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500년 자취를 더듬으며
◇ 몽촌토성(夢村土城) : 송파구 방이동 88번지(사적 제297호)
- 올림픽공원 내의 백제가 쌓은 타원형의 토성
‘88 서울올림픽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던 올림픽 공원 내에는 풍납토성과 비슷한 제방과 같은 토성이 있다. 이 토성은 사적으로 지정된 몽촌토성인데 거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풍납토성과 성내천(城內川)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 토성은 백제가 쌓은 것이다. 타원형으로 이어진 자연의 야산을 이용하여 그 위에 진흙을 쌓아서 성벽을 이룬 이 토성은 성벽의 길이가 총 2,285m로서 남북의 길이가 750m, 동서 길이가 500m 되는 본성(本城)과 이보다 작은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토성은 신라의 경주 월성(月城)과 매우 흡사한 지형에 쌓아졌으나 이보다 더 넓고 크며, 백제 성곽의 특징 그대로 해자(垓字)도 둘려 있어서 적이 밖에서 공격하기가 어렵게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북벽의 단을 이룬 곳에는 목책(木柵)을 세웠던 흔적이 있어서 당시에 외적을 목책으로 방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성안에서는 백제의 회백색 연질토기(軟質土器)가 많이 채집된 외에 경질토기도 발견되고 있어서 학계 일부에서는 여기가 바로 백제 초기의 위례성(慰禮城)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즉 1983년 11월과 1984년 7월․8월 모두 3개월에 걸쳐 서울·한양·단국·숭실대 등 4개 대학교의 발굴 조사단이 이곳을 발굴한 결과, 여기에 남아 있는 백제 초기의 구조물과 유물들은 백제 초기의 위례성의 위치를 규명하는 데에 유력한 단서로 보고 있다.
이 성과 이웃하고 있는 풍납토성이 백제의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는 벌써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몽촌토성에 얽힌 그간의 지명(地名) 변천은 주목할 만하다.
몽촌토성은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되어 현재는 송파구 방이동이지만 옛날부터 ’꿈 말‘이라 불려 오다가 한문 표기로 몽촌(夢村)이라 하였다. ‘꿈 말’이란 곧 ‘곰 말’의 와전음(訛轉音)일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옛말에 큰 것을 ‘곰’이라 해서 공주(公州)가 백제의 서울이었을 때 금강 나루를 “곰나루”라 한 것도 큰 고을에 닿는 큰 나루란 뜻이었다.
따라서 몽촌은 ‘꿈 말’에서 한자음화 한 것이고, 이 명칭은 ‘큰 마을’이라는 뜻의 ‘곰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본다면 이곳이 큰 마을 즉, 백제의 서울인 위례성일 것이라는 추정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고려 때부터 조선 초까지에는 이곳을 고원성(古垣城) 혹은 고원 강촌(古垣江村)이라 하였다. ‘고원’이란 곧 ‘고울’이고, ‘고울’은 ‘옛 울’이니 즉 ‘옛 위례’ ‘옛 서울’의 한자음 화한 이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몽촌토성은 지리적 위치, 그리고 견고한 것으로 미루어서 풍납토성, 삼성토성 등으로 이루어진 위례성의 주성(主城)이었을 것이다.
◇ 한성백제 박물관 : 송파구 위례성대로 71(방이동 88-20 올림픽공원 내)
- 한성백제사 연구로, 2천 년 서울역사를 효율적으로 전시·교육·홍보할 전문박물관
서울은 2천여 년 전 한강 유역에 도읍하였던 한성백제의 수도로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 문화 도시이다.
그러나 그 중요성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성백제의 중요한 유적지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3만여 점의 유물이 발굴기관별로 분산 보관되고 있었다.
2000년 고도 서울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분산된 유물 관리 및 연구 지원체계의 보완이 필요하고, 정도 600년의 역사에서 2000년 역사를 가진 고도로서 서울의 정체성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 서울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할 필요가 있어 박물관을 설립했다.
한성백제 박물관은 이전까지 서울의 역사가 조선시대 중심으로 연구에서 벗어나, ‘한성백제’에 대한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연구를 담당하게 되었다. 즉 역사적 사료 및 연구를 체계적으로 수행하며, 홍보 및 교육을 담당하는데 그 중심적 역할을 한다.
지금 서울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 백제 한성기의 핵심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만도 만여 점에 이른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유물 ·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고, 수도 서울의 2천 년 역사를 재조명하며 문화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몽촌토성이 바라보이는 올림픽공원 내에 한성백제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앞으로 한성백제 박물관은 한성백제사 연구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2천 년 서울역사를 효율적으로 전시 · 교육 · 홍보할 전문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을 통해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국제문화도시 서울에 전통 문화공간을 확보하여 시민들이 수준 높은 문화를 누리도록 지원함으로써 서울 시민의 자긍심을 제고할 것이다.
한성백제 박물관은 2004년 2월 16일에 건립계획을 수립하여 2012년 4월 30일에 개관 및 개관행사를 하였다.
박물관 구조는 지하 1층에 전시 로비, 박물관 삽, 기획전시실, 한성백제 이전 시대를 보여주는 상설전시실이 있고, 1층은 전체가 한성백제 역사를 보여주는 상설전시실로 쓰이며, 2층에 카페테리아가 있다.
