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의 용기 & 안태근 검사의 회개
최근 현직 여 검사의 성추행 피해사실 고백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독교의 회개 문제가 중요 이슈로 불거졌다. TV인터뷰에서 피해를 고백한 서지현 검사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해서다.
“가해자가 최근 종교에 귀의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며 간증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이 발언의 근거는 매스컴은 물론 SNS를 통하여 금새 드러났다. 지금은 퇴직한 안태근 검사는 최근 서울의 대형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자를 대표하여 간증을 했고, 간증한 동영상이 여기저기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동영상에서 안 검사는 울먹이기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주요 보직에 배치돼 순탄한 공직생활을 해왔다. 모든 것이 내 노력 덕이라 생각했다. 뜻하지 않게 공직을 그만두게 됐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게 됐다. 나의 교만을 회개하니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이러한 갈등의 맥락이 꼭 영화 ‘밀양’을 닮았다. 밀양에서 여주인공 전도연은 남편을 잃은 후 외동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가서 살게 되는데, 아들이 유괴되어 살해당한다. 참척의 고통을 달래면서 전도연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아들을 죽인 범죄자를 용서할 필요가 있다는 교회의 권면에 따라 살인자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에 면회를 간다. 그때 범인은 교도소에 들어와 기독교인이 되어 하나님께 자기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이에 전도연은 충격을 받고 부르짖는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 받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서 검사의 성추행 피해 고백으로 영화 밀양의 줄거리가 현실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와 교회와 회개가 쟁점으로 급부상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 하는 회개는 어떤 것인가?
안태근 검사는 공직생활 동안 자신은 깨끗하게 처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퇴직 후 아내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면서 자기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교만’이었다고 말한다. 공직에 있는 동안 깨끗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정당한 평가를 받아 비교적 승승장구했지만 거기에 교만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인으로 입교시켰다. 이에 세간에서는 기독교의 회개가 과연 진정한 회개인가? 피해자에게 직접 회개하지 않는 회개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께만 회개하면 다 되는가? 과연 교회는 이 사회에서 무슨 기능인가? 등등의 질문을 쏟아내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반 기독교적인 정서에 편승하여 마치 불에 기름을 부은 듯 하다.
안태근 검사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였을까?
그의 회개에 따른 교회의 세례는 거짓에 놀아난 것인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회개가 선행된다. 사실 이 때의 회개는 인간으로서 저지르게 되는 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대단히 미미한 회개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저지른 내 죄가 해변의 모래알 만큼이라면 이때의 회개는 모래알갱이 하나쯤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회개는 ‘그나마 자기가 죄인임을 어렴풋하게라도 깨닫고 자기 죄를 고백했다.’는 데 더 큰 의의를 둘 수밖에 없는 아주 작은 회개일 뿐이다.
이렇게 시작한 회개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 평생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 그동안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점차 죄로 깨달아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신앙생활이 지속되어야 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게 예배하면서 그때그때 알게 되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청해듣고자 하려는 몸부림이 기도가 되어야 한다.
검사가 되어 누릴 것이 많은 삶 가운데, 그동안은 아무 문제의식 없이 행동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죄로 인지될 때마다 회개하는 일상이 곧 신앙생활이다. 어쩌면 안태근 검사는 재직 중 여성을 대하는 자기의 태도가 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인하여 그것이 죄임을 깨닫게 될 터이다.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뒤늦게 깨달은 자기 죄에 대하여 더욱 통절히 회개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교회는 그가 그렇게 하도록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독교인이 되어 한 평생 살아간다면 자기의 죄를 낱낱이 다 깨닫고 다 회개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인간이 자기의 죄를 모두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천국 문을 열고 죄인들을 통과시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이다.
이 진리를 알고, 기독교인의 자기의 죄인 됨을 진실하게 성찰하는 태도가 곧 ‘겸손’이다. 겸손의 반대말이 ‘교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안 태근 검사가 세례 받으면서 간증한 자기 교만의 죄 고백은 대단히 값지다. 안 태근 검사가 신앙인으로 향후의 삶을 영위한다면 지금처럼 죄에 대해 통렬한 대가를 치르게 될 일은 얼마든지 또 있을 수가 있다. 그때마다 겸손한 태도로 “내 죄의 중함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알았으니 다시 회개하고 죄 값을 치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개인적인 아픈 죄의 고백 이야기 하나를 하고자 한다. 오래 전 친척 아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장례식장에 갔다. 장례식장에는 형을 먼저 보낸 아우가 상주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아우에게 조문하면서 딴에는 생각해 주는 말이라 생각하고, 한 마디 했었다.
“평소에 형과 자주 좀 오가지 그랬어!”
망인도 그의 동생도 모두 나에게는 아우뻘이어서 친척 형으로서 해 준 한 마디였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이 말이 친척을 향한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 녀석이 비슷하게 세상을 등지는 참척을 당했다. 아들의 장례식장에 수십 년 전 나에게 한 마디를 들어야 했던 친척 동생이 조문을 왔다.
그 아우를 보는 순간 내가 그때 해 줬던 말 한 마디가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크나큰 죄악의 한 마디였음을 깨달았다.
“아우님! 그때 그 한 마디 내가 잘 못했네! 용서해 주게나!”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이 참회는 2017년 6월에 펴낸 ‘침묵하지 않는 하나님’에 담아냈다.)
지금도 생각한다. 도대체 내가 저지르는 죄가 얼마나 많을까?
가끔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을 본다.
“하나님!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아도 다 용서해 주는 분이다.
알고 짓는 죄보다도 모르고 짓는 죄가 훨씬 더 많으니, 하나님도 별달리 방법이 없으시다.
다 용서해줘야지 어찌 하실까?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