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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묵상글 들 ( 연중 제12주일-두려울 것 없는 성도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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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제12주일-두려울 것 없는 성도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주님의 이 말씀은 상당히 문제적인 말씀입니다.
해석하기에 따라 인간 범죄에 의한 참사인데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거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허락지 않는 인간의 범죄가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범죄가 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거라는 얘기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허락'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냐를 봐야 하고,
참새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의 의미도 무엇인지 잘 봐야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피조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주게 하시고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도 인간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자유 의지를 인간에게 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을 어떻게 대하고 다스릴 것인지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 의지를 가지고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고 자라게 할 것인지,
무관심이나 미움으로 다른 피조물을 파괴할 것인지 인간에게 맡기신 겁니다.
사실 이것은 피조물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자유 의지로 사랑할 수도, 배반할 수도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어마어마한 자유인데
인간이 사람을 죽이면서 하느님의 허락을 받고 죽이지 않지요.
그러니 인간이 하느님이든 다른 피조물이든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게 하셨는데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지 미움이 아니지요.
주식을 하겠다는 자식에게 하도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이 허락을 주지만
부모가 정녕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땀 흘려 돈 버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렇다면 당신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주님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는 인간들이 권력 싸움으로 서로 권력에서 밀어내듯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셔도 인간에 의해 인간이 나락에 떨어질 수 있지만,
하늘에서는 하느님 허락 없이 인간이 지옥에 떨어질 수 없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 주님 말씀은 구체적으로 예언자의 처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 좋아할 권력자들이 없고,
그런데도 계속 하느님 나라 정의를 외치면 헤로디아에 의해 세례자 요한이
죽임을 당하듯 박해를 받게 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박해와 죽임을 당하여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의 박해와 죽음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의 영원한 죽음과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죽이는 것까지이고 살리는 것은 못하며,
저 하늘에서는 하느님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진정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이 두렵지 않지요.
그러므로 관건은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고 열망하는 나인지, 그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참으로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멀리 보고 널리 들으라>고
이 세상 지혜도 얘기하는데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가
많은 사람이 당장의 행복을 바라고 멀리 행복을 찾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현재의 행복을 살아갈 수 있어야겠지만
그것이 당장의 행복에 매달리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와 당장의 차이는 미래를 내다보느냐 아니냐의 차이지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미래에서 더 나아가 영원을 내다보는 사람들이고,
현재와 미래와 영원을 주재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며, 그래서
이 하느님 때문에 현재 박해를 당해도 박해자를 두려워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현재로 앞당겨 살아가는 성도들이요 성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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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고 도미니코 신부님.연중 제12주일 -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두려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는 육적인 차원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의미는 영적인 차원으로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두려움은 하느님의 선에 대한 사랑에서 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반성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두려움은 신앙의 기본원리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두려움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지혜는 가장 참된 진리를 아는 것이며 우리 영혼의 정직성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체험합니다. 지혜는 우리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를 압니다. 지혜에 이르는 첫 단계인 두려움은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죄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가져다주고 그분 곧 진리의 빛이 우리의 양심 안에서 빛나게 해줍니다.
육적인 차원의 명예욕에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한 두려움이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닙니다. 명예욕은 특히 완벽주의로 나타납니다. 완벽주의 배경에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깊은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겸손의 목표는 모든 두려움을 추방하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육적인 차원의 두려움은 이기주의에서 옵니다.
