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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광호 초대회장 황해도가 고향인 안 선생은 서울대학교 재학 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나가 장교가 된다. 전쟁 중 총탄부상도 당하고 대위로 육사교관 시절엔 전두환과 노태우 생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월남전에 기술자로 진출하여 17만 재월 한국인 중 바둑챔피언을 지냈다. 그는 1974년에 호주로 들어 와서 가족과 함께 시드니 중심부에서 약 40분 떨어진 쿠링가이란 외곽에 살았다. 내가 전화를 하여 “안선생님, 바둑 한판 하실 시간 있으세요?” 하면 30킬로나 떨어진 우리 집에 금방 나타난다. 연로하신 분이 시내를 평균 100킬로로 달리기 때문이다. 그는 과속으로 운전면허가 취소 되기도 했다. 그는 자존심이 엄청나게 강하면서 누구보다 겸손하다. 그는 내기바둑 판에서는 언제나 좌장이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함부로 행동을 못 했다. 그의 고집과 칼날 같은 성격 때문에 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안 5단을 주인공으로 바둑소설을 쓰려는 시도도 몇 번 있었다. 안 선생(5단 1930년생)은 이제는 연로해서 활동이 뜸해지고 집에서 자적하고 있다.
2) 초기 바둑인의 애환 나는 바둑을 통해서 너무 많은 걸 얻었다. 그러나 바둑을 통해 많은 걸 잃은 사람들도 있다. 1970~80년대에는 시드니에 사는 한인바둑 회원들은 모일 장소가 없어 주말이면 이 집 저 집으로 몰려 다니면서 바둑을 두었다. 내기 바둑의 속성상 걸핏하면 밤을 새우는 등 민폐가 심했다. 한국에선 고학력자자들이 당시 시드니에선 청소, 택시운전 등 노동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이 주말에 모여 바둑으로 웃고 떠들 때가 이민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부부가 단순 노동으로 맞벌이를 하던 시절 음식대접 등 온갖 심부름을 해야 하는 부인네들에겐 못 할 짓이었다. 점점 바둑 기피증-혐오증 가정이 생기더니 드디어 바둑 두는 남편 때문에 우울증 증세를 나타내는 부인들까지 생겼다. 사방에서 부부싸움도 잦아졌다. 한번은 H씨집 부인이 바둑을 아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수순상 그 집에서 바둑모임을 가졌을 때 일이다. 바둑을 한참 즐기고 있는데 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 집 부인이 눈에 초점을 잃고 실성한 표정에 손에는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그 표정과 도끼가 너무 섬찟해서 다 숨도 못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부인이 갑자기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어와 자기 남편이 두고 있던 4촌 두께 바둑판을 도끼로 몇 차례 찍었다. 바둑 알이 사방으로 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10여명이 바둑을 두다가 말고 허겁지겁 신발을 찾아 신고 뺑소니를 쳤다. 사실 그 집 남편은 바둑을 너무 좋아해서 절제는 없었다. 내가 1978년 초대 호주챔피언이 되었을 때 그가 “한상대 바둑은 관전해 봤는데 별거 아니야. 내가 가서 혼을 내 주고 오지” 하고 1000킬로가 넘는 멜본 우리집에 와서 치수고치기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치수가 더 벌어지자 그는 본전이라도 찾으려고 사흘 밤을 새우게 된다. 방학 때라고 해도 우리가 계획한 일이 많았는데 그 분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나보다 한참 연상인 분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새벽 두 시쯤 그가 “아주머니 출출한데 밤참 좀 내 오세요” 하고 소리를 지르면 자고 있던 우리집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차리곤 했다. 그는 또 바둑을 두며 쉬지 않고 노래를 한다. 그 것도 가곡만 부른다. 내 원래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음대에서 정식으로 성악공부도 한 나에겐 괴로운 시간이었다. 