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0강 아직 죄인 + 그리스도의 죽으심
= Θ 사랑의 확증 (II-1)
(롬5:5-11)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선 성령으로 말미암아 Θ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Θ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Θ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Θ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별 일없이 산다’> - 장기하 가수의 노래 가사
네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네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번 건 네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
하지만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자기가 공격하여 망하게 하고 싶은 대상이 자신의 맹공에도 별일 없이 사는 것을 볼 때 그 공격자는 약이 올라 죽는다. / 분명히 자기가 별일을 만들어서 공격을 퍼부었는데 그 상대방이 별일 아닌 것처럼 그냥 살아내는 것을 볼 때 가해자는 미친다. / 그렇게 세상의 공격을 당하면서도 별일 없이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 부른다.
- 세상적 관점으로 볼 때 그들의 삶이 정말 별일 없는 삶이 아니었다.
- 그들은 산중과 광야와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고, 돌에 맞아 죽었고, 톱질을 당해 죽기도 했다.
- 그들은 모두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 채찍에 맞기도 했다.
-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 별일 없이 산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세상에게 맞아 죽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별일에 주눅 들지 않고 별일 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세상이 약이 올랐던 것이다. > 그게 별일 없이 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의 인생이었다.
우리가 볼 때는 분명 별일 있이 산 사람들인데 왜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별일 없이 산 사람들, 세상이 약이 올라 미쳐 버린 사람들이라고 부를까? /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게 맞아 죽어 티끌의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역사 속 역할이며 정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믿음이라는 것에 장악되어 육의 죽음이라는 목적지로 열심히 끌려가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며 그게 옳은 길임을 알았던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닥치는 별일 들이 사실은 Θ의 손길과 은혜임을 인정하고 수긍했던 사람들이었다.
자기가 입고 있는 지긋지긋한 육이 죽어야 자기 안에 사시는 예수가 드러나고, 그 예수로 연합되어 하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신의 마지막 자리가 그렇게 완료되어간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감당치 못했던 것이다. / 감정이, 느낌이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도 아팠고, 고통스러웠고, 힘들었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령의 간섭하심이 있었다. 그래서 이내 거기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 좀 죽여다오’라고 매 순간 부르짖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 맞다면, 그러한 성도의 삶을 올바로 인식하고 정의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공격해 오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 그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겠는가? / 처음에는 힘이 들고 생경하겠지만 이내 그는 ‘나의 육은 어서어서 이렇게 부인되고 죽는 것이 맞다’는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게 되고 점점 그 상황 앞에서 담대해질 것이다.
매 순간 불같은 환난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마지막 불 한 방으로 완전히 죽여주겠다는 협박을 받을 때 그게 정말 협박으로만 들리겠는가? 변태 같은 말일지 모르지만 복음으로 들리지 않을까? / 통점과 신경과 이성과 인격을 고스란히 소유한 채 세상에게 불살라지고 있는 인생이 한 번에 끝날 수 있다는 소식이 정말 그렇게 두렵고 불안한 말로만 들릴까? / 약속된 나라가 묵시 속에서 완료되어 영원 속에 존재한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몰라도 그러한 믿음 안에서 약속된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오히려 육의 죽음을 기다리게 되어 있다. / 그러한 이들에게는 세상의 공격이나 자기 부인의 현장이 별일이 아니라 Θ의 은혜의 손길로 인식되어, 심지어 찬송까지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지주의와 십자가 복음의 차이>
- 그게 믿음에 의해 끌려가는 성도의 삶이며 성도는 반드시 그 이끌림의 흔적을 역사에 남기게 되는 것이다. / 이게 영지주의와 십자가 복음의 차이이다.
- 성도는 반드시 성령의 이끌림에 반응하는 삶의 궤적을 갖게 된다.
- 그래서 성도의 삶은 환난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바탕에서 십자가를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
- 그들은 성도의 삶의 흔적도 다 부인해 버린다.
- 그들은 성화주의를 배격할 수밖에 없다.
-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들과 우리가 한 길을 간다고 섣부른 판단을 하면 안 된다.
- 그들과 우리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 영지주의적 십자가는 무 율법주의가 되어 그야말로 막사는 인생을 생산해 내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 그게 진짜 방종을 조장해내는 거짓 복음이다.
- 그들은 헌금도 안 하고, 교회도 안 가고, 봉사 같은 것도 무시한다.
