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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 인종원년 북송이 아닌 남송의 사신으로 고려에 1개월간 머무르다 귀국후 고려도경을 집필하였는데 자신이 경험했었을것보다 너무 많은 내용을 글로 남기었는데 필시 자신이 경험한 내용에 그이전의 여러기록을 참고하여 작성했을것으로 본다. 그가 지적한 고려의 위치는 분명히 濱海東南에 있다고 하였으니 운영자가 밝힌 하북성 대성은 천진해구가 인접한 평야 부근일것이나 산세를 이용해 궁궐이 위치한다고 기술한 내용은 정말 의아하다. (운영자 주)
1.문헌기록들.
高麗史
1卷-世家1-太祖1
○(己卯)二年春正月定都于松嶽之陽創宮闕置三省六尙書官九寺立市廛辨坊里分五部置六衛.
고려태조2년 송악 남쪽에 궁궐을 짓고 3성6부,상서관,9개의 절과 장을 세우고 방리를 나누어 5부와 6위를 두었다.
고려도경 -서긍
[國城] 국성
高麗。自唐以前。蓋居平壤。本漢武帝所置樂浪郡。而唐高宗所建都護府也。以唐志考之。平壤城乃在鴨綠水東南。唐末。高麗君長懲累世兵革之難。稍徙而東。今王城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矣。其城周圍六十里。山形繚繞。雜以沙礫。隨其地形而築之。外無濠壍。不施女墻。列太上御名延屋。如廊廡狀。頗類敵樓。雖施兵仗。以備不虞。而因山之勢。非盡堅高。至其低處。則不能受敵。萬一有警。信知其不足守也。外門十二。各有摽名。舊誌纔知其七。今盡得之。正東曰宣仁。 舊不見名。止曰東大門。曰崇仁。 舊曰東門 曰安定。 舊曰須恤。乃麗人方言也。 東南曰長霸。正南曰宣華。 舊不見門 曰會賓。曰泰安。 舊名貞觀。今易此名。 西南曰光德。 舊曰正州。亦通其路耳。州郡非門名所宜。 正西曰宣義。曰狻猊。正北曰北昌。 舊名崧山。特登山之路。非本名也。東北曰宣祺。 舊名金郊。今易此。 西南隅。王府宮室居之。其東北隅。卽順天館。極加完葺。西門亦壯麗。蓋爲中朝人使設也。自京市司至興國寺橋。由廣化門以迄奉先庫。爲長廊數百間。以其民居隘陋。參差不齊。用以遮蔽。不欲使人洞見其醜。東南之門。蓋溪流至巳方。衆水所會之地。其餘諸門。官府,宮祠,道觀,僧寺,別宮,客館。皆因地勢。星布諸處。民居十數家。共一聚落。井邑街市。無足取者。總其建國大槩而圖之。其餘則互見於別篇。(고려때의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다-운영자 주)
고려는, 당 나라 이전에는 대개 평양(平壤)에 있었으니, 본래 한 무제(漢武帝)가 설치했던 낙랑군(樂浪郡)이며, 당 고종(唐高宗)이 세운 도호부(都護府)이다. 《당지(唐志)》를 상고하여 보면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당 나라 말엽에 고려의 군장(君長)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을 경계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겨갔다. 지금 왕성(王城)은 압록강의 동남쪽 천여 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주위가 60리이고, 산이 빙 둘러 있으며 모래와 자갈이 섞인 땅인데, 그 지형에 따라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밖에 호참(濠壍)과 여장(女墻 성가퀴)을 만들지 않았으며, 줄지어 잇닿은 집은 행랑채와 같은 형상인데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비록 병장(兵仗)을 설치하여 뜻밖의 변을 대비하고 있으나, 산의 형세대로 따랐기 때문에 전체가 견고하거나 높게 되지 않았고, 그 중 낮은 곳에 있어서는 적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
열 두 외문(外門)에 각각 표시한 이름이 있었는데, 옛 기록에는 겨우 그 중 7곳을 말했으나 지금 다 알 수 있다. 정동(正東)에는 선인(宣仁)- 옛 기록에는 이름을 표시하지 않고 다만 동대문이라고 하였다. -숭인(崇仁)- 옛 기록에는 동문이라고 했다. -안정(安定)- 옛 기록에는 수휼(須恤)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려 사람들의 방언이다. - 이 있고, 동남에는 장패(長覇)가 있고, 정남에는 선화(宣華)- 옛 기록에는 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회빈(會賓),태안(泰安)- 옛 기록에는 정관(貞觀)이었는데 지금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 이 있고, 서남에는 광덕(光德)- 옛 기록에는 정주(正州)라 했는데 또한 그쪽 길과 통한다. 주ㆍ군을 문 이름으로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 이 있고, 정서에는 선의(宣義)ㆍ산예(狻猊)가 있고, 정북에는 북창(北昌)- 옛 기록에는 숭산(崧山)이라 했다. 단지 등산하는 길이요 본 이름이 아니다. - 이 있고, 동북에는 선기(宣祺)- 옛 이름은 금교(金郊)였는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 가 있다.
