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향(정향)-라일락-수수꽃다리-미스킴-털개회나무
수수꽃다리는 아름다운 나무 이름 뽑기 대회라도 한다면 금상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 수수꽃
다리는 ‘꽃이 마치 수수 꽃처럼 피어 있다’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수수꽃다리는 북한의 황해도 동북부와 평남 및 함남의 석회암지대에 걸쳐 자란다. 키 2~3미터
의 자그마한 나무로 하트형의 잎이 마주보기로 달린다.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다가 원뿔모
양의 커다란 꽃대에 수많은 꽃이 피어 향기를 내뿜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이 나무의 가치를 알
게 된다.
수수꽃다리는 더위를 싫어하므로 주로 중북부지방에서 정원수로 흔히 심는다. 현재 한국에는
자생지가 없으며, 지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수수꽃다리는 남북분단 이전에 북한에서 옮겨
심은 것이다. 수수꽃다리는 개회나무, 털개회나무 등 6~8종의 형제나무를 거느리고 있는데,서
로 너무 닮아서 이들이 누구인지를 찾아낸다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꽃을 좋아한 옛사람들은 머리 아프게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합쳐서 중국 이름을 그대로 받아
들여 정향(丁香)이라 불렀다.
속동문선(續東文選)》각주 에 실린 남효온의 〈금강산 유람기〉에는 “정향 꽃 꺾어 말안장에
꽂고 그 향내를 맡으며 면암을 지나 30리를 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산림경제》 〈양화(養
花)〉 편에는 “2월이나 10월에 여러 줄기가 한데 어울려 난 포기에서 포기가름을 하여 옮겨 심
으면 곧 산다. 4월에 꽃이 피면 향기가 온 집 안에 진동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화암수록》
화목구등품〉의 7품에는 “정향(庭香)은 유우(幽友), 혹은 정향이라 한다. 홍백 두 가지가 있는데,
꽃이 피면 향취가 온 뜰에 가득하다”라고 했다.
수수꽃다리는 이렇게 진가를 알아본 선비들이 정원에 조금씩 심고 가꾸어 왔다. 하지만 개화 초
기에 들어서면서 라일락이라는 서양수수꽃다리(학명 Syringa vulgaris)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된다. 라일락이 일본에 1880년경에 들어왔다고 하니 우리나라에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수입 수수꽃다리가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라일락은 향기가 조금 더 강하고 키가 약간 크게 자라는 것 외에 수수꽃다리보다 더 특별한 장
점은 없다. 이 둘은 꽃이나 향기가 비슷하여 거의 구분이 안 된다. 그래도 쏟아지는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왔다는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라일락은 수수꽃다리를 제치고 공원이나 학교의 정원수
로 자리를 잡게 된다.
라일락은 유럽 사람들도 좋아하는 꽃이다. 수많은 원예품종이 있고, 보통 연보라색과 흰색을 기
본으로 진한 보라색까지 다양하다. 5월 중순의 봄날, 라일락은 연보라색이나 하얀 빛깔의 작은 꽃
들이 뭉게구름처럼 모여 핀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라일락 향기는 금방 코끝을 자극한다. 어
둠이 내리면 향기는 더욱 강해진다.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젊은 연인들에게 친
숙한 꽃이고, 바로 그들의 향기다. 영어권에서는 라일락(lilac)이라 부르며 프랑스에서는 리라(lilas)
라고 한다.
라일락의 원예품종 중에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다. 1947년 미 군정청에 근무하던 엘윈
M. 미더는 북한산에서 우리 토종식물인 털개회나무 씨앗을 받아 본국으로 가져갔다. 이후 싹을 틔워
‘미스킴라일락’이라 이름 짓고 개량하여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시장에 퍼져나갔다. 유럽 라일락에 비해
키가 작고 가지 뻗음이 일정하여 모양 만들기가 쉽고, 향기가 짙어 더 멀리 퍼져 나가는 우량품종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것을 역수입해다 심는 실정이다. 종자확보 전쟁에서 한발 늦은 우리가 타산
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오래전부터 향료와 약재로 널리 알려진 정향(丁香)이 또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정향이 아닌 늘푸른
나무로 열대의 몰루카 제도가 원산인 다른 나무다. 이 나무는 꽃봉오리가 피기 전에 채취한 후 말려서
쓰며, 증류(蒸溜)하여 얻어지는 정향유는 화장품이나 약품의 향료 등으로 쓰임새가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