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익풍(1830-1906)에 대하여
안익풍은 철종 12년인 1861년에 32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를 한다. 이듬해인 1862년에 순강원 수봉관이 되고, 고종원년인 1864년에 전적,병조좌랑이 되고, 기사관을 겸직하게 되는등 일찍이 출육을 하였다.이후 1866년까지 약 2년간 기사관으로 왕의 정사를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왕조실록에 기사관으로써의 활동이 많이 기록되어있다. 1866년에 금교찰방이 되었고, 1869년에는 예조정랑이 되었다. 1871년에 다시 승정원 기사관의 되어 왕의 정사를 기록하였다. 1874년에 사헌부 지평이되었다가 낙향을 하고, 1876년에 다시 벼슬을 할 후보가 되어 1879년에 봉상시 주부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1880년에 사헌부 장령,사간원 정언 1881년에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1883년에 부국강병의 방안에 대하여 상소를 하고 같은해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1884년에도 사간원 사간에 임용되었다가 부사직이 되었다. 1885년에도 사간에 임용되었다가 부사직에 단부되었다. 1889년에 새로이 벼슬을 할 후보가 되어 1893년에도 사간이 되었다가 부사직에 단부되었고, 1902년에 중추원의관이 되었고,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안익풍은 사관으로써 왕조실록에 자주 언급이 된 인물이다. 조관생활을 보면 문과급제후 약 12년간 사관,정랑,찰방등으로 내직과 외직을 오가면서 조관생활을 하였고, 1880년에 사헌부 장령,사헌부정언,헌납을 지내고 낙향을 하고, 1983년과 84년, 85년 연이어 사간원 사간에 3차례 임용이 되었다. 93년에도 사헌부 사간에 임용된바있다.
안익풍의 국조방목과 승정원 일기등의 기록(발췌)은 아래와 같다.
安翊豊
본관(本貫) : 순흥(順興)
거주지(居住地) : 안주(安州)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철종(哲宗) 12년
과거시험연도 : 1861 신유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병과33(丙科33)
[이력 및 기타 사항]
전력(前歷) : 유학(幼學)
관직(官職) : 사간, 중추원의관
[가족사항]
부(父) : 안몽임(安夢任)
조부(祖父) : 안제덕(安濟德)
증조부(曾祖父) : 안사정(安思鼎)
외조부(外祖父) : 김낙기(金洛棋)
1862 년 2 월 16 일
以鄭獻敎爲刑曹參判 金大根爲同春秋 李寅騏爲假監役 安翊豊爲順康園守奉官 尹肯大爲昭寧園守奉官 寅騏以下初仕也 金賢根 東寧尉單付金炳㴤爲知事 李觀淵爲全羅兵使○再政以趙獻永爲右尹 申桓爲慶尙左水使 吳永善爲吉州牧使
고종 원년 6월 21일 (경인) 원본2678책/탈초본127책 1864년 同治(淸/穆宗) 3년
安翊豐爲典籍, 鄭謙植爲注書, 姜文奎爲獒樹察訪, 洪祐命爲吏曹參議, 兼春秋單崔奭奎。以安翊豐爲兵曹佐郞, 尹致愚爲長興主簿, 李象準爲宗府主簿, 張成敎爲典設別提, 李穉赫爲草溪郡守, 兪晩源爲左通禮, 鄭基勉爲右通禮, 李秉奭爲司僕主薄, 吳致箕爲敦寧主簿, 鄭完淳爲瓦署別提, 金秉喆爲司藝, 鮮于昇爲典籍。兼春秋單安翊豐
1864 년 9 월 14 일
行勸講于觀物軒 右議政 任百經 講官 金學性 承旨 尹龜永 玉堂 徐璟淳 假注書 李浚贊 兼春秋 安翊豊 任膺模
1865 년 윤5 월 7 일
行勸講于觀物軒 講官 金學性 承旨 曺錫元 玉堂 南一愚 假注書 張原相 兼春秋 安翊豊 別兼春秋 趙定燮
1866 년 5 월 5 일
行進講于熙政堂 判敦寧 李景在 講官 鄭基世 承旨 李鍾鳳 玉堂 李裕承 假注書 尹基周 兼春秋 鮮于昇 安翊豊
1866 년 7 월 15 일
安翊豊爲金郊察訪
고종 5권, 5년(1868 무진 / 청 동치(同治) 7년) 10월 9일(임자) 2번째기사황해도 암행어사 서신보를 소견하다
황해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 서신보(徐臣輔)를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에 의하여 신천 전 군수(信川前郡守) 한필교(韓弼敎), 강령 현감(康領縣監) 최병화(崔秉和), 금교 전 찰방(金郊前察訪) 안익풍(安翊豐), 오차포 첨사(吾叉浦僉使) 이민기(李敏基) 등에게 죄를 주었다
고종 6년 기사(1869, 동치8) 9월 25일(계사) 맑음
3차 정사에서 안익풍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3차 정사를 하였다. 안익풍(安翊豐)을 예조 정랑으로, 이인혁(李寅赫)을 예릉 영(睿陵令)으로 삼았다.