우리 집 사람도 그 때부터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하물며 자기 아내에게는 어떻게 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 후 그 부인 증세가 점점 나빠진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스트레스가 암으로 발전했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래도 남편은 계속 바둑을 두었다. 몇 년 후에 우리는 그 부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사실 그 부인을 바둑인들은 용서를 못하고 기회만 있으면 뒤에서 비난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었다. 사망 소식이 들려오자 그 비난이 멈추었다. 바둑광이던 남편도 바둑을 끊었다. 그는 그 후 신앙생활에 몰두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린다. 최근 내가 시드니에 전화로 물어 봤더니 현재도 바둑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부인들이 있다고 한다. 서양인 같으면 남편을 집에서 쫓아내고 이혼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이 글에서 한국인 바둑광 얘기는 생략할 생각이다. 조금 써보려니까 나도 연루 된 일이 많고 감당 못할 내용이 많아서다. 3) 최해택 회장 안 5단 뒤를 이어 정광철, 최종옥씨 등 바둑계 원로들이 차례로 회장을 역임했다. 1988년에는 시드니로 이사간 필자가 회장을 맡았다. 2004년 한인바둑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호주바둑협회(AGA) 데본 베일리 회장이 축사를 했다. 그는 축사 에서 “한인 바둑역사 20년 중 첫 10년간은 한상대교수를 구심점으로 돌아갔고 그가 귀국한 후 다음 10년은 최해택 화백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다”고 했다. 호주문인협회 윤필립 회장은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최화백이 ‘바둑의 낭만시대를 열었다’는 평을 했다. 대구 계명대학에서 미술강사였던 최 5단은 화풍이 미국의 천재화가 폴록(Jackson Pollock)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내가 그를 “최폴록” 이라고 부른다. 그는 1991년 자기 화실을 기원으로 꾸며 ‘시드니 기원’을 차렸다. 당시 시드니에는 한국인 유단자가 7~80명에 5단만 2~30명을 헤아렸다.
모일 자리가 생긴 바둑인들은 시드니 기원에 모였다. 더 이상 ‘도끼사건’은 생길 일이 없어졌다. 친화력이 좋은 기분파 최회장은 회원들과 자주 어울려 술집에도 가고 노래방도 다녔다. 특히 카페 ‘템테이션(Temptation)’이 아지트였다고 한다. 바둑인들은 여행도 같이 가고 내기 바둑으로 야통(夜通)도 하고 한-중-일 3국 바둑클럽 대항전도 주선했다. 한국에서 온 중앙일보 전문위원 박치문 7단 VS 왕우비 8단, 세계일보 기자 이승현 6단 VS 지보근 7단과 내기 바둑 3번기도 성사 시켰다. 이 시기에 바둑인들은 최화백의 주도로 낭만을 만끽하면서 바둑을 즐길 수 있었다. 나에겐 없는 능력이다.ㅠㅠ
안영길 사범이 호주에 오자 최화백은 시드니에서 500킬로쯤 떨어진 탬워스(Tamworth)란 내륙도시에서 열리는 컨트리 뮤직 페스티벌(Country Music Festival)에 그를 데려갔다. 멋쟁이 아니면 엄두를 못 낼 일이다. 그는 그림소재를 찾는다는 핑계로 평소 여행을 많이 다닌다. 추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소재를 찾으러 그렇게 자주 여행을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의 ‘방황성의 발로’인 것 같다. ^^ 그는 가끔 안사범을 자기 모텔에 데려가 재우기도 한다. 최화백과 안사범. ‘둘만의 낭만시대’를 열기 라도 한 건가?
4) 창립 20주년 행사 2004년 시드니 한인바둑회는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기념행사의 하나로 한국에서 3명을 시드니에 초청한다. 조훈현, 양재호 9단과 나다. 나는 바둑회 창립공신으로, 조국수는 유명해서, 양사범은 친호파라 불렀다. 내가 1993년 호주바둑협회(AGA) 회장이 되자 호주대회 심판으로 양사범을 초청했다. 호주대회를 전 후하여 약 한 달을 나는 양사범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 양사범은 그 때 호주에 반해서 나중엔 식구들만 데리고 세 번인가 호주를 더 찾았다. 사람이 겸허하고 진지한 그는 교포 바둑인들과 친해지며 양 9단은 친호주파가 되고 호주에는 ‘양재호 팬클럽’이 생긴다. 조훈현 9단의 경우 ‘위대한 챔피언의 방문’이라며 호주 바둑계 전체가 들썩였다.
