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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에서 마르세유로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아를 여행내내 어찌나 추위에 심하게 떨었는지 기차에 올라서도 한참동안 뼈속까지 파고든 한기에 몸을 떨어야 했다.
서서히 기차가 마르세유에 가까와졌다고 느꼈을 즈음 아내가 뜬금없이 지나치는 말처럼 물었다.
'내일도 아를까지는 오늘 우리가 오고 갔던 길을 똑같이 또 한 번 지나가는 거라고?'
'응. 아를을 지나가야 몽펠리에로 갈 수 있으니까 아침에 갔던 똑같은 풍경을 한참 동안은 다시 만나게 되겠지.'
'다른 새로운 길은 없어? 왔다갔다 했으니까 두 번이나 똑같은 길을 이미 본 것인데........'
'다른 길? 그럼 기차대신 버스를 타면 되겠지. 버스는 해안 마을을 돌아가기도 하고 산을 타고 넘기도 할 테니....... 왜? 한 시간 이상 같은 길을 반복한다니까 좀 돌아가더라고 딴 풍경을 보고 싶어?'
'우리가 이동하는데 시간에 쫓기는 것은 아니지?'
'물론 아니지. 여유가 아니라 우리 하고싶은대로 하면 되지. 아직 차편 예약도 안한걸? 마르세유 도착해서 표 구매하려는건데....... 버스탈래? 프릭스 버스라고 국제선 버스가 있는데, 마침 터미널도 같은 마르세유 기차역 모서리에 같이 있어. 그럼...... 우리 버스탈까?'
'우리가 다음 목적지에 가본것은 아니니까 어느것이 더 편하거나 불편한지는 모르겠지만........ 버스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 그럼 도착하는대로 플릭스 버스에 들려보지 뭐.'
ㅎㅎㅎ.
ㅋㅋㅋ.
누군가 그랬다. '마누라 말씀 잘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말이다. 몽펠리에 가는 길에 버스를 이용하게 된 것은 사전에 계획된 것도 아니고, 막말로 기차표를 사러 역에 가는 길에 아내가 뜬금없이 '버스 타고 싶어'라고 말하기에 그냥 어떨결에 '그래? 타면 되지뭐'라며 기차를 버스로 바꾼 아주 단순한 그냥 지나치는 치기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아무런 이유없는 선택의 결과가........... 헐!!!!!! 세상에나.......... 또 헐!!!!!!
이번 이야기에서는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해외여행에서 아주 유익한 꿀팁(유럽. 남북 아메리카 + 2014년 인도)'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이전에 내가 처음 유럽여행을 시작했을 때, 그때부터 '프릭스 버스(FlixBus)'라는 운송 프로그램에 대해서 알았다면은, 아마도 이제껏 내가 가졌던 모든 여행 스케줄 체결이나 여행의 내용면에서 훨씬 풍성해졌을 것이고, 더 여유롭게 더 많은 곳을 돌아나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가정은 패키지 여행자에게는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유배낭 여행자들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어 이렇게 짧게나마 유익한 정보라 사려되어 소개하고자 한다.
유럽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프릭스 버스'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여행을 시작해 일단 유럽이라는 지역에 도착했다고 치면...... 유럽내 국가간 이동에서는 저가항공이 거의 완벽하게 운용되고 있기에 별 불편함(수화물 조건만 제외)을 느끼지 못했고, 철도운송 또한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 런던까지도 무난히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운용되고 있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거기에 특히 스페인 여행에서 느꼈던 것처럼 모든 도시가 완벽한 터미널과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거미줄처럼 운송망이 잘 갖춰져서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되다가, 어디를 가든지 근교 이동 철도망과 시내버스 운행이 현지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여행자들에게도 썩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랬음에도 다음 여행 목적지가 상당한 장거리거나 아니면 국경을 넘어 인근의 다른 국가로 넘어가고 넘어오는 상황이 닥치면, 몇 가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상황이 발생되고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장애가 생겨나게 된다. 이동시간이 오래 걸리고 날짜가 달라지면 여행중 숙소 문제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고, 그에 따라 여행 스케줄이 얼마든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프릭스 버스 시스템이다. 한 번쯤 깊게 관심을 가지고 적극 활용해 보시라 강권하고 싶다.
아마도...... 프릭스 버스를 알기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달라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터키를 여행하다보면 메트로(METRO) 라는 운송회사가 드넓은 터키의 전역을 빼곡히 거미줄처럼 연계 운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10시간 혹은 24시간 넘는 장거리 운행도 커버한다. 메트로를 선택하게 되면 목적지 이동이 보장되고 경유지에서 식사와 약간의 휴식이 보장된다. 여행에서 아주 중요한 숙소 문제를 운행시간 안에 넣고 여행자가 얼마든지 스케줄 운용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동남아를 여행한다 보면 베트남의 슬리핑 버스를 예로 들을 수 있겠다. 신투어리스트나 풍짱버스로 대변되는 베트남은 교통운송망은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의 이송뿐만이 아니라 인접국가인 라오스의 루랑프라방이나 캄보디아의 시엠립까지 국경을 넘나드는 운행 프로그램을 시행중이다.
이런 일부 국가의 국내 국제 운송 프로그램의 초현실적인 세계적인 확장판이 바로 플릭스 버스(FlixBus)라고 하겠다.
인터넷을 통해 플릭스 버스에 대해 알아보고 적극 활용해 보자. 예약과 좌석 구입도 아주 쉽다.
여행을 떠나 해외의 유명한 도시를 다니다 보면 우리는 간혹 (FlixBus) 라는 글자가 선명한 녹색 버스를 대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고, 워낙 다양한 버스들이 오가다 보니 무심코 지나쳐 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프릭스 버스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시라 권하고 싶다. 프릭스 버스는 세계 어디에서나 모두 똑같이 녹색을 띠고 같은 디자인의 프릭스 로고를 품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중요 도시와 유명 여행지를 하나의 궤로 거미줄 망처럼 오나벽하게 연결하는 목표를 가지고 2011년 독일 뮌휀에서 설립한 국제 버스운송 시스템을 갖춘 비교적 신진 기업이다.
첫 운행을 2013년 뮌헨에서 3개의 노선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이후 유럽의 전역을 하나 둘 자신들의 새로운 노선으로 개척해 나갔다. 비약적인 성장 끝에 2018년에는 미국에 상륙하여 마침내 미국 전역을 커버하기 시작했다. 2022년에는 이 확장이 카나다 전역까지 뻗쳐나갔다. 21년 브라질에 상륙하더니 지난해(23년)에 칠레까지 개척하면서 남미지역의 상당부분을 커버하는 신기원을 이룩하고 있다. 더하여 마침내 2024년 아시아 지역에 상륙하여 인도의 46개 지역을 새로운 운행지로 진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40개국 이상의 세계 도처에 운송망을 확장하였고, 이는 5.000 이상의 운송망으로 대략 400.000개 이상의 도시들을 거점으로 확보한고 운행에 나서고 있다. 흡사,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국운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정책) 정책을 통해 세계 모든 국가를 철도와 고속도로로 연결하고 그 핵심에 중국을 두겠다는 정책의 표본이 된 (독일판 일대일로 사업)이 바로 프릭스 버스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 주도가 아닌 자유 시장경제에 입각한 기업의 주도'라는 논리적 해석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이다.
