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래 20240118 목회자 모임
오늘은 누가 메시아냐 하는 문제로 얘기해 볼려고 합니다. 유태인들은 메시아 사상이 아주 통일되고 확고합니다. 다윗과 같은 그런 왕, 그보다 더 훌륭한 왕, 더 큰 왕, 자기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사람들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는 그런 왕이 와야 된다. 이거 아주 확고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에게도 그걸 기대하다가 아니고 이건 아주 완전히 참람한 놈이다. 이래 갖고 죽인 거 아니겠습니까? 확실해요. 그러니까 이것이 어떻게 우리 메시아가 되냐? 이래서 죽인 거 아니겠어요.
나도 할라고 노력한다 이랬으면 살텐데, 그렇냐고 물으니까 그렇다고 대답하잖아. 니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메시야냐? 그 말이잖아요. 그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메시야냐? 그렇다고만 안 했으면 안 죽어도 되는데, 굳이 그 말을 하고 죽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말을 하면 죽을 줄 알았지요.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말을 하고 결국 죽었습니다. 그 말 때문에. 이 사람들은 아주 분명해요. 메시아가 어떤 사람인가가 분명합니다.
근데 우리 지금 카톨릭이고 개신교 간에 메시아가 분명치를 못하잖아요. 어떤 사람이 메시아인지, 그보다도 구원 자체가 다 서로 다르단 말입니다. 무엇이 구원인지가 서로 다르니까 이거 끝없는 일 같애요. 목표가 분명치 않으니까. 그럼 예수가 과연 메시아인가? 그러면 구원이 무언가가 분명히 해야 되잖아요. 그래야 메시아가 누가 메시아인가 드러날 텐데, 구원도 분명하지 못한데 메시아부터 어찌하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우리 현재의 역사를 보면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허망한 일이라고요. 메시아 없는 기독교, 메시아가 누군지 모르는 기독교. 근데 왜 우리는 노력하고 있는가? 왜 무엇 때문에 힘쓰고 있는가?
요즘에 몰트만이라는 사람이 저쪽에서 나와가지고 희망의 신학이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어요. 그래 난 희망이 뭔가 했더니, 희망 기다리면 온다, 앞에 다가온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는 지금 이 사회에 들어가서 각 분야에 개혁을 해야 된다. 그 얘기더라고요. 내용이. 다는 아직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론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 결국 사회복음주의 되잖아요. 또. 사회에 나가서 사회를 개혁하자. 그러고 있으면 미래는 온다. 미래는 온다. 빤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유주의에서 나오더니, 다시 자유주의로 돌아가는구나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르트가 원래 자유주의자였잖아요. 하르낙과 같이. 근데 거기서 너무 계시를 무시한다, 이러면 안 된다, 이래서 나온 사람이라고요. 근데 나와 가지고 무슨 계시를 특별하게 얘기했냐면 없잖아요.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를 다 잘라버렸으니까 특별한 게 없잖아요.
내가 한 몇 년 동안 우리 교회에서 그걸 겪었잖아요. 대책이 있냐 답이 있냐 물으니까, 답이 어떻게 있냐 이거예요. 지금 답이 어떻게 있냐, 우리가 지금 찾아가는 거다 이거예요. 이건 2000년 동안 찾아왔잖아요. 뭘 더 찾아야 된단 말인가? 이 막막한 일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냥 다른 목적이 있다면 괜찮은데, 구원이 목적이라면 그러면 맹랑한 짓이잖아요.
우리나라에 구원파가 들어와 가지고 아주 큰 난리를 쳤는데 그것도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구원이 뭔지 모르고 있다가 이 사람들이 들어와 가지고 이게 구원이다 이러니까 엄청나게 많이 빠져나갔잖아요. 그것 때문에. 막연한 소리만 듣다가 구체적인 얘기를 들으니까.
그때 제일 많이 빠져나가는 데가 장로교입니다. 제일 많이 빠져나갑니다. 용문산이 나와 가지고 많이 혼란됐던 것이 감리교고요. 그리고 구원파가 나와 가지고 가장 혼란과 손상을 입은 게 장로교입니다. 답이 없으니까.