서남 모퉁이에는 왕부(王府), 궁실(宮室)이 있고, 그 동북 모퉁이에 있는 것이 곧 순천관(順天館)인데 매우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으며, 서문(西門)도 또한 웅장하고 화려하니, 대개 중국에서 사신 오는 사람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경시사(京市司)에서 흥국사(興國寺) 다리까지와, 광화문(廣化門)에서 봉선고(奉先庫)까지에 긴 행랑집 수백 칸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민중들의 주거가 좁고 누추하며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가려서 사람들에게 그 누추함을 훤하게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동남쪽의 문은, 대개 시냇물이 동남쪽[巳方]으로 흐르니 모든 물이 모이게 되는 곳이요, 그 나머지 모든 문과 관부(官府)ㆍ궁사(宮祠)ㆍ도관(道觀)ㆍ승사(僧寺)ㆍ별궁(別宮)ㆍ객관(客館)도 모두 지형에 따라 여러 곳에 별처럼 널려 있다.백성들의 주거는 열 두어 집씩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고, 바둑판 같은 시가지는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상으로 건국(建國)의 대략을 총괄하여 그렸고, 그 나머지는 다른 편(篇)에 상호 찾아볼 수 있다.
[樓觀] 누관
王城。昔無樓觀。自通使以來。觀光上國。得其規模。稍能 太上御名 治。初惟王城宮寺有之。今官道兩旁。與國相富人。稍稍僭侈。入宣義門。每數十家則建一樓。俯近興國寺。二樓相望。左曰博濟。右曰益平。王府之東。二樓臨衢。不見摽牓。簾幙華煥。聞皆王族游觀之所。人使經由。則有婦女。窺覘於其間。衣服之飾。不異民庶。或云王每出游。則其族始易錦繡也。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을 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건축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절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나라에서 개설한 도로) 양쪽과 국상(國相 일국의 재상),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각(樓閣) 하나씩이 세워져 있다.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각이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 것은 ‘박제(博濟)’라 하고 오른쪽 것은 ‘익평(益平)’이라 한다. 왕부(王府)의 동쪽에도 누각 둘이 거리에 임해 있어, 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으니, 모두 왕족들이 놀이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신이 지나가게 되면,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의복 꾸밈새가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놀러 올 때면 왕족들이 비로소 비단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門闕] 문궐
臣聞黃帝,堯,舜。尙象於豫。乃設重門擊柝。以待暴客。後世聖人。又差尊卑而爲之等。故天子之門。曰皐曰庫曰雉曰應曰路凡五。諸侯則去其二焉。曰庫曰雉曰路而已。魯爲周公後。而新作雉門兩觀。且不逃春秋之譏。況其他侯乎。高麗門闕之制。亦頗遵古侯禮。雖其屢聘上國。亦頗效顰學步。然材乏工拙。終以朴陋云。
황제(黃帝 중국 전설상의 제왕)와 요(堯)ㆍ순(舜)은 예방하기를 숭상하여 겹문을 설치하고 딱따기를 쳐서 폭객(暴客 도적)을 대비했고, 후세의 성인들은 또 존비(尊卑)를 나누어 등급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자(天子)의 문(門)은 고문(皐門)ㆍ고문(庫門)ㆍ치문(雉門)ㆍ응문(應門)ㆍ노문(路門)이라 하여 모두 다섯 문이고, 제후(諸侯)들은 이 중 두 문을 없애고 고문ㆍ치문ㆍ노문뿐이었다. 그래서 노(魯) 나라는 주공(周公)의 후손으로서도 치문(雉門)에 새로 두 누관(樓觀)을 지었다가 《춘추(春秋)》의 꾸지람을 면하지 못하였거든, 더구나 그 나머지 제후들이겠는가? 고려의 궐문 제도는 자못 옛 제후의 예(禮)를 따랐다. 비록 그들이 누차 상국에 빙문 다니며 본떠다가 모방한 것이지만, 재목이 모자라고 기술이 졸렬하여 결국 거칠고 세련되지 못했다고 한다.