프릭스 버스가 중국시장에 진출을 꿰한다면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자신들의 국책사업인 일대일로 정책을 훨씬 뛰어넘는 자본주의적 기업 윤리에 입각한 시장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지가 나는 무척이나 궁금하다. 무작정 거부하기는 어렵다. 이유는 인도 때문이다. 세계의 중심이 되고 싶은 중국에 잠재적 최대의 강적인 인도가 이미 프릭스 버스 사업을 허가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운송망을 통해 인도는 유럽(EU)에 훨씬 쉽게 다가서게 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중국은 인도보다 한 발 더 앞장서고 싶어한다. 결국 어떻게든 프릭스 운송망을 받아들이거나, 신장 위구르 지역을 통한 유럽과의 직접적인 프릭스 운송망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또 그 배후에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드넓은 러시아 전역을 커버하지 못하고 있는 푸틴 정부로서도 중국 다음으로 러시아로 프릭스 운송망이 확장되기를 바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음으로는 북한과 대한민국에까지 확장될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치인이 철도를 통해 북한을 지나고 중국과 러시아와 몽고를 지나 유럽에 연결될 날이 언젠가 올것이라고 희망을 노래했었지만....... 이런 추세라면....... 십 년 후쯤에는 육로를 통해 프릭스 버스를 타고 로마와 파리를 지나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갈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내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십 년이 아니라면....... 십 오년 후에는 '버스로 유럽까지'가 충분히 가능하리라 나는 확신한다.
프릭스 버스는 누차 이야기 한 바처럼...... 어디까지나 자유여행자에게 꼭 필요한(피키지 여행자에게는 전혀 불필요) 으뜸 상품이라 하겠다.
프릭스 버스는 어디까지나 국제 협약에 준한 국제 노선 운행을 전제로 한다. 이 부분이 때론 세세하게 설명하기 곤란한 부작용을 낳기도 하고 언론에 화제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점 때문에 자유 배낭여행자에게는 간혹 커다란 도움이 되고 안전고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어떤 국가가 프릭스 버스의 진출을 허락하고 협약을 체결한다고 해도, 그 나라만의 자국민을 위한 특별 운송조항이나 노동조합의 조칙과 대립할 때가 있는 것이다. 하여 프릭스 버스는 내가 직접 경험해 보고 조사해 본 것처럼 비교적 유연성을 가지고 안정성과 우발성에 대해 미리미리 대비를 하고 있다.
그 하나가 프릭스는 진출하는 국영이나 지자체마다, 관할 버스 터미널 하나하나의 운행 주체측과 아주 세세한 협의와 개별 조약을 체결했다.
예를 들어 프릭스 버스가 서울 센트럴 버스 터미널에서 부산 터미널까지 진출을 했는데......... 버스운송 노조와 터미널 운영 노조가 공동 파업을 벌여서 센트럴 버스 터미널이 완전 중단 차단되었다고 가상해 보자. 시간이 되어 프릭스 버스가 도착했는데 터미널이 완전 봉쇄되어 있다면....... 당연히 서울에서 예약한 여행자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버스 이용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부나 지자체 따로, 노조 따로, 경찰 따로........ 평양에서 출발한 버스는 정시에 서울에 도착했는데....... 어떻게 운행이 실현될 수 있단 말인가? 독일의 프릭스 버스가 프랑스에 진출하면서 실질적으로 닥친 문제였다고 한다. 하여 프릭스 운영부가 꺼내 든 정책은 이랬다. 마르세유처럼 정부와 지자체가 어떤 상황이 벌어지던 국제법에 의해 보장되는 국제버스노선 운행을 보장하면 터미널에 입고한다. 만약 그 보장이 어렵다면 지자체와 경찰의 약속으로 해단 지자체의 터미널을 거점으로 이용하지 않고, 시 외곽의 비교적 한산한 지역 간이 버스 정류장에 이 국제노선 버스가 정차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다소 불편을 감수해서라도 국제노선 버스 운행만은 어떻게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목적에서 내려진 결론이다. 하여 국제 노선을 달리는 프릭스 버스가 많은 지역에서 시외곽의 한적한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선다. 물론 이 정류장은 시내버스나 트램 등 대중교통으로 그 도시나 유명 여행지로 아주 쉽게 접근하도록 하는 전제를 우선으로 한다.
다음 여행지인 몽펠리에 여행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는 여정은 프릭스 버스를 이용하기로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집에서 벌써 인터넷을 통해 예약을 마쳐 둔 상태였다. 코트쥐다르와 프로방스 여행의 대부분 지중해 연안의 철도를 이용할 것을 생각할 때,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갈 때는 기차보다 버스를 이용해 안도라 인근의 국경 고지대를 구경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예약시...... 오스트리아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밀라노를 거쳐 프랑스 니스를 지나 마르세유를 경유하여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거쳐 마드리드까지 운행하는 프릭스 버스가 우리가 계획하는 몽펠리에에서의 출발 기점이 터미널이 아니라 외곽의 트램 종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마당에 아내가 마르세유에서 몽펠리에 코스를 버스를 타면 어떻까 라는 생각에......... 그렇게되면 몽펠리에 가면서 프릭스 버스 정차 정류장을 확인 할 수 있겠구나. 몽펠리에 도착 후에야 어떻게 하든 숙소를 찾아 갈 자신이 있으며, 역에서 숙소를 찾아가 보면 떠나는 날 시간에 쫓기거나 당황하지 않고 여유있게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사전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르세유에 도착해 프릭스 버스를 예약했다.
그것이 프릭스 버스를 선택한 이유의 전부였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실로 엄청나게 달랐다. 천당과 지옥의 차이라고나 할까?
마르세유와 작별하는 날이라고 생각해.......... 미처 다 둘러보지 못한 마르세유 도심을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 다녔다.
