 고발이 나오게 되면, 소재지 수령이 죄를 받아야 되고, 심한 자는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라 하였고,
1. 건문 3년 의정부의 수판인데, 혼인의 예는 인륜으로서 소중한 것이다. 혹 가난한 남녀들이 때가 지나도록 혼인하지 못한 자가 있으니, 서울에서는 한성부(漢城府)에서, 지방에서는 감사가 힘을 다해서 방문하여, 내외친(內外親)으로 사촌(四寸) 이상의 친척들이 함께 혼수를 갖추어 때를 잃지 아니하도록 하고, 이 법에 어기는 자는 죄를 주라 하였고,
1. 영락 2년 의정부 수판인데, 산성(山城)을 수축하는 것을 고려(高麗)의 융성할 때에는 매양 별감(別監)을 보내어 때때로 수축하게 하였으니, 지금부터는 매년 농한기를 당하거든 견실하게 수축하여 뜻하지 아니한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라 하였고,
1. 영락 5년 의정부 수판인데, 형제간이란 형체만 다르나 기운은 같이 타고 난 것이나, 이로움만 탐하여 은의를 상하는 자는, 사정의 여하를 막론하고 송사하는 물건은 모조리 관에서 몰수하도록 하고, 영구히 서용(用)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고,
1. 영락 5년에 충청도 경차관(敬差官) 한옹(韓雍)이 계(啓)한 것인데, 배[船] 만들 소나무를 미리 기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각 주(州)·군(郡)에 명하여 작벌하는 것을 엄금하라 하였고,
1. 영락 10년에 사헌부가 계한 것인데, 부부(夫婦)가 있은 뒤에 군신(君臣)도 있게 되는 것이므로, 부부라는 것은 인륜(人倫)의 근본이 되나니, 적처(嫡妻)와 첩(妾)의 구별을 문란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예의(禮義)의 교화가 시행되지 못하여 부부(夫婦)의 도가 드디어 문란하게 되었다. 경사대부(卿士大夫)로서 흔히 처(妻)가 있으면서 또 처를 두게 된 자도 있고, 때로는 첩(妾)으로 처를 삼은 자도 있게 되어, 드디어 지금에 이르러 처(妻) 첩(妾)이 서로 송사하기에 이른 폐단이 생겨서, 원망과 싸움이 자주 일어나게 되어 화기를 손상하고 변괴가 일어나게 되니, 이것은 적은 손실이 아니다. 이것을 바로잡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신 등은 삼가 안찰하건대, 《대명률(大明律)》에 말하기를, ‘무릇 처(妻)를 첩(妾)으로 삼는 자는 장(杖) 1백 도(度)로 하고, 처가 있는데 첩으로 처를 삼는 자는 장(杖) 90도의 형으로 한다고 모두 개정한다.’ 하였으며, ‘만약 처가 있는데 또 처를 맞이하게 된 자는 또한 장(杖) 90도에 처하고, 다음에 얻는 처(妻)는 따로 떠나게 한다.’ 하였으니, 신 등은 청컨대, 중매 절차와 혼례식의 구비하고 소략한 것으로 처와 첩을 작정하게 하고, 남자 자신이 현재에 첩을 처로 삼은 자나, 처가 있는데 또 처를 맞이한 자는 모두 법률에 의하여 죄를 주라 하였다.