고종 6년 기사(1869, 동치8) 11월 20일(정해) 맑음
숙배하지 않은 예조 정랑 안익풍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 이조가 아뢰기를,예조 정랑 안익풍(安翊豐)은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기한이 지나도록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봉상시 판관 오장선(吳長善)은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고종 7년 경오(1870, 동치9) 8월 25일(기미) 맑음
내일 종묘서의 관원이 모두 구일제에 응시하므로 낭청 안익풍을 가관으로 차송할 것을 청하는 예조의 계
○ 또 아뢰기를,“방금 종묘서가 보고한 것을 보니, 내일 구일제를 시취할 때 본서의 관원이 모두 과거를 보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정식에 따라 본조 낭청 안익풍(安翊豐)을 가관(假官)으로 차송하여 대직하게 한 다음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871 년 9 월 24 일
行進講于紫薇堂 講官 金世均 承旨 李承宇 玉堂 李秀萬 注書 兪鎭學 兼春秋 石宗珍 安翊豊
1872 년 4 월 21 일
行召對于紫薇堂 承旨 李承宇 玉堂 王性協 閔泳穆 閣臣 姜籫 假注書 車有聲 兼春秋 安翊豊 尹相殷
1872 년 10 월 11 일
안익풍 등의 수단자에 대해, 용서하고 풀어 주라는 전교
○ 안익풍(安翊豐), 윤조영(尹祖榮), 홍찬섭(洪贊燮), 박종형(朴鍾瀅), 곽기락(郭基洛), 신병일(愼炳一), 김영훈(金永薰), 신철구(辛哲求), 이기조(李基肇), 전홍교(全洪敎), 김승훈(金承勳), 최응각(崔應珏), 유원식(劉遠植), 강영수(姜永壽), 이건창(李建昌), 김창륜(金昌倫) 등의 수단자(囚單子)에 대해 전교하기를,“모두 용서하고 풀어 주라.”
1872 년 10 월 24 일
行進講于紫薇堂 講官 趙基應 承旨 李晩耆 玉堂 尹用求 假注書 李基肇 兼春秋 安翊豊 別兼春秋 李根命
1874 년 7 월 12 일
安翊豊 李建容爲持平
1874 년 7 월 23 일
遞大司憲 沈承澤 大司諫 具鍾祿 執義 閔泳穆 司諫 李尙燁 掌令 朴齊晠 李晩瀅 獻納 南宗斗 持平 安翊豊 李建容 正言 李舜範 鄭應哲以趙翼永 金羽熙爲持平
1876 년 7 월 16 일
○以洪在九 金元均爲正言 在九及白聚奎 安翊豊 元均及李秉皐 李晩魯竝新通也