타인보다 더 낫게 보이려는 하는 육적인 욕구는 그 뒤에 있는 것이 바로 나의 두려움이며 불안이라는 것, 무시되고 소외된다는 두려움, 나의 마음을 열어야 하는 두려움, 상처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이들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는 것, 아마도 내가 실제의 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게으름과 비겁은 영적생활에 있어 가장 큰 적입니다. 게으름과 비겁은 하느님의 사랑보다 우리 자신의 현재의 안락함을 더 중시합니다. 그것들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으므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합니다. 교만은 자기 안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잃어버릴 까봐 자기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요구하게 됩니다. 때로는 두려움은 자신을 폐쇄적으로 만듭니다. 두려움은 완벽주의에서 생겨납니다.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두려움을 느낍니다. 결국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육적인 두려움과 영적인 두려움인 경외심이 공존합니다. 성서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경외심을 깨어나게 하고 자라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말씀안에서 겸손을 지니며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인 경외심으로 욱적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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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김명겸 요한 신부님. 연중 제12주일
마태오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이야기로 시작해서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하신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복음을 선포하면서
제자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이야기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의 목숨도 헛되이 버려지지 않듯이
사람의 목숨을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은
귀한 존재, 소중한 존재입니다.
몰론 복음에서 이야기되는 복음 선포가
제자들처럼 세상으로 파견되어
나가서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요즘의 상황은
그러한 방법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두려움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이 겪는 두려움은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 뿌리는 똑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죽이는 존재에 대해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빼앗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에서는
제자들을 박해햐는 사람들로 나타나고,
지금의 우리의 상황에서는
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육신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육신의 죽음으로 허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육신의 죽음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죽는 것이기에,
죽음에 대한 책임이 하느님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만큼 하느님께서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의 상황에서 다시 생명을 주실지
아니면 거두어 가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하시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인간의 생사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부분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저 막연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함부로 대해지지 않고,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
나를 항상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허무하게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유, 그 해방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복음 선포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통해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는
나날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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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키엣대주교님 묵상. 진정 두려워하는 것(연중 제12주일)
드넓은 우주에서 인간은 보잘 것 없는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주는 어느 한 순간 우리 인간의 존재를 말살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이기에 두렵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지혜로운 판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권력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망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육체일 뿐 인간의 영혼을 말살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세상의 삶일 뿐입니다. 아무리 권력자라도 다음 생애를 뺏을 수는 없습니다. 그 권력 또한 우주의 섭리로 사라질 것입니다.
세상과 하느님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 지 그 판단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지금 이 생애와 다음 생애를 지배하시고 육체뿐 아니라 영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두려움과 무모함은 위험합니다. 한쪽은 너무 부족하고 다른 한쪽은 너무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두려운 것이고 무엇이 두렵지 않은 것인지를 잘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치의 판단
지금 이 세상, 육체의 삶은 짧은 순간 존재하고 사라지지만 영혼의 삶은 영원할 것입니다. 지금 이 삶과 다음 생애 모두 중요하지만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완벽하게 유지할 수 없다면 더 고귀하고 영원한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기회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할 기회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 작기에 잘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날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아보실 것입니다. 삶이 끝날 때 기회도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아직 갈등과 혼란의 세상 속에 있을 때 지금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선포할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시간과 범위 안에서 주님의 관리를 받고 그 시간이 끝나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불변의 진리를 분명히 인식할 때만이 두려운 것과 두렵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잃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영혼을 지니고 있을 때 만이 주님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하늘이 아직 밝게 빛날 때 실천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기회는 오직 한번 뿐입니다. 어리석은 처녀가 천국의 문 밖에서 슬피 탄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른 하인이 은화를 숨기고 슬피 우는 것처럼 기회를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진정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세상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단지 육체만 사라질 뿐, 영혼은 주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은 언젠가는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육체적인 고통 또한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두려운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의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 두려운 것입니까?
2. 믿음의 삶은 때로는 많은 것을 버리고 많은 불이익을 견뎌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3. 하느님의 충실한 자녀가 되기 위해 세상의 두려움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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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이영근 신부님.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은 연중 12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예레 20,11)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두려워함”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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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연중 1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두려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15,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10,31)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 때에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 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 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 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사람다운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당당하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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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연중 제12주일 : 가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그리스도 신자들은 신앙 때문에 자신의 생활 속에서 부딪치게 되는 어려움 내지 ‘박해’를 당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와 예언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대 받는 표적’이 되기도 한다. 예레미야도 설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위협을 받는 절망감을 제1독서는 표현하고 있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거센 반감이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신뢰를 잊지 않고 있다. 고통을 당하고 두려움에 싸이면서도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이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무한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상징적 형상’이 되었다.