1. 영락 10년의 왕지(王旨)인데, 조운(漕運)하였다가 물에 빠져 죽은 수군은 유사(攸司)를 시켜 그의 가족을 충분히 구휼하여 주라 하니, 정부(政府)에서 건의하기를,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이르기를, ‘선군(船軍)으로 병고가 있는 자도 임금에게 올려서 그의 가족을 구휼하여 준다.’ 하였으니, 하물며 미곡(米穀)을 조운(漕運)하였다가 죽음에 이른 자이겠는가. 청컨대, 쌀과 콩을 합하여 4섬씩 주고 3년 동안 그의 집에 부역을 면제하여 주라 하였고,
1. 홍무 21년 사사(使司)의 수판인데, 전쟁에 나가 죽은 자의 자손을 당연히 벼슬자리에 써 주어야 한다 하였고,
1. 영락 7년 의정부의 수판인데, 여러 포구의 각종 선척의 사관(射官)으로서 방어한 경력의 연월이 가장 오래된 자를, 큰 배에는 2명씩, 작은 배에는 1명씩을 가려서, 수군 도절제사가 그의 연월(年月)을 조사하여 각인의 성명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여 신고하면, 그들의 전직(前職)에서 한 계급씩을 올려 주고, 그 가운데 재능이 출중하여 사람들에게 심복될 만한 자는 차례로 승천시켜서, 벼슬이 절충(折衝) 계제의 수륙(水陸) 군관(軍官)까지에 이르도록 할 것이며, 적과 상대하여 이기도록 제어한 자는 이 예에 구애하지 아니하고 장수의 보고에 의하여 다 관직을 제수하게 하고, 장수가 사정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거나 미워하여, 이 은전은 받지 못하게 한 자는 신고하여 죄를 논하게 하라 하였고,
1. 홍무 21년 사사(使司)의 수판인데, 환과 고독(鰥寡孤獨)으로 입을 옷과 먹을 것이 없으며, 의탁할 곳도 없는 자는 의당히 구휼해야 될 것이니, 경중에서는 호조(戶曹)가, 지방에서는 감사(監司)가 주장하여, 무시로 방문해서 보고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고,
1. 홍무 7년에 사헌부에서 장계로 신청한 것인데, 대소 인원들과 연화승(緣化僧)으로서 진성(陳省)을 받고 제작기 공물(貢物) 바칠 것을 준비하여 남보다 먼저 바치면, 그 관사에서 영수한 문서를 받게 되나, 늦어서 하부 관서로 넘어가게 되면, 공물 가격은 갑절이나 더 받게 되어 미약한 백성들을 못 살게 한다. 지금부터는 모두 그런 일이 없도록 금단할 것이라 하였고,
1. 영락 5년 의정부의 수판인데, 의옥(疑獄)으로 미결 중에 있어서 오랫동안 옥에 갇히게 된 자를, 서울에서는 형조(刑曹)·사헌부(司憲府)·순금사(巡禁司)와, 각도의 관찰사(觀察使)가 그들의 갇혔던 연월을 갖추어 기록하여 보고해서 임금의 교지를 받을 것이며, 지체 없이 재결할 것이라 하였고,
1. 홍무 30년 사사(使司)의 행이(行移)인데, 약소한 백성으로서 어쩌다가 외출하여 돌아오지 못하면, 권리 많은 부자나, 벼슬아치나, 및 교활한 아전들이 도망간 것이라 하고, 그들의 집이나 전토를 모두 빼앗아 점유하게 된다. 그리하여 잔약한 민호가 날로 의지할 곳을 잃어버리게 되니, 금후로는 관에서 이들의 강탈 점유하는 것을 엄금하여, 본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할 것이고, 만약 영구히 돌아오지 아니하면 전토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 하였고,
1. 영락 10년 의정부의 장계로 보고한 것인데, 여러 관사의 사령(使令)들이 공용물을 사들인다 하면서 시장 사람의 물건을 겁탈하고 있다. 금후로는 경시서(京市署)에 고하여, 그들이 가지고 간 저화(楮貨)를 몰수할 것이며, 어긴 자는 무거운 벌칙으로 죄를 논하게 하라 하였고,
1. 홍무 21년 사사(使司)의 수판인데 주군(州郡)의 아전이 사면(四面)에 있는 촌락에다가 사사로이 농막(農幕)을 설치하고 숨어 사는 민호(民戶)를 거기에 들어가 살게 하고 그들을 노비와 같이 사역하는 자와, 수납 받을 때에는 제 마음대로 세를 올렸다 내렸다 하여, 수납해서 도적질하여 사용(私用)으로 쓰는 자와, 또는 군대에 갈 장정을 뽑을 때에, 부잣집의 뇌물을 받아 먹고 마음대로 병역을 면제시켜 준 자와, 권세와 의탁하여 터무니 없이 관작을 받아 가지고 공공연히 부역을 회피하는 자는 모두 세밀히 조사하여 범한 것이 중한 자는 형법으로 다스릴 것이며, 나머지는 경중을 구분하여 죄를 논할 것이요, 횡령으로 받은 물건은 추징하여 관에 몰수하도록 하라 하였고,