다음날 일어나 아침 산책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티비 화면에 계속해서 (Greve)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Greve)라는 단어가 특이하게 프랑스에서만은 '데모'라고 쓰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파리에서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만치 뼈저리게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뉴스를 틀어놓고 불어로 된 뉴스 타이틀을 메모지에 적어서 파파고 검색기를 돌려 보았다. 파리에서 퍼져나온 (연금 제도에 저항하는 파업)이 프랑스 제2 도시인 마르세유에서 까지 데모로 시작되었으며, 오늘 오전 10시에 마르세유 시청 앞에서(올드 포트 부근) 데모와 행진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이었다. 시정부의 대응책이 발표되고 경찰 동원령이 발동되었고, 시민들의 업무지장과 안전대책을 당부하는 내용도 뒤따랐다. 어제까지 그렇게 평화로왔는데......... 이제 잠시 뒤부턴 이내 우리가 경험한 파리의 도심 데모현장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허겁지겁 짐을 싸서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벌써........ 아뿔싸!!!!!!!!!
운송노조 파업으로 지하철 1호선이 이미 폐쇄되었다. 택시를 타야하나? 파리에선 경찰이 저지선을 형성하고 나니 지하철과 시내버스는 물론 택시까지 멈춰섰었다. 오로지 자전거와 걷는것만이 전부였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니 군데군데 버스노선도 이미 멈춰선 것이 속속 드러났다. 그때 무전기를 들고 안전복을 입은 공무원이 다가와 목적지를 묻는다. 생 찰스역이라 하자 PDA를 두드려 운행중인 대중교통 노선도를 점검한다. 그러면서 '여행자들이무척 당황하셨으리라 죄송하다'고 공무원으로서 대신 사과를 한다. 지하철이 2호선은 아직 운행중이며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아가 몇 번 버스를 갈아타면 역에 도착할 수 있다고 세세하게 설명은 해 주었지만...... 이 낯선 상황이 여행자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과제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암튼...... 그때 천사와 같은 할머니와 손녀인 예쁜 숙녀가 우리를 이끌어 같이 2호선을 타고 이동했고, 공무원이 알려준 버스에 태워 주고는 자신들의 길을 갔다. 여행중에 이번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또 새로운 천사를 만났다. 우리의 무작정식 자유여행이 가능하고 늘 자신에 찬 이유는 바로 이 천사들 때문이다. 하여 일상속에서 나도 늘 천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마르세유 기차역에 도착은 했다.
그런데........ 역이 완전 폐쇄되었다. 철도 노조가 마르세유 파업의 주체였던 것이다. 여기저기 경찰들이 저지선 구축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역사는 열려있지만 조명등이 모두 꺼져있고 상점과 창구가 모두 굳게 닫혀있다. 상황을 안내하는 공무원도 역사에는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암담한 참혹한 이 현실 앞에.......... 아내의 표정을 살피니....... 공포까지는 아닐지라도 고충과 절망이 가득한 표정이다.
이를 어쩌지? 당장 뾰족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뭐라 위로라도 해 주어야 하겠는데......... 그러다 문득............
'프릭스 버스는 국제 버스야. 프랑스 노동법에 적용받는 구조가 아니야. 국제법에 의해서 운송을 보장받는 버스야. 오스트리아에서 출발해 이탈리아를 지나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야하는데...... 마르세유에서 데모때문에 멈추지는 않을거야. 일단 창구로 가 보자고.........'
응급처방이었다고는 하지만 어디서 나에게 이런 배짱이 생겨난 것일까? 당장 몇 분 후면 들통이 날텐데 말이다. 아내가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하여, 우리는 어두컴컴한 마르세유 기차역 너른 통로를 지나 끝자락에 위치한 프릭스 버스 창구로 갔다. 그런데............ 와!!!!! 있다.
창구도 열려 있고 녹색 조끼를 입근 직원이 우리를 보고 손짓을 하고 있다. 창구 앞에 십여 명의 여행자들이 캐리어와 짐들을 쌓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프릭스 버스는 국제법에 준하는 국제 노선이라 현지 상황과 관계없이 정상 운행 합니다. 다만 마르세유 현지 교통 사정으로 어쩌면 조금 지체될 수는 있겠지만 정상 운행 합니다.' 라고 상황을 직원이 설명해 준다.
'거봐. 내가 이번엔 버스타고 가자고 했잖아. 이 얼마나 다행이야.'
'그러게....... 그래서 내가 마누라 말씀이라면 절대 복종하는 거잖아. 어제 기차표를 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휴........'
20분을 연착해서 마침내 녹색 버스가 들어섰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를 질렀다.
마르세유 여행자들이 내렸고, 기다렸다고 짐을 먼저 싣고 하나 둘 예약된 좌석에 올라탔다. 빈 좌석이 하나도 남지않고 빼곡히 정원을 가득 채운 다음에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이내 버스는 도로 위에 멈추어 섰다. 마세유 도심이 경찰의 저지선을 중심으로 양쪽 모두 완전히 막혀 있었다. 나가려는 노선은 승용차와 버스로 가득찼고, 도심으로 들어오는 노선은 트럭과 트랙터 콤바인등 농민 중심의 데모측이었다. 경찰차와 앰블런스만 오가는 단 하나의 열려진 비상노선으로 신기하게도........ 녹색 버스만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프릭스 버스 국제 노선의 위력이라고 해야 할까?
마침내 녹색 버스는 경찰의 저지선을 벗어나 마르세유 교외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정보다 1시간 정도 늦게........ 몽펠리에에 무사히 도착했다.
자유 배낭여행자라면....... 여행 스케줄을 계획하면서 한 번쯤은 자신의 계획을 프릭스 버스 운행 노선과 연계시켜 살펴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당신의 여행이 더욱 여유롭고 풍성해 질 것이라 확신한다.(나의 실질적인 경험에 의한 주관적인 생각과 권고일 뿐, 본인과 프릭스 버스는 어떤 이해관계도 없음을 분명하게 밝혀두고자 한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지역 곳곳에 남아있는 소중한 인류문화유산인 개선문은 대부분이 로마제국 시대에 만들어졌다. 당시의 세계관으로 치자면 로마제국이 곧 지구의 전부라고 여겼던 시대였다. 그랬던 당시의 모든 세상에 로마는 거미줄처럼 안벽한 도로망을 구축했고 군사적 요충지마다 거대 도시를 건설했다. 초대형 원형경기장을 만들어 각 지역의 피지배자들을 끌어들여 온갖 즐거움을 선사하고 로마에 스스로 동화되고 복종하도록 이끌었다. 그런 도시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개선문을 만들었고, 붉은 망토에 빛나는 글라디오스(로마 검)를 허리에 찬 숱한 전설 같은 무용담으로 가히 저승사자라고 불리던 용맹한 세계최강의 로마의 군단이 보부도 당당하게 개선문 아래를 지나 행진했던 것이다. 1개 군단이면 대략 1만 명의 군인들로 만들어진 집단이다. 그들이 전쟁터로 나갈 때 길게 늘어서 이 개선문 아래를 지나 진군했고, 승리하면 다시 이 개선문 아래로 수많은 노획물과 포로를 앞세우고 행군을 해 지나갔다. 온 도시는 몇 날이고 환호성에 젖어 꽃을 흩뿌리고 와인에 젖어 승리의 축제를 만끽했다. 그런 이유로 열려진 정치 사회제도 속에서 다양한 분야에 걸처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배양하여...... 기꺼이 서로 앞 다투어 로마인이 되고자 했다. ‘누구나 로마인이 될 수 있다’는 가히 로마제국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이런 로마제국의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저)를 죽도록 흠모했고 시대를 앞서 태어났다면 기꺼이 시저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나폴레옹은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본받아 파리에 나폴레옹 자신의 업적을 영원히 남겨두기 위하여 개선문을 만들었다. 애초에는 이탈리아 침공에서 승리를 거둔 뒤, 로마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개선문을 파리로 옮기려 하였으나 당시의 건축기술의 한계라는 장벽에 부딪치자 내친김에 새롭게 파리에 자신의 개선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근대에 만들어진 가장 유명한 개선문이 탄생한 것이다.