고종 16년 기묘(1879, 광서5) 윤3월 13일(병술) 맑음
신병이 있는 봉상시 주부 안익풍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 이조가 아뢰기를,“봉상시 주부 안익풍(安翊豐)과 남학 교수 이중칠(李重七)이 모두 신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1880 년 8월 26 일
以宋秉璿爲執義 新通也 趙璟淳爲司諫 李秉皐 安翊豊爲掌令 崔琛 朴文彬爲持平 金文鉉爲獻納 鄭寅興 李範晉爲正言 魚允中爲應敎 李鳳德爲副校理 宋彙仁 黃益秀爲修撰 高必相爲副修撰 李豊翼爲禮曹判書 申錫年爲同敦寧 徐有象爲同 義禁 申在鱗爲工曹參判
1880 년 9월 8 일
遞同敦寧 南孝淳 大司憲 金有淵 大司諫 金元性執義愼錫九 司諫 趙璟淳 掌令 李秉皐 安翊豊 持平 崔琛 朴文彬 獻納 金文鉉 正言 鄭寅興 李範晉
1880 년 9월 11일
遞知經筵 金世鎬 知義禁 李寅命 掌令 李秉皐 安翊豊 正言 魏道源 持平 金洛鉉
1880 년 10 월 2 일
以金尙鉉爲大司憲 朴弘壽爲大司諫 李在淳爲執義 李肇信爲司諫 金熙國爲獻納 徐在懋 李斗永爲掌令 權昌洙 洪祐冀爲持平 金秉喆 安翊豊爲正言 竝前望也
1880 년 10 월 5 일
兩司聯箚陳勉賜批 大司憲 金尙鉉 執義 李在淳 正言 安翊豊
聯箚略曰閉藏之月纔屆五日殷轟之異忽有再警御膳減損箚勉交騰殿下脩省之道已備矣而猶有一毫未盡乎敬天者而然歟竊恐弭災之方惟在乎萬化之本若能日開經筵講明治道則百祥畢臻也批以曾未幾日又有此轟燁之警災不虛生反躬懍惕所陳甚切實當留念矣
1880 년 12 월 1 일
遞承旨 洪永禹 韓龍敎 大司憲 李寅卨 大司諫 朴弘壽 執義 李在淳 司諫 李建昌 掌令 趙秉升 洪羲麟 持平 洪祐冀 韓秉濟 獻納 李範晉 正言 安翊豊 南廷皓
1881 년 4 월 7 일
敎曰龍崗縣令之代新錄中擬入又敎曰孟山縣監之代勿拘常格各別擇差○以李玄翼爲兵曹參判 趙龍鎬爲大司成 安珽求爲朔州府使 洪祐昌爲陳慰兼進香使 趙昌永爲副使 柳宗植爲書狀官 李廷珪爲德山郡守 李容稙爲龍崗縣令 李文鉉爲孟山縣監 迎接都監提調 洪祐吉郞廳柳承根 白時洽 崔奭奎 安翊豊 朴齊璟 申觀朝 李敦學 趙章鎬 公事郞廳 李京鎬竝單付
고종 18년 신사(1881, 광서 7) > 윤7월19일 (기유) > 최종기사
○ 대간의 전망 단자를 들이니, 대사헌에 남일우(南一祐)를, 대사간에 이원일(李源逸)을, 집의에 오상현(吳尙鉉)을, 사간에 김황묵(金璜默)을 낙점하고, 장령에 김기문(金箕文)ㆍ홍세섭(洪世燮)을, 헌납에 안익풍(安翊豐)을, 지평에 황하흠(黃夏欽)ㆍ차유성(車有聲)을, 정언에 구건희(具建喜)ㆍ이돈우(李燉佑)를 낙점하였다.