1. 홍무 21년 사사의 수판인데, 무릇 머리 깎은 중들은 반드시 도첩(度牒)을 받아야 바야흐로 출가(出家)하게 되는 것이 이미 나타난 법령이 있거늘, 무식한 승려들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오직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병역에 나간 군인이나, 향리(鄕吏)나, 역졸(驛卒)의 자식이나, 공사 노예(公私奴隸)들까지도 제 마음대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것은 심히 잘못 된 일이니, 금후로는 양반(兩班)의 자제로서 승려가 되기를 자원하는 자는, 그 부모나 친족이 녹사(錄司)에 중이 될 것을 고하여 예조(禮曹)에 보고하고, 나라에 계문(啓聞)하여 교지(敎旨)를 받은 뒤에 정전(丁錢)을 바치고 도첩(度牒)을 내어 주어야 바야흐로 출가하기를 허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 나머지 직분이 있는 사람이나 독자(獨者)·처녀는 일절 금단할 것이요, 이에 어긴 자는 환속(還俗)하게 하고, 그들을 중으로 보내려 한 부모와 데려간 사승(師僧)과, 사주(寺主)는 중한 죄로 논하게 되고, 부녀로서 수절하기 위하여 머리 깎은 자는 이 법의 예외로 할 것이라고 하였고,
1. 홍무 21년 사헌부의 수판(受判)인데, 장사[葬]한다는 것은 사람 시체를 갈무려[藏] 준다는 것이니, 그 해골을 감추어 밖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어늘, 요즈음에 불교도의 화장법이 성행하게 되어, 사람이 죽으면 들어다가 뜨거운 불속에 넣어서 모발이 타고 살이 타 녹아 없어지게 하고 다만 해골만 남게 한다. 심한 자는 해골도 태워서 그 재를 뿌려 물고기나 날짐승에게 주고 말하기를,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극락에 가서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갈 수 있다.’ 한다. 이 말이 한 번 일어나게 되면서 사대부(士大夫)의 고명하다는 사람도 모두 거기에 혹하여 땅에 장사하지 아니한 자가 많게 되었다. 아아, 참 심히 어질지 못한 일이다. 사람의 정신이란 유행되고 화통(和通)하여, 죽어서나 살아서나 사람이건 귀신이건 근본은 동일한 기맥인 것이다. 조부모가 지하에서 편하게 있으면 자손도 또한 편하게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이와 반대일 것이요, 또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나무가 땅에 뿌리를 의탁한 것과 같아서, 그 뿌리와 본신을 불사르면 지엽이 말라 시들어질 것이니, 어찌 잎이 피고 가지가 자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어리석은 남녀들도 다 같이 아는 바이다. 성인께서 세 치[寸]의 관(棺)에 다섯 치 곽(槨)으로 마련하면서도 오히려 속히 썩을까 염려하며, 염()하는 옷이 수십 벌이면서도 그래도 박한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였으며, 또 관속에 곡식을 넣으면 혹시 벌레나 개미가 침입할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송종(送終)하는 예절이 이와 같거늘, 도리어 변방 되놈의 아비 없는 가르침을 사용하려는 것이 인(仁)한 일이라 이르겠는가. 원컨대, 지금부터는 일체 화장을 금하고 이 법을 범한 자는 죄를 주게 하고, 지방의 인민들은 부모의 장삿날에 이웃 마을 사람과 향도(香徒)들을 모아놓고 술 마시고 노래 불러 조금도 애통한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예로서 풍속을 이룩하는데 누(累)가 되는 것이 말할 수 없으니, 역시 모두 엄금하라 하였고,
1. 영락 10년 의정부에서 말한 것인데, 여러 관사의 노비들에게 혹 봉족(奉足)도 주지 아니하고 급료도 주지 않아서, 이로 말미암아 도망간 자가 많게 되니, 금후로는 정역(正役) 1명에 봉족(奉足) 1명을 주고, 또 급료도 주게 하고, 급료를 주지 못하는 자에게는 봉족(奉足) 2명씩을 줄 것이며, 남녀 막론하고 연령이 66세 이상이거나 15세 이하 된 자에는 사역하는 데 내세우지 말도록 할 것이며, 또 여러 관사(官司)의 아전[吏典]이나 사령이나 노예 등 여러 사람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간 자가 곧 상경하지 못하게 되면, 문득 서울에 사는 경주인(京主人)에게 독촉하는데, 때로는 날수를 계산하여 속전(贖錢)을 물리게 하고, 그것을 다른 데서 꾸어서 주고 나중에 갑절씩 받아들이니, 그 때문에 가졌던 살림과 식량이 모두 없어지게 되어, 그 폐단이 심히 크다. 금후로는 휴가를 받은 사람이 기간 내에 상경하지 못하게 되면, 그 도에다 공문을 보내어 독촉할 것이며, 그가 상경하기를 기다려 죄로 논할 것이라 하였고,
