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명종 때 신라의 성골 김알지의 후손으로 알려진
김섬한 할아버지가 국자감 사문박사에 오르며
연안김씨라는 가문을 세웁니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라는 것이 생겨난 건 고려시대인데,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지금처럼 부계중심의 족보가 정립된 건 조선 후기로 넘어와서입니다.
어쨌든 대체로 이른 시기에 연안김씨도
씨족 중심의 족보를 갖추게 됩니다.
- 연안김씨가 명문의 반열에 들게 된 건
김섬한 할아버지의 6세손인 김도 할아버지 때입니다.
김도 할아버지는 명나라의 제과에 급제하여
그 능력을 세계적 수준에서 인정받게 됩니다.
당시의 세계란 중국 중심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명의 과거에 급제한 것은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중국의 관직은 오르지 않고 다시 고려로 와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합니다.
여기에서 공민왕 때란 점이 중요하죠,
공민왕은 원나라의 권신의 힘을 물리치기 위해
능력있는 신진사대부들을 주로 등용했고
거기에 김도 할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한 겁니다.
- 김도 할아버지의 아들이 김자지 할아버지입니다.
김자지 할아버지는 고려 조선에 걸쳐 계속 관직을 유지했던 것으로 봐서
조선의 개국공신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평안도 관찰사와 형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두루거쳐 문정공에 봉해지죠.
김자지 할아버지의 아들 세대 그러니까 8대손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연안김씨는 각파가 나누어집니다.
연안김씨는 총 22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9파가 김자지 할아버지 아들들을 파시조로 삼고 있습니다.
김자지 할아버지는 세종10년 형조판서를 지냈습니다.
제가 국문학과이고 훈민정음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해서 아는 거지만,
세종은 그 자신이 매우 학문에 뛰어났던 분입니다.
한글 창제도 자신이 주도했고 집현전 학자들은
해석을 단 것에 불과할 정도죠.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에 속하는 왕입니다.
세종 당시에 형조판서를 지냈다는 것은
그만큼 그 학문적 능력을 세종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입니다.
한국인물대사전에 의하면 음양, 복서(점술), 천문, 지리, 음율, 의학에
두루 정통했다고 합니다.
- 여기에서 하나 집고 넘어갈 점은 '파'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로 오면서 점차 양반들이 설자리를 잃어가면서
양반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장자중심의 가족관계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겁니다.
그래서 8대손들을 기준으로 삼았던 거죠.
따라서 지금에 와서는 '파'는 좀 더 가까운 혈족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아들의 이름만이
아니라 딸의 이름 사위의 이름 사위의 부모, 자식의 이름,
그 이상까지 기록되어 있었답니다.)
- 연안김씨는 조선시대에 왕비 한 분, 상신(재상) 여섯 분,
대제학 두 분, 호당 네 분, 청백리 두 분, 공신 다섯 분,
문과급제 일백예순세 분을 배출하며
손꼽히는 명족으로 꼽힌다고 한국족보대사전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특히나 씨족의 전체 인구에 따른 비율로 따지면
최고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가문 가운데 하나랍니다.
- 충정공 김전, 김자지 할아버지의 증손으로 성종 때
문과에 장원을 했고 호당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군수시절 백성을 위한 선정을 배풀어 군민들에 의해
생사당이 지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생사당이 지어진 인물은 손에 꼽을정도입니다.
또한 청백리에도 뽑혔습니다.
- 김안로는 원래는 신진사림세력이었으나 아들인 희가 부마가 되면서
권력욕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사사를 당하게 되죠.
김전 같은 청렴결백한 분도 계신가 하면 김안로 같은 권신도 있으니,
자손인 우리들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겠습니다.
- 국사책에 나오는 수신사 김기수는 조선말 일본의 수신사로 다녀와
일본의 발달된 문명을 조선에 정확하게 전해주었습니다.
- 의친왕비의 부친인 김사준은 합방 후 일본으로부터
남작작위를 받았으나 취소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첫댓글 정말 자세히 잘 쓰셨네요. 조상에 대해 마니 알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