근데 그것은 사실은 우리가 한국에서 볼 때 그렇지, 미국서 보면 다 그렇다고요. 구원파만 그런 게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침례교잖아요. 침례교가 와 가지고 장로교관을 때려부신 거라고요. 그게 우리는 특이했지만, 미국에서는 특이한 사실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디를 갈라면 목적지가 있어서 왔든지 안 왔든지 하지, 목적지 없이 가면은 어디를 가다 끝나겠어요?
6.25 때 내가 피난 오면서 아주 죽을 고생했습니다. 광주에 있다가 내려오는데 마지막 버스를 타고 내려왔거든됴. 그 마지막 버스라고 선배가 얼른 서둘러 갖고 날 차를 태워주더라고요. 그 차를 타고 어디까지 왔냐? 해남 남창 이런 데까지 왔어요. 저 끝에. 거기서 인자 다리를 건너가지고 완도읍으로 들어가는 그런 자린데, 거기서 우리 동네를 또 갈라면 땅끝까지 걸어가야 되요. 거의 밤새도록 걸어갔어요. 다른 사람 다 어른들이고 나는 인자 어린 학생이잖아요. 이야, 말도 안 하고 딱 가는데 낙오자 되면 누가 돌아볼 사람도 없어요. 나만 보고 가니까 나는 그래도 길을 모르니까 그 사람 따라 죽자살자 따라가야 돼. 근데 길로 가면 좋은데 길이 아니에요. 그때 길이 없었던가 바닷가로 가더라고요. 바닷가로. 그 모래밭도 있고 자갈밭도 있고 또 바위도 있고 막 건너가면서 이카는데요. 와 나 죽을 뻔했어요. 죽은 맛... 얼마만 갔는지 가니까 인자 땅끝이라는 데를 오더라고요. 난 땅끝이 어딘지 몰랐거든. 거기서 배를 타고 한 시간 갔지요. 그때. 한 시간 반 정도 노 저어서 가니까, 요즘에 기성으로 가면 한 15분이면 갔는데, 노 저어서 가니까 한 시간 반이 걸렸어요. 그것도 그 사람들이 배로 어떻게 빌려 갖고 왔기에 내가 탔지, 나 혼자 갔으면 못 가죠. 그래 갖고 산양진(노화도)이라는 데가 내렸어. 내려서 인자 그 사람 따라가는데 가다 보니까 내가 아는 동네들 이렇게 새로 들어가 뿌리고 마지막에 나만 남았네요. 와, 참 집에 도착하니까 날이 훤히 밝아오려고 해요. 오후 3시인가 버스를 탔는데 집에 도착하니까 새벽이여 새벽. 밝아지는 새벽이었어. 나 생전 그런 고생을 처음 해봐갖고... 군대도 안 가보고 뭐야?
그러니까 목표가 만일 그것도 있었으니까. 갈 곳 있었으니까 왔지. 그렇게 하면서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해봐요. 어찌 되겠습니까? 뒤에서 적이 와가지고 어쩔 수 없이 도망을 갔다. 근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간다. 이거 막막한 일이잖아요. 우리 지금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종교가 어디로 가는지 목표가 없잖아요.
불교에가면 해탈하려고 가니까 목표가 있어요. 해탈이 목적으로 되니까. 근데 기독교는 해탈도 없고, 그저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교회 봉사하고 이것밖에 없잖아요. 거기서 그래도 나온다는 사람이 희망의 신앙이라고 부르짖고 나왔는데 희망이 무슨 희망입니까? 그게. 우리 한 대로 온다 이 말이지. 우리가 뭘 하냐에 따라서 희망은 온다. 앞에서 온다 해. 그럼 뻔하잖아요. 사회복음이지. 데모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런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메시아가 누군가를 아는 것이 정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예수다, 거기까지는 다 동의하지 않잖아요. 근데 예수 메시아인지 아는데 안 되잖아. 여기까지는. 근데 어저께 저녁에, 아니 그저께 저녁이구나, 박종규 교수 신학 강의가 있거든요. 이번에 천주교 신학자를 소개하게 됐습니다. 들어보니까, 나 지금 프린터해서 왔는데 아주 그럴싸한 말이 굉장히 많아요. 아주 근접한 말이더만.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라네. 로마노 과르디니. 지금 일부러 프린트해 왔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 개신교 신학자들하고는 영 다르다니까요? 입장이 다르게 보이니까. 여러분 이거 좀 한번 읽어보세요. 저기 인터넷에 올라 있어요. 요점은 뽑아놨더라고. 이렇게. 근데 보니까, 아주 고민이 많던 사람으로서 이걸 추적하더라고요. 천주교 신학자들을 앞으로 몇 사람 볼 텐데, 좀 봐볼라고. 그들은 물론 천주교가 목포가 되겠지만은 고민하는 방향이 다르더라니까요?
