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투자 기법으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불과 10만 달러를 밑천 삼아 오늘날 4백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모은 투자의 달인
워렌 버핏(75). 그런 그가 전 재산의 무려
85%를 자선사업으로 흔쾌히 기부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미국 전역에 감동의 물결이 일고 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칼럼니스트인 앨런 머레이는 “버핏은 자기 재단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재단에 그처럼 거액을
기부한다는 점에서 자선 사업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고 높이 평가했다.그가 말한 ‘다른 사람’이란 미국 최고의 갑부이자
마이크로소프트사(MS)
회장인 빌 게이츠이다.실제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 자동차왕
헨리 포드, 석유왕
존 록펠러, 식품왕 켈로그를 포함해 미국의 역대 억만장자들은
예외없이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거액을 기부했다.세계 역사상 최대 자선기금을 내놓으면서도 철저한 ‘자기 낮추기’를 몸소 보여준 버핏은
자선사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상찬을 듣고 있다.
버핏이 지난
6월26일 기자 회견을 통해 공개적으로 밝힌 자선 계획의 골자를 보면, 3백74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는 전체 기부액가운데 무려 3백10억
달러를 게이츠가 부인과 공동으로 만든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고, 나머지를 사별한 부인 이름을 딴 ‘수전 톰슨 버핏 재단’과
세 자녀가 세운 재단에 주겠다는 것이다.6년 전 출범한 게이츠 재단은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에서의 말라리아와 결핵, 에이즈 퇴치 등을 위해 매년
거액을 투입해온 세계 최고의 자선 단체다.버핏의 자선 자금원은 지난 1965년 이후 회장 직을 맡고 있는 세계적 종합투자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에 주식 형태로 보유 중인 4백40억 달러 상당의 지분이다.버핏의 자선 계획 발표장에 자리를 함께 했던 게이츠는 “버핏은 단순히 세계
최대의 투자가뿐 아니라 선행을 한 세계 최대의 투자가로서도 알려질 것”이라고 감격해했다.
얼마 전까지도 사후에 전재산을 기부하겠다던 버핏이 이처럼 갑작스레 자선 계획을 발표한 배경도
꽤나 흥미롭다.우선 그는 건강상 자선 계획을 앞당겼을 것이라는 세간의 관측을 일축했다.주치의에 따르면 자신의 건강은 만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번 결정의 결정적 요인으로 자기보다 25년이나 어린 절친한 친구 게이츠 자선 사업의 너무도 깊은 인상과 감동을 꼽았다.
“나는 자선사업가 기질이 없다”
그는 유력 경제
주간지 <포천>지과의 회견에서 “다년간 빌 게이츠 부부와 어울려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그들이 벌이고 있는 자선 사업을 보고 점점
경탄하게 됐다.특히 게이츠 부부가 자선 사업에 쏟는 열정과 정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라고 밝혔다.그러면서도 버핏은 자기 재단이 아닌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 “골프에
타이거 우즈만 한 선수가 없듯이 자선에도 게이츠만큼 효율적인 조건을 구비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나는 게이츠 내외처럼 훌륭한 자선사업가 기질은 없는 것 같다”라고 겸양을 보였다.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이번 결정과 관련해 버핏은 자신의 사업 파트너뿐 아니라
자녀들과도 미리 상의했다.이들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자선계획이 당초 예정과 크게 바뀌어 당혹스러웠다.사실 버핏은 자신의 사후에 재산 대부분을
부인 이름을 딴 수전 톰슨 버핏 재단에 기부할 생각이었다.그런데 사후가 아닌 생전에, 그것도 버핏 재단이 아닌 게이츠 재단에 돈을 기부하겠다고
하자 이들이 선뜻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그러나 이들은 버핏 재단으로는 전세계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의 운용 방법이나 기술
측면에서 도저히 게이츠 재단만큼 효율성을 기할 수 없다는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 흔쾌히 동의했다.“나의 결정을 계기로 다른 재력가들도 꼭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재단을 만들기보다는 기부금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곳을 찾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있다”라는 버핏의 고백에 이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버핏이 자선의 미덕을 깨달은 것은 매우 오래 전이다.그는
1952년 결혼하면서 “우리가 엄청난 부자로 살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부인 수전은 그런 얘기를 귀담아듣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실제로
결혼 5년 뒤 자신의 돈 100달러를 포함해 투자자들로부터 모은 10만 달러를 밑천으로 그는 매년 30%에 가까운 이익을 남기며 떼돈을 벌기