[宣義門]
宣義門。卽王城之正西門也。西爲金方。於五常屬義。故以名之。其正門二重。上有樓觀。合爲瓮城。南北兩偏。別開門相對。各有武夫守衛。其中門不常開。唯王與使者出入。餘悉由偏門也。自碧瀾亭。以至西郊。乃過此門。而後入館。王城之門。唯此最大且華。蓋爲國朝人使設也。
선의문은 곧 왕성의 서쪽 정문인데, 서는 금방(金方)으로서 오상(五常 인ㆍ의ㆍ예ㆍ지ㆍ신)에선 의(義)에 속하기 때문에 이름하게 된 것이다. 정문은 이중으로 되었고, 그 위에 누관이 있는데, 합쳐 옹성(甕城 성문을 둘러싼 작은 성)이 되어 있고, 남ㆍ북 양편에 따로 문을 내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각각 무부(武夫)가 수위하고 있다.중문(中門)은 늘 열어놓지 않고 오직 왕이나 사자가 출입할 때만 열고 나머지는 모두 편문(偏門)으로 다닌다.벽란정(碧瀾亭)에서 서교(西郊)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문을 지나야 관(館)에 들어갈 수 있는데, 왕성의 문으로는 오직 이 문이 가장 크고도 화려하다. 그런데 이 문은 국조(國朝 송 나라 조정) 사신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外門 ] 외문
王城諸門。大率草創。唯宣義門。以使者出入之所。北昌門。爲使者回程祠廟之路。故極加嚴飾。他不逮也。自會賓,長霸等門。其制略同。唯當其中爲兩戶。無尊卑。皆得出入。其城皆爲夾柱。護以鐵筩。上爲小廊。隨山形高下而築之。自下而望崧山之脊。城垣繚繞。若蛇虺蜿蜒之形。長霸門通安東府。光德門通正州。宣仁門通楊,全,羅三州。崇仁門通日本。安定門通慶,廣,淸三州。宣祺門通大金國。北昌門通三角山。薪炭松子布帛所出之道也。
왕성의 모든 문은 거개 초창기(草創期)에 만든 것인데, 선의문(宣義門)은 사자(使者)가 출입하는 곳이고, 북창문(北昌門)은 사자가 회정(回程 돌아가는 길)하거나, 사묘(祠廟)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아주 엄숙하게 꾸며져 다른 문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회빈문(會賓門)ㆍ장패문(長覇門) 등부터는 그 제도가 대략 같은데, 오직 그 한가운데에 쌍문을 만들어 존비(尊卑)에 구애없이 모두 출입할 수 있게 했다.성(城)은 모두 양쪽을 나무로 받치고 철통(鐵筩)으로 보호하였으며, 위는 회랑(回廊)처럼 되었는데 산 지형의 높고 낮은 대로 쌓았다. 아래서 숭산(崧山) 등성이를 바라보면, 성의 담장을 빙 두른 것이 마치 뱀이 꿈틀거리는 형상과 같다. 장패문은 안동부(安東府)로 통하고, 광덕문(光德門)은 정주(正州)로 통하고, 선인문(宣仁門)은 양주(楊州)ㆍ전주(全州)ㆍ나주(羅州) 등 3주로 통하고, 숭인문(崇仁門)은 일본으로 통하고, 안정문(安定門)은 경주(慶州)ㆍ광주(廣州)ㆍ청주(淸州) 등 3주로 통하고, 선기문(宣祺門)은 대금국(大金國)으로 통하고, 북창문은 삼각산(三角山)으로 통하는데, 신탄(薪炭 땔나무와 숯)ㆍ잣[松子]ㆍ포백(布帛)이 나는 지방이다.
[廣化門 ] 광화문
廣化門。王府之偏門也。其方面東。而形制略如宣義。獨無瓮城。藻飾之工過之。亦開三門。南偏門榜儀制令四事。北門榜周易乾卦繇辭五字。仍有春貼子云。雪痕尙在三雲陛。日脚初升五鳳樓。百辟稱觴千萬壽。衮龍衣上瑞浮。
광화문은 왕부(王府)의 편문(偏門)인데, 동쪽으로 향했고, 모양과 제도는 대략 선의문과 같은데, 유독 옹성(甕城)이 없고, 문채나게 꾸민 공력은 더하다. 역시 문 셋을 냈는데, 남쪽 편문에는 의제령(儀制令) 4가지 일을 방시(榜示)했고, 북쪽 문에는 《주역》 건괘(乾卦)의 요사(繇辭) 5글자 건(乾)ㆍ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을 방시했으며, 또한 춘첩자(春帖字 입춘날 대궐 안 기둥에 써 붙이는 주련(柱聯))에 이렇게 썼다.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 / 雪痕尙在三雲陛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 / 日脚初升五鳳樓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 / 百?稱觴千萬壽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렸도다 / 袞龍衣上瑞光浮
[昇平門] 승평문
昇平門。卽王宮之正南門也。上爲重樓。旁起兩觀。三門並列。制益宏大。四阿。各有銅火珠爲飾。自門之內。左右分爲兩亭。皆曰同樂。矮牆。幾百堵相屬。以至神鳳門。而門之制。又壯大於昇平矣。東曰春德。通世子宮。西曰太初。通王居備坐。又十餘步。卽閶闔門。乃王奉迎詔書之所也。左右兩挾有承天門。自是而上。山勢稍逼。中庭隘狹。去會慶殿門。不過數丈耳。昇平,神鳳,閶闔三門。制度文采。大抵相類。而神鳳爲冠。題牓之字。金書朱地。有歐率更之體。大抵麗人多法古。不敢以臆說己見而妄爲俗體也。
승평문은 곧 왕궁(王宮)의 정남문이다. 위에는 2층 누각을 만들고 양쪽에 두 누관을 세워, 3문이 죽 늘어서 있으니 제도가 더욱 굉장하고 웅대한데, 문의 네 모서리는 각각 동화주(銅火珠 문짝에 붙이는 장식)로 장식이 되어 있다.문 안에서부터 좌우로 나누어 두 개의 정자를 만들고 모두 ‘동락정(同樂亭)’이라고 했다. 나지막한 담장 몇 백이 서로 연속되어 신봉문(神鳳門)까지 이르렀는데, 신봉문의 제도는 승평문보다도 웅장하고 컸다. 동쪽 문에는 ‘춘덕(春德)’이라고 편액했는데 세자궁(世子宮)으로 통하고, 서쪽 문은 ‘태초(太初)’라고 했는데, 왕이 거처하는 비좌(備坐)와 통한다.또 10여 보(步)쯤 가면 창합문(閶闔門)이 있는데, 곧 왕이 조서(詔書)를 받는 곳이다. 좌우 양쪽에 승천문(承天門)이 있고, 여기서부터 위로는 산세가 점차 급하고 뜰이 좁고, 회경전 문과의 거리가 두어 장(丈)에 지나지 않는다.승평ㆍ신봉ㆍ창합 3문의 제도와 채색은 대개 서로 비슷한데, 신봉문이 으뜸이다. 제방(題牓)의 글씨는 붉은색 바탕에 금자(金字)로 씌어 있는데, 구 솔경(歐率更구양순)의 글씨체이다. 대개 고려 사람들은 거개 옛 체를 법받았고, 감히 억설(臆說)이나 자기 소견을 가지고 망령되이 속체(俗體)를 쓰지 않는다.