한인바둑회 20주년 행사 때 나는 마침 폴란드에서 열린 유럽대회(EGC)에 한국팀 단장으로 가 있어서 못 왔다. 바르샤바에서 전화로 축하 인사말만 전했다. 이런 일을 계획하고 경비를 확보하고 지휘한 최화백의 열정과 능력은 알아 주어야 한다. 회장이 누구이던 간에 이런 행사의 “추진체(Driving force)”는 최화백이었다. 그러다가 최화백이 시드니 북쪽 100킬로쯤에 있는 엔트런스(The Entrance)란 관광지에 모텔을 사서 이사를 가버린다. 그러자 그런 분위기도 바뀌었다. 바둑계에 구심점이 없어진 것이다. 최화백이 바둑행사 때마다 시드니로 와서 돕기는 하나 모텔경영이 바빠서 ‘낭만시대’를 계속 끌고 가지는 못한다. 시드니에서 떨어진 곳에 모텔을 산 것이 나는 혹시 최화백 부인의 묘책이 아니었나 의심도 된다. 그래야 남편이 시드니와 바둑을 떠날 테니까.
내가 바둑팀을 인솔하고 호주에 갈 때마다 최화백은 앞장서서 도움을 준다. 친선교류전의 플래카드 붓글씨는 꼭 본인이 쓰고 대회를 준비하는 모든 일에 도움을 준다. 그의 모텔에 우리가 단체로 묵으면 그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공금에서 내는 거니까 받으라”고 강제로 주면 기어이 반 값만 받는다.
5) 신명길 회장 1985년 멜본 한인바둑회가 10주년을 마지 한다. 교민 인구가 늘면서 그 동안 많이 성장했다. 황용기 바둑회장이 내가 설립자라고 모든 경비를 대주며 우리 가족을 멜본에 초청했다. 내가 공로 패를 받고 난 후 나와 멜본 최강자 신명길 7단과 특별 3 번기가 마련 되었다. 1대1이 되자 호주 챔피언인 내가 질 까봐 그랬는지 황회장이 그만 하자고 한다. 그때 나의 연세대 후배이며 사람이 성실한 신7단이 나와 친해진다. 그가 시드니에 이사온 다음 내가 회장인 단체에는 신명길 사장이 단골 총무였다. 내가 그의 능력과 사람 됨됨을 믿기 때문이었다. 당시 시드니에는 내가 8년 동안 매 월 주도하던 교양모임이 있었다. 원래 이 모임을 시드니 사람들이 “한상대 사단”이라고 불렀는데 시인 고은선생이 참가해 본 후 “밤에 모여 웃는 모임” 이란 뜻의 “야소회(夜笑會)”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거기 총무도 신사장이었다. 모임은 먼저 교양강좌를 1시간 갖고 그 후에 BBQ를 곁 드려 각 집에서 가져 온 반찬을 함께 먹는다. 그 다음 여흥 시간에 재미로 회원들을 노래 잘하는 순서를 매기는 프로그램이 가끔 있었다. 여기서 신총무의 순위는 12~3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자기가 10위 안에 들은 적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회원들에게 물어 보면 “희망사항이겠지요” 하며 웃는다. 순위가 10위 밖으로 나간 가수들 노래는 참고 들어 주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그런 신 7단에게도 일생 딱 한번 앵콜 곡을 부를 기회가 찾아 온다. 자기 약혼식에서 신랑 노래순서가 있었는데 노래가 끝난 후 누가 실수로 “앵콜!” 하고 외쳤다. 신랑 자리로 돌아가던 신사장이 “앵콜?” 하고 뒤 돌아 보더니 부리나케 마이크로 돌아와 한 곡을 더 부르고 말았다. 주례를 보던 나도 손쓸 틈이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 신 7단은 2006년 한인바둑회장을 지냈다. 그는 한인 바둑계를 소리 없이 돕는다. 예를 들어 한국대사배 바둑대회를 치를 때면 몇 천불 경비가 발생하는데 대사관에서는 이름만 걸고 지원금은 천불 미만으로 나온다. 그러면 신사장이 조용히 자기 돈으로 나머지 경비를 메우곤 한다. 실질적으로 그 대회는 “신명길 배(杯)”나 다름 없다. 한국인 중 최강자인 신 7단은 호주챔피언도 지내고 지난 해엔 국무총리배에 호주대표로 참가했다. 나와는 호주팀으로 평양에도 다녀 왔다 그러나 그는 사업이 바빠 바둑공부를 할 시간이 없어서 중국 강자들에게 추월 당하고 있다. ☞ 평양 기행문 바로가기 6) 한인 강자들 신7단 다음으로는 송관섭 6단이 강한데 그는 뉴질랜드에서 거주하다가 1년 반 전에 시드니로 왔다고 한다. 