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선정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10편
아무島
이순희
강남역 네거리엔 인파가 넘실거린다
한 겨울 한파에도 리듬을 타듯
수많은 머리들이 물결처럼 밀리고 밀려간다
그 물결 속에
그녀
외로운 섬으로 떠 있다
사람들 몰려와 물거품인 듯
그 섬에 부딪히지만 거품은 이내 꺼지고 만다
누구도 오를 수 없는
그 섬
파도와 바람만이 스칠 뿐이다
철썩 철썩 인파가 그 섬을 치면
그녀의 울음이 바람에 실려 간다
지독한 외로움에
그 섬 자연을 닮아 스스로 그러하다는 듯
아무島라는 섬
홀로 그렇게 떠 있다
슬픔을 담는 그릇
정해영
겨울나무의
나뭇잎이 떨어지자 입이 없어 졌다
하고 싶은 말을 담아낼
그릇이 마땅치 않다
흘리거나 넘쳐버려서
주변을 어지럽히거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은
말이 아닌 말
크지도 작지도 않게
뜻이 잘 담기는 말의 그릇을 찾는다
나이테가 커지면서
안 보이던 슬픔이 보인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눈빛
눈빛으로 다 전할 수 없는
깊숙한 고백을
담아낼 용기가 없다
나무는 잎을 모두 떨어 뜨렸다
말이 사라졌다
슬픔을 담아낼 가장 든든한 그릇은
침묵이라고
나무는 적고 있다
서울쥐
김지명
세상이 차려준 식탁
모두 내 것이었다
K역에 사는 s쥐의 자질은 선택적 귀를 갖는 일
발소리 목소리 한창일 때 귀마개로 귀를 재우고
밤 깊으면 귓속의 작은 귀로 바깥을 바라보는
똑같은 구름이 평생 따라다녔다
똑같은 목에 신발을 매달고
5촉짜리 눈을 비벼 오늘의 냄새에 몰두한다
4-3구역에 떨어진 빵조각이 무성영화를 돌리고 있다
기분이 잠깐 지상의 비에 한눈을 판다
짝짝이 신발소리 하나 귀로 저물어 노래로 만들어질 때
못 보던 S쥐가 무대에 보이고
여유 한 점 쉬어가는 s쥐가 보인다
어둠을 나눠 쓰고 계절을 나눠 쓰는
울타리 많은 구역
어느 고운 손이 공양한 4-3구역의 양식을
덩치를 내세워 깃발을 세우는
어림없는 신념에 행진곡이 흐른다
빵 한조각의 결투는 세상의 전부였고
빵 한조각의 결투는 세상을 번복하지 못했다
서로의 얼굴을 베껴주는 스크린도어
어둠은 기억을 퍼 나르고
어둠은 기억을 헐어버리고
미세먼지와 마음먼지가 끓어 넘친
K역에 태풍처럼 공기를 재편할 듯
첫 전동열차가 엔딩 화면으로 들어온다
웃음의 잔치에 도착한 적 없는 s쥐
내 것 아닌 마음을 침대에 뉘고 있다
독살 *
최병근
서천군 장포리 바닷가
고기 잡는 독살님은
원시인처럼 바다를 지키고 계시지만
수억 년째 퍼담지 못한 바닷물을
하루 두 번 뻘밭으로 만든다는
지구와 달의 약속만 믿으며
바다를 훔치는 천하의 사기꾼이다
바닷물은 마른 적이 없었다며
철썩철썩 밀물 믿고 휩쓸려온 고기떼
때 놓친 자승자박으로 파닥거린다
돌그물에 걸려든 갯것들
썰물은 갯벌에 발자국 흐리며
잠잠히 멀어져 간다
바닷물로 사기 친 독살님은
시퍼런 바다가 두려운지
뻘밭에서 눈먼 고기만 잡는다
밀물 썰물 머물던 수제선이
드나들 시기를 출렁출렁 저울질하자
장포리 독살님이 넌지시 이르고 있다
나는 어느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 돌로 담을 쌓은 뒤 밀물과 썰물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어로 형태
너는 소아시아에서 왔다
장옥관
밤마다 차도르를 쓴 여인이 바구니 들고
내 침실에 들어섰다
너는 소아시아에서 왔다
너를 반으로 가르면 수줍게 드러나는
꽃,
피지 않은 게 아니라 감춘 것일까
꽃의 내향성,
벌 나비를 외면하고 제 내장을 파먹는 굶주린 개
개의 고환처럼 달라붙은 그 방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흰 피를 나르며 스스로의 일에 골몰하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거부하는
열매,
검붉거나 말랑하거나
끈적끈적한 흰 피
주름 많은 그 질에서 검은 씨앗
쏟아져 나온다, 눈이 부시다
눈망울
박형준
자전거도로 한복판 중앙선에
참새 한 마리 앉아 있다
바퀴에 날개 한쪽이 잘려서