예수의 실존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 믿기만 하면 안 되고 예수의 실존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된다고.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는 말이 없으니까 그것도 막막한 말이지만, 그래도 그 실존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얘기가 좀 특이하지 않아요.
나도 만일에 사실로서의 예수, 역사 안에서 사실인 예수를 모르고 지나가 버렸더라면, 역시 나도 잘 믿긴 잘 믿고 편하기도 편하고 자유롭고 참 좋았어요. 나는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었으니까. 이 정도면 되지 않았냐 이렇게 생각했어. 근데 인제 와서 보니까, 그랬으면 나는 정말 대구교회 신화적 인물이 되고, 대구교회는 딴 길로 갈 뻔 봤거든요.
메시아, 우리의 구원자가 누군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준다는 건 아주 쉬워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건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준 게 아니고, 지금 다른 데 빠진 사람 건져주는 얘긴데, 이게 그냥 객관적으로 누가 와서 건져준 사건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자신이 우리가 되지 않으면 내가 되지 않으면 이거 안 되는 일이잖아요. 구속, 구속이란 게... 그러니까 내가 안 되면 안 되는 일이거든. 대속은 되지만 구속은 될 수가 없다고요.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생각이 나고 상속자가 누구냐 아들이 누구냐 이것을, 우리는 그냥 육신적으로 낳은 아들이니까. 하나님이 낳으신 아들이다 하지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들을 계산할 때 상속자만 계산하잖아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스마엘 이런 거 뭐 없잖아요. 이삭은 야곱을 낳고 에서가 없어져 버리잖아. 야곱은 열두 형제와 유다를 낳고, 유다와 열두 형제를 낳고 유다만 상속자입니다. 열두 형제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기 위해서 한 말이니까. 그래서 부가 돼 있는 거고.
유다는 누구를 낳고 유다도 누구를 낳고 이래 갖고 결국 예수가 낳았다. 유다가 낳자 그러니까 상속자면 아들입니다. 왜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 하냐?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적으로 낳았습니까? 언제. 하늘에서 뚝 떨어서 나왔습니까? 예수는 왜 하나님 아들이냐? 이걸 이방인들이 물으면요, 우리 대부분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사야를 펴놓고 봐라 여기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통하겠어요? 그게. 더군다나 불교인들한테 내놓으면 웃기는 얘기라 안 하겠습니까? 그건 누구 얘기지 우리하고 뭔 상관이냐 이럴 거 아니겠어요.
참 메시아라면 불교인이 됐든지 유교인이 됐든지 누가 됐든지 간에 메시아가 돼야 된다고. 하나님은 불교를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유교를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기독교를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지어서 함께 살자고 지어놨는데 사람이 이탈해 버렸다는 것이 문젠데, 이것 자체도 인정 안 하대요. 바르트에서. 이것도 인정 안 해요. 그러니 근원을 인정 안 하니까 답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결국은 희망이 답이다. 이렇게 돌아오고 말더라고요. 희망이 답이다. 희망이 앞으로 다가온다. 이런 얘기로 넘어가 됐던 것 같습니다.