[同德門 ] 동덕문
同德。左右二門相對。其中卽昇平門也。形制略似殿門而極高。唯無臺觀。昌德,會賓,春宮,承休。其制與同德不異。特閤門與承天二門差?爾。
동덕문은 좌우로 두 문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것이 곧 승평문이다. 모양과 제도는 대략 전문(殿門)과 같아 매우 높으나, 대관(臺觀)이 없다.창덕(昌德)ㆍ회빈(會賓)ㆍ춘궁(春宮)ㆍ승휴문(承休門)은 그 제도가 동덕문과 다르지 않은데, 특히 합문(閤門)ㆍ승천(承天) 두 문이 조금 좁을 뿐이다.
[殿門] 전문
會慶殿門。在山之半。石梯隥道。高可五丈。蓋正殿之門也。並列三門。中間唯詔書得入。王與人使。分左右而行。門外列戟二十四枝。甲冑之士。執其儀衛。守衛甚衆。特嚴於它門爾。
회경전(會慶殿)의 문은 산 중턱에 있고 돌사다리 높이가 5장(丈) 가량인데, 이것이 정전(正殿)의 문이다. 3문을 나란히 세웠는데, 중간 문은 오직 조서만 들어갈 수 있고, 왕과 사신은 좌우로 나누어 통행한다.
문밖에 창 24자루를 늘어 세웠고, 갑주(甲冑)를 입은 군사가 의위(儀衛)를 담당하고 수위병이 매우 많아서, 다른 문보다도 특히 엄중하다.
[宮殿] 궁전
臣仰惟神宗皇帝。誕敷文敎。覃被遐方。貢琛面內者。梯航呇편001 至。惟高麗尤加禮遇。因遣近侍。銜命綏撫。嘗頒睿旨。凡相見處。殿名鴟吻。更不回避。以是知聖謨宏遠。不責蠻夷以小節。而嘉其忠順之大義也。夏童北虜。氈城穹廬。四時隨水草溫涼以徙。初無定都。若高麗。自前史已載其依山谷而居。少田業。力作不足以自資。其俗節於飮食。而好修宮室。故至今王之所居堂 太上御名仍在。圓櫨方頂。飛翬連甍。丹碧藻飾。望之潭潭然依崧山之脊。蹭道突兀。古木交蔭。殆若嶽祠山寺而已。今繪其形制。仍不廢其名也。[편-001]呇 : 沓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크게 문교(文敎)를 펴 먼 나라에까지 미치매, 보물을 바치고 알현(謁見)하려는 사람이 바다를 건너 답지하였다. 그 가운데 고려에게만 더욱 예우(禮遇)하여 주고, 따라서 근시(近侍)를 사신으로 보내어 위무하였으며, 일찍이 예지(睿旨 황제의 분부)를 내렸다.무릇 바라보이는 궁전 이름과, 치미(鴟尾 용마루의 막새기와) 장식을 거리낌없이 했으니, 여기서 성상의 계책이 크고 원대하여 작은 일로 오랑캐를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하고 순종하는 큰 의리만 아름답게 여김을 알았다.
하동(夏童)이나 북로(北虜)들은 털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가지고 사철 물과 풀이 있는 따뜻하고 서늘한 곳을 따라 옮겨다니고, 처음부터 일정한 도읍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전대(前代)의 역사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데,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며, 농지가 적어 힘써 지어도 자급(自給)할 수 없으며 그 풍속은 음식을 절제하고 궁실(宮室)을 짓기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구조는 둥근 기둥에 모난 두공(頭工)으로 되었고, 날아갈 듯 연이은 용마루에 울긋불긋 단청으로 꾸며져 바라보면 담담(潭潭 깊고 넓은 모양)하고, 숭산(崧山) 등성이에 의지해 있어서 길이 울퉁불퉁 걷기 어려우며, 고목(古木)이 무성하게 얽히어 자못 악사(嶽祠)ㆍ산사(山寺)와 같다.지금 그 형상과 제도를 그리고, 그 명칭은 그대로 써 둔다.
