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彰節祠重修記창절사중수기 金亮行김양행 1758년 한문 한글본.hwp
창절서원에는 판각으로 <육신사중수기>라는 제목으로 보관되어 있는데
창절서원지에서 설명하기를 이조참판 김양행이 1819년(순조19년)에 기문을 지었다로 표기하고 있고
본문 중에서 글자와 해역의 차이와 변경이 보인다.(아래 창절서원지 사진참조)
彰節祠重修記<창절사중수기> 金亮行 김양행/ 1758년
寧越府之北莊陵洞口(영월부지북장릉동구) 영월부 북쪽의 장릉 동구에
有所謂六臣祠者(유소위육신사자) 육신사라고 일컬어지는 곳이 있다.
故參判朴公彭年·(고참판박공팽년·) 고 참판 박팽년과
承旨成公三問·(승지성공삼문·) 승지 성삼문,
校理李公塏·(교리이공개·) 교리 이개,
司藝柳公誠源·(사예유공성원·) 사예 유성원,
參判河公緯地·(참판하공위지·) 참판 하위지,
都摠管兪公應孚之所亨而(도총관유공응부지소형이) 도총관 유응부에게 재사지내는 곳으로,
以戶長嚴興道配焉(이호장엄흥도배언) 호장 엄흥도도 이곳에 배향되었다.
盖昔端宗大王之遜位也(개석단종대왕지손위야) 옛날에 단종대왕께서 왕위를 양보하셨을 때,
六臣同時死之(육신동시사지) 육신은 동시에 죽었고
嚴興道有殮葬玉體之功(엄흥도유렴장옥체지공) 엄흥도는 단종의 옥체를 염습하여 장례를 치른 공로가 있었다.
肅廟乙丑(숙묘을축) 숙종 을축년(1685, 숙종 11)
監司洪萬宗始立祠妥侑(감사홍만종시립사타유) 관찰사 홍만종이 처음으로 사당을 세워 이들을 배향하였다.
及至戊寅(급지무인) 무인년에 이르러
追復端宗位號而封陵(추복단종위호이봉능) 단종의 위호를 추복하고 능으로 봉하면서,
賜祠額曰彰節(사사액왈창절) 이 사당에 창절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其事蹟顚末(기사적전말) 그 사적의 전말은
詳載於南秋江所爲傳(상재어남추강소위전) 추강 남효온이 찬술한 <육신전(六臣傳)>
及尤庵·遂菴二先生記文中 可考也(급우암·수암이선생기문중 가고야) 및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 두 선생이 지은 기문 중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으므로 상고할 수 있다.
今上三十四年戊寅(금상삼십사년무인) 금상34년 무인년(1758)
禮曹判書洪象漢奉審莊陵還奏(예조판서홍상한봉심장릉환주) 예조판서 홍상한(洪象漢1701~1769)이 장릉을 봉심한 뒤, 복명하며
今年是封陵之周甲(금년시봉능지주갑) “금년은 능으로 봉한 지 60년째 되는 해입니다.”라 아뢰었다.
上培興愴慕(상배흥창모) 주상께서는 곱절이나 슬퍼하시며,
亟令有司修理陵寢儀物(극령유사수리능침의물) 서둘러 하명하여 유사(有司)로 하여금 능침의 의물(儀物)을 수리하게 하였고,
遣大臣攝告(견대신섭고) 대신을 파견하여 고유제(告有祭)를 섭행케 하였다.
禮判繼陣六臣祠頹圮狀(예판계진육신사퇴비상) 육신사가 무너져버린 실상에 대해 예조판서가 연이어 주달하자,
上亦令本道修葺(상역령본도수즙) 주상께서는 또한 본도(本道)에 명하여 보수하게 하였다.
仍命六臣特贈正卿(잉명육신특증정경) 그리고 육신에게 특별히 정경(正卿)의 관직을 추증하되
不待狀議諡(불대장의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논하게 하였고,
嚴興道 贈亞卿(엄흥도 증아경) 엄흥도에게는 아경(亞卿)으로 추증하고
幷錄其後(병녹기후) 그 후손을 서용토록 하였다.
又親製文賜祭焉(우친제문사제언) 또한 제문(祭文)까지 친히 지으셔 치제했으니,
國家崇報之典(국가숭보지전) 국가가 존숭하고 보답하는 전례(典禮)가
至是而無遺憾矣(지시이무유감의) 이에 이르러 더 이상 유감이 없게 되었다.
我肅廟之追擧縟儀(아숙묘지추거욕의) 우리 숙종께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而雪六臣之寃者(이설육신지원자) 육신의 원통함을 말끔히 씻어주신 것은
卓然正大(탁연정대) 어찌나 정대(正大)하던지,
可以扶百世之人紀(가이부백세지인기) 백세의 기강을 떠받들기 충분하거니와,
而聖上今日之擧(이성상금일지거) 성스러운 주상께서 금번에 설행하신 조처는
尤有光於繼述之道(우유광어계술지도)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도리를 더욱 환하게 비추었다.