호주나 뉴질랜드 시민권자는 두 나라 간에 거주지를 옮기면 자동으로 영주권을 받는다. 송 6단의 연배는 신 7단과 비슷하다. 정석은 거의 모르지만 오직 수읽기 하나로 2인자 자리에 올랐다. 내가 “깡패 바둑”이라고 명명한 최해택 5단이 3위인데 60대 중반에 들어선 최화백이 요즈음은 실수가 잦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바둑회 총무를 맡은 최태진 5단은 서열 4위다. 그는 이번 2009년 8월 8일 열린 한국대사배에서 호주 최강 궈이밍 7단을 꺾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바둑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고 한다. 지난 선거에 차기 회장으로 추천 되었으나 본인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한다. 2년 째 연임하는 현 이정웅회장은 사람이 겸손하고 틀림 없어 바둑계를 위해 많은 일을 하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이회장이 교회 일로 너무 바빠서 바둑에 전력투구하지 못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마지막으로 서학범 4단은 조훈현 9단과 양재호9단이 호주를 방문하였을 때 회장이었다(2003~2004). 그는 최해택 회장 때 총무로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내가 기억 하고 있다. 지금도 자기가 힘이 닿는데 까지 바둑계를 위해 공헌하고 있다고 한다. 초기만 빼고 한인바둑회 회장은 바둑회 총무출신이 대부분 하고 있다. 나도 그래야 좋은 회장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호주에 살면서 한국에서 바둑인을 여러 명 초청했다. 1980년대까지는 초청장이 있어야 호주엘 올 수 있었다. 1980년에 김재구사범 일행, 1981년에 강철민사범 일행, 86년에는 서봉수사범과 박치문씨가 왔는데 박치문씨는 그 후 몇 번 더 온다. 그들이 호주에서 저지른 기행도 책 한 권 분량은 나올 거다^^ 박치문씨 외에 관전필자로는 이광구씨, 이승현(세계일보)씨가 왔고 93년에는 양재호 9단이 다녀간다. 98년에 35명의 어린이 팀이 올 때 서능욱 9단이 가족과 같이 온다. 이 중 통틀어 모범생은 양 9단뿐이었다.
○…중국 세 약진 1) 멜본 강자 내가 2005년 바둑팀을 인솔하고 멜본에 갔을 때다. 우리 팀 연구생출신 제자에게 “여기에 류둥밍(劉東明) 7단이 있는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고근태 선수가 4위를 할 때 그는 3위를 했다. 네가 최선을 다해 두어야 할 거다” 했더니 “교수님, 제가 설마 지겠어요? 안심하세요” 하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바둑이 끈끈한 류에게 참패를 당했다. 4단 이상 선수 7명이 두어 우리 팀이 1승 6패를 했다. 나하고 둔 13세의 캐빈 첸 7단은 나에게 완승을 했다. 고비마다 전투에서 나에게 이겨간다. 그는 기본기가 좋고 수 읽기도 강했다. 내 제자 김선기 6단이 “교수님, 저런 꼬마한테 어떻게 지세요? 제가 이기는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 두더니 참패를 당한다.
그들이 나중에 “멜본에서 랭킹 1위는 캐빈 첸이고 류둥밍은 2위입니다” 해서 놀랐다. 우리 측은 4단 한 명이 호주 백인 4단에게 이긴 한판 밖에 없었다. 5단 이상은 다 중국 계다. 우리 팀이 상당히 센데도 고단 진에선 1승도 못 건지고 말았다. 그 날 진 우리 팀 연구생출신은 그 패배가 너무 아파 밤에 잠을 잘 못 잤다. 이튿날 비 공식 게임이지만 연구생 출신 박종욱이 캐빈을 이겼다. 류둥밍은 바둑 두기를 거절하고 관전만 했다. 그 다음해는 우리 팀이 조금 더 분발해 멜본팀과 5단 이상이 둔 10 게임 중 3승 7패를 했다. 그 7 패는 다 중국 계에게 당했다. 이 것이 서양바둑계의 현주소다. 서양 어느 나라에 가거나 강자는 거의가 중국인 들이다. 호주의 메이저대회 결승대국은 거의가 중국인끼리 치러진다.