[王府] 왕부
王府內城。環列十三門。各揭名額。隨方見義。唯廣化門正東通長衢。殿門十五。唯神鳳爲最華。內府十六。尙書省爲冠。九殿參差。會慶爲正寑。三閣鼎峙。淸燕爲壯麗。復有小殿。以爲燕居之所。日視事於便座。唯施茵褥於榻上。國官親侍。跪列其側。聽受王旨。次弟傳出。大臣。五日一見。別有議政之堂。餘官則朔望之外。四見於王。聽旨受事。則立於門外。惟執奏官。當門授之。升堦復位。皆脫屨膝行。而進退往來。廷趨必面王磬折。其謹如此。至餘屋宇。則皆草創名浮於實。不足詳紀。析而圖之。或互見於諸篇也。
왕부에는 내성(內城)이 둘려 있고, 열 세 군데의 문에는 각각 편액(扁額)이 걸렸는데, 방향에 따라 의의를 나타내었다. 광화문(廣化門)이 정동(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했고, 궁궐 문은 15개인데 신봉문(神鳳門)이 가장 화려하다. 내부(內部)는 16인데 상서성(尙書省)이 으뜸이 된다. 아홉 궁전은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은데 회경전(會慶殿)이 정침(正寢)이고, 세 각(閣)이 솟발처럼 벌려 있는데, 청연각(淸燕閣)이 웅장 화려하다. 또 작은 궁전이 있어 연거(燕居 한가로이 거처하는 곳)하는 곳으로 쓴다.날마다 편좌(便座)에서 정사(政事)를 보는데, 오직 인욕(茵褥 돗자리)을 탑(榻) 위에 깔았다. 국관(國官)이나 친시(親侍)들이 그 곁에 꿇고 늘어 앉아 왕의 분부를 받아 차례로 전달한다.대신은 5일에 한 번씩 알현하는데 따로 정사를 의논하는 당(堂)이 있고, 나머지 관원들은 매달 1일과 15일 이외에 네 차례 왕에게 알현하여 분부를 받는다. 분부 받을 일이 있으면 문밖에 서서 받는데 집주관(執奏官)이 문에 서서 준다. 섬돌에 올라갔다 자리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신을 벗고 무릎 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가며, 궁정(宮廷)에서 추창(趨창- 예도에 맞도록 허리 굽혀 빨리 걷는 것)할 때에는 반드시 왕을 향하여 절을 하니, 그 조심함이 이와 같다.나머지 옥우(屋宇)에 있어서는 모두 초창(草創)한 것으로서 이름이 실재보다 과하여 상세히 기록할 것이 못 되므로 가려서 그렸는데, 여타의 편(篇)에 섞여 보이기도 한다.
고려도경설명에 따라 그린 정전의 위치와 이름.(타 사이트서 발췌)
[會慶殿 ] 회경전
會慶殿在閶闔門內。別有殿門。規模甚壯。基址高五丈餘。東西兩堦。丹漆欄檻。飾以銅花文彩。雄麗冠於諸殿。兩廊通三十間。中庭甃石。地虛不堅。行則有聲。常禮不敢居。惟人使至。則受詔拜表於庭下。燕會則設使副之席於殿之西楹。東向。上節位於東序。中節位於西序。下節位於門之兩廈而北向。餘禮則別殿以別之。
회경전은 창합문(閶闔門) 안에 있는데, 따로 궁궐문이 있고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터의 높이는 5장(丈)쯤 되고, 동ㆍ서 양쪽의 섬돌은 붉게 칠하고, 난간은 동화(銅花 구리로 꽃무늬를 만든 것)로 꾸몄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여 모든 궁궐 중에 제일이다.
양쪽 행랑은 모두 30칸이고, 뜰안은 벽돌로 깔았는데 견고하지 못하여 다니면 소리가 난다.상례(常禮 일상적인 예식) 때에는 감히 거처하지 않고 오직 사신(使臣)이 오게 되면 뜰아래에서 조서(詔書)를 받거나 표문(表文)에 절한다. 연회(燕會) 때에는 정사와 부사의 자리를 전(殿)의 서영(西楹)에 동으로 향하여 차리고, 상절(上節 상사에게 딸린 관속)들은 동쪽머리[東序], 중절(中節 부사에게 딸린 관속)은 서쪽머리[西序], 하절(下節 하례)은 문의 양쪽 행랑에 자리하여 북으로 향한다. 나머지 예식(禮式)은 딴 궁궐에서 하여 구별한다.