무신론자라고 일축해 보일 수도 있지만 또 그 사람들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일축할 수만 없잖아요. 한동안 또 떠들어야 될 거라고 생각돼요. 내가 30살쯤 먹었을 때 그 사람이 몰트만이 소개됐습니다. 서남동 교수에 의해서 소개가 됐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들어보니까, 뭔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요번에 정리해 놓은 걸 보니까, 인제 그렇게 알아지더구만.
상속자가 누군가? 우리가 다 상속자가 돼야 아들이 되는 거잖아요. 내가 믿으니까 아들이다. 예수 믿으면 아들이 된다. 이건 막연한 말입니다. 막연한. 내가 상속자가 돼야 된다고요. 상속을 공유해야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상속을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상속해야 되잖아요. 누구나.
예수님만 아들이면 또 뭐합니까? 예수님만, 우리는 또 아니잖아요. 이 복잡한 문제가 걸려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2000년 동안 이러고 있지요. 앞으로 2000년이 또 지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걸 가지고, 이런 프레임을 가지고 나가면 2000년 더 지나가도 역시 마찬가지 답은 역시 없습니다.
근원을 인정 안 하던데 어떻게 답이 나오겠습니까? 내가 몇 년 동안 시달리다가 결국 교회가 쪼개졌잖아요. 요번에 묘한 말 들었는데 김 목사의 친구가 있어요. 신학교 같이 나온 친구인데 한쪽 발이 약간 절어요. 근데 그 사람이 요번에 함께 가는 교회 와가지고 이런 얘기 하더라네. “김목사가 대구 교회 갔다 해서 난 쪼개질 줄 알았다.” 그렇게 얘기하더라. 거기 와서 하는 말이,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그래요. 그 사람 목회자 안 하거든요. 내가 만나보고 이래 했긴 했는데 아니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요. 그게. “니가 가면 깨질 줄 알았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깨질 사람을 내가 불러온 거라면 모르고, 그걸 모르고 불러왔어요. 알고 불러오겠어요. 그 사람이 어떻고가 문제가 아니고 그러니까 신학의 문제죠. 결국은. 문제는 신학이더라고.
자기도 좀 고통을 당했겠죠. 아무래도 평탄했겠어요? 다 반대하고 이러니까. 지금은 인자 나가 가지고 청년부 이하 사람들 데리고 조용히 교회를 하고 싶은 겁니다. 조용히. 그런데 또 모르는 사람들이 가서 들어붙어갖고 거기 따라가니까 여러분 한번 들어보세요. 이거 따라오란 설교가 전혀 아닙니다. 들어보면요, 이래도 올라믄 온나 이 말입니다. 이래도 올라믄 온나. 와.
우리는 비록 교회가 갈라졌지만 우리가 타작마당을 경험한 거 같애. 타작마당에 가면 콩깍지를 놓아두고 도리깨질 하잖아요. 그러면 콩은 그래도 안 상하니까 콩만 나오고요. 나머지는 다 불에 태워지잖아요. 꼭 그와 같은 형편이 벌어졌습니다.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러고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냥 옛날처럼 하고 있으면 당연히 들어올 수 있는데, 평신도 교회 한다고 하고 있으니까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예요. 자기도 지금 거의 고민 중이에요. 이리도 못 가고 저리도 못 가고...
나는 무식할지라도 이 한 가지만 안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한 가지만 확실히 안 것이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 마지막 갈라질 때 그렇게 갈라졌어요.
처음 믿는 그런 말이었는데, 나한테 한 15분인지 얼만지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그런 모습으로 나한테 아주 직격탄을 던졌거든요. “목사님 몰라 그렇습니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알면 안 그럴 겁니다. 성경도 잘 모르고 신학도 모르고 일반 상식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나한테 노골적으로 얘기했거든요.