2) 시드니 중국 강자 현재 호주 최강자는 시드니에 사는 궈이밍(郭以明)이다. 그는 2000년 이후 호주대회 네 번 우승을 비롯 2009년 8월 한국대사배에서도 우승하여 오는 11월에 전주에서 개최되는 국무총리배 세계대회에 호주대표로 출전한다. 그는 58년생으로 한 살 위인 신명길 7단과는 친구 사이다. 그는 중국에서 치과의사 자격을 땄으나 호주에서 인정을 못 받자 무역업으로 방향을 바꿨다. 항주가 고향인 궈 7단은 지난 11월에 열린 항주국제친선대회에 참가한 나에게 자기 고향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나와는 30년 전부터 알았고 신사장 소유의 항주기원 식당에도 투자를 하여 공동경영을 하고 있다. 사람이 싹싹하며 기풍은 정통파이면서도 쉽게 무너지질 않는다. 지난 번 항주호텔에서 나에게 자기가 천야오예(陳耀燁) 9단과 호선으로 둔 바둑을 복기하며 다 이긴 바둑을 끝내기 실수로 졌다며 아까워했다. 자기 바둑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친구다. 궈 7단 외에 시드니 중국계 강자를 꼽으라면 데이빗 허, 먀오쟈오, 그리고 구위리우가 있다. 데이빗 허(David He)는 40살이고 애쉬필드에서 핸드폰(Mobile phone) 가게를 경영하고 있다. 바둑은 두텁고 힘이 좋지만 정교함이 부족하다. 2007년에 호주대회(AGA) 우승을 차지했고, 2008년 NSW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먀오쟈오(Miao Zhao)는 27살의 청년으로 현재는 시드니 북쪽에 있는 뉴캐슬에서 컴퓨터 관련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바둑은 끈끈하고 잔 바둑을 잘 둔다. 2008년에 호주 오픈과 캔베라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구위 리우(Guyu Liu)는 25살로 현재 호주의 강자들 중에 가장 어리다. 그는 호주시민권을 한달 전에 받았는데 역시 컴퓨터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올 해 NSW 대회와 캔베라 대회에서 우승했다. 위에 언급한 세 명의 중국인들은 토요일마다 시드니기원에 와서 안영길 사범과 다면기를 두고 복기를 하며 기력을 연마하고 있다. 바둑에 대해 열성적이고 기풍은 다 다르지만 모범적인 사람들이라고 안영길 사범은 전한다. 이들이 시드니 중국인 강자들이다.
2009 유럽대회(EGC)에 우리 바둑영어교실 학생 5명(김은국, 황인성, 김준상, 오치민, 전상윤)이 참가 해서 1~5위를 휩쓸었다. 미국대회(USGC)는 프로 김명완 8단이 작년에 이어 2연패를 했다. 이런 일들이 서양인에게 “한국 바둑은 세다”는 인상을 심어 준다. 중국의 인해전술에 밀릴 땐 우리는 소수의 엘리트를 파견하여 이런 효과를 보는 일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은 안사범처럼 현지에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는 거다. 시드니에서 한국 바둑전성기 시절 교민이 5만 명 정도였다. 지금은 시드니에 교민이 약 10만 명이 사는데도 한인 바둑인구는 눈에 띄게 줄었다. 모든 원인이 국내 바둑인구가 줄면서 나오는 현상이다.