1. 영락 11년 사간원(司諫院)의 장계인데, 불(佛)이라는 것은 군신의 의(義)도 없고 부자의 은(恩)도 없이 부허(浮虛)하고 허망한 말을 가지고 망녕스러이 은혜를 갚는다는 말을 붙여서 세상을 현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며 풍속을 패망케 하여, 우리 유도(儒道)에 해됨이 이보다 심함이 없다. 옛날 당우(唐虞) 3대 때에 있어서 나라의 연대도 많으려니와 사람의 수명도 길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부처가 그렇게 하여 준 것이 아니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에 불법(佛法)이 처음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뒤로부터 난리와 패망이 계속되어서 국운이 장구하지 못하였고, 그 뒤에 양(梁)나라·진(陳)나라·후위(後魏) 때에는 부처 섬기기를 더욱 삼가히 하였으나, 그 나라의 연대는 더욱 단촉하였고, 드디어 계행(戒行)을 지킨 임금으로서 대성(臺城)에서 굶어죽는 화액을 당하게 되었으니, 부처를 섬겨서 복을 구하였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부처를 믿을 것이 없음은 변론할 것도 없이 명백한 일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자는 책망할 것도 없으려니와, 세상에서 고명하였다고 하는 자도 또한 여기에 혹하여 섬기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대저 사특한 말이 틈을 타고 들어와서 유혹하게 되면, 미치기는 쉬우나 깨어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상이나 처자상을 다하여 애통 박절한 때에, 그 틈을 타서 복전(福田)의 이익된 말로 꾀어 차츰차츰 그 가운데로 들어가서 가산을 탕진하기에 이르게 되니, 사특한 말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이제 우리 전하께서 크게 개혁케 하였으니, 진실로 천 년 동안에 없던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죽은 자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거나 승려에게 재를 드리는 일은 아직 인순(因循)하여 고치지 못하여, 사람이 죽으면 모두 좋은 길로 가게 한다 하면서 이미 칠칠재를 올리고, 또 법석(法席)의 모임을 배설하여, 무식한 무리들이 오로지 부화한 것만 숭상하여 남의 이목에 자랑만 하려 한다. 만일 부처가 영험이 있다 하여, 사람들이 먹이는 것이나 받아먹고 사람의 죄를 구원해 준다면, 이것은 벼슬과 옥사(獄事)나 팔아 먹는 탐관오리의 하는 일이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또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있는 것이요, 재앙과 복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비록 부지런히 빌어도 부처가 어떻게 그 사이에 은혜를 베풀겠는가. 엎드려 바라보니, 전하께서 유사에 명하여 상장과 제사 의식은 일체 문공 가례(文公家禮)에 의하도록 하고, 부처에 대한 일은 엄금케 하여 여러 사람의 의혹을 끊어 없애게 하라 하였고,
1. 영락(永樂) 15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유백순(柳伯淳) 등이 올린 말인데, 연해(沿海)의 어장을 권세 있는 집에서 이익을 빼앗아 점유하고 있으니, 엄중히 금지하여 어민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도록 하라 하였고,
1. 영락 15년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인데, 선군(船軍)이 물위에다 생명을 걸고 있어서 가산도 돌보지 못하여 그 고생이 다른 사람의 갑절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비록 아들 2, 3형제를 두었다 할지라도 좌우령(左右領)에 나누어 소속되어 있어서, 서로 교대하여 번을 서게 되어 혹 한 자식이라도 군적(軍籍)에 들지 아니하면 누정(漏丁)이라 하여 다른 사람의 봉족(奉足)으로 옮겨서 보충케 하니, 이것이 수군을 우대하여 돌보아 주는 본의에 어긋나는 일이니 금후에는 세 아들이 이미 군적(軍籍)에 들어 있으면 비록 한 자식이라도 군역(軍役)을 면제케 하여 부모를 봉양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상 30가지 조목을 다 그대로 따랐다.