[乾德殿 ] 건덕전
乾德殿在會慶殿之西北。別有殿門。其制五間。視會慶差小。故事人使至彼。第三會。王禮加勤。特出姬侍。則燕於其中。彼使者至。楷以拘衣制不講。惟同會慶酬酢而止。若朝廷非專遣使。雖郡吏使臣。持牒傳命。亦燕於此殿。特禮文有隆殺耳。
건덕전은 회경전의 서북쪽에 있는데, 따로 궁궐문이 있고, 그 제도는 5칸으로 되어 회경전에 비하여 조금 작다.예전에는 사신이 거기에 가면, 제3차 연회 때에 왕의 예(禮)가 더욱 정성스러워 특별히 궁녀를 불러 모시도록 하고 그 속에서 잔치를 하였다 한다. 이번에 갔을 때에는 해(楷인종의 이름)가 의복제도에 구애되어 시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회경전에서와 같이 수작(酬酢)하고 그쳤다. 만약 중국에서 보낸 자이면, 조정에서 보낸 사신이 아니고 군리(郡吏)의 사신이 통첩(通牒)을 가지고 가 명령을 전하더라도 역시 이 궁궐에서 잔치하나, 다만 예의 절차에 차등이 있을 뿐이다.
[長和殿 ] 장화전
長和殿在會慶之後。直北一崗。地勢高峻。形制益隘。不逮乾德。兩?皆帑藏。其東貯聖朝所錫內府之珍。其西以儲其國金帛之類。警備之卒。視他所加嚴焉。
장화전은 회경전 뒤 정북 방향의 멧부리에 있는데, 지형이 높고 험준하며, 모양과 제도가 더욱 좁아 건덕전만 못하다.양쪽 행랑은 모두 탕장(帑藏 왕실의 창고)인데, 동쪽 행랑에는 성조(聖朝 송 나라를 말한다)에서 내린 내부(內府)의 보물을 저장하고, 서쪽 행랑에는 그 나라의 금백(金帛) 따위를 저장한다. 경비하는 병졸이 다른 곳보다 더 엄중하다.
[元德殿 ] 원덕전
元德殿在長和殿之後也。地勢益高。營治草率。聞其王不常居。惟隣國侵逼。邊?有警。則卽之。發兵命將。若刑殺樞要之士。則與近臣親密者一二人。議決于此。
원덕전은 장화전 뒤에 있다. 지형이 더욱 높고 만듦새가 간소하다. 듣건대, 그 왕이 늘 거처하지 않고, 오직 이웃 나라가 침범하거나 변방이 시끄러우면, 거기로 나아가 병부(兵符)를 발하거나 장수에게 명령을 내린다. 만약 중요한 인사(人士)를 죽이려면 가까운 신하 1~2인과 여기에서 의결(議決)한다고 한다.
[萬齡殿 ] 만령전
萬齡殿在乾德之後。基 太上御名 差小。而藻飾華麗。蓋寑室也。姬嬪侍女。於兩廡列室而環居。自崧山之半。下視其室奧。亦不甚寬敞。諒其姬侍之數。亦稱其居耳。
만령전은 건덕전 뒤에 있는데, 터와 구조가 조금 작으나 문채나게 꾸며 화려하니, 이것이 침실이다. 비빈(妃嬪)과 시녀들이 양편 행랑에 방을 잇대어 빙 둘러 거처하는데, 숭산(崧山) 중턱에서 그 안을 내려다보니 또한 그다지 넓지 않았다. 생각건대, 그 궁녀나 모시는 자의 숫자도 그 방의 수와 같은 듯 싶었다.
[長齡殿 ] 장령전
長齡殿在乾德之東紫門內。其制三間。雖華煥不逮萬齡。而規模過之。每中朝使者欲行。前期必有先書。介紹至。則於此受之。賈人之至境。遣官迎勞。舍館定。然後於長齡受其獻。計所直。以方物數倍償之。
장령전은 건덕전 동쪽 자문(紫門) 안에 있고 그 제도는 3칸인데, 비록 화려함은 만령전(萬齡殿)만 못하나 규모는 크다.
매양 중국에서 사자가 고려에 가려면, 기일에 앞서 반드시 먼저 보내는 소개서(紹介書)가 있는데, 그 연락이 오면 여기에서 받는다. 고인(賈人 상인)이 국경에 이르면 관원을 보내어 맞아 위로하고, 사관(舍館)이 결정된 뒤에 장령전에서 그가 바치는 것을 받고서 그 값어치를 계산하여 방물(方物)로 두어 배쯤 되게 보상한다.