猗歟盛哉(의여성재) 아! 아름답고 훌륭하구나!
於是 朴公以下五臣(어시 박공이하오신) 이에 박공(朴公)이하 다섯 분에게
幷贈吏曹判書(병증이조판서) 모두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兪公兵曹判書(유공병조판서) 유공(兪公)에게 병조판서를 추증했으며
嚴公工曹參判(엄공공조참판) 엄공(嚴公)에게 공조참판을 추증했다.
朴公諡曰忠正(박공시왈충정) 그리고 박공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成公曰忠文(성공왈충문) 성공(成公)에게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李公曰忠簡(이공왈충간) 이공(李公)에게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柳公曰忠景(유공왈충경) 유공(柳公)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河公曰忠烈(하공왈충열) 하공(河公)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愈公曰忠穆(유공왈충목) 유공에게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각각 하사하였다.
監司臣沈鏞悉心經盡書(감사신심용실심경진서) 감사(監司) 신 심수(沈鏽)는 성심껏 경영하여
更葺祠宇(경즙사우) 사우(祠宇)를 다시 보수했는데,
屬其幕裨(속기막비) 그의 비장(裨將)
爲忠文公旁裔者成世綱輿(위충문공방예자성세강여) 성세강(成世綱. 충문공 성삼문의 방계후손이다) 및
齋任李錫中等蕫其役(재임이석중등동기역) 재임(齋任) 이석중(李錫中) 등에게 부탁하여 그 공덕을 감독케 하였다.
一境士民(일경사민) 이에 온 고을의 선비와 백성이
奔走效力(분주효력) 모두 분주히 노력한 덕분에,
不旬日(불순일) 열흘도 채 되지 않아
而正廟及齋堂·樓亭(이정묘급재당·루정) 정묘(正廟)와 재당(齋堂), 누정(樓亭) 등
凡七十餘楹(범칠십여영) 도합 70칸의 건물이
煥然一新(환연일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道臣又捐俸置田(도신우연봉치전) 감사는 다시 녹봉을 출연하여 전답을 마련함으로써
以爲久遠之規(이위구원지규) 영구히 제향을 설행할 계책으로 삼았다.
功旣訖(공기흘) 공역을 마친 뒤,
李錫中來請余文(이석중래청여문) 이석중은 나를 찾아와 그 일을 기록해달라고 요청하였다.
以記其事(이기기사) 생각건대
余惟今去六臣已三百餘年(여유금거육신이삼백여년) 육신의 시대부터 이미 300여 년의 시간이 흘렀거늘,
而人情之悲慕彌深(이인정지비모미심) 사람들이 슬퍼하며 사모하는 마음은 한층 더 깊어졌다.
雖婦孺輿擡 (수부유여대) 부녀자와 젖먹이, 하인들조차
筍聞六臣之名(순문육신지명) 육신의 이름을 들으면,
無不爲之咨嗟涕涕而不能已(무불위지자차체체이불능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다.
從古(종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人臣之殉節者(인신지순절자) 순절한 신하를 따져보면
亦多矣(역다의) 또한 부지기수거늘,
而獨於六臣如此者(이독어육신여차자) 유독 육신에 대해 이와 같은 것은
何哉(하재) 무엇 때문일까?
誠以其心至苦(성이기심지고) 진실로 그 마음이 지극히 고통스럽기 때문에
而其死尤可悲也(이기사우가비야) 그 죽음이 더욱 비통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夫以六臣之賢(부이육신지현) 무릇 육신처럼 현명한 분들이
豈不識天命之所歸(기불식천명지소귀) 어찌 천명(天命)이 귀결되는 곳을 알지 못했겠는가!
而猶不量其力(이유불량기력) 그런데도 자신들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은 채,
必櫻淊天之禍(필앵함천지화) 저 하늘까지 넘실대는 재앙에 기필코 다가섰고,
糜爛而不悔(미란이불회) 온몸이 문드러지면서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其心以爲不如是(기심이위불여시)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則臣分有所未盡也(칙신분유소미진야) 신하의 직분에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其所處之難(기소처지난) 그 처신의 어려움은
不可與一朝慷慨就死者(불가여일조강개취사자) 하루아침의 비분강개로 죽음에 나아간 자들과
同日而論(동일이론) 나란히 논할 수 없다.