복음: 마태 10,26-33: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도 ‘박해’가 주제이다. 그 박해는 사도들의 선교 사명에 따르는 박해임을 말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 박해는 사도들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띤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세 번씩이나 격려하신다(26.28.31절). 두려워한다는 것은 온 힘을 다하여 고백하여야 할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첫 번째 이유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26절)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있게 될 마지막 ‘심판’의 근거가 될 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32-33절).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대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참 생명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28절).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 언제나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한다. ‘승리’는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 그래서 자기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즉,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써”(10,39) 그 목숨을 “되찾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가 항상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한 닢”(29절)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의 운명도 그분의 보살핌에 있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보호해 주신다.’라는 의미보다도 당신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하시리라는 ‘약속’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경우처럼 당신을 온전히 아버지께 바치심으로써 구원과 증거의 힘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제 복음을 전파하는데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인간 법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변호사가 되거나, 때에 따라서는 고발자가 될 수도 있는 하느님의 마지막 법정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2-33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복음의 주인공이요, 복음의 대상이고 그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가치 기준’이 된다. 이제 교회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붕 위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두려움을 갖는다면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 교회도 세상도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는 무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독서: 로마 5,12-15: 은총의 경우와 죄의 경우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해야 한다. 죄가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은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에 대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잘 표현하고 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15절).
이러한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주기 위해 교회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구원의 선물을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떤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온 세상에 용기 있게 선포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섭리해 주시며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합당한 삶이 되도록 도와주심을 믿으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구원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구원받은 자의 체험적인 삶을 전할 수 있을 때 올바로 복음을,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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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연중 제1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8-31).”
두려움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죽음을(멸망을) 두려워하여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육신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든지 간에
누구에게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음은 일반적인 일이고 보편적인 일인데도,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는 것을 볼 때가 많기 때문이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은 일이기 때문이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고, 저쪽 세상의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재의식 속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4,18).
어떻든 죽음이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이 무서움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려면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요한 14,1), 회개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인데,
우리가 실천한 선행과 사랑을 아주 사소한 일까지 다 알고 계시고,
갚아 주신다는 뜻입니다(마태 6,4).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우리 자신은 잊어버리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라는 말씀에 연결되어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한 일들을 심판 때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서
억울한 심판을 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반대로 생각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참새보다 못한 처지가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27).”
언제인지는 몰라도 때가 되면,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가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누가 구원받을 선인인지, 누가 심판받을 악인인지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은 틀림없이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심하지 말고, 꾸준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선교활동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그 나라를 맞이하게 될 텐데,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충실하게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나라의 밖으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지역보다 더 먼 곳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마르 16,15).
이 말에 대해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라는 지시는 사도들에게만 하신
지시가 아닌가? 모든 신앙인이 다 선교활동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하는 것과 같은 선교활동을
모든 신앙인이 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는 말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평소의 삶으로도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곧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하고, 신앙의 증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산상 설교에 있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라.” 라는
말씀은(마태 5,13-16) 사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되어 있는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고백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이 증언과 고백은 말로 하는 것을 포함해서 ‘온 삶’으로 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입니다.
박해 때에는 붙잡혀 가서 재판관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없는 상황에서는 언제, 누가 보아도 신앙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고백이고 증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종교와 신앙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신원보증을 서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증을 서 주시니 심판의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
즉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고, 종교와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앙갚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멸망을 선택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마태 12,20)
예수님께서는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예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버리셔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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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연중 제12주간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마태오 가 병사들의 손에 순교를 당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두 가지 장면이 대비를 이룹니다.
한 장면에서는 포악한 병사가 마태오를 죽이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천사가 월계수를 마태오에게 건네고자 구름을 타고 내려옵니다.
