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오스카는 체르노빌 덕분에 무사히 여기까지 오게 되어 늘 고맙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빌은 겸손하게
자기 덕분이 아니라 창조자께서 쓰신 작은 도구일 뿐이라고 했다. 무신론자인 빌의 대답은 결코 신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오스카는 그 한마디에 감동하며 빌이 이제야 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무척 컸다. 우크라이나 장군의 경호원
을 지낸 특등사수가 피난길에 만난 요하나를 사랑해서 일개의 가족을 지키려다 부상을 당한 살신성인의
품성만 보아도 요하나와 결혼을 하면 크리스천마을을 이끌어 갈만한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아쉬움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6년 동안 이렇게 좋은 집을 짓느라고 수고하셨다는 위로의 말에는 다정함이 묻어 나오고, 이미 반쯤 지어진
주인 없는 집이라서 그리 고생하지 않았다는 말에도 창조자께서 두 가족을 위해 예비하셨다는 말에도
무신론자가 아닌 오랜 신앙인 같았다. 자신보다 더 신자 같은 크리스천 언어사용에 놀라 아멘보다‘어’가
먼저 나왔다.
“어? 아멘!”
빌이 대문을 보고 말했다.
“두 집 대문이 마주보고 있는 것을 보니까 전에 살던 집과 닮았어요. 늘 마주 보는 대문처럼 두 가족이 무척
사이좋은 사촌관계로 보입니다.”
“어? 자네가 전에 살던 집 대문을 어떻게 아나?”
사소하게 넘어갈 문제까지 세심하게 기억하는 자상함에도 사위로 맞이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빌은 제일 궁금한 벤과 요하나의 결혼관계는 묻지 못했다.
루카스와 여자들은 식사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빌의 만남은 반가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요하나
눈치를 살피느라고 요리에 집중하지 못한 탓이었다. 요하나도 마찬가지였다.
리나는 요하나가 기다리던 사람이 돌아왔다고 결혼무효 선언을 할 수가 없었다. 벤이 결혼할 방법 이라고는
노총각 키예프 삼촌처럼 독일로 나가거나 주변국가나 도시로 나가야 가능했다.
이 무인도 같은 숲속에서 벤이 결혼할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아들을 위해
사촌 형제의 딸 요하나를 붙잡아야하는 엄마의 선택이었다.
이자벨라도 속이 타들어갔다.‘왜 이제 온 거야. 차라리 오지 않았더라면 깨끗이 잊고 벤과 결혼을 할 터인데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고 주여~’
빌은 텃밭과 저수지에서 요하나가 살기에 적합한지 먹 거리도 살펴보았다. 사랑했던 요하나를 향한 오지랖
작동에 깜작 놀라 ‘이건 아니지 벤이 걱정할 문제야’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바람도 그건 아니라는 듯
자신의 눈높이의 해바라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놓고 지나갔다.
식탁에서 루카스는 빌을 환영하는 인사와 식사기도를 했다. 6년 만에 들어보는 빌의 힘찬 아멘에 모두 함박
웃음을 웃었다. 하지만 벤은 여전히 전과 달리 큰 반응과 웃음도 없었다.빌의 배낭 안에서 이곳저곳을 찌르는
듯 움직이는 물체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탄창이 아닐까? 한 여자를 두고 쌍둥이 동생이 형과 형수 그리고 썰매 개들까지 죽였었지.’
요하나와 결혼 사실을 안다면 무서운 형제의 비극이 재현될까하는 두려움이 자꾸만 떠올라 식사에도 전념할
수가 없었다. 소심함의 극치. 포크를 잡은 손이 떨려와 식탁아래 숨기고 주물렀다.
온통배낭에 신경이 쓰여 손이 올라오지 못했다. 요하나가 갓 구운 빵을 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또 소심함이
발동 했구나 싶어 벤 옆으로 다가가 앉아 빵을 떼어주며 말했다.
“벤. 견과류 건포도 빵이 나왔는데 맛을 보고 평가해 주겠어?”
“어? 그 그럴까?”
빌은 무척 다정하게 다가가 앉아 말을 건네는 요하나를 보자 디데이4일이 두 사람의 결혼 날짜라고 믿어졌다.
벤은 엷은 미소와 함께 빵이 맛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질학자 브랸스크는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는 미소라며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벤은 아니라며 거짓말을 하다 들킨 소년처럼 황급히 빵을 크게 떼어 먹었다.