고종 20년 계미(1883, 광서9) 3월 11일(신묘) 맑음
부국 강병의 방도에 대해 진달하는 전 장령 안익풍의 상소
○ 전 장령 안익풍(安翊豐)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참람되고 망녕됨을 살피지 않고 대략 5가지 조항을 아뢰옵니다. 첫째는 궁궐을 엄숙하게 잘 다스리는 것이니, 감히 법도와 규례를 넘지 못하게 하소서. 둘째는 민심을 안돈시키는 것이니, 전형을 정밀히 해서 수령을 임명하는 것을 깨끗이 하고 감사를 신중히 가려 보내어 수령이 끝까지 잘 하기를 격려해서 그 직책에 오래 있게 하면 백성이 교화에 복종할 것입니다. 셋째는 기강을 엄격히 세우는 것이니, 오늘 이후로는 내외 대소 관리를 막론하고 만일 법을 범하는 일이 있으면 엄히 징계하소서. 또 근래에 사치하는 풍습도 또한 기강이 엄격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우선 낭비하는 풍습을 금하고 차차 복식을 절도 있게 하여 절약하고 검소하는 데 힘쓰게 하소서. 넷째 내수(內修)를 위임하는 것이니, 세상일을 두루 다스리고 널리 시대의 어려움을 구하게 하소서. 다섯째 외교에 참으로 성심을 다하는 것이니, 큰 국량을 지니고 시무에 능한 재주와 덕을 지닌 사람을 선발하여 각국에 파견하여 공법(公法)을 조약하고, 나이는 어리나 총명하고 지교(智巧)가 있는 자를 골라 다른 나라의 제도를 익히게 하소서.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교섭통상에서 신의를 잃지 마시고, 무예를 연마하고 변방을 방어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 부국 강병의 방도는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진달한 여러 조항은 대부분 절실한 것이다. 매우 가상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하였다.
1883 년 6 월 25 일
安翊豊爲司諫 洪承穆爲大司成
1883 년 7 월 14 일
遞同敦寧 南啓宇 工曹參判 李源逸 大司憲 趙準永 大司諫 金洛鎭 執義 南奎熙 司諫 安翊豊 掌令 尹泰興 張逵鴻 獻納 朴淇鍾 持平 李會英 明範錫 正言 姜鏋 李晩煃
고종 21년 갑신(1884, 광서 10) > 10월29일 (경자) > 최종기사
○ 이비가 2차 정사를 하였다. 홍경섭(洪敬燮)을 집의로, 안익풍(安翊豐)을 사간으로, 김익용(金益容)을 지경연사로, 조광우(趙光祐)를 전적으로 삼았다
고종 21년 갑신(1884, 광서 10) > 11월30일 (경오) > 최종기사
○ 병비에, 판서 김윤식(金允植)은 병이고, 참판 묄렌도르프[穆麟德;Möllendorf]는 병이고, 참의 임면호(任冕鎬)는 입직중에 나왔고, 참지 박해철(朴海哲)은 병이고, 우승지 유지영은 나왔다.부호군에 조신희(趙臣熙)ㆍ박제교(朴齊敎)ㆍ조충희(趙忠熙)ㆍ김유행(金裕行), 부사직에 안익풍(安翊豐)ㆍ홍경섭(洪敬燮), 이상을 아울러 단부하였다
1885 년 9 월 2일
以成彝鎬爲大司憲 申錫年爲大司諫 白仁行爲執義安翊豊爲司諫 崔應珏 洪炳一爲掌令 洪羲麟爲獻納 尹皞燮 姜鏋爲持平 姜濬永 徐行輔爲正言 竝前望也
1885 년 9 월 4 일
遞判義禁 沈履澤 知義禁 李喬翼 同義禁 尹成鎭沈 東臣 知春秋 閔泳商 尹宇善 同春秋 南廷益 同成均 趙康夏 同敦寧 李源逸 大司憲 成彝鎬 大司諫 申錫年 執義 白仁行 司諫 安翊豊 掌令 崔應珏
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 11) > 9월4일 (기해) > 최종기사
대호군에 성이호(成彝鎬), 호군에 이원일(李源逸)ㆍ신석년(申錫秊)ㆍ홍남주(洪南周), 부호군에 이혁(李爀)ㆍ김명저(金明著)ㆍ김연흠(金鍊欽)ㆍ김동환(金東煥)ㆍ이춘식(李春植)ㆍ이희만(李喜晚)ㆍ연민(連珉), 부사직에 백인행(白仁行)ㆍ안익풍(安翊豐)ㆍ최응각(崔應珏), 이상 모두를 단부하였다. 겸 선천진수군첨절제사 청북수군방어사(兼宣川鎭水軍僉節制使淸北水軍防禦使)에 임원호(任原鎬)를 단부하였다.