한 그림 안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장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비참한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을 그린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신앙에 의하여 승리의 월계수가 주어지는 기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이라면, 다른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장면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겠습니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비극적 죽음이 전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압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치 씨앗이 땅에서 썩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씨앗이 죽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싹이 텄다.”라고 말하듯이, 비극적인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승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 속에서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도 많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드러내는 믿음에 기뻐하고 계심을 기억합시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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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새벽을 열며. 연중 제12주일. 빠다킹 신부님.
과거는 힘이 셉니다. 그래서 과거의 휘둘림에 한 대 맞으면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힘듭니다. 과거는 제자리에 있을 뿐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과거는 지금 현재에도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어쩌면 미래에도 그 힘의 위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4월 15일. 제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언젠가는 이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솔직히 어머니 잃은 슬픔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어떻게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됩니다.
분명 과거의 일회성 사건이지만, 지금도 그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어떤 쪽으로 그 힘을 발휘시키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글과 강의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언제나 제가 쓴 글을 읽으셨고, 이를 위해 컴퓨터도 스스로 독학하셨습니다. 이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이렇게 움직입니다. 또 자라고 변하고 몰라보게 달라집니다. 주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마음에 따라 움직이며 자라고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즉,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심판 날에 우리 의지의 숨겨진 양심이 드러날 것이고, 지금은 흐리게 보이는 것들이 모두에게 드러나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의 위협이나 모략 또는 그 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영혼이 없으면 죽고, 영혼은 하느님이 없으면 죽는다.’라는 성 아오스딩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육신의 죽음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죄를 슬퍼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귀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주님을 안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과거의 주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하느님 나라 초대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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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란 우연하거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순간에 오랜 노력과 의지의 결정체로 찾아오는 것(노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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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 들어간 학생이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던 독서실에서 적은 글입니다.
“독서실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한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내가 제일 공부를 잘하는데, 내가 제일 열심히 공부한다.”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제일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된 것이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 안에서도 적용됩니다. 제일 열심히 운동해서 운동을 잘하고, 제일 열심히 노래해서 노래를 잘하고, 제일 열심히 춤을 춰서 춤을 잘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는 열심히 해도 안 된다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분야일 수도 있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효율적인 요령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배움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우고 또 가르치면서 앎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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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연중 제12 주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 타임지에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의 부고 명단이 실렸습니다. 10만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고인들과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아직도 매일 확진자가 생기고 있고, 안타깝지만 사망자도 나오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사라지기를 기도합니다.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미국의 방송에서 한국의 외교부 장관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한국이 어떻게 코로나19를 잘 막아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한국의 외교부 장관은 3T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Test, Trace, Treatment"라고 하였습니다. 검사, 추적, 치료라고 하였습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증상이 시작되면 이미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범위한 검사가 필요합니다. 빠른 진단키트의 개발과 신속한 검사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하고, 자가 격리 시키는 것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확진자의 동선과 겹치는 지역에 있었다면 자발적인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지역 내 감염을 막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고, 자원 봉사자의 참여가 있었기에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사망자의 수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봉쇄와 단절, 폐쇄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때로 위기와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Lockdown(폐쇄)가 장기화 되면서 미사 없는 신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체 활동도 중단 되었습니다. 영상으로 미사를 보고 있습니다. 문자로 신자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기름이 없으면 달릴 수 없듯이, 공동체의 친교와 나눔이 없으면 신앙의 열기와 활력이 식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다행히 성당 문은 열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성체조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서와 신심서적을 가까이 하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부들은 교리와 신학을 수호하였습니다. 이단에 현혹되지 않도록 교회의 전통과 신앙의 진리를 지켜왔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엄청난 박해가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드러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박해는 점점 심해졌지만 신앙은 점점 뜨거워졌습니다. 한국교회도 박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교우촌을 만들었습니다. 사제를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를 만나면 공동체는 기뻐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103위 성인이 되었고, 124위 복자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시련과 갈등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함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께 의지하였고, 하느님께서 고난과 역경에서 구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시련과 갈등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더 강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갈등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때 일수록 더 굳게 하느님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걸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가엾이 여기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어 저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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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戰士
-두려워하지 마라, 함께하라, 선포하라-
“주여, 당신의 넓으신 자비로 나를 도우소서”
방금 부른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화답송 후렴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도움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온갖 불행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환한 두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늘 미소짓는 교황님 얼굴에 후덕해 보이는 중년 후반부의 여성이 함께 찍은 참 행복해 보이는 아름다운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그 유명한 인권 운동가였다 살해된 마르틴 루터 킹의 따님이었습니다. 머릿 기사의 제목은 그녀의 고백이었습니다.