此其所以感人特深(차기소이감인특심) 사람들이 더욱 애틋하게 느끼고
旣遠而猶慕者歟(기원이유모자여)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사모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當六臣之死也(당육신지사야) 육신이 죽었을 때,
僇及其孥及相坐(륙급기노급상좌) 그 처자식뿐만 아니라 연좌된 사람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屠滅者幾三十餘家(도멸자기삼십여가) 당시 도륙된 집안은 거의 30여 가문에 육박한다.
一世惴惴焉(일세췌췌언) 한 시대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不得顯言其事(불득현언기사) 그 일을 대놓고 말하지 못했거늘,
況敢有訟寃者乎(황감유송원자호) 하물며 그 원통함을 감히 하소연할 자가 있었겠는가!
其勢若將終古抑鬱(기세야장종고억울) 이에 영원토록 억울함을 간직한 채,
無以洗丹書之籍矣(무이세단서지적의) 단서(丹書)에 적힌 죄명을 끝내 씻을 수 없을 듯이 보였다.
乃子 屢蒙二聖褒嘉(내자 루몽이성포가) 그러다가 두 임금의 포장(襃獎)을 누차에 걸쳐 입으며,
享以俎豆旌贈(향이조두정증) 제향(祭享)과 정려(旌閭), 추증(追贈)의 은전을 누리게 되었고,
爀然表爲本朝節義之首(혁연표위본조절의지수) 본조(本朝) 절의의 으뜸으로 혁혁하게 칭송되었다.
觀乎此(관호차) 이것을 통해
足以見天道之必有定(족이견천도지필유정) 천도(天道)는 반드시 정해진 것으로서,
而非一時氣數之力所能終俺也(이비일시기수지력소능종엄야)
한때 운수의 힘으로 끝까지 가릴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살필 수 있다.
後之忠臣烈士(후지충신열사) 훗날의 충신열사는
可以不恨於當日之禍(가이불한어당일지화) 당시의 재앙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요,
而知所勸矣(이지소권의) 무엇을 권면할지 분명히 알 수 있으리라.
且嚴公以鄕邑小吏(차엄공이향읍소리) 더욱이 엄공은 지방의 하찮은 아전으로서
非有讀書稽古之力(비유독서계고지력) 서적을 읽거나 옛일을 헤아릴 만한 능력도 갖추지 못했거늘,
而乃能倉卒奮義(이내능창졸분의) 창졸지간에 의기를 떨쳐
爲賢士大夫所不能爲之事(위현사대부소불능위지사) 훌륭한 사대부도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해냈으니,
可謂獨全其秉彛之天(가위독전기병이지천) 떳떳한 천성을 홀로 보전했다고 이를 만하다.
其配食六臣也 宜哉(기배식육신야 의재) 그러니 그를 육신과 함께 배향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로다!
余小嘗寓居越中(여소상우거월중) 나는 어려서 영월에 우거한 적이 있는데,
每從老杏下(매종노행하) 매양 오래된 살구나무 밑에서
東望遺祠(동망유사) 동쪽으로 사당을 바라보았다.
密邇園陵(밀이원능) 사당은 능침과 매우 가깝고
松檜交掩(송회교엄) 소나무가 무성했으며
煙雲互起(연운호기) 안개와 구름이 더불어 피어올랐다.
則想見六臣之靈(칙상견육신지령) 이러한 풍광을 바라보노라면 육신의 영령이
共衛龍馭(공위용어) 선왕을 호위하며
上下於蓬山·錦水之間(상하어봉산·금수지간) 봉산(蓬山)과 금장강(錦障江) 사이를 오르내리는 모습이 연상되어,
而竊不勝其徊徨悽愴矣(이절불승기회황처창의) 서글픈 마음을 이기지 못한 채 주변을 서성거렸다.
今於李君之請(금어이군지청) 지금 이군(李君)이 기문을 요청하자,
不覺復有疇昔之感(불각복유주석지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감흥이 다시 일어났다.
逐不辭而爲之書如此(축불사이위지서여차) 마침내 사양치 않고 그를 위해 이상과 같이 적는 바이다.
[출처 및 인용도서]
『역주 장릉지속편』권3. 한국학중연구원발행 2011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용어설명]
1. 김양행(金亮行) 1715년(숙종 41)~1779년(정조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정(子靜). 호는 지암(止菴) 또는 여호(驪湖).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참판에 추증된 신겸(信謙)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좌의정 이명(頤命)의 딸이다. 민우수(閔愚洙)의 문인이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성리학을 비롯 예학과 역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간(李柬)의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에 동조한 김창흡(金昌翕)의 영향을 받아 낙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1754년(영조 30)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이듬해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758년에는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사옹원주부·사헌부지평·장령·집의·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호조참의·예조참의·경연관·공조참의에 임용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했다. 그 뒤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정조 때 형조참판을 지냈다. 이우신(李友信)·민치복(閔致福)·박준원(朴準源) 등의 많은 학자들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지암문집』 9권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肅廟乙丑(숙묘을축 1685, 숙종 11) 監司洪萬宗始立祠妥侑(감사홍만종시립사타유) : 송시열(宋時烈)의 <영월군육신사기(寧越郡六臣祠記>(『송자대전』권144)에 감사 홍만종이 육신사를 건립한 상세내력이 기록되어있다.