[長慶殿 ] 장경전
長慶,重光,宣政三殿。舊記雖載其名。今聞更修重光,長慶。易爲別殿。恐是今建閣之地。宣政卽外朝也。歲時。與其臣屬會飮。王誕日。亦有節名。王俁以八月十七日。謂之咸寧。其日大會公族貴臣近侍於長慶。中國賈人之在館者。亦遣官爲筵伴。用華夷二部樂。亦有致語。嘗記其口號。曰當時瑞色照宮林。和氣濃濃破積陰。香火千家祈國壽。笙歌二部樂賓心。興酣日影移珠箔。舞罷花枝倒玉簪。須盡淸歡酬美景。從容莫訴酒杯深。
장경ㆍ중광(重光)ㆍ선정(宣政) 3전(殿)은 옛 기록에 비록 그 이름이 실려 있으나 지금 듣건대, 중광전ㆍ장경전을 중수하여 다른 전(殿)으로 바꾸었다 하니, 아마도 지금 전각(殿閣)을 세운 곳이 선정전으로서 곧 외조(外朝 국왕이 국정을 처리하던 곳)일 것이다. 이곳에서 세시(歲時)에 그 신하들과 모여서 연회를 베푼다. 왕의 탄일(誕日)에도 명절 이름을 붙였으니, 왕우(王俁예종)가 8월 17일 출생했으므로, 그 날을 ‘함녕절(咸寧節)’이라 부른다. 그 날은 공족(公族)ㆍ귀신(貴臣)ㆍ근시(近侍)들을 장경전에 모두 모으고, 중국 상인으로 객관(客館)에 있는 사람도 관원을 보내어 연회에 참여시키는데 화이(華夷) 두 가지 음악을 쓰며 또한 치어(致語 임금에게 올리는 송덕문(頌德文))가 있다. 그 구호는 다음과 같다.
[延英殿閣 ] 연영전각
延英殿閣在長齡之北。制度小大。略如乾德。王於此親試進士。又其北曰慈和。亦爲燕集之處。前建三閣。曰寶文。以奉累聖所錫詔書。西曰淸燕。以藏諸史子集。嘗太上御名 得其燕記。
연영전각은 장령전(長齡殿) 북쪽에 있는데, 제도는 작으나 대략 건덕전(乾德殿)과 비슷하다. 왕이 여기에서 진사(進士)들을 친히 시험 보인다. 또 그 북쪽의 것을 자화전(慈和殿)이라고 하는데, 역시 연회하는 곳이다.
[臨川閣 ] 임천각
臨川閣在會慶殿西會同門內。爲屋四楹。窻戶洞達。外無重簷。頗類臺門。非燕集之地。其中藏書數萬卷而已。
임천각은 회경전(會慶殿)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다. 집은 네 기둥으로 되었고 창문이 툭 트였으나 밖이 겹처마로 되어 있지 않아 자못 누대(樓臺)의 문과 같은데, 연회하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서책 수만 권이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
[長慶宮 ] 장경궁
長慶宮在王府之西南。由嵒山麓。有二小徑。北通王府。東通宣義門長衢。老屋數十楹。王顒諸妹居其中。後出適人。遂虛其地。荒蕪益甚。俁疾革。又卽之醫治。已而不起。因以爲祠奉之所。俁之侍姬。與其舊僚屬十數人守之。比使者銜睿眷之隆。遵元豐舊制。祭奠前王。弔慰其嗣。皆於長慶拜而受之。
장경궁은 왕부(王府) 서남쪽 유암산(由嵓山) 기슭에 있다. 두 갈래의 조그만 길이 있는데 북으로는 왕부와 통하고 동으로는 선의문(宣義門)과 통하며 긴 거리에는 낡은집 몇 채가 있다. 왕옹(王顒숙종)의 여러 자매가 그곳에 살았는데, 뒤에 시집가고 드디어 그곳을 비워 두었으므로 더욱 황폐해졌다. 왕우(王俁예종)가 병이 위독하여 거기에 가 치료했는데, 마침내 치유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따라서 제사 모시는 사당으로 삼았다. 왕우를 모시던 궁녀와 그의 옛 관속 수십 인이 지킨다.근래에는 사신이 예권(睿眷)의 융숭한 명을 받들고, 원풍(元豐) 시절의 예(例)대로 전왕(前王)에게 제사지내고 그 사왕(嗣王)에게도 조위(弔慰)하는데, 모두 장경궁에서 받는다.
[左春宮 ] 좌춘궁
左春宮在會慶殿之東春德門內。王之嫡長子初立。曰世子。旣冠而後居之。屋宇制度。殺於王宮。其大門。榜曰大和。次曰元仁。次曰育德。聽事之堂無榜。梁棟脩偉。屛上書文王世子篇。亦建官屬十數人。右春宮在昇平門外御史臺之西。王之姊妹諸女居之。
좌춘궁은 회경전의 동쪽 춘덕문(春德門)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嫡長子)가 처음으로 책봉(冊封)되면 세자(世子)라 하고, 관례(冠禮 성인이 되는 예식)를 하고 난 뒤에는 여기에 거처하는데, 건물의 제도는 왕궁(王宮)만 못하다.대문의 편액은 ‘대화(大和)’라 했고, 다음은 ‘원인(元仁)’, 그 다음은 ‘육덕(育德)’이라고 했다.
일 보는 집은 편액이 없고, 들보와 기둥은 길고 크며, 병풍에는 〈문왕세자(文王世子)〉 편이 씌어 있었다. 또한 관속(官屬) 십수 인을 두었다.우춘궁(右春宮)은 승평문(昇平門) 밖 어사대(御史臺)서쪽에 있는데, 왕의 자매 등 여러 여인이 거처한다.