1889 년 1 월 30 일
永錫及白義行 安翊豊新通也
고종 30년 계사(1893, 광서 19) > 5월8일 (기축) > 최종기사
○ 대간의 전망 단자를 들이니, 대사헌에 엄세영(嚴世永), 대사간에 이명철(李命喆), 사간에 안익풍(安翊豐), 장령에 이민하(李民夏), 헌납에 김인섭(金麟燮), 지평에 정승조(鄭升朝), 정언에 김희국(金熙國)ㆍ전석구(全錫九)를 낙점하고, 장령에 조원조(趙愿祖), 지평에 조명귀(趙名龜)를 더 써넣어 낙점하였다
고종 30년 계사(1893, 광서 19) > 5월18일 (기해) > 최종기사
○ 병비에, 행 판서 민영소(閔泳韶)는 병이고, 참판 이기호(李起鎬)는 병이고, 참의 정인흥(鄭寅興)은 병이고, 참지 강우형(姜友馨)은 나왔고, 우부승지 홍우상(洪祐相)은 나왔다.
동지중추부사에 장재순(張載淳)을 단부하고, 수문장 가설(守門將加設)에 심규택(沈逵澤)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송병서(宋秉瑞)ㆍ엄세영(嚴世永)ㆍ이기호(李起鎬)ㆍ조병우(趙秉友)ㆍ권응선(權膺善)ㆍ심기택(沈琦澤)ㆍ김복수(金復秀)ㆍ한학교(韓鶴敎)ㆍ양상정(梁相鼎), 부호군에 조장하(趙章夏)ㆍ남숙희(南肅熙)ㆍ이명철(李命喆)ㆍ송득환(宋得煥)ㆍ안익수(安益壽)ㆍ김해경(金海敬)ㆍ곽재춘(郭在春)ㆍ곽종묵(郭宗默)ㆍ송재흥(宋在興)ㆍ곽창묵(郭昌默), 부사직에 윤교영(尹喬榮)ㆍ이병관(李炳觀)ㆍ윤긍주(尹兢周)ㆍ안익풍(安翊豐)ㆍ이민하(李民夏)ㆍ조원조(趙愿祖)ㆍ남주원(南周元)ㆍ김인섭(金麟燮)ㆍ조명귀(趙名龜), 부사과에 신철희(申喆熙)ㆍ김흥국(金興國)ㆍ전석구(全錫九)ㆍ정석원(鄭錫元)ㆍ이세영(李世榮)ㆍ엄주익(嚴柱益),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고종 39년 임인(1902, 광무 6) > 4월23일 (계축, 양력 5월 30일) > 최종기사
○ 조철희(趙徹煕), 민직호(閔稷鎬)를 혜민원 참서관에 임용하고, 공학소(孔學韶), 김홍주(金洪柱), 안익풍(安翊豐), 한우상(韓宇相), 장보형(張輔衡), 김주화(金柱華), 마춘권(馬春權)을 중추원 의관에 임용하였다.
고종 39년 임인(1902, 광무 6) > 4월24일 (갑인, 양력 5월 31일) > 최종기사
○ 중추원 의관 홍윤섭(洪允燮)ㆍ장보형(張輔衡)ㆍ공학소(孔學韶)ㆍ김홍주(金洪柱)ㆍ안익풍(安翊豐)ㆍ한우상(韓宇相), 내부 주사 심준구(沈駿求)ㆍ이덕하(李德夏), 충청남도관찰부 주사 권우섭(權友燮)ㆍ김형종(金亨鍾), 충청북도관찰부 주사 윤재혁(尹宰赫)ㆍ김동익(金東益), 황해도관찰부 주사 엄태영(嚴泰永)ㆍ지유붕(池游鵬), 평안남도관찰부 주사 김하영(金夏榮)ㆍ최도재(崔道在), 함경북도관찰부 주사 이동호(李東浩)ㆍ김명채(金明彩), 제주목 주사(濟州牧主事) 오덕영(吳悳泳), 혜민원 주사 최규용(崔奎鏞)ㆍ홍승구(洪承九)ㆍ윤상협(尹相協)ㆍ이호림(李鎬林)ㆍ박승헌(朴勝憲)ㆍ정완영(鄭琓榮), 내부 주사 송도빈(宋道彬)의 본관을 의원면직하였다
고종 39년 임인(1902, 광무 6) > 5월 5일
從三品 安翊豊 光武六年五月五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