날지도 못한 채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노란 중앙선엔
자전거도 넘나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지
몸을 떨며 앉아 있다
지나가는 소년 하나가
속도에만 관심있는 자전거와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로
손을 들고 나와 산책로의 속도를 잠시 늦춘다
중앙선으로 다가가 참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길가로 돌아와 풀숲에 내려놓는다
손바닥에 앉아
소년을 올려다보던 참새의 눈망울
손바닥의 참새를 내려다보던 소년의 눈망울
그 짧고 느린 시간 동안
산책로의 무표정한 속도들 사이로
섬 소리가 들리며 흘러가고 있다
모래 전야, 야전
정채원
까마귀가 파먹은 거북의 눈구멍
사이로 해가 지고 있다
가장 연한 부분이 가장 먼저
파먹힌다는데
후손을 남기기 위해
목숨 걸고 떼 지어 이동하는 홍게처럼
시간은 다리가 모자란다
백신이 없는 도시를 가시로 품고 있는
회오리 선인장은 울퉁불퉁 풍만하고
어미치타가 새끼에게
이미 죽은 먹이로
목을 조르는 연습을 시키는 동안
우리는 서로 리모컨을 차지하려고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세상을 제압하려고
품격의 무도를 배우던 사람들
공중 발차기를 하려던 사람들
나방은 경전 한 페이지에
날개가 끼여 말라죽었다
금빛 몸가루가 묻어 있는 곳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알 수 없다
바쁜 여름
박성우
상추 열댓 장 뜯고
열무 두어 포기 뽑아다 씻어
늦은 아침을 먹었다
사람이나 손수레만
건너다닐 수 있는
작은 다리에 걸터앉아
냇물과 먼 산을 바라보았다
발아래에서 올라오는
물소리는 세찼고
굽이 너머에 있는
먼 산은 멀리 있어 고요했다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는 하늘은 넓었고
산바람이 보들보들
불어오는 골짝은 좁았다
여름이 깊어질수록
밭고랑 풀은 수북해지고
산등성이 그늘은 짙어지겠지,
서둘러 해야 할 일과
어지간히 늦춰도 좋을 일을
하릴없이 구분해보다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왜가리를 올려다보았다
터널 속의 기린과 눈물이 마른 소녀들
조동범
어둡고 무서운 오늘밤을 생각한다
터널은 끝이고, 끝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불운은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미칠 것 같은 오늘밤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의 다리는 모두 끊어진 채 폭풍우를 기다리고 있다
터널 속의 기린을 본 적이 있는가
머리가 천정까지 닿을 듯 느리게 걷는 기린의 오늘밤은 그러나
터널 밖의 세상을 모른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기린은 천천히 어둠이 되어가며 큰 눈을 껌벅여 어둠을 거두어들이려 한다. 그러나
터널 속의 기린은 터널 속의 기린일 뿐이고
물러설 수 없는 벼랑은 터널의 출구에 비명처럼 버티고 서 있다
눈물이 마른 소녀들이 터널의 출구에서 벼랑과 기린과 오늘밤의 어둠을 통곡하지만,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오늘밤은
깊고 푸른 악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 한다.
마른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지나가면
세상은 경악을 거듭하며 불온한 소문을 웅성일 뿐이다
터널 속의 기린은 여전히 터널 속에 있고, 소녀들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지 못하며,
세상의 끝으로부터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고 믿고 있는 기린과
소녀들의 무서운 오늘밤은
추도할 수 없는 어젯밤이 되어
내일 밤의 마른번개를 향해 아득히 멀어져 갈 뿐이다.