헤이든은 순진한 성격에 벤이 체르노빌 때문에 주눅이 든 것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벤. 반가운 손님이 오셔서 마음이 벅차 음식을 넘기기도 힘이 드나 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옆집 예쁜 누나가
왔는데 얼굴만 바라보다가 포크를 씹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깨진 치아를 보여 드리고 싶은데 영구치로
이갈이를 해서 보여 드릴수가 없어서 아쉽네요. 하하하.”
“하하하... 호호호......”
헤이든의 말에 폭소가 터지고 벤은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안정을 찾아 빵 그릇에 손이 부지런히 오갔다.
하지만 오직 빵 그릇과 물에만 오갔지 오랜만에 만든 좋은 요리에는 손이 갈 만한 여유는 찾지 못했다.
식후에 그 밤은 그동안 빌이 지내온 이야기를 듣자며 가족과 함께 루카스의 집에 모였다.
빌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 달 동안 수고하여 찾은 문제의 배낭을 들어 보였다. 벤의 두근거리는 심장이 말했다.
‘저안에 든 게 설마.......’
벤과 달리 빌은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제가 아주 좋은 선물을 가져 왔는데 보여 드리겠습니다.”
“체르노빌이 가져 온 좋은 선물이 뭘까 요하나에게 주는 특별 선물이”
리나는 이자벨라의 말에 깜짝 놀라며 어떤 돌발발언이 터질까봐 이자벨라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아들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못 박으려고 선수를 쳤다.
“빌~선물보다 먼저 축하해줘요 4일 후에 벤과 요하나가 결혼하기로 했어요. 요하나 그렇지?”
빌은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자 그 충격에 배낭을 풀던 손이 멈추었다. 벤은 어머니의 깜짝 발언에 초긴장의
상태가 되었다. 빌은 요하나의 표정을 살폈다. 어색하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자 빌은 ‘목걸이 함을
나무에 걸어두고 가버릴걸 괜히 왔나’싶었다. 요하나도 급소를 찔린 듯 대답을 못하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요하나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애타게 기다렸고 한발 늦은 방문에 아쉽고 허탈한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추궁하듯 묻는 말에‘아니요’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기다리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한 사람을
앞에 두고 잔인하게 배신자가 되어‘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나는 빌과의 관계를 이 자리에서 완전히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싶어 물은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요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예.”
리나는 안도의 숨을 남모르게 내쉬었다. 빌은 예상을 했지만 예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벤의
충격은 더 급상승했다. 형제의 비극이 떠올라 온몸이 떨리고 얼굴색도 파랗게 질려 솜털이 일어선 것을
꾹꾹 누르며 배낭만 응시했다.
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예상했던 결과라며 받아들였다.
“요하나. 벤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그동안 피난길에 서로 돕고 여기까지 오도록 인도하신
요하나의 창조자 나의 창조자께서 서로의 갈 길을 열어주신 것 같아 감사해요.”
벤은 그제야 떨리는 가슴이 평온해지고 손을 맞잡고 아멘으로 화답했다. 가족들도 아멘으로 화답을 했지만
빌에게는 무척 미안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리나는 아들을 생각한 욕심으로 말했지만 빌은 넓은 마음으로 요하나를 축하해주니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빌은 자신이 한말에 책임을 지려고 요하나에 대한 사랑을 지워버렸다. 편안한 마음에서 찾아온 미소를 지으며
리나에게 말했다.
“제가 어머님 말씀이 생각나서 한 달 전에 폴란드 숲정이를 다녀왔습니다.”
“예? 내가 무슨 말을 했을까?”
“그리고 오다가 주상절리 입구 버스에서 요하나가 써둔 팻말을 보고 쉽게 찾아 왔습니다.”
“오호~그걸 보았어요? 요하나는 역시 지혜가 많아.”
가족들은 빌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숲정이에 다녀온 이유가 궁금했다. 마음이 급한 이자벨라가 물었다.
“빌~무슨 일로 숲정이를 다녀왔어요?”
“예. 병원에서 전통목걸이 함을 가져오지 못해서 무척 아쉬워하시는 말씀을 들었거든요.”
“그럼 그걸 찾으러 갔다는 말이에요?”
“예. 맞습니다. 바로 그것이 여러분을 위한 선물입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배낭으로 눈이 갔다. 빌이 배낭을 풀자 리나는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올라 심호흡을 했다.