세종 011 03/01/16(기묘) /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와 수군 도절제사 박초가 벽골제와 눌제의 수축에 대해 아뢰다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가 계하기를,
“김제군(金堤郡) 벽골제(碧骨堤)와 고부군(古阜郡) 눌제(訥堤)가 무너져 터졌으므로, 일찍이 풍년을 기다려 수축할 것을 명령하셨사오나, 신이 이제 순시하여 이해(利害)를 물어보니, 방죽 언덕은 비록 무너졌으나, 물이 오히려 고여 있어 뚝 안의 좋은 전지 수만(數萬) 두락(斗落)이 침수되어 있사오며, 또한 농사철을 당하여 크게 무너지면 뚝 아래의 농사꾼들이 모두 떠내려가고 침몰될 것이오니, 아주 백성들에게 경작할 것을 허락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니, 의정부와 육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더니, 모두 윤화(允和)의 의견을 옳다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려 하였더니, 김제군 사람 박초(朴礎)가, 그 때에 전라도 수군 도절제사로 있었는데, 상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김제군의 벽골제는 신라 때부터 축조한 것으로 실로 우리 동방의 큰 못이온데, 성상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바르게 하시려 하시와, 무릇 백성의 이 됨과 해 됨은 반드시 이룩하고 제거하시는지라, 지난해인 을미년에 지군사(知郡事) 김방(金倣)에게 명령하시어 감독하여 수축하게 하였던바, 사역된 인부가 겨우 2만 명으로 20여일만에 공사가 완성되어, 방죽 아래의 땅이 모두 다 옥토가 되어서, 공전(公田)의 수확이 매년 천 석이 넘었으므로, 군민(軍民)의 식량이 또한 풍족하였사오니, 방죽이 공사(公私)에 모두 유리한 것은 분명하옵는바, 근자에 일을 맡은 관원이 어엿한 방죽을 가지고, 혹시나 터져 무너지면 그로 인하여 죄를 얻을까 두려워 하고 수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허망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인부 4만 명을 동원하고 목책(木柵)을 다섯 겹으로 둘러야 방죽이 완고하다.’ 하였으므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수축할 것을 명하시었던 것인데, 교지가 겨우 내리자, 집사자(執事者)가 국가의 정책이 이 일은 시급을 요하지 않는 줄로 생각하고, 그 고을의 군사를 시켜서 백성에게 파괴해 없앨 것의 가부를 물으니, 백성은 겁이 나서 관가의 뜻에 아부하여 가만히 서로 말하기를, ‘무너뜨리자는 말을 좇지 아니하였다가는 우리 고을만 부역하는 고통을 혼자 당할 것이다.’라 하여, 비록 그 수리의 혜택을 받는 자라도 모두 그 말을 찬성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비가 오면 도랑을 내어 물을 빼고, 가물면 막아서, 저수하는데에 물을 빼고 저수하는 방법만 얻는 다면, 물이 넘어 무너져 터진다든가, 말라 타서 농사가 낭패될 염려가 어찌 있겠습니까. 방죽의 완고함이라든가 물의 이해는 진실로 감수(監守)하는 자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수축하려 할 당초에 방죽 위아래의 토지의 비옥하고 메마른 것과 토지 면적의 다소(多少)를 조사하여 민심이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를 살핀 후에 갖추 아뢰어 교지를 물어 완성시켰고, 돌을 세워 사적을 기록한 것은 성대(聖代)에 농사를 힘쓰고 백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천고(千古)에 밝히 보인 바이었사온데, 겨우 한 해의 우기를 지나 급작히 파기하여 버리려 하오니, 백성에게 해 되는 것이 무엇이며, 파기하여 백성에게 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나이다. 방죽의 형상이 위가 좁아서 둘려 있는 길 같고, 아래는 넓어서 구릉(丘陵) 같아서, 물이 위로 넘지 아니하면, 반드시 언덕을 무너뜨릴 염려가 없사온데, 무슨 까닭으로 보축(補築)하기에 급급한지요. 