마르세유 도심 도로망의 중심지인 담므가에 가면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의 개선문을 만날 수 있다. 엑상 프로방스로 가는 고속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이라 보면 되겠다. 보면 볼수록 영판 파리의 개선문을 닮았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사실은 파리의 개선문 보다 한참이나 앞서서 지금의 모양으로 건설 계획이 세워져 추진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파리의 나폴레옹 개선문이 여기 마르세유 개선문을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루이 16세 시대에 마르세유 시정부는 도시재개발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로마시대 이후로 올드 포트 외곽의 함선 보관 및 수리시설 지역과 군수물자 보관소 병기창의 너른 부지를 고심 끝에 일반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결과가 현재의 마르세유 신항 방파제가 되는 것이다. 이때 어마어마한 돈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고심 끝에 그 돈의 일부를 들여서 당시의 통치자였던 루이 16세를 찬양하는 기념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그것이 바로 마르세유 개선문인 것이다. 하지만, 사치와 허영과 방탕에 빠진 루이 16세와 정부는 무능했고 점점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은 끝내 혁명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당연히 지지부진하던 마르세유 개선문의 공사 진행은 중단되고 말았다.
역사사상 최조의 민주 혁명으로 기록된 프랑스 대혁명은 정말로 너무나 어이없게(내 주관적 견해로는 실로 민주혁명이라 보기 어렵다고 판다)....... 민중의 혁명은 분명히 성공했지만, 혁명 성공 이후를 이끌어갈 지도부의 권력다툼과 암투와 부패로 인해 다시 군사혁명이 벌어지게 되고........ 나폴레옹이 등장해 새로운 왕정을 시작한다.(왜 영화 ‘서울의 봄’이 갑자기 떠오르지?) <이게 시장 말이 돼? 그러면서 거창하게 최초의 민주혁명국가라고? 헐!!! 한마디로 싸그리 붕신들 아닌가?> 나폴레옹은 영웅이 되었지만 민중의 삶은 연이은 전란 속에서 참혹했을 뿐이다. 유럽 연합국의 덕분에 나폴레옹의 압정에서 그 잘난 프랑스 민중은 마침내 해방되었다. 그럼 이젠 당연히 민주 공화정이 정착을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게도 프랑스 대혁명 정부의 분란과 파탄과 부패와 무능에 환멸을 느껴서...... 다시 과거의 루이 왕조를 재건해 17세 18세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겨버린 것이다. 그런 프랑스가 무슨 ‘민주 혁명’을 운운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내 주관적인 견해에서 최조의 민주혁명은....... ‘미국 독립전쟁’ 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영국 왕정의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도망쳐 개척정신 하나로 뭉쳐서 터전을 겨우 일구었는데, 식민지 확장을 노린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 등이 신대륙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와중에....... 비록 먼 곳까지 도망쳐 나온 처지이기는 하나 자신들의 고국 동포와 오랜 정적인 프랑스의 전쟁을 보면서 개척자들은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결성해 동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판도가 영국의 승리 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자 영국 정부는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영연방에(여왕의 영토) 편입시키고 법령에 따른 세금 징수를 추진했다. 개척자들의 온정을 완전 무시한 처사였다. 개척자들은 모국이라고 생각해 자발적으로 도움을 준 것뿐이지, 또다시 왕정으로의 귀속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룩한 개척지였는가 말이다. 개척자들은 다시 민병대의 이름으로 뭉쳐서 당시 세계 최강의 현대식 군대인 대영제국을 상대로 과감하게 독립을 외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지만........‘자유를 향한 개척민들의 집념’은 끝내 대영제국을 물리치고야 말았다.
전쟁의 와중에 개척민들을 대변할 정부를 구성하려고 당시의 처지로는 아주 독특한 특별한 민주 방식의 직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고 결과로 미합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탄생이자 시작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민주 방식의 선거제가 오늘날의 완벽한 민주 투표제와는 다르게 어중간한 성격이 다분히 있지만, 미국인들은 250년 전에 아주 힘겹게 시작했던 당시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나는 미국을 그렇게 달가워하지도 않고 비판도 많이 하지만, 그들의 개척정신과 민주주의를 지향했던 그들의 신념과 자부심에는 늘 경의를 표하는 입장이다. 그런 이면에는 당연하게....... 18세기 말 19세기 프랑스인들의 지성은 온통 불합리한 허풍쟁이 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마르세유 개선문(Place Jules-Guesde)이 있는 지금의 자리에는 본래 분수대가 있었다. 도시 재개발과 외지(액상 프로방스)로 뻗어나가는 고속도로의 시작을 이곳으로 하려는 계획은 분수대를 철거하고 파리 개선문처럼 원형의 중심도로 개설을 추가로 계획했던 것이다. 하여 본래의 분수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롭게 현재의 개선문이 들어섰다. 당시에 철거된 분수대가 바로 지금의 라 카스텔란 광장에 오벨리스크를 떠받치고 있는 분수다. 그런가하면 카스텔란 광장의 분수(Place Castellane)도 이곳으로 옮겨오기 이전에 이 자리엔 먼저 오벨리스크 하나가 달랑 놓여 져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마르세유의 중심지이자 핵심이 고대 도시가 건설되었었기 때문에 이곳의 중심도로 지명이 바로 로마가도인 것이다. 그 로마가도의 분기점에 로마시대의 오벨리스크가 설치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스텔란 분수가 이곳으로 옮겨오는 것이 결정되면서, 결국 로마가도의 오벨리스크는 결국 비교적 외곽지역이랄 수 있는 마자르그 지역(Mazargues)의 원형교차로로 옮겨졌다.