시작했다.일약 갑부가 됐지만 정작 버핏 내외는 20세기 초 억만장자 앤드루 카네기처럼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그는 <포천>과의 회견에서 “우리 부부는 거액의 돈을 자식들에게 넘겨준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면서 “재산가의 집에 태어난
자식들은 물질 환경이나 교육 환경이 그렇지 못한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모든 점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돈 세례를 퍼붓는 것은 올바르지도,
이성적인 일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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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연합 워렌 버핏은 원래 재산을 부인 명의의
재단에 기부할 계획이었다.그러나 빌 게이츠 부부와 만나(왼쪽) 그들의 자선 사업에 쏟는 열정에 감탄한 뒤,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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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버핏이 돈 문제에 관해 자식들에게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한 번은 큰아들 하워드가 농장을 하나 사달다고 졸라대자 버핏은 조건부로 승인했다.그 조건이란,
‘농장을 내가 구입해 임대할 테니 대신 너는 농장에서 수입이 생기면 반드시 원금도 갚고 세금도 내라’는 것이었다.아들은 달갑지 않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이런 일도 있다.딸이 공항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몰고 나오려는데 주차비 20달러가 모자르자 아버지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버핏은 딸에게 20달러를 내줬다.그러나 공짜는 없었다.버핏은 딸에게 돈을 마련하는 대로 수표를 써서 자기 앞으로 보내라고 말했다.딸은
군소리 없이 따라야 했다.그가 자식들에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만, 자녀부터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가르쳐야 한다는
버핏의 소신은 지금도 그대로다.그렇게 자란 세 자녀 모두 아버지처럼 자선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자식들에게 구두쇠 노릇을 해온 버핏이 과연 자신에게도 엄격했을까. 누가봐도 구수하고 인정
많은 할아버지 모습인 그의 일상도 소박과 근검 그 자체다.대표적인 예로 그는 1958년에 당시 3만1천5백달러를 주고 산 허름한 저택에서
아직까지 살고 있다.이 저택의 현재 시가는 50만~70만 달러이다.자동차도 90년대 후반의 링컨 컨티넨털을 직접 몰고 다닌다.또 점심과
저녁 ‘주식’으로 햄버거와 스테이크, 콜라 등을 즐긴다.취미라고 해봐야 브리지 카드 놀이인데 단골 상대는 빌 게이츠다.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1만8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며 수백억 달러가 넘는 자산 규모를 가진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면서도 연봉은 10만 달러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억만장자이면서도 이런 검소한 삶을 살고 있는 그를 가리켜 세상 사람들은 ‘
오마하의 현인’으로 부른다.오마하는
네브래스카 주에 있는
그의 고향 마을이다.그보다 훨씬 못한 숱한 재력가들이 수천만 달러의 연봉을 받으며 대저택에 전용 비행기까지 갖추며 호사스럽게 사는 것과는
정반대다.
자본주의가 빈곤 해결 못한다고 믿어 기부
버핏은 게이츠와는 살아온 환경이나 생활 스타일 등에서 많이 다르지만 자선에 관한 철학만은
100% 같다.이들은 재산 상속에 강한 혐오감을 갖고 있다.버핏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노골적으로 “나는 왕조 시대와 같은 세습적인
부에 아무런 가치를 못 느낀다”면서 부의 상속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두 사람은 또 자신들을 상상도 못할 거부로 키워준 바로 그 자본주의
체제가 자체적으로 빈곤의 근본 원인을 치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공감한다.버핏이 미 공영방송인 PBS와의 인터뷰에서 “시장 경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라고 지적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일각에서는 버핏의 감동적 자선 기부를 계기로 미국의
억만장자들도 뒤따르지 않겠느냐고 기대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은 갈 길이 먼 것 같다.실제로
워싱턴 타임스가 버핏의 발표 직후 재산 6백만 달러 이상을
가진 갑부 1백50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무려 74%의 부자들이 재산을 자녀에게 상속하겠다고 대답했다.자선 단체에
내놓겠다고 답한 백만장자는 6%에 불과했다.버핏의 자선 행위가 더욱 값지고 빛나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미국에서도 아직은 백만장자,
억만장자의 자선 행위가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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