어둡고 무서운 오늘밤을 생각한다
그것은 미칠 것 같은 오늘밤이고,
기린과 소녀는 세상의 끝을 향해 걸어 들어가며
모든 불행의 기원을 영원토록 복기하려 한다
조금녜와 동백
김 광 선
잠이 덜 깬 새벽 소변기 앞
아랫배까지 탱탱한 그 것을 애써 조준한다
새 학기 창문 너머로 동백꽃 활짝 핀
교내 화장실
열린 유리창 너머로 오줌줄기를 자랑하던
파도 끝자락 외딴섬 중학교
낄낄거리며 서로의 것을 확인하면서
동백꽃만 수줍어 괜스레 붉고
여울져 넘어가는 한 시절 바다는
청해호, 덕일호
섬 귀퉁이 돌아나가는 물굽이는 유행가로 번졌다
둥그런 여객선 꽁무니에 사무친
낭창낭창 섬 아낙 억센 허리처럼 가녀린
화전놀이 장고소리에 유행가 설던
동백꽃 붉은 가지는 한 잔 술에 얼근해서
물너울 넘어간 중선배만 기다렸지
애타게 섬이 붉은 조금녜들은
객선 밑바닥 삼등칸
아무렇게나 누워 지린 갯내로 서방 찾아갔다
동백 꿀 달디 단 지지리 가난은
*중선배: 안강망 어선
*조금녜: 안강망 어선이 조금이면 들어와 '간조'(급여)를 직접 받으러 여수 판장으로 남편을 찾아가던 뱃사람 여인들.
*청해호, 덕일호: 여수 나로도 거문도를 오가던 여객선 이름.
트랜서핑*
강서완
파도 위에서 파도를 포기할 순 없지
과속하는 이과수의 근육질, 덮쳐오는 하피이글의 매부리발톱, 두려워하지 마
모서리 범람하는 바코드, 분해되고 분절된 빛과 어둠의 부품들
보드를 던지고 머리를 감싸고 마음 하나 끌어안고 다 버려 봐
양극성을 달리는 펜듈럼, 훌라후프가 크게 돌아간다고 중심이 먼 건 아니지 화병과 항아리의 부피는 근육과 지방의 무게와는 다르지 파도가 죽었는지 중심이 살았는지
감각은 오랜 통증의 직관,
틈을 노려야 해 맑은 파편을 회오리치는 소주의 파랑, 한 잔 구름 기우는 그 순간 이글의 등에 올라타야 해
야호, 찬스야! 유리침엽수를 건너는 맑은 소리, 파란 파도가 말리면서 수억 물방울이 부딪히는 크리스털 코러스!
테두리 없는 이중거울 장식 없는 레코드, 사물과 그림자가 투명하게 피어나는
춤추는 네 안의 영토를 잊지 마 꽃피는 통증을 전적으로 믿어야 파도의 정면을 즐길 수 있어
균형을 고집하는 규칙과 숲의 깊은 군락 날개 달린 물고기 떼
끝없는 수평에 바람의 활을 켜고 죽음의 프레임을 탈주하는 꽃잎들
너머를 두려워하지 마 수백 번 넘어진 뒷모습을 들어 올린 거울만이 바다를 기록하지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하는
깃발의 춤 ‘is’ 모든 축배의 ‘is’
기울기울 걷던 아기 적부터 어린 서퍼에 집중해온 눈동자, 캄캄할 때 열리는 빛나는 고요를 너는 알지
*바딤 젤란드
나무가 무성하고 마음이 무성하고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고
황인찬
가로수는 병충해에 강한 것이 선택되고 여름에는 푸르고, 겨울에는 빛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가로수의 간격은 8m가 원칙이나 도심지는 6m로 한다
같은 노선에는 같은 가로수를 심어야 한다
─이게 가로수의 규칙이래
─그러면 저건 6m 간격이겠네
이제 우리가 마지막 사람이었다 불 꺼진 건물들 사이, 우리는 새벽의 벚나무 아래를 걷고 있었고, 어스름 속에서 벚꽃잎은 창백한 푸른 빛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가로수가 벚나무래
─벚나무도 가로수야?
너는 자꾸 어디서 들은 말을 주워섬겼다 밖으로 나가면 죽을 수도 있대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는 5층 높이래 휘발유 냄새를 좋아하면 기생충이 몸에 있는 거래
그런 말들이 우리를 지켜주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그 말들을 따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아침이 오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너무 고요했고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내가 마지막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도 꿈을 꾸면 끝없이 가로수가 늘어선 길 위에 서 있다 나무들은 어김없이 6m의 간격을 유지한 채로 영원히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