<마르세유와 치안부재, 그리고 개선문 지역>
마르세유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계속 따라다닌 것이 바로 치안부재 문제였다. 그런데 우리의 마르세유 여행은 비교적 여타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별다른 것 없이 순조로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세유의 치안부재가 모두 오해였고 마르세유는 아주 쾌적했고 치안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하다고 느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혹여, 마르세유를 여행하게 된다면....... 적어도 개선문(Place Jules-Guesde)지역 만큼은 아예 가지 않던가, 가야겠다면 점심때를 전후로 혼자는 자제하고 여럿이서 조심해서 다녀오시라고 당부하고 싶다. 마르세유에서 치안부재를 걱정해야 하는 장소를 하나만 꼽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개선문 지역이라고 하겠다.
춥고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마르세유 기차역에서 언덕길을 통해 개선문으로 향했다. 교통의 요지인 만큼 개선문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개선문이 위치한 담므가는 고속도로 진입로이자 버스정류장과 지하철과 인근으로 트램까지 지나가는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늘 인파로 넘쳐난다. 그중에 실질적으로 개선문 주위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자리를 차지하고 눌러앉아있다시피 한 사람들의 태반은 생김새나 옷차림으로 보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건너온 유민들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은 미심쩍은 낯선 풍경에 의아심을 가지면서 겨우 개선문을 한 바퀴 돌아보았을 즈음, 광장 모퉁이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십여 명의 북아프리카 출신 유민으로 보이는 무리가 지나가는 직장인으로 보이는 차림의 흑인들을 상대로 밀치고 무엇인가를 빼앗으려 하면서 싸움으로 번져갔던 것이다. 현지인들이 멀리 돌아가고 여행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소리를 치며 도로를 가로질러 도망치듯 건너갔다. 소란을 알게 된 챠밍 여사가 혹시나 오지랖 넓은 내가 또 끼어들까봐 걱정되었는지 무작정 나를 잡아끈다. 오래 전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 뒷골목에서 청년들 싸움판에 뛰어들어 집단구타를 뜯어말리던 기억이 아직도 큰 공포로 남아있는 이유이리라.
순간 요란한 비상 싸이렌 소리와 함께 서너 대의 경찰차와 진압용 전투차량까지 등장했다. 하나같이 몰려 온 경찰들 모두가 방호복 차림에 권총을 차고 손에는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그제야 마르세유가 아직도 조직 간에 총기를 동반한 폭력전쟁이 빈발한 지역이라는 사실이 번뜻하고 뇌리에 다시 되살아났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짧은 시간에 폭력을 행사하던 사내들이 썰물처럼 어디론가 싹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두드려 맞던 세 사람만 남았다. 넓은 지역을 에워싸듯 바리케이트를 친 경찰들은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그리고 한두 명을 경찰차량까지 끌고 가듯 데리고 가서는 조사를 했다.
테러와 전쟁 중인 이스탄불에서의 경찰 모습은 적지 않게 호기심의 발동이었는데, 마르세유에서의 경찰 모습은 분명 비상사태 직전의 긴장감이 도는 그런 모습이었다. 느닷없이 소매치기를 당해도 무서울 판에, 우르르 몰려가 강제로 빼앗고, 여의치 않으면 칼이든지 심지어 총까지 빼어드는 우범지대가 실재하는 곳이 바로........ 마르세유 여행에 치안부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유였던 것이다.
우리가 여행자임을 알아 본 경찰이 도로를 건너갈 수 있게 안내를 해준다. 무표정에 다소 긴장된 표정이 역력하다.
개선문 지역을 벗어나 시내 중심을 향해 다시 언덕길을 내려간다.
조금 전에 목격한 광경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추위에서 잠시 벗어나 몸을 좀 녹이고 가려고 카페를 찾았다. 현지 노인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터키식 카페가 눈에 띄어서 이럴 때 터키 커피를 한 잔 마셔보려고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맞은편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에스페레소를 티스푼으로 슬쩍 떠서 맛을 보니....... 헐, 실제로 이거 한약보다 더하다.
설탕이 있어야만 하겠기에 카운터에 설탕을 얻으러 다가갔는데, 그때 막 카페로 들어서는 서너 명의 생김새와 분위기가 영 험악하다. 하나같이 동양인을 처음 보나? 나를 일제히 뻔히 쳐다보면서 스쳐 지나간다. 그럴수록 억한 마음에 기가 죽은 모습을 보일까 우려하여 끝내 어깃장을 놓고야마는 내가 가진 이 쓸데없는 기질이 기어코 그들의 뒷모습을 샅샅이 흩어보듯이 시선을 떼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다. ‘어라? 저자들은 바로.......’ 불량스러워 보이는 자들이 카페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가 먼저 자리 잡은 사내들과 함석을 하는데...... ‘얼씨구?’ 방금 전에 개선문 광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다 잽싸게 도망친 그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을 이끌고 지시를 하던 유독 눈에 확 띄는 우두머리의 레게 머리와 갈색 옷차림이 바로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각설탕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오니...... 이 사태를 벌써 눈치 챈 챠밍 여사가 몹시 당황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슬쩍 그들이 있는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얼른 카페에서 나가자고 서둔다.
어허. 그렇다고 허겁지겁 도망칠 내가 아니지...... 그래도 대한민국 예비역 병장 출신인데........ 쓰디 쓴 에스페레소를 끝까지 마시기는 마셨는데..... 맛을 전혀 모르겠다. 아내는 커피 마실 엄두도 못 내고 무작정 서둘러 여기서 나가자고 한다.
끝내...... 마실 것 다 마시고, 화장실까지 다녀와서 끌려나오듯이 나왔는데....... ‘쓸데없는 허세만 부린다고..... 마눌님에서 미친 거 아냐?'라는 분노에 찬 호통까지 들으며 혼나고 또 혼났다.