“교황님과 내 아버지는 똑같은 꿈에서 일치되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마르틴 루터 킹,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들이자 성인들입니다. 늘 하느님을 꿈꿨던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행복했던 분들이며 이런 성인같은 분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은 서서히 실현되어 갑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 세상일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행복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습니다. 모든 불행과 혼란은 하느님 중심을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요 참행복의 원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참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가 54장, ‘주님은 나의 목자’는 언제 불러도 감미롭고 위로와 힘을 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나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
하느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의 묘비명 부탁에 지체없이 추천했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성구도 생각납니다. “잘 놀다 간다”라는 묘비명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니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깊은 안정과 평화가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요즘 같은 불확실한 삶은 더욱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합니다. 흡사 두려움에 포위되어 불안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같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바로 믿음 부족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믿음의 빛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여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박해 상황중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격려 말씀입니다만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지 마련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요 믿음의 기초입니다.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두려움, 즉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는 경건敬虔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할 때, 올바로 두려워할 때 세상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하느님 두려운줄 모르는 믿음 부재의 사람들이기에 생각없이 함부로 본능의 욕망대로 막 살기에 불행한 삶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참으로 하나하나 귀하게 살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사람들은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귀히 여깁니다. 참으로 주님께 청할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고통의 깊이는 믿음의 깊이입니다. 두려움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버텨낼 수 있는 깊은 믿음을 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넓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보십니다.
삶의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두려움의 고통의 깊이 없이는 믿음의 깊이도 없습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두려움과 고통을 믿음을 깊이하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하여 더욱 견고해 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둘째,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주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뒤에는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나 가까이 있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치유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이보다 더 좋은 말씀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저절로 힐링이요 안정과 평화의 행복한 삶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돌판에 세겨진 주님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께서 승천시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제 여섯째 숙부가 임종전 일주간 붙잡고 사신 말씀이요, 제가 고백성사때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자주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의 두려움과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면초가 상황중에 들려오는 “저기 마고로 비싸빔이 지나간다!”며 수군대른 말소리입니다. 마고로 비싸빔은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이요 적대자들이 예레미야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흡사 수난중인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통이 클수록 깊어지는 하느님 믿음의 크기와 깊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 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이렇게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온통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처분에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지혜입니다. 이런 고통의 심연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순경順境중에 찬미는 누구나 합니다. 이런 역경逆境중에도 불구하고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가 그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역경을 순경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참으로 불운을 행운으로, 운명을 바꾸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예레미야의 찬양이 심금을 울리는 감동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찬양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견고히 하며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더불어 영원한 동반자이자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지고 튼튼해 집니다.