근데 내가 그 말을 들으면서 기분 나쁘지 않아요. 당연히 그렇지 뭐. 니가 나보다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내가 어떻게 너 OO을 얘기하겠냐 그렇게 조용히 들었어요. 듣고 나서 마지막 한 말은 이거였습니다. 나도 한마디만 묻겠는데, “이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노?” 이렇게 물으니까 말을 못 하더라고요. 반대해서 못 한 줄 알았는데 뒤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자기가 지금 힘내서 얘기한 얘기를 다시 물으니까, 어이가 없었을 거 아니겠습니까? ‘야, 이 사람 벽장호네. 아무리 말해도 안 되네.’ 이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 답을 안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는 힘을 내서 얘기했는데 그건 아무 말할 것 없이 OOOOOOOOO. 내 지금 생각하면 무섭다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 “뭐 됐다. 그만하자. 내가 알고 싶은거 이게 한 가지뿐이다.” 그래서 그날 마음을 결정한 것 같아요. ‘안 되겠구나. 이 영감 도저히 안 되겠구나.’ 그래서 마음을 결정한 것 같습니다.
왜 그 말을 들어도 괜찮냐면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지식인 거야. 나한테는 지금 지식이 필요치 않단 말입니다. 그래 자기한테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아주 필요 없는 지식을 얘기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관계할 필요가 없잖아요. 나도 옛날에는 이것저것 다 많이 알고 싶었는데, 인제 이것저것 알 필요가 전혀 없어요. 딱 한 가지로 집약됐으니까. 더 이상 다른 걸 알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걸 더 깊이 알고 더 잘 전하고 싶은 마음뿐이지, 다른 거 더 알고 싶은 생각 없어요.
신학자 얘기를 들어도 이 말을 하는지 아닌지 그것밖에 안 들어요. 무슨 얘기를 했든 간에 그 말밖에 안 들립니다. 김윤동 교수의 [진짜 예수를 찾아서[를 들어도 그것만 난 들려. 다른 건 안 들려. 야, 교수 할라면 그렇게 해야 되는가? 아니 난 놀랬어. 놀랬어요. 어떻게 그걸 그렇게 자세히 연구해 갖고 말이지. 자기도 지금 연구해서 한 말이거든. 새로운 책 사다보고 그래 갖고 한 말인데, 어떻게 골고루 다 그렇게 알아가지고. 연도까지 알아가지고. 강의를 안 하지만 아니 나 감탄했구만. 감탄했어요. 대학 교수가 저런가 싶어. 나는 문학 강의나 좀 듣고 그랬기 때문에 전혀 저렇게 철학적인 거 이런 건 모른단 말입니다.
근데 이번 들어보니까, 진짜로 공부 많이 했대. 많이. 한번 들어보세요. 여러분. 듣고 계신지 모르겠는데요. 근데 나는 거기서 그런 것만 발견돼. 아니 지구에서 천체를 관찰하니 맞을 리가 있냐? 지구가 돌고 있는데. 아무리 관찰해도 안 맞는 거야. 이게. 지구가 돌고 있으니 그건 맞아지겠습니까? 그게 거의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고 사람 입장에서 하나님을 찾으니까 알아지겠냐? 그렇게 생각이 돼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예수가 필요하구나. 우리도 만일 창세기 1, 2장이 없었으면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 창세기 1, 2장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거 아니겠어요?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가 그걸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사람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너로 지었다. 카톡릭 신학자가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너는 사람이라 그래. 하나님의 너는 예수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말한 너다. 이겁니다. 하나님의 너.
에밀 브룬는가 그 사람이 너와 나라는 제목의 책을 냈어요. OOOOOO 해 가지고 너와 나, 그것도 읽어보면 굉장히 어려워요. 직접 읽다 말았는데. 근데 이 사람이 그게 하더라니까요? 하나님의 너는 예수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너라고 말한 대상은 바로 예수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가 나를 너라고 말하면 그거 인자 완전한 거야. 하나님이 나를 가르켜 너 이러면 아주 완전한 거야. 상대자라고 말하니까 배필이란 말도 되고 상대자란 말도 되는 거죠.
너도 사람 나도 사람 이럴 때 너 내가 말한 너는 누구냐 나하고 같은 사람이라고. 그래 옛날에 소유를 가지고 말할 땐 절대로 그게 안 되죠. 내가 너고 니가 나다 이거 불가능하잖아요. 근데 존재 안에서 만나지면 니가 나고 내가 너고, 심지어는 예수가 내고 내가 예수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이 완전한 세계 아니겠습니까?