또한 지하 1층에는 강의실과 도서실, 300석 강당, 수장고와 주차장이 있으며, 지하 2층에는 주차장과 기계 전기실이 있다. 박물관 전체 총넓이는 약 19,423㎡이고,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지하 3층, 지상 2층, 대지면적은 14,894㎡이다.
한성백제 박물관 건물 외형은 몽촌토성의 윤곽을 나타내면서도 해양 국가 한성백제를 상징하는 배 모양으로 디자인하고,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지역 상징이 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건물이 비스듬한 것은 바다에 떠 있는 배를 나타낸 것이다.
백제는 한강과 서해를 통해 중국, 일본과 무역하면서 국력을 키워나갔다. 몽촌토성과 700m 떨어져 있는 풍납토성이 배 모양일 정도로 백제는 해양 국가를 꿈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해양 국가 특징을 건물에 반영했으며 옥상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돛을 나타냈다.
옥상은 박물관 앞에 보이는 몽촌토성 모양을 나타냈으며, 토성을 올라가듯 경사지게 했다.
몽촌토성은 남한산성 끝자락 자연 구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만든 성이다. 그래서 모양이 정연하지 않고 들어가거나 튀어나온 곳이 있다. (몽촌토성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다 보니 낮은 곳에 흙을 메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내부 공간의 주인공은 풍납토성 흙 단면을 실제 전사한, 밑변 길이가 43미터, 윗변이 13미터, 높이 10.8미터의 벽이다. 그 거대한 벽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려고 로비 공간을 지하부터 지상 2층까지 개방했다.
전시실은 전사벽을 중심에 두고, 둥그렇게 둘러싼 형태인데 역사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높이가 높아져서 마지막, 가장 높은 곳에 이르면 역사의 절정, 한강을 중심으로 한 삼국의 패권 다툼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끝을 맺는다.
전시를 모두 본 후에는 박물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휴게 식당에서 몽촌토성을 바라보면서 이곳이 옛 백제인들이 말을 타고 다니던 곳이라는 땅의 역사적 의미를 새삼 다시 새겨볼 수 있다.
◇ 백제 초기 수혈지(百濟初期竪穴址) : 송파구 방이동 88번지
- 백제 초기의 4채의 움집과 12채의 지상 건물의 터
몽촌토성 내 가족 놀이동산 동쪽에는 백제 초기의 수혈지(竪穴址 : 움집)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움집은 신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서 널리 사용하던 주거 형태로 지표에서 약 30~100㎝ 정도 파서 집을 지었다. 그러나 철기시대 이후에는 거의 지상 가옥으로 변화하였는데 몽촌토성 내에서 움집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움집은 1980년대 발굴할 때 발견한 4채의 움집과 12채의 지상 건물의 터를 전시하고 있다. 발굴 당시 이 움집들은 해발 25m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구멍에 기둥을 세워 만든 집 자리이다. 방이동의 백제 초기의 움집은 현재 집 구조의 원형이 된다.
이 수혈지 등에서 흑색 만여 기법으로 제작된 고배 · 직구단경호(直口短頸壺) · 직구광견호(直口廣肩壺) · 삼족토기(三足土器)와 같은 새로운 토기 종류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기종의 출현은 백제 국가 성립의 지표로 이해할 수 있다.
몽촌토성 내에는 4곳의 지상 건물터와 함께 12곳의 움집터가 조사되었으며, 30여 개소에 달하는 저장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4채의 움집과 12채의 지상 건물의 터를 전시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앞서 만든 움집터 위에 나중에 만든 움집이 위아래로 겹친 상태를 보인다. 움집은 평면 6각형의 모양으로 동남쪽에 출입구 시설이 각각 나 있다.
발굴된 이 수혈지는 구릉(丘陵) 경사면을 ‘ㄴ’자 형태로 파서 만든 구조라는 점에서 일반 주거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주택의 북동쪽 모서리의 토단(土壇)과 관련된 주거지였거나 또는 마구(馬具)와 말뼈가 출토된 것을 보면 특수 용도의 주거지로 추정된다.
◇ 서울역사편찬원 : 송파구 올림픽로 424(방이동)
- 서울시 역사 자료의 수집, 조사와 연구 및 편찬을 추진하는 연구기관
서울역사편찬원은 서울시 역사 자료의 수집, 조사와 연구 및 편찬에 관한 사항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서울시 연구기관이다.
1949년에 설치된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의 행정 및 연구 기능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2015년에 독립 출범하였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서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초 · 전문 자료를 발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의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자 힘쓰고 있다.
또한 역사 학술대회 개최, 강좌 및 답사 운영 등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 지식을 전문 연구자 및 일반시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독립 출범한 이후에는 강좌와 답사의 확대 운영은 물론 서울 근현대사 사료의 발굴과 편찬, 서울역사 중점 연구 총서 발간 등의 여러 사업을 확장하여 시행하고 있다.
21세기는 ‘소통의 시대’라고 한다. 서울역사편찬원도 시민 여러분과 소통하기 위하여 계속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서울역사편찬원에서는 누리집을 통해 시민들에게 발간한 자료들을 쉽고 편하게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귀중한 연구 성과들을 시민 여러분에게 상세히 전해드릴 수 있고, 시민 여러분도 더욱 편리하게 여러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역사 학술대회 · 공동 학술 연구대회 · 중점 연구발표회의 개최, 강좌 · 답사 운영, 서울 관련 각종 대중서 발간 등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 지식을 전문 연구자 및 일반시민들과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