○…프로 사범 1) 오송생 사범 1985년 오송생 9단이 이민을 왔다. 전 호주 바둑인이 그가 오면 호주바둑계가 크게 발전하리라 기대했다. 9단이면 구름 위에 사는 신선쯤 생각했다. 그러나 호인(好人) 형인 오 9단은 호주에 와서 바둑만 열심히 두었다. 교실을 열고 바둑을 가르치고 하는 일은 생각도 안 했다. 언어 장벽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가 이민 와서 2년쯤 됐을까? 내가 아직 캔베라에 살고 있을 때다. 오 9단이 4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시드니에서 3백킬로 이상 떨어진 우리 집엘 찾아왔다. 그는 나와 3일 밤을 새면서 바둑을 두었다. 그런 후에야 캔베라 구경에 나섰다. 나는 그 때 “프로도 이렇게 바둑을 좋아 할 수 있구나” 하고 놀랬다. 내가 시드니로 이사를 가서 그와 자주 만나면서 그가 물 떠난 물고기라는 걸 알았다. 결국 나의 주선으로 오 9단은 1989년부터 한국에서 기사생활을 하게 된다. 객원기사로 10년을 한국에 머문 그가 청도 바둑학교 교감으로 중국으로 돌아 갔다가 몇 년 지나 다시 호주로 돌아 온다. 먼 여로였다. 그러나 오 9단은 심장이 나빠 건강상 문제로 바둑사범 역할은 거의 못 하고 타계한다. 호주는 프로기사를 국가사범으로 갖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의 지도는 많이 받지 못 했다. ☞ 오송생 9단 바로가기
2) 안영길 사범 신명길 7단이 하루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오송생 9단 빈 자리에 교수님 제자 중 한 명 안 보내세요?” 한다. 나는 그 때서야 “맞아, 그 자리가 비었지. 내가 왜 그 생각은 한번도 안 했지?” 나는 곧 안영길 사범을 추천했다. 나의 제 2의 고향인 호주에 내가 아들처럼 사랑하는 안사범을 보낸다고 생각하니까 흥분이 된다. 곧 호주 바둑협회 집행부에 편지를 쓰고 안사범을 서둘러 보냈다. 2008년 8월이었다. 안사범은 아주 매력적인 청년이다. 그는 성실하고 근면하다. 성격도 달콤하고 남에게 절대로 무례한 법이 없다. 그래서 가는 곳 마다 인기가 좋다. 바둑성적도 군대 가기 전에는 우리나라 톱10에 들곤 했다. 내가 내 바둑영어교실에서 2년쯤 가르쳤는데 공부도 잘 한다. 총무를 맡아 리더쉽을 발휘해 교실을 잘 끌고 나갔다. 그가 명지대 바둑학과생이었을 때도 공부를 잘했다. 다른 프로기사들에 비해 일반상식도 많고 문화적 호기심도 많아 그를 데리고 여행을 하면 심심치가 않다. 그는 호주에 사는 같은 또래의 내 아들을 대신하여 한국에서 우리부부를 잘 돌봐 주어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호주에서 기회가 오면 대학에서 공부할 꿈도 갖고 있다.
지보근 7단이 처음 호주에 왔을 때다. 내가 그에게 한국 2세들에게 바둑을 가르쳐 보라고 권했다. 교실이 시작된 후 2주쯤 지나 지사범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교수님, 저는 안 되겠습니다. 아이들이 걸핏하면 그거 영어로 설명해 주세요! 하는데 제 영어가 그렇게 안 됩니다” 한다. 나도 그제서야 새삼 그가 영어로 강의가 안 되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안사범은 영어로 강의를 잘한다. ‘브리스번 바둑 캠프 2009’에서 안사범 영어강의는 훌륭했다고 하디 회장이 나에게 전해 왔다. 그는 피아노도 잘 친다. 자기가 직접 작곡한 곡을 치기도 한다. 바둑대회장에 피아노만 있는 곳이면 그의 반주로 내가 노래를 불렀다. 안사범의 호주진출로 호주바둑이 “새로운 전환기(Turning Point)”를 맞이 하고 있다.
3) 허기철 - 이세나 부부 2년 반전쯤 우리 바둑영어교실에서 공부하던 허기철사범이 호주로 왔다. 허사범 보다 이세돌 9단의 누나이며 여류강자인 이세나 7단이 더 잘 알려져 있다. 허사범은 호주로 오는 결심을 하기 전에 사전답사 차 나를 따라 두 번이나 호주에 다녀간다. 호주에 온 그가 시드니 북쪽 한인 집거지인 이스트우드(Eastwood)에 기원을 열었다. 그 동안 이세나 7단은 중국계 강자 속에서 2006년 도요타 덴소배에서 우승을 하고 지난 2008년 한국대사배에서도 우승을 했다. 그러나 이세나 7단은 평소에 바둑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바둑대회에 나가는 것이 양심에 꺼린다며 적극적인 참여는 안 하고 있다. 그들은 기원에서 유학생과 바둑인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그들은 작년에 호주에 안사범이 오자 그를 돌보아 주고 기원을 더 적임자인 안사범에게 인계하기로 한다. 현재 허기철사범은 한국으로 돌아와 바둑세계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세나 7단은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해 왔고 호주영주권도 신청한 상태로 알고 있다. 이 7단이 호주영주권을 얻으면 한인 바둑계는 보배를 얻게 된다.