예수와 우리 관계가 그렇게 안 되는 한 우린 예수를 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예수의 너가 나여야 된단 말이에요. 예수의 너가. 우리의 당신이 예수여야 되잖아요. 우리의 너가 당신이어야 된다. 우리의 당신은 예수여야 된다.
어떤 사람들이 기도할 때 늘 하나님이 할 땐 당신이란 말을 써요. 나 있을 때 목사님 당신이란 말을 많이 써요. 딱 알고 한 말은 아니지만, 좀 더 가깝게 하느라고 그런 말을 쓰겠지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에 임하옵소서 그 얘기잖아요. 우리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그럼 나한테 진정 당신일 때 기도가 돼야 내 기도가 되지. 나한테 당신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일이잖아요. 예수와 나 사이도 나와 너, 너와 당신 이런 관계고. 하나님과 예수 관계도 마찬가지로 너와 나, 아버지와 나, 아들 이것이 된다고요. 그니까 이 문제가 아주 희귀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평을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 그래서 난 카톨릭 신학자들 몇 사람을 좀 더 연구하라고 해볼라고요. 전혀 다른 얘기 하더라고요. 예수의 실존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볼트만도 마지막에는 얘기 해놨더만, 우리의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내 사건이 될 때 그게 바로 구원이라고 자기 논문에 썼어요. 자기 학위 논문에.
그 사람들이 그걸 못 봐가지고 실존적 선택이란 말만 받아들이고 있다고요. 그 말이 맞잖아요. 우리의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내 사건이 될 때, 그때 우리는 하나가 되는 거다. 얘기를 해놨어요. 얼마나 완전한 말입니까? 자기도 그렇게는 못 됐지마는 그 말은 아주 완전한 말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의 논문, 볼트만이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어요. 그럴지라도 그 말은 신화일지라도 다 신화일지라도 예수 사건만은 신화가 아니다. 이건 사실이다. 이렇게 써놓은 사람이 있더라고. 거기서 나는 힌트를 얻었어요. 힘을 얻고. 아, 이런 사람이 있구나 그래서 내가 사실로서의 예수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말 때문에. 안 그래도 내가 거기까지 갈 수 없는 사람이잖아요. 아무래도. 근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어허 이럴 수가 있구나.” 하여간 나는 죽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대해서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 감사가 됩니다. 이 자리로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이. 나를 불러낼 때 어디까지 오라고 불러냈겠어요? 분명히 나를 불러냈는데, 그래서 결말이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그 결말까지 하나님께서 딱 세워줬다고 난 생각해.
나무를 심었으면 열매를 먹어봐야 되잖아요. 열매가 열려서 홍시 될 때까지. 인제 내 인생이 마감돼도 여한이 없어요. 진짜로. 그리고 인제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니고 만민의 것이 되었다는 거. 내가 없어도 상관없는 거예요. 나하고 관계없어요. 이걸 안 사람들은 이제 자기대로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도 누가 왔길래 그 얘기를 했는데 아직도 확실히 자신이 없는 모양이야. 토론토에 가 있는 권석일형제라고 알죠? 와서 내가 얘기 몇 시간 했는데 잘 안 돼. 얼른. 오기 전에 간증을 시켰는데 그런 얘기만 하더라고. 얘기를 안하고. 그래서 아하 그러니까 아무것도 못 하고 있구나 이 생각 들었어. 훌로 신학을 나왔습니다. 영어 잘하고 한때는 빌리그램 같은 부흥사가 된다고 마누라 된 사람이 끌고 다녔어요. 야심적으로 끌고 다니다가 나를 만나 가지고 석일이 형제가 인제 거기 안 끌려다니게 되니까 실망하고 이혼해버리더라고요. 여자가. 와 요즘에 개혁자 사모님 된 여자들은요, 아유 굉장한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니까요.