셋째, “복음을 선포하라”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주님과의 관상은 복음 선포의 활동으로, 주님과의 친교는 선교활동으로 향할 때 더욱 견고해지는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끊임없이 바다향해 흐를 때 살아 있는 맑은 강이듯 끊임없이 복음 선포의 활동이 있을 때 더욱 깊어지는 관상의 친교요 더욱 견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우리 삶자체가 복음이, 복음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와 더불어 사라지는 무지의 두려움, 무지의 어둠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하느님의 나라가, 파스카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이 투명히 드러날수록 저절로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의 삶은 그대로 말과 글과 행동으로, 아니 우리 삶 전부로 주님을 증언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 때 알고 알 때 증언합니다. 과연 나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주님은 나를 얼마나 알고 있겠는지요.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영원한 도반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사랑과 앎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과 앎의 관계인지 깊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당대의 제자들도 모두 훌륭한 하느님의 전사들이었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영원한 현역의 죽어야 제대인 우리들입니다. 강론을 써가면서 새롭게 바뀐 강론 제목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모르지만 세월 흘러 나이들어갈수록 한결같은 삶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습니다. 절대 저절로 한결같은 삶이 아니라 갈수록 치열한 분투奮鬪의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중심의 확고한 믿음의 삶과 더불어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며 당부 말씀을 주십니다.
1.두려워하지 마라.
2.나와 함께 있어라.
3.복음을 선포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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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2주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이 말씀이 길지 않은 복음 대목 안에 세 차례나 반복됩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을 준비시키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일, 선하고 진실되고 바르고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늘 세상이 환영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얽히고설킨 관계 안에 이해관계 역시 복잡하게 엉켜있기 마련이라 아무리 훌륭하고 고귀한 가치가 있는 지향이라도 제 이익을 털끝만큼이라도 건드리면 순식간에 적으로 규정해 버리지요. 예수님과 당시 종교 지배층과의 관계가 그러했고, 구약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1독서는 그 대표적 목소리로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려줍니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예레 20,10).
믿었던 이가 맞서거나 등을 돌릴 때는 으레 그러던 자들이 그럴 때와 달리 마음이 쪼개지고 산산이 무너내립니다. 살면서 이런 일은 안 겪으면 참 좋겠지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물론 예수님도 아프게 받으셔야 했던 상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이기주의와 차별로 가득찬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을 살고 전하는 예언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이나 사도들, 순교자와 성인들의 공덕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따름은 바로 그 위험하고 고독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예레 20,11)
참담한 처지를 토로한 예레미야가 곧바로 주님께 신뢰를 고백하며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힘은 그 운명을 뼛속 깊이, 내장 속속들이까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송사는 인간이 맡지만, 예언자와 세상 사이의 송사는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예레 20,1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
이 증언은 잘 마련된 곳, 호의적인 군중 앞에서 준비된 내용을 선포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고사하고 말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 틈에서, 때로는 적대감과 시기심이 가득한 냉소적 눈빛 앞에서 말과 행동과 삶으로 표현되는 증언까지 포함하지요.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라는 증언은 소리를 넘어 온 존재로 발산하는 파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증인이 되고 사도가 되려는 삶은 번번히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에 대한 의식이, 주님 사랑으로 충만해 의기충전해서 달려나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기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여겨 지레 사랑의 실천을 포기하고 물러서지요.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하며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실존을 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의 순례길을 걷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선사하신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매일 넘어지고 주저앉는 죄스런 우리를 매일 일으켜 세웁니다.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외부적 악의 뿐만 아니라 내면의 어두움을 향해서도 유효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오히려 내편인 줄 알았던 자아 안에 스며든 실망과 좌절입니다.
제1독서와 화답송은 두려움 섞인 한탄에서 시작되어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반증하지요. 우리 머리카락 수까지 아시는 주님이 우리 곁에 힘센 용사처럼 현존하십니다. 우리 고통스런 외마디의 단 한 음절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귀기울이시는 분,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당신 부대에 다 담아두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시나요? 주님의 이 자상하고 든든한 격려로 위로받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다가오는 어둠에 힘내어 마주해도 좋습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우리 바로 곁에 계십니다. 이런 든든한 빽을 지니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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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2주일>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0,26)
오늘 복음(마태10,26-33)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험난한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이르신 말씀입니다.