또 고부군의 눌제는 무술년 가을에 겨우 만 명을 사역하여 한 달만에 완성하였고, 옛적 정전법(井田法)에 의거하여 11의 법으로 구획하여 경계를 삼고, 사전(私田) 1결을 받은 자 아홉이 공동으로 공전(公田) 1결을 경작하여 바치는데, 그 토지가 비옥하여 공사(公私)의 수확하는 바가 모두 풍족하므로, 그 이익됨이 큰 것이라야 돌을 세워 공적을 기록한 것이 역시 벽골제와 맞먹는 것이온데, 이제 불행하게도 장마를 만나 무너졌으니, 방죽의 뚝이 견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감수하는 자가 물을 잘 소통시키지 않은 소치였사오니, 책임의 소재가 따로 있겠거늘, 집사자가 도리어 제방의 위치가 마땅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힘을 덜 들이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는 것이 편한 줄을 생각하지 않고 망녕된 생각을 내어, 수만 명의 민중을 동원하여 예전 뚝 아래의 넓은 들로 내려다가 쌓아서 보안현(保安縣) 남교(南郊)까지 편입시켜 산과 들을 파서 도랑을 내어 서쪽으로 검포(黔浦) 바다까지 통하였으나, 그것으로 무너져 터질 근심을 면할런지 감히 알지 못하겠나이다. 만약 전대로 막아 저수한다면 7, 8백 명의 인부를 써서 불과 20일 동안 일할 것 뿐입니다. 신이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올 때에, 길이 두 방죽 언덕으로 지났는데, 눌제에 터진 것을 보축하고 벽골제를 헐어버리는 것을 금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의 급무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방죽 위 아래의 좋은 토지가 모두 소용없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옵서 채택하여 주시면 다행이겠나이다.”
고 하였다. 정부와 여러 조(曹)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이조 판서 허지가 박초(朴礎)의 의견을 따를 것을 청하매, 영의정 유정현 등이 모두 말하기를,
“초(礎)와 윤화(允和)의 소견(所見)이 같지 아니하니, 마땅히 조관(朝官)을 보내어 두 사람과 함께 살펴보고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선지(宣旨)하기를,
“전에 부평(富平)에 방죽 막는 것도 호조와 사헌부 관원을 보내어 함께 살펴보게 하고서 수축하였어도 그래도 터져 무너졌는데, 이제 조관을 보내어 살펴본다 하여도, 가고 오고하는 동안에 반드시 농사철이 닥쳐 올 것이니, 마땅히 풍년을 기다려 다시 수축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2 집 421 면
【분류】 *농업-수리(水利)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세종 011 03/01/16(기묘) /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와 수군 도절제사 박초가 벽골제와 눌제의 수축에 대해 아뢰다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가 계하기를,
“김제군(金堤郡) 벽골제(碧骨堤)와 고부군(古阜郡) 눌제(訥堤)가 무너져 터졌으므로, 일찍이 풍년을 기다려 수축할 것을 명령하셨사오나, 신이 이제 순시하여 이해(利害)를 물어보니, 방죽 언덕은 비록 무너졌으나, 물이 오히려 고여 있어 뚝 안의 좋은 전지 수만(數萬) 두락(斗落)이 침수되어 있사오며, 또한 농사철을 당하여 크게 무너지면 뚝 아래의 농사꾼들이 모두 떠내려가고 침몰될 것이오니, 아주 백성들에게 경작할 것을 허락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니, 의정부와 육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더니, 모두 윤화(允和)의 의견을 옳다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려 하였더니, 김제군 사람 박초(朴礎)가, 그 때에 전라도 수군 도절제사로 있었는데, 상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김제군의 벽골제는 신라 때부터 축조한 것으로 실로 우리 동방의 큰 못이온데, 성상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바르게 하시려 하시와, 무릇 백성의 이 됨과 해 됨은 반드시 이룩하고 제거하시는지라, 지난해인 을미년에 지군사(知郡事) 김방(金倣)에게 명령하시어 감독하여 수축하게 하였던바, 사역된 인부가 겨우 2만 명으로 20여일만에 공사가 완성되어, 방죽 아래의 땅이 모두 다 옥토가 되어서, 공전(公田)의 수확이 매년 천 석이 넘었으므로, 군민(軍民)의 식량이 또한 풍족하였사오니, 방죽이 공사(公私)에 모두 유리한 것은 분명하옵는바, 근자에 일을 맡은 관원이 어엿한 방죽을 가지고, 혹시나 터져 무너지면 그로 인하여 죄를 얻을까 두려워 하고 수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허망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인부 4만 명을 동원하고 목책(木柵)을 다섯 겹으로 둘러야 방죽이 완고하다.’ 