우리 지금 교회도 그런 형제자매 있거든요. 형제를 보면 아무래도 큰일을 못 하게 생겼어요. 근데 이 자매는 큰 사람을 키울라고 애를 쓰다가 우리 교회 와가지고 형제는 그냥 늘어져 버리고 자기 주제를 파악했어. 근데 자매는 말이지 자기 일생의 기대가 어그러져 버린 거야. 그래서 함부로 장가가도 안 될 일이죠. 어렵습니다. 아주 어렵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또 너무 몰라서 문제였어. 옛날 한경직 목사 그 시대만 해도요, 이 양반들은 그냥 예수 믿는 사람 그랬지. 목사 아내가 된다 이런 생각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목회하는데 여간 어려움이 많았어요. 같이 동조가 안 되니까. 가난하고 그땐 다 찌들리고 이러는 편인데 편안했겠습니까? 어려움이 많았죠.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야심적으로 목사 아내가 될라고 생각한다고요.
나도 그래서 내가 방언만 했더라면요 순복음 목사될 수 밖에... 거기서 결혼할 의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요. 나하고는 뭐 차이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인데, 아이고 대담하게 대들더라니까요. 이 사람들은 그래요. 가능성만 있으면요 대담하게 대들어요. 왜 조영기 목사를 봤잖아. 그러니까 그런 꿈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방언을 못 하기 때문에 아예 나하고 어떻게 안 됐어요. 방언했더라면 난 영 다른 길로 빠질 뻔했지요. 방언했더라면. 그게 방언이 단순히 방언이 아니고 일종의 신비란 말입니다. 신비.
그러니까 냉랭하던 내 목회생활이 이걸 보니까, 이야 목회가 저래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서대문에 가서 보면요 후끈후끈해요. 그냥. 정말 열기가 대단하고 살아있고 움직이고... 그리고 당장 내가 있는 교회 오면은 한 80명 모이는데 냉랭해 갖고 있고. 야 이거 참 안 되겠대. 내가 그러고 다닌 줄 알았으면 목사님이 그때 이미 혼냈을 거야. 나는 그분들은 몰래 그러고 다니거든. 삼각산으로 어디를 맞춰서, 오만 데다 가도 안 되더만. 아무리도 해도 안 돼. 그래서 그쪽으로 못 갔어.
결국 CCC에 가니까 그런 거 없으니까 좋았지. 그냥 전도하자. 편하고 좋대. 전도하자. 단순한 복음을 가지고 전도만하자. 김 목사님이 그거잖아요. 그냥 너무 편한 거 좋아졌어. 복잡한 복음 가지고 성경 언제 다 가르치고 있겠어? 언제 다 배우겠어요? 근데 사영리 복음, 딱 이것만 전하면 된다는데 너무 쉽잖아요.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안 되는 것이 CCC 운동을 25년 동안 했는데 엑스플로어 74할 때 목표는 어디냐면은 30만을 불러다가 한 주일 동안 훈련을 시킴으로써 전도인을 만든다. 이거였습니다. 그럼 30만 명 훈련할라면 순장급 사람이 얼마가 필요한데 그게 안 나오는 거예요. CCC 25년 역사를 통해서 그런 사람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1차적으로 실패했습니다. 그 익스플로러 74가 개회로 끝났지. 실속이 그렇게 많이 있지 못했어요. 순장급 요원들이 없으니까. 운동해가면 운동하고 끝나버려요. 졸업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사람들을 양육해야 되겠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나도 그게 동의하고 그래 성경 공부하다가 내가 벽에 부딪친 거 아니었어요. 아무리 연구하고 얘기해도 끄떡하지 않고 있으니까. 우리 교회에 충주 사람들 와 있지만 참 묵묵부답인 사람들입니다. 말 안 해요. 좀처럼 해서 좋단 말도 안 하고 나쁘단 말도 안 해요. 거기서 내가 부딪쳤어. 쪼끄만 반응했더라면야 신나고 할텐데 전혀 무반응이니까. 그것도 참 큰 뜻이었어요. 충주로 아주 OO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꼭 가야 할 길로만 딱 뽑아다가 그 길에 놓은 것 같애. 꼭 길로만. 딴 데는 절대 못 가게 하고.
하여간 여러분과 함께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난 참 귀한 일이고 재밌는 일이고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