- 오히려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을 전부 ‘자기 의 쌓는 자들’로 매도한다.
「은혜 위에서 인간 행위의 위선됨과 간사함과 작위성을 고발하는 것」과 「영지주의 하에서의 인간 행위의 무가치성을 주장하는 것」은 겉으로는 일견 비슷해 보여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 마치 서머나 교회가 그러한 영지주의적 가짜 복음으로 인간의 행위 자체를 다 무시하는 그런 무리들과 같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식의 글들이 인터넷 토론 방이나 블로그 같은 데에 올라오는 것을 보면 참 그들의 이해의 폭이 너무 얕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그들과 완전히 다른 은혜의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 성도는 반드시 자기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는다.
-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Θ 아버지가 의도하시는 목적지로 우리를 끌고 가신다.
- 그 자리가 바로 육의 죽음의 자리이다.
(롬8:16-17)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Θ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Θ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Θ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 / 그 증거의 방법이 Θ의 아들과 함께 고난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 반가운 소리인가? 성령은 여러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러 오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 바울은 그래서 우리의 삶을 탄식의 삶이라고 표현한다.
(롬8:22-27)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Θ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구원받은 자들에게도 탄식이 있다. / 성령 받은 성도가 자기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 자기 몸의 구속이 육의 죽음이다. / 왜 그런가? 분명 내 안에 성령이 계신데 이 육이 자꾸 다른 길로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 스스로에게 감지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몸의 구속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26절):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 연약함 =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 / 우리는 자꾸 육의 생존을 위해 달리려고 하는데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기필코 죽이는 방향으로 끌고 가신다는 말이다. / 바로 밑으로 가면 그러한 성령의 간구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간구임이 분명하게 나오고, 그러한 예수님의 간구에 의해 성도의 삶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롬8:33-36) 누가 능히 Θ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Θ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Θ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간구로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것 =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 그 모든 것을 경험하게 되는 성도가 감지하는 현실 =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고 있구나’ -> 성도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도살당하는 양, 소품에 불과하다.
그것을 아는 이들은 비록 느낌과 감정의 육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죽고 부인당하는 것이 맞는 것이니 어서 더 확실하게 죽여 달라’는 소원을 품을 수 있게 된다. / 그래서 세상이 감당이 안 되는 이들인 것이다. 별일 없이 사는 이들이 되는 것이다. / 아파요. 싫어요. 그런데 이게 맞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그래서 별일 없어요.
믿음은 성도에게 들어가는 순간 그를 이리저리 몰아서 육의 죽음의 자리로 끌고 간다. / 성도는 그러한 성도의 삶의 실체를 말씀으로 조명받는다. / 처음에는 좀 낯설어도 이내 적응하고 잘 죽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 그게 신앙생활이다. / 육이 죽어가면서 진짜 헌금이 나오고, 진짜 구제가 나오고, 진짜 봉사가 나온다. 그게 죽음이다. / 믿음이 가입되기 전에는 ‘나’만을 신 삼아 살던 자들이 믿음에 의해 육의 죽음을 조금씩 경험하면서 ‘나’만을 향했던 관심과 사랑이 Θ과 사람들에게로 조금씩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 ‘나’만을 향했던 사랑과 관심과 신뢰가 점점 끊어져 가는 삶을 ‘사망의 몸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게 진짜 성도의 신실함이다, / 그건 인간 스스로의 지혜나 노력이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과 이끄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성화 또한 성령님의 이끄심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 / 성도의 삶에 그 어떤 흔적도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 11장] = 믿음에 의해 죽음의 자리로 끌려간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기록된 곳. - 그들이 믿음에 의해, ‘별일 없이’ 맞아 죽을 수 있었다. / 스데반, 사도 바울, 베드로, 폴리캅, 등등 수많은 순교자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장악되었던 사람들이다. / 우리는 너무 쉽게 그러한 이들을 영웅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을 본 받자로 간다. /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한 이들의 믿음과 행위를 본 받을 수 있는 힘을 키우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그렇게 만든 Θ의 열심을 깨달으라고 외친다. /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50이 안 되었다. 제자들은 살만큼 산 것이다. / 살만큼 산 사람들이 뭐 그렇게 생명에 연연했겠는가? 폴리캅은 80이 넘은 사람이었다. 그 정도면 호상이다. / 자꾸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존경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Θ에게 집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