3. 沈鏽(심수 1707~1776) : 영조33(1757)에 416代 江春道觀察使. 영조34년(1758) 10월에 영조의 명을 받아 민충사 중건을 10월27일 완료하고, 10월28일 치제한 후에 하사받은 愍忠(민충)편액을 걸었다. 당시인 1757년에 영월도호부사는 홍종해(洪宗海)로 정축년(丁丑年, 1757년 영조 33) 정월 16일에 부임하여, 무인년(戊寅年, 1758년 영조 34) 4월 28일에 벼슬을 사직하고 물러났다. 1758년에는 이선철(李宣哲)이 무인년(戊寅年, 1758년 영조 34) 5월 26일에 영월부사로 부임하여, 기묘년(己卯年, 1759년 영조 35) 6월 15일까지 재임하였다.
4. 同日而論(동일이론) 나란히 논할 수 없다. : 『사기』「소진열전蘇秦列傳」에 “무릇 다른 사람을 격파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격파당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신하로 삼는 것과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는 것을 어찌 나란히 논할 수 있겠습니까!” 가 보인다.
5. 단서(丹書) : 붉은 글씨로 쓰인 공신녹권(功臣錄券). 혹은 붉은 글씨로 죄인의 죄상을 기록한 문서.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인다.
6. 재임(齋任) : 성균관이나 향교 등에서 숙식하며 공부하는 유생으로서 그 안의 일을 맡아보던 임원
이석중(李錫中)은 영월 창절사(서원)의 임원으로서 김양행에게 기문을 청 한것으로 판단한다.
*三十四年【戊寅】十月 영조34년[무인 1758] 10월,
以莊陵復位回甲(이장릉복위회갑) 장릉(莊陵)을 복위한 지 60년이 지났으므로
命遣大臣行祭于莊陵(명견대신행제우장릉) 대신을 보내 장릉에 제사 지낼 것을 명하셨다.
又命六臣贈職賜諡(우명육신증직사시) 또한 육신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하사하며
致祭于寧越彰節書院(치제우영월창절서원)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에 치제하도록 명하셨다.
仍敎曰(잉교왈) 이어서 전교하시기를(전교내용은 승정원일기 영조34년 10월4일 조에 자세하다)
又聞若于里許(우문야우리허) “듣건대 이곳에서 몇 리쯤 떨어진 곳에
有愍忠小祠云(유민충소사운) 민충 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다고 한다.
赤令道臣重建(적령도신중건) 이 또한 관찰사에게 명하여 중건토록 하여라.
此等微人(차등미인) 이처럼 미천한 자들이
此等立節 往牒罕聞(차등립절 왕첩한문)이처럼 절의를 세운 경우는 옛날 문헌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重建後(중건후) 중건을 마치고 나서는
令道臣差定守令致祭(령도신차정수령치제) 관찰사에게 명하여 수령을 차정(差定)한 뒤 치제케 하여라.” 라 하였다.
仍以愍忠賜祠額(잉이민충사사액)그리고 ‘민충’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本道觀察使沈鏽(본도관찰사심수) 본도 관찰사 심수(沈鏽 1707~ ? )가
依下敎 改建祠宇(의하교 개건사우) 하교에 의거하여 사당 건물을 개건하였다.【『政院日記 정원일기』】
同月十五日 始後(동월십오일 시후)동월15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二十七日 告訖(이십칠일 고흘) 동월27일에 끝마쳤다.
上又命以彰節書院(상우명이창절서원) 주상께서 다시 명하시기를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下去禮官(하거예관) 내려간 예관(禮官)들은
兼爲致祭於愍忠祠乃於二十八日 致祭揭額(겸위치제어민충사내어이십팔일 치제게액) 민충사에도 겸하여 치제하여라.” 라 하였다. 이에 28일에 치제하고 편액을 걸었다.
賜額致祭以後(사액치제이후) 편액을 하사하고 치제한 이후,
使本府鄕任(사본부향임) 본부의 향임(鄕任)으로 하여금
行每年兩度享禮(행매년양도향례) 매년 두 차례의 제향을 거행케 하였다.
【『寧越府誌』祭文不傳】【『영월부지』제문은 전하지 않고 있다.】
창절서원 소장 판각기문 서원지 등록 자료사진(일부 문장에서 글자와 해역의 차이, 변경이 발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