[別宮 ] 별궁
王之別宮與其子弟所居。皆謂之宮。王母,妃,姊妹別居者。給官受田。以奉湯沐。或空不居。許民射莫利。而供租賦。雞林宮在王府之西。扶餘宮在由巖山之東。又有辰韓,朝鮮,常安,樂浪,卞韓,金冠六宮。分置城內。皆王伯叔昆弟之居也。王繼母之宅。號積慶。今公族不見顯位。而別宮十室九空。其田土。昔領於壽昌。今皆屬之王府。又置官以掌之。
왕의 별궁 및 그 자제들이 거처하는 곳을 모두 궁이라 한다. 왕의 모비(母妃)와 자매 중에 따로 사는 사람은 집과 전토(田土)를 받아, 탕목(湯沐 생활비)에 쓰도록 하는데, 더러는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민간에게 이득을 보게 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한다.계림궁(鷄林宮)은 왕부(王府) 서쪽에 있고 부여궁(扶餘宮)은 유암산(由巖山) 동쪽에 있으며, 또한 진한(辰韓)ㆍ조선(朝鮮)ㆍ상안(常安타본에는 장안(長安))ㆍ낙랑(樂浪)ㆍ변한(卞韓) ㆍ금관(金冠)의 6궁이 성안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왕의 백숙(伯叔)ㆍ곤제(昆弟)가 거처하는 곳이다. 왕의 계모(繼母)가 거처하는 궁을 적경궁(積慶宮)이라 한다.지금 공족(公族)으로서 현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별궁은 10채 중 9채는 비어 있다. 그 전토를 과거는 수창궁(壽昌宮)에서 관할했는데, 지금은 모두 왕부에 소속시켜 또한 관원을 두어 관장하게 한다. (하략)
주)조선 태조이성계는 그의 즉위를 수창궁에서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조선왕조실록 태조조에 있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 城邑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 권 성읍 에서.
2.고려궁궐의 변천.
고려의 궁궐은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현종 때가 가장 화려했으며, 몽고의 침략 이후로 고려의 궁궐은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2.1 고려태조 때의 궁궐.
천덕전, 상정전과 중광전, 신덕전, 위봉루로 이뤄져 있었다. 천덕전은 조회를 하는 정전, 상정전과 중광전은 정사를 보는 편전, 신덕전은 휴식과 수면을 하는 침전, 위봉루는 구정에 있던 큰 누각이다. 신라 경순왕이 신하의 예를 취하던 곳이 바로 천덕전이었으며, 백제에게 승리한 후 축하연을 한 곳은 위봉루였다. 광종 때 중수를 했고, 성종 때는 천덕전은 건덕전으로 바뀐다.
2.2 현종 때의 궁궐
개성이 함락당하고 분탕질을한 거란의 침입 후 현종2년10월에 복구를 시작해 5년1월에 마친다. 현종은 기존의 궁궐을 복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명한 회경전(만월대)과 다수의 궁궐을 확장한다. 현종 11년8월부터 14년8월까지 기존의 건덕전 동편에 남북방향으로 길게 새로운 궁궐들을 추가했다. 만월대의 회경전을 비롯해서 장화전 원덕전 등이 새로 들어 섰다. 현종 때 추가된 신궁궐들은 1126년(인종4년)에 이자겸의 난으로 소실되고 만다.
2.3 인종 때의 궁궐
이자겸의 난으로 소실된 궁궐복구는 난이 평정된지 4년이나 지난 후인 인종 10년 1월에 시작되어 인종 16년 5월에야 끝났다. 1138년(인종 16년)에 궁궐의 명칭이 가장 많이 바뀌었다. 회경전은 선경전으로, 건덕전은 대관전으로, 중광전과 선정전(상정전)은 각각 강안전과 선인전으로, 만령전(만수전)은 영수전으로, 위봉루(신봉루)는 의봉루로, 수춘궁은(좌춘궁)은 여정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연영전은 집현전으로, 명경전은 금명전으로, 응건전은 건시전으로, 장령전은 봉원전으로, 함원전은 정덕전으로, 자수전은 영수전으로, 연친전은 목친전으로, 정양궁은 숙화궁으로, 건명전은 저상전으로, 신덕전은 목청전으로, 성숙전은 영헌전으로, 자화전은 집회전으로, 함경전은 항복전으로 각각 변경됐다.
2.4 원 침략시기의 궁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공백이 발생한 개성은 몽고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물론 강화에 개성과 똑같은 모양과 이름의 궁궐이 건설됐지만 개성의 궁궐은 이후에 영영 그 이름을 상실해 버렸다.30년간의 몽고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끝내 강화를 맺어야 했고,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지만 궁궐은 부분적 복구에 그치고 만다. 몽고의 압력에 의해 더 이상 황성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 가운데 본궁(정궁)은 복구하지 못하고 이궁을 본궁 대신에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수녕궁과 연경궁이 본궁을 대신했으며, 연경궁은 충선왕이 증축한 후에 공민왕 때까지 본격적으로 본궁을 대신했다.
그림참고 http://blog.naver.com/qnwkkr?Redirect=Log&logNo=1200611545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