○…호주 바둑협회 현 집행부(AGA Committee 2008/9) 회장(President) 존 하디(John Hardy) 총무(Secretary) 데이빗 오머로드(David Ormerod) 재무(Treasurer) 래리 웬(Larry Wen) 1) 존 하디 회장 1980년대 초 골드코스트에서 가족과 휴가를 즐기던 나는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브리스번 시립도서관에 갔다. 매주 화요일마다 존 하디가 바둑강의를 한다는 날이었다. 내가 도서관에 들어서니까 고등학생 약 50명과 일반인 30여명이 존의 강의를 듣고 있다. 내가 들어서자 존이 놀라면서 “조금 전에 호주챔피언은 한국계 한상대 씨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본인이 여기엘 왔다”고 하자 모두 일어나서 박수로 환영한다. 존은 나에게 “챔피언 앞에선 강의를 못 하겠다. 대신 강의를 해달라”고 한다. 내가 “당신 강의를 들으러 온 거니까 계속하라”고 하자 존은 하던 강의를 계속한다. 이 날도 확인했지만 초보자강의는 원어민이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나는 존처럼 초보자들을 그렇게 웃겨가며 강의할 자신이 없다. 내가 학생들에게 초보자 교육시키는 방법을 중지한 것도 현지인이 가르치는 것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 하디는 브리스번에서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바둑을 보급해 왔다. 시드니-멜본 쪽에서 주도하던 호주바둑업무를 그는 시드니 북쪽 1000킬로 이상 떨어진 퀸스랜드로 가져갔다. 그는 회장이 되고 2008년 의욕적으로 한, 중, 일 바둑강국을 돌며 바둑계 지도자들을 만났다. 2005년에는 우리 교실 바둑 팀이 브리스번에 가서 교류전이란 이름으로 그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준 일이 있다.
2) 호주의 바둑 클럽(Club Directory) 애들레이드 Adelaide Go Club Contact: Kazuya Miki, 08 8357 3328; email miki38@tpg.com.au 브리스번 Brisbane Go Club Contact: John Hardy, 0409-786050; email J.Hardy@uq.net.au 캔베라 Canberra Go Club Contact: Neville Smythe, 02 6232 7277; email Neville.Smythe@anu.edu.au 멜본 Melbourne Go Club Contact: Brad Melki, 03 9528 1149 (W); email bmelki@hotkey.net.au 멜본 일본클럽 Melbourne Japanese Go Club Contact: Yoshi Nagami, 03 9727 3388; email nagami@optusnet.com.au 멜본대학클럽 Melbourne Students Playing Go Contact: Dilshan Angampitiya; email mail@spgo.org.au 시드니 시(市) 클럽 Sydney City Go Club Contact: Robert Vadas; email ravadas@yahoo.com 시드니 카스클럽 The CASS Go Club (Sydney) Contact: Devon Bailey, (02) 9534 1321; email devonbailey@optushome.com.au 시드니 기원 Sydney Ki-Won (Korean Baduk Club) Contact: Young-Gil An (02) 9874 4843; email anyoungkil@gmail.com, 시드니 중국클럽 Sydney Chinese Weichi Club Contact: Yiming Guo; email yimingguo@optushome.com.au 커튼클럽 Curtin Go Club Contact: Adam Harley, 0402 931 807; email uizado@iinet.net.au 3) 바둑대회 (Tournaments and Events) AGA 가 주관하는 바둑대회: Toyota-Denso Cup, Brisbane, 1월 (짝수 해에 개최) Queensland State Championships, Brisbane 2월 Victorian State Championships, Melbourne 3월 NEC Cup, Melbourne, 4월 NSW State Championships, Sydney, 6월 ACT Championships, Canberra, 7월 The Korean Ambassador’s Cup 8월 Australian National Championships, 10월 이 외에도 몇 개 군소대회가 있으나 주로 위에 열거된 대회성적에 따라 점수를 획득한다. 점수가 많은 사람이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대회나 다른 국제대회에 참가한다. 한국대사배 우승자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무총리배에 참가한다. 그 동안 많은 예산을 투입해 호주 바둑인들을 열광케 했던 도요타 덴소배와 NEC컵은 일본의 사정으로 올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 세계는 이제 일본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중국세가 몰려 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나아갈 길은? (호주는 여기서 마치고 다음은 뉴질랜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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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호주 브리스베인에 있는 딸아이가 갑자기 보고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