트램 노선을 따라 걷다보면 노알리스 지역이 나타나는데, 현지인들이 이 지역을 ‘마르세유의 배꼽’이라고 부른다면 적어도 마르세유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이 지역이 가진 중요성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마르세유 여행을 하다보면 반듯이 등장해야만 하는 한 이탈리아 여성이 있는데 바로 캐서린 데 메디치(Caterina de' Medici) 왕비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수장인 로렌초 메디치의 딸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앙리 2세에게 시집을 왔다. 이 혼사를 통해 귀족의 반열에 오르고 싶었던 로렌초 메디치의 야망과 재정적으로 극한의 상황에 몰린 왕족의 정략결혼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앙리 2세는 왕이 될 처지가 아니었는데 형의 횡사로 얼떨결에 왕위에 올랐고, 그 역시 일찍 죽음으로서 캐더린 메디치는 어린 아들의 배후에서 섭정이 된다. 그 이후의 모습은...... 중국 역사의 측천무후와 견줄 만큼 흑역사로 가득 점철 도배된다.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조롱하는 마음으로 지나치는 회랑이 있는데 바로....... 루벤스가 그린 캐서린 데 메디치의 일생을 그린 연작 시리즈가 전시되어 있는 회랑이다. 다비드라는 화가가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기 이전과 이후로 팡이하게 다른 평가를 받지만...... 이후의 그림이라 해도 화가로서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면. 루벤스의 캐서린 메디치 찬양을 목격한 이후로 나는........ 내 주관은 루벤스라는 화가를 ‘하찮다 못해서 미천한 아부덩어리 화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어느 날 갑자기 루벤스가 캐서린 메디치를 운명처럼 죽을 만큼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면 정신병자라 치부하기 이전에 약간의 동정이라고 해 주련만...... 이거야말로 쉽게 표현하자면........ 카드리느 메디치를 거의 성모 마리아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으로 찬양하는 그림을 4년 동안 초대형 연작으로 그려낸 미치광이 정신병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술의 대상을 뛰어넘어 찬양의 대상으로 변질 시켜 버렸다.
1579년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캐서린 드 메디치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6월 15일에 도착해 처음 머문 곳이 마르세유의 중심가(마르세유의 배꼽) 노알리스(Noailles) 지역의 저택이었다. 힘들었던 뱃길 여정의 피로를 푸는 기간 동안 캐서린은 주변의 너른 땅을 마구 사들였다. 메디치 가문의 재력을 뽐내면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계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때 캐서린이 사들인 부지에 건축이 이루어졌고 그곳에 카푸친 수도회가 들어섰다. 훗날 이 수도원 건물과 부지는 국가에 귀속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이곳에 직물공장과 식물원과 공원이 조성되었고, 오늘날에는 야외 전통재래시장이 형성되어 과일과 채소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거래되는 상설시장이 연중무휴로 열리고 있으면서, 마르세유 주민은 물론 인근의 많은 로컬 음식점에 싱싱한 재료를 제공하고 있는 아주 매력적인 시장이다.
저녁꺼리를 준비도 할 겸해서 우리는 기꺼이 카푸친 시장으로 향했다.
카푸친 시장에서 과일을 사고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언덕 위쪽으로 한 눈에 확 띄는 고딕양식 건축물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마르세유에서 노틀담 르 라가르드 성당이나 마르세유 대성당의 건축 양식인 네오 고딕양식의 교회건축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처음으로 전통적인 프랑스 특유의 고딕양식 외관을 갖춘 교회건물이었기에 유독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일단은 무조건 가서 보아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 같은 느낌에 서둘러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도로 공사 중인 현장을 돌아가다 보니 너른 교차로 위쪽의 교회로 바로 가지 못하고 반대편의 공원 쪽을 삥 돌아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공원으로 돌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멋진 조각상이 올라있는 거대한 분수가 전형적인 고딕건축 양식의 뾰족한 두 개의 첨탑을 배경으로 카메라의 한 앵글 안에 모두 들어가는 감동적인 풍경을 선사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수의 꼭대기에 칼과 깃발을 들고 서있는 여신상은 프랑스(국가)를 상징한다. 그 아래로 프랑스가 근세에 겪었던 4개의 커다란 전투를 상징하는 승리의 전투장면이 조각으로 승화되어 있다. 조각가 콘스탄트 루 (Constant Roux)가 "Bouches du Rhône의 아이들"로 칭송받은 마르세유와 인근 마을 출신의 젊은이 1천명이 1870-1871 년의 프랑코 - 프로이센 전쟁 (Franco-Prussian War)에서 전사한 것을 기리고자 추모 공원에 분수를 설치하고 그 위에 추모 기념비(Monument des Mobiles)를 조각해 완성했다. 하여 오늘날에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젊은이들을 추모하는 것을 넘어,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한 영혼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공원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 공원이라서 그런지....... 오늘날에는 다양한 이유를 전면에 내세우고 발생하는 여러 단체들의 집회시위 장소로 사용되면서 언론매체와 방송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마르세유의 명소 내지는 인기(?) 지역이 되었다.
추모 공원 주변의 어수선한 공사현장을 지나 다소 복잡한 교차로를 건너 마침내 교회( St. Vincent de Paul Church)의 영역에 들어섰다. 파리나 프랑스 북부 대서양 연안에서 주로 보이는 교과서적인 고딕양식의 전형적인 풍경이 자못 감동적이다. 타 지역의 고딕 성당에 비해서는 높이나 규모면에서 조금 왜소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고딕의 전형적인 미를 느껴보기엔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가하면 빈센트 폴 교회는 고딕 양식의 교회전형에 비하자면 어딘지 모르게 나름 수수한 모습이다.
혹, 국내여행을 하면서 사찰 순례를 하다보면, 대부분의 사찰들이 화려한 단청을 입고 있으며 심지어는 청기와 지붕에 니스 칠까지 더해서 눈이 부실정도로 번쩍이는 것을 근자에 들어서는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그런 낯선 풍경들엔 왜인지 도무지 익숙해질 낌새조차 내 마음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점점 사찰을 향하던 발걸음이 뜸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에 지리산이나 해남 땅에서 터지고 갈라지고 아무런 단청도 없니 고스란히 본래의 속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오래된 사찰의 백골 자태를 만났을 때의 감동이란....... 나는 지금 꼭 그런 느낌으로 멀고 먼 마르세유에서 수수한 자태를 가진 왜소한 고딕건축물을 마주하고 있다. 다만..... 세월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빈센트 폴 교회를 마주하고 서면 당장 가장 크게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입구에 서있는 잔 다르크(Jeanne d'Arc) 조각상이 꽤나 인상적이다. 잔 다르크 동상이 빈센트 폴 교회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까지는 더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지극히 내 주관적인 관심에서 짐작하기로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한 가녀린 오를레앙((la Pucelle d’Orléans)의 처녀가 나타나 프랑스 왕정국가를 구해냈다. 하지만 교회와 정치권력의 야합과 불합리에 의하여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마녀의 죄’를 뒤집어쓰고 화형에 처해져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이후로 약 6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잔 다르크는 여전히 ‘마녀’의 오명을 서야만 했고 외면과 버림을 당해야만 했다. 현대에 이르러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잔 다르크에 대한 재조명과 명예회복 운동이 꾸준하게 벌어지고 이어져 내려왔다. 그녀는 위기의 프랑스를 구원한 ‘오를레앙의 성처녀’로 불리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황청과 영국 정치권력의 체면과 프랑스 역사의 체면을 생각할 때, 잔 다르크는 여전히 외면되고 냉대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여전히 ‘잔 다르크는 마녀’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5년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에 이르러 ‘역사적 반성과 화해와 더불어 헤쳐 나가야 하는 인류의 미래’ 차원에서 교황은 많은 숙원사업과 눈부신 업적을 이루어내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잔 다르크의 사면과 복권’ 사업이었다. 교황은 잔 다르크를 마녀로 내몰아 화형에 처했던 교회의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교회를 대신해 용서를 구했다. 잔 다르크를 복권시키고 기독교의 성인으로 추존했다. 비로소 ‘오를레앙의 마녀’가 ‘오를레앙의 성처녀’로 역사위에 당당하게 복권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현대에 이르러 새롭게 탈바꿈하고 거듭나려던 빈센트 폴 교회의 노력의 일환으로 복권된 잔 다르크의 동상이 정면에 세워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보티넬리가 만든 잔 다르크 동상 뒤에서 건너다보는 카네비에르 도심 풍경도 역시나 멋지다. 프랑스는 어디를 가나 그 어떤 프랑스 특유의 정취가 그득 배어있는 그들만의 풍경이 매력적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높이 70m에 이르는 뾰족한 첨탑이 고딕 양식만의 맛과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거기다가 육중하게 느껴지는 청동 패널 장식으로 마감한 거대한 나무문은 도대체 이 안의 성당 내부 모습이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꽁꽁 감추려고 이렇게 엄청난 무게감으로 가로막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날 정도이다.
