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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白石)을 사랑한
고귀한 연정이
길상화(吉祥花) 꽃으로 피어났던가
꽃무릇을 바라보는 소녀의 그리움 마냥
상사화로 피었다 스러져간 사랑
길상화(吉祥華)보살님🙏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
당신은 그의 나타샤였고
나는 백석의 당나귀인양~
햇빛 스며드는 성북동 계곡
대원각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새겨보는 맘
성북동 계곡물에 마음을 씻고
아리랑고개로
넘어 가보자 🦋
법정스님 무소유 되뇌이며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사바 세상
바랑 진 저 고개를 언제나 넘나~
■ 길상사(吉祥寺)에서⛩
(2017.10.29 국교 밴드 게재한 글입니다,
사진은 2021.09.14 촬영)
삼각산 길상사
공덕주 김영한(1916~1999)은 가난 때문에 팔려가다시피 만난 남편과 사별한 후, 기생이 되었다. 기명은 진향(眞香). 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졌으나, 신분 때문에 남자 측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여 끝내 맺어지지 못했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자야'라는 여성이 그녀다.
그리고 해방 후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백석과는 영영 이별하게 되었고, 성북동 기슭에 요정인 대원각을 차려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백석과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항상 마음에 담아둔 채 홀로 지냈다.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매년 식사를 하지 않으면서 그를 기렸다고 한다.
백석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는 생전에 그녀가 했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언제 백석에 대해 가장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 있나"라고 답했고, 대원각을 시주할 당시 심경에 대해선 "1,000억 원이란 돈이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고 말했단다. 이 분도 시인의 기질이
그러던 중 승려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 스님에게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니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였다.
실로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법정은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웠고, 이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시가로도 1,0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고 하는데, 무소유를 설하던 법정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시주를 받은 데 대하여 불교 내부에서도 논란은 있었다. 그러나 법정이 신나서 덥석 받은 것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그녀의 마지막 원을 이루어준 것이니 이를 비난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1999년에 김영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화장하여 절터에 뿌려졌다. 절터에 골고루 산골했기 때문에 따로 무덤은 없으나,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 안에 있다.
2010년 법정도 여기서 입적했다.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진영각에 법정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사족으로, 법정 스님이 처음 출가하신 사찰인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다. 출가한 사찰과 한때나마 같은 이름을 사진 사찰에서 입적하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관세음보살상, 성모 마리아상처럼~
속세를 떠나 세상을 물들이고~🍁🌹⛩
* 시인 백석과 길상화 보살의 옛 이야기는 '나무위키' 자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