루카스는 아내를 진정 시키려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 빌이 목걸이 함을 꺼내 들자 리나는 보자마자
소리쳤다.
“주여~ 찾았어요. 감사해요 빌~”
가족들은 기쁨에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중에 더욱 기쁜 사람은 벤이었다. 배낭에서 나온 물건이 탄창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잠시나마 오해를 했던 일이 너무나 미안했다.
빌은 루카스에게 함을 건네주었다. 마음이 급한 이자벨라는 빨리 읽어 보자고 재촉을 했다.
“20세가 되면 함께 열어보라고 하셨는데 6년이나 지났어요.”
모두가 박수로 환영했다. 하지만 리나는 빌에게 미안해서 오늘은 빌이 그동안 격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하고 내일 점심 식후에 공개를 하자고 했다. 밤은 빌의 투병기와 여기까지 오게 된 6년의 이야기로
깊어갔다.
벤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특등사수 형의 믿음직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요하나는 벤과 반대로 이제야
돌아온 빌 때문에 사랑을 잃은 공허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었다. 세 사람은 아침에 산책을 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피난길 아침처럼 산책을 나섰다. 요하나는 빌이 열매를 따주던 추억이 새큼 달큼 살아났다.
빌은 그때처럼 열매를 따서 벤과 요하나에게 건네주었다. 요하나는 열매의 상큼함에 실눈을 뜨고 좋아했다.
벤은 요하나의 실눈을 보고 같이 실눈을 떠 보이며 웃었다.
빌은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여 마음이 정리되었다.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서 정비사의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요하나와 사랑과 이별이 만남으로 정리가 되었다.
기다리던 점심시간, 풍성한 식탁이 차려지고 이자벨라는 큰소리로 집안을 돌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 제2의 숲정이 마을에 중대 발표가 있는 날입니다 어서 모이세요. 전통을 이어가는 축복
목걸이 편지를 26년 만에 개봉합니다.”
지질학자들도 전통의 한 페이지를 자신들이 장식한다는 기쁨에 환한 얼굴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단상에
오른 루카스는 나무목걸이를 둘로 쪼개어 나온 작은 두루마리 편지를 단상에 놓고 말했다.
“오늘은 숲정이의 전통 축복 편지를 개봉하는 기쁜 날입니다. 벤과 요하나에게 어떤 축복의 말씀이 담겨
있는지 26년 전 그날의 산모 대표를 모십니다.”
사람들은 박수로 리나를 맞이했다. 단상에 오른 리나는 두루마리를 펼치기 전에 심호흡을 하고 출산의 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몸이 약하고 입덧이 심한 이자벨라는 아직 해산의 날이 오지 않았는데 무척 지쳐 있었지요.
루카스와 오스카 키예프 삼촌은 이자벨라를 위해 멀리 석청을 따러 갔다가 늦어지고 저는 바로 그날 출산을
하게 되었어요. 출산을 도울 마리아님은 우리 둘을 돌보려고 편리를 위해 이자벨라는 작은방에 저는 큰방에
산방을 차렸어요.
제가 산통을 하는데 갑자기 이자벨라도 산통을 하고 조기 출산과 정상 출산을 했는데 마리아님 혼자서
두 아기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심한 고통에 지쳐 잠이 들고 다음날 정오쯤 되어서야 눈을 떴는데
저는 아들을 이자벨라는 딸을 안고 있었습니다.”
지질학자들은 산모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리나는 시선이 두루마리로 가고 반대로 돌돌 말아 읽기
편하게 한 뒤에 살펴보니 오래되어 빛이 바랜 글씨는 읽기에 무리가 있어 조금 유심히 바라보아야했다.
리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한자 한자 읽어 내려갔다.
“샬롬. 창조자를 경외하며, 두 자녀가 건강하고, 창조자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리나는 다시 다음에 읽을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사람들은 편지를 읽던 리나가 갑자기 손을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고 ‘왜 그러지?’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리나는 얼굴색이 변하고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드는 듯 단상을 짚었다. 루카스는 리나가 쓰러질까봐 놀라 리나를 부르며 달려 나갔다.
“리나 왜 그래 왜.”
리나는 루카스를 향해 손을 들어 저지하고 두루마리를 쥐고 단상을 내려서며 말했다.
“더. 더 이상. 편지를 읽을 수가 없어요.”
리나는 따라오지 말라고 소리치며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모두가 리나를 부르며 따라가자 안에서 문을
잠그고 모포 커튼을 내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