하지만....... 에두아르 디 드롱이 만들었다는 1.270 제곱미터 면적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을 제외하면...... 어쩌면 좀 실망스러울 정도로 성당의 내부 모습은 간소하다. 고딕 건축 양식의 특징이 뾰족한 지붕, 장엄한 돌기둥, 병면을 빼곡히 채우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라고 친다면........ 빈센트 폴 교회가 고딕양식인 것은 틀림없어 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초라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다가 지금 한창 성당 내부 공사가 벌어지고 있어서 회랑의 중심으로 높은 비계가 설치되었고 가림막 겸 안전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여 아쉽지만 이쯤에서 발걸음을 돌려 성당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400년 전에 프로방스 총독이 본래 수도원의 자리에 새로 교회를 짓고자 한 것이 빈센트 폴 교회의 시작이었다. 마르세유 분쟁 때마다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하다가 점차 교회는 마르세유 사람들의 외면을 받아 1980년대엔 텅 빈 교회로 전락하기까지 하여 시는 이 교회를 철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대변화가 찾아왔다. 2005년 소르키네 신부가 부임하면서부터 교회는 새롭게 부흥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날 리카르도 교회와 대성당에 이어서 마르세유에서 세 번째로 가장 사랑받는 교회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것이다. 2014년 이후로 마르세유 역사적 기념물로 인정받아 건축과 예술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에게 마르세유에서 꼭 찾아가야 하는 명소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내부가 온전한 모습이 아니어서 좀 아쉽기는 했으나...... 빼어난 외관의 고딕양식 미는 발걸음을 돌려 내려가면서도 몇 번이고 자꾸만 우리로 하여금 고개를 돌려보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숙소까지 언덕을 넘어 골목길을 헤집으며 걸어가려고 애초 생각했었는데...... 오늘이 마르세유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서운한 것이 결국....... 우리의 발걸음을 반대방향으로 올드 포트 인근의 도심으로 향하게 만들고 말았다.
사마르테인 카페를 찾아 우선 알랑제 커피를 아메리카노 스타일로 바꿔 마신다.
오늘은 햇쌀도 무심한 듯 옅은 구름 속에 숨어들었고 어제나 그제와 똑같은 매섭도록 싸늘한 날씨에다 여전한 미스트랄의 심술이 차츰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만들어가고 있다.
코앞에 있는 올드 포트광장 건너편에서 지하철(Vieux Port)을 타면 숙소까지 곧바로 갈 수 있는데....... 뭔 미련이 이리도 많은지....... 두 정거장이나 떨어져 있는 카스텔란 역까지 가서 타자고........ 도심을 저만치 돌아 로마가도로 향한다.
이곳에 이르면 묘하게........ 어딘지 모르게 파리 시청 인근의 풍경이 엿보인다. 전형적인 프랑스 대도심의 중심가 풍경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느낌이다. 시청, 오페라 하우스, 충심 상가, 잘 가구어진 도심 공원의 풍경 등을 마음속에 주워 담으며 카스텔란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다 만나게 되는 영락없는 파리 시청의 축소판과 같은 멋진 건물 모서리에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기념 조형물이 무리의 발걸음을 사정없이 끌어당긴다.
기념탑과 조각상에 새겨져 있는 글씨를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니...... 파리 시청을 빼닮은 멋진 건물이 현 마스세유 경찰청(Bouches-du-Rhône)이었고, 조형물이 설치된 모서리가 바로 <유고슬라비아 알렉산더 1세와 루이 바르토 기념탑> 이었다. 이것 역시 추모 기념비의 하나이다. 그런데 어디지 모르게 범상치 않은 분위기와 기운이 넘쳐난다. 하단의 안내문을 보니 마르세유출신의 건축가 가스통 카스텔 (Gaston Castel)과 조각가 앙투안 사르토 리오 (Antoine Sartorio), 루이 보티 넬리 (Louis Botinelly), 엘리 장 베지 앙 (Élie-Jean Vézien)이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기념비에서 유독 내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문장은 바로 (유고슬라비아)라는 문장이다. 내가 역사에 심취해 있을 때,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히틀러에 대항한 티토> 그리고 <발칸반도 분쟁과 알렉산더 1세> 라는 제목으로 한동안 유고슬라비아 역사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그때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 1세’와 ‘티토’였다.
하긴...... 오늘날 (유고슬라비아)를 기억하는 사람조차도 별로 없을 세상이 아닌가? 동유럽의 올림픽과 축구에서 절대강국으로 인정받았던 유고슬라비아는 우리 세대(?) 이전 사람들이나 기억할까? 이제는 역사와 세계 지도에서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 않은가?
혹, 당신은 (유고슬라비아)를 아십니까?
근대역사 속에서 동유럽 영역에는 오스트리아 왕국. 키예프왕국. 폴란드 왕국. 러시아 왕국 등이 실제로 존재했다. 이 시기에 발칸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실제로 강력하게 지배해온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존재했던 것이다.
간추려서 쉽게 설명하자면 발칸반도에 위치한 Josip Broz Tito 등의 20세기 말엽에 등장한 국가들이 모두 유고왕국(유고 연합. 유고 동맹)에 속한 국가들이었다. 당시에는 분명한 왕이 직접 통치를 하는 왕정국가였다.