요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워 두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며,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곧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로마14,17)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곧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1테살5,16-18)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간직해야 할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 곧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산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성심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히 내려진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달입니다.
'예수성심'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신 바로 그곳에서 흘러 나왔습니다.
예수성심이야 말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징표이며, 지금 여기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며 원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랑을 굳게 믿읍시다!
이 사랑을 바라봅시다!
이 사랑을 기억합시다!
이 사랑 안에 머뭅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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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2 주일]
예레미야 20,10-13
로마 5,12-15
마태오 10,26-33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다섯 곳에 모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파견설교’로 마태오 복음 10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두 제자를 발탁하심,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훈시 말씀,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 가족이 분열되리라는 말씀, 예수님 추종에 따른 보상.
연중 제12주일에 소개되고 있는 내용은 파견 설교 가운데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승의 생명은 죽일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만은 죽일 수 없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두가지 생명을 다 앗아가실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찮은 미물인 참새의 생명도 아끼고 돌보시는데, 참새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을 것 같으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처럼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작업은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골적인 박해자들과 냉랭한 반대자들,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자들에게 주님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때로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초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극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마태오 복음 10장 26~27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당당한 대세 종교이지, 캥기는 것이 많아 은밀히 집회를 여는
밀교(密敎)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메시지는 태양처럼 밝은 빛,모든 이의 시선을 끄는 생명이 약동하는 빛 안에서 전해집니다.
우리 집회는 비밀집회도 아니고 지하 운동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자신들 마음 속에만 깊이 간직하거나 은폐시켜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선포되어야 하고 내 삶을 통해 드러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쁜 메시지는 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손길 한번 닿지 않는 교회 도서관 먼지 낀 영성 서적 안에 잠자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거리에서 울려퍼져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서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복음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외쳐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자신의 뒤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나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데 열심이었는데, 이런 나를 향해 절대 그게 아니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오 복음 10장 30~31절)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입니다.
나 같은 인간, 하느님 안중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분께서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두셨답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만큼 하느님께서 내게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허물투성이뿐인 내 일생일지라도 그분께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것 같은 내 일상생활, 내 일거수일투족이 그분의 큰 관심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라고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소소한 일상생활 전체를 무심코 흘려보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가 아무리 무의미해보이고 암담해보일지라도 더 이상 막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에 보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영양가 있는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심기일전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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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2 주일]
예레미야 20,10-13
로마 5,12-15
마태오 10,26-33
‘아님 말구’ 정신으로 사랑하라!
누군가를 사랑하여 다가가 고백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고백이 거절당하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놓고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 군인이 있었습니다.
다녀와서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목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혼녀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약혼녀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
친구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약혼녀는 한없이 울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또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혼인식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혼인하는 사람은 발은 물론이요, 양손까지 절단된 퇴역군인이었던 것입니다.
두 다리가 절단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가가지 못한 이 군인은 얼마나 큰 후회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단 표현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또한 ‘아님 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를 그렇게 쓴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사랑이 집착이 되거나, 혹은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한마디 말도 못 붙이고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안 잡히는 물고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그물에 들어오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물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이유는 그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들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면 그물질은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데 우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멸망시켜도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혼까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두려움 없이 증언한다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님 말구!’ 정신입니다.
선교왕들은 다 이런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찬미 예수!”라고 인사합니다.
불교 손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며 한 해에 서른 명 정도를 선교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띠를 두르고 무작정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한 해에도 수백 명 선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인도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주저하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어떤 선교왕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여긴다고 합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찔러보는 것입니다.
안 익었으면 다음에 또 찔러본다는 마음으로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을 선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유튜브에도 가끔 ‘악성 댓글’을 달거나 ‘싫어요’를 누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왜 찾아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졌는데 호수의 물고기들이 다 그 그물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사실 ‘좋아요’, ‘싫어요’가 몇 개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러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악플을 다신 분이 있다면 읽어보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분을 더는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읽고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 반드시 거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님 말구!’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면 선포합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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