하였으므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수축할 것을 명하시었던 것인데, 교지가 겨우 내리자, 집사자(執事者)가 국가의 정책이 이 일은 시급을 요하지 않는 줄로 생각하고, 그 고을의 군사를 시켜서 백성에게 파괴해 없앨 것의 가부를 물으니, 백성은 겁이 나서 관가의 뜻에 아부하여 가만히 서로 말하기를, ‘무너뜨리자는 말을 좇지 아니하였다가는 우리 고을만 부역하는 고통을 혼자 당할 것이다.’라 하여, 비록 그 수리의 혜택을 받는 자라도 모두 그 말을 찬성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비가 오면 도랑을 내어 물을 빼고, 가물면 막아서, 저수하는데에 물을 빼고 저수하는 방법만 얻는 다면, 물이 넘어 무너져 터진다든가, 말라 타서 농사가 낭패될 염려가 어찌 있겠습니까. 방죽의 완고함이라든가 물의 이해는 진실로 감수(監守)하는 자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수축하려 할 당초에 방죽 위아래의 토지의 비옥하고 메마른 것과 토지 면적의 다소(多少)를 조사하여 민심이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를 살핀 후에 갖추 아뢰어 교지를 물어 완성시켰고, 돌을 세워 사적을 기록한 것은 성대(聖代)에 농사를 힘쓰고 백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천고(千古)에 밝히 보인 바이었사온데, 겨우 한 해의 우기를 지나 급작히 파기하여 버리려 하오니, 백성에게 해 되는 것이 무엇이며, 파기하여 백성에게 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나이다. 방죽의 형상이 위가 좁아서 둘려 있는 길 같고, 아래는 넓어서 구릉(丘陵) 같아서, 물이 위로 넘지 아니하면, 반드시 언덕을 무너뜨릴 염려가 없사온데, 무슨 까닭으로 보축(補築)하기에 급급한지요. 또 고부군의 눌제는 무술년 가을에 겨우 만 명을 사역하여 한 달만에 완성하였고, 옛적 정전법(井田法)에 의거하여 11의 법으로 구획하여 경계를 삼고, 사전(私田) 1결을 받은 자 아홉이 공동으로 공전(公田) 1결을 경작하여 바치는데, 그 토지가 비옥하여 공사(公私)의 수확하는 바가 모두 풍족하므로, 그 이익됨이 큰 것이라야 돌을 세워 공적을 기록한 것이 역시 벽골제와 맞먹는 것이온데, 이제 불행하게도 장마를 만나 무너졌으니, 방죽의 뚝이 견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감수하는 자가 물을 잘 소통시키지 않은 소치였사오니, 책임의 소재가 따로 있겠거늘, 집사자가 도리어 제방의 위치가 마땅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힘을 덜 들이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는 것이 편한 줄을 생각하지 않고 망녕된 생각을 내어, 수만 명의 민중을 동원하여 예전 뚝 아래의 넓은 들로 내려다가 쌓아서 보안현(保安縣) 남교(南郊)까지 편입시켜 산과 들을 파서 도랑을 내어 서쪽으로 검포(黔浦) 바다까지 통하였으나, 그것으로 무너져 터질 근심을 면할런지 감히 알지 못하겠나이다. 만약 전대로 막아 저수한다면 7, 8백 명의 인부를 써서 불과 20일 동안 일할 것 뿐입니다. 신이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올 때에, 길이 두 방죽 언덕으로 지났는데, 눌제에 터진 것을 보축하고 벽골제를 헐어버리는 것을 금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의 급무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방죽 위 아래의 좋은 토지가 모두 소용없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옵서 채택하여 주시면 다행이겠나이다.”