분쟁의 시작은 분명 오스만 터키(터키)라는 이슬람 국가의 유럽 침공에서부터였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 전역을 지나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에 인접한 지역까지 침공 점령해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곳을 지배했다. 이 과정에 과거 절대적인 정교회 신앙의 지역이 이슬람 종교로 개종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근 현대에 들어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면서 그 지역을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차지해 다스렸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는 오늘날의 국가 숫자만큼이나 역사와 전통이 확연히 다른 민족들이 존재했고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다 이젠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교라는 종교적 마찰과 분쟁이 추가된 것이다. 거기에다 러시아에서 레닌이 씨앗을 뿌린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치사상까지 더해졌다.
하나의 민족 안에서도 각기 다른 종교와 정치사상이 서로 마찰을 일으키게 되자 점차 확대되어 이제 분쟁의 씨앗은 정치. 종교. 민족(혈연)까지 뒤섞이며 도저히 풀 수 없는 불가능의 차원으로 번져갔다. 이것이 이 순간까지도 일촉즉발의 제 3차 세계대전의 서막이라 불리는 (발칸반도 분쟁)의 내막인 것이다.
이런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출중한 인재가 하나 등장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1세였다. 그는 모든 부족을 공평하게 대했고 종교적 자유를 허락했다. 각 부족에 올바른 리더를 끌어내 세웠고 흔들릴 수 없는 왕국의 원칙을 제시했다. 그리고는 어느 부족이라도 그 원칙을 넘어서거나 위태롭게 하면...... 강력한 왕권을 동원해 나머지 부족 모두를 이끌고 강력하게 징벌했다. 하여 적어도 알렉산더 1세가 버티고 있는 한 유고슬라비아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몰락한 프로이센 왕국(독일)에서 전쟁 배상금 문제(제 1차 세계대전 전범국 독일)로 인하여 극렬민족주의자 히틀러가 등장함으로써 세계정세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극렬한 민족주의 파급은 겨우 잠잠해진 유고슬라비아 내부 문제에도 적지 않게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 너무도 뻔했다. 주변 국가와의 협력을 추진했다. 처음 알렉산드르 1세는 이탈리아와의 협력을 추진했는데, 이탈리아에서 역시나 극렬민족주의자인 파시스트당의 무솔리니가 집권을 하게 되자 오히려 의심의 시선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같은 처지에서 서로 필요성을 느끼게 된 국가가 바로 프랑스였다. 위기 앞에서 양국은 협력을 약속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유고슬라비아 알렉산더 1세 왕이 직접 프랑스 파리로 가서 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흑해에서 구축함에 오른 왕은 바다를 통해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열차편으로 파리로 가서 조약을 체결할 예정이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왕을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 영접했다. 가드페레이드 후 환영만찬을 거쳐 세이트 찰스 역에서 야간열차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만찬장으로 이동하던 중....... 불가리아 출신으로 크로아티아 민족해방전선의 지원을 받는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에 의해서 암살되고 말았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원대한 이상과 꿈이 한 순간에 박살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왕위는 아들인 알렉산드르 2세에게 양위되었지만...... 당시 그의 나이가 불과 11세였으니..... 그 결과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의한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유고슬라비아가 몰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 앞에 유고슬라비아 왕정은 비록 무너졌지만...... 유고슬라비아 민중 안에서 또 한 명의 탁월한 지도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바로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위대한 지도자로 손꼽히는 티토(Josip Broz Tito)다.
크로아티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티토는 성인이 되기까지 노동자로 살았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으로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오랜 시간 러시아 곳곳을 숨어 피해 다녔다. 또한 이 시기는 러시아 내전의 시기로 러시아 제국과 레닌의 마르크스 사회주의자들이 공산당을 만들어 게릴라전을 펼치던 시기였다. 이 고난의 여정에서 티토는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뜬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 온 티토는 곧바로 민족주의 무장투쟁에 돌입하여 빨치산을 조직해 히틀러의 나찌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늘 야전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생활했고 치열한 전투에 기꺼이 앞장섰다. 그리고 발칸반도 전역을 뛰어다니며 ‘민족적 종교적 분열과 다툼에 앞서서 유고슬라비아인 모두가 일치단결해 거대한 적 나찌의 침공에 맞서 싸워 이겨서 먼저 이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뛰어난 언변과 언제나 앞장서서 싸우는 용맹한 헌신에 온 유고슬라비아인들이 다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의 저항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 나찌의 히틀러는 ‘티토 제거를 위한 암살 특수부대를 실제 투입’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영화 <나바론> <무기여 잘있거라>에 등장해 연합군을 돕는 빨치산의 우두머리가 바로 티토였다. 티토와 스탈린은 강력한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티토는 스탈린과 거리를 두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자주 독립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스탈린의 목적은 유고슬라비아를 접수하고 지배하는 것이었는데....... 티토가 일찍부터 이를 눈치 챈 것이다. 티토는 스탈린에게 유고연합은 언제든 러시아를 향해서 또 한 번의 빨치산 전쟁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엄포를 놓았을 정도로 당당했다. 티토는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 신봉자였지만...... 러시아식 공산주의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티토는 케네디도 만났다. 유고연방의 자주와 독립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꼭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러시아식 공산당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반대였다. 그러자 카스트로와 호지명과 북한의 김일성이 티토에게 다가왔다. 티토는 이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무자비한 소련식 공산주의에 저항했다.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적어도 티토가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는 유고 영토 안에서 민족 간의 분쟁도 종교 간의 마찰도 일어나지 않았다. 드러나지 않은 불씨는 여전히 내부에 남아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티토의 앞에서만은 감히 입 밖에 드러내놓지 못했고 감히 그이 당부를 거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역시 한 인간이었기에..... 결국엔 늙어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러자 유고 전역에서 온갖 문제들이 터져 나왔고 다툼을 넘어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노려 소련이 온갖 이간질을 부추겨 민족 종교문제로 비화되더니 서로 죽이고.... 나아가 민족 말살을 시도하는 세기말적인 끊이질 않는 ‘발칸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만 것이다. 이를 노린 소련이 쳐들어와서 유고 연방을 소비에트 연방에 흡수 통합해 버렸다. 하여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분쟁이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16개국의 독립국가로 떨어져 나가면서........ 유고 연방에 속했던 발칸반도의 10세기 신흥 독립국가들(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알바니아)이 정치. 종교. 민족 문제를 기반으로 하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코소보 사태, 세르비아 인종 말살전쟁.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전쟁. 크로아티아 내전. 체코와 슬로바키아 독립전쟁 등을 끊임없이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아니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언제든 제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불씨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모든 시작점이 여기 마르세유에서 벌어졌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알렉산더 1세 암살사건이 발단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결과와 미래에 대한 우려에서 내가 티토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마르세유를 떠나고자 하는 시점에서 말이다.
-- 이제 마르세유를 떠나 다음 여행지 (몽펠리에 여행)에서 이어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일하면서 짬을 내다보니 조금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