고 하였다. 정부와 여러 조(曹)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이조 판서 허지가 박초(朴礎)의 의견을 따를 것을 청하매, 영의정 유정현 등이 모두 말하기를,
“초(礎)와 윤화(允和)의 소견(所見)이 같지 아니하니, 마땅히 조관(朝官)을 보내어 두 사람과 함께 살펴보고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선지(宣旨)하기를,
“전에 부평(富平)에 방죽 막는 것도 호조와 사헌부 관원을 보내어 함께 살펴보게 하고서 수축하였어도 그래도 터져 무너졌는데, 이제 조관을 보내어 살펴본다 하여도, 가고 오고하는 동안에 반드시 농사철이 닥쳐 올 것이니, 마땅히 풍년을 기다려 다시 수축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2 집 421 면
【분류】 *농업-수리(水利)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세종 036 09/05/19(병오) / 병조에서 사신들이 오고 가는 평안도의 사관이나 역참의 개선책을 청하다
병조에서 여러 관원이 진술한 말 중에서 가히 시행할 만한 조목을 들어 계하기를,
“평안도에 있는 사관(舍館)이나 역참(驛站)은 중국과 우리 나라 사신들의 오고 가고, 맞고 보내는 일이 다른 도의 갑절이나 되어 역호(驛戶)가 초라하고 잔약하니, 청컨대 보충군(補充軍)과 혁파된 사사(寺社)의 종들로 장정 3명씩을 1호(戶)로 삼아 역(驛)의 작고 큼에 따라 조역(助役)으로 6호나 7호씩을 더 배정하되, 사사(寺社)의 종은 전운노(轉運奴)라고 일컫고, 보충군(補充軍)은 관부(館夫)라고 일컫게 하여, 그 구분전(口分田)으로써 역(役)을 정하되, 각 고을의 부근에 있는 군자감 토지를 농토로 주고, 그 토지를 경작하던 자에게는 도망하여 없어진 호구가 경작하던 토지와 근처에 있는 공전(公田)으로 주며, 또 조역이 된 보충군 속에 만일 말을 다룰 만한 자가 있으면 그 도의 토관(土官)으로 위령(衛領)의 직에 임명하고 포상(褒賞)하며, 각 역참의 구실아치로 들어와 거주하는 사람 중에 별일이 없는 자가 있으면, 모두 구휼하여 다른 노역을 시키지 말고 객관 일에 조력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에서 봉상시(奉常寺)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선농단(先農壇)·우사단(雩祀壇)·선목단(先牧壇)·원단(圓壇)·산천단(山川壇)·사한단(司寒壇)·한강단(漢江壇)·백악당(白岳堂)을 지키는 노자(奴子)들의 구분전(口分田)을 일찍이 2결(結)이나 준 것이 너무 많았고, 또 성밑의 공전(公田)의 수효가 적사오니, 청하옵건대 단·당(壇堂) 근처 사람들에게 50부(負)를 주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3 집 295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세종 093 23/06/15(경진) / 황치신의 진상을 조사하라고 이르다
사헌 장령(司憲掌令) 홍심(洪深)을 불러 교지(敎旨)하기를,
“내가 들으니 황치신의 바꾼 밭이 모두 조상의 무덤 가까운 곳에 있어서 부득이하여 서로 바꾼 것이라고 들었을 뿐이다. 과연 그렇다면 진실로 마땅히 서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몰수당하여 공전(公田)이 되었다면 의리가 사사로이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치신이 신임 대신(信任大臣)으로서 나에게 고(告)하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서로 바꾼 것은 과실이 없지 아니하다. 옛사람은 비록 장오(贓汚)를 범하였더라도 어버이를 위하여서 범하였다면 두어두었다고 한다. 이제 치신의 죄도 그 정상을 따진다면, 실상은 어버이를 위한 것이다. 비록 그러하더라도, 바꾼 바의 밭이 멀리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조상의 무덤 근처에 있다고 칭탁해 말한다면 그른 것이다. 인군(人君)은 선(善)한 것을 상주고 악(惡)한 것을 벌주어야 하나, 마땅히 그 사실을 규명하여야 할 것이니, 경기도에 고문을 보내[移關]어 자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