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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밭 연가 장미숙 작가 재 조명 / 민명자
실존의 계곡과 허공을 건너는 삶의 노래
―장미숙의 수필세계 / 민명자
1. 원류(原流)를 찾아서
삶을 인식하는 관점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살아가는 양태 또한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보편적인 인생행로가 물의 여정과도 닮았다. 먼 시원(始原)으로부터 길 떠나 세상의 온갖 지류와 몸 섞으며 졸졸 혹은 콸콸, 예측할 수 없는 길을 가는 물, 인간 삶도 그러하다. 한 생명 부여받고 세상에 태어나 운명의 물결에 떠밀려 이리저리 흐르면서 때로는 저음이나 고음 혹은 단음이나 장음으로, 고요나 격정 혹은 환희나 비창의 음조 따라 먼 길을 간다. 최초의 발원지를 모태로 하는 원류가 있되 이미 지나온 시간의 물길을 거슬러갈 수 없다. 그와 같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재구성하고 삶의 곡조를 그려내는 문자적 발현체가 곧 문학이다. 장르 특성상 실제체험의 유전인자를 가장 많이 지닌 수필에선 작가가 걸어온 삶의 결이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또한 수필 특유의 진솔한 매력이기도 하다.
장미숙 수필의 원류는 어디에 있을까. 작가가 『인간과문학』(2019. 가을)에 수록한 5편의 작품과 수필집 『고추밭 연가』(지식과 감성, 2017)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5편 중 「고추밭 연가」를 제외한 4편은 수필집에 수록되지 않은 신작이다. 이들 작품과 더불어 수필집을 살핌으로써 작가의 수필세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수필집에는 총 50편의 작품이 5부로 나뉘어 수록되었다. 그중에서 독자를 맞이하는 첫 작품이 바로 어머니에 대한 심상을 그린 「고추밭 연가」이며 표제작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무의식의 심층에 굳게 자리 잡은 어머니를 필두로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시공간에서 만난 여러 인물과 사물과 자연의 기표들이 실존과 이상의 경계를 표표히 넘나들며 수필의 큰 줄기를 이어간다. 이에 화관처럼 얹힌 다채로운 수상경력(2015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를 전후로 각종 문학상을 10여회 이상 수상)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치열함과 그 반영물인 수필에 대한 열정의 농도를 가늠케 한다.
수필집 ‘책머리’에서 장미숙이 인식하는 삶은 “하얀 도화지에 동그라미” 그리기이다. “삶의 동그라미는 탄생과 사멸이 만나야 완벽해진다”라는 것이 장미숙의 견해다. 한 인생이 끝나봐야 그 도형의 완성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직선적 시간관으로 보면 “동그라미의 끝은 사멸”이겠지만 순환적 시간관으로 보면 끝과 시작은 서로 맞물려 있다. 죽음과 재생 및 자기소멸과 갱신이 무한변화의 궤도 안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법칙 안에서 수필은 탄생한다. 주어진, 그리고 다가올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몸짓이다. 그냥 두면 무의미하게 사멸해갈 것들을 불러내 “생명을 불어넣어 꽃을 피우게 하는 일”이 바로 장미숙의 수필쓰기이다. 작가의 수필을 살핀다는 것은 그 기저에 자리 잡은 정신의 원류를 탐색하는 일이며, 그 세계로 함께 들어가 삶의 동질성을 체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2. 불안의 계곡, 허공 건너기
장미숙의 「불안에 대한 보고서」를 읽으며 문득 생각한다. 인간의 불안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개별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보자면 부(富)나 명예나 권력 등의 사다리에서 더 높은 곳을 차지하려는 상승욕구와 불투명한 미래가 결합한 산물이 곧 불안이라는 불청객이 아닐까싶다. 불안은 욕망의 친구다. 상승은커녕 추락의 위기감도 불안을 불러온다. 불안은 절망의 친구다. 자연의 질서 따라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천재지변이 없는 한 미래가 어느 정도 예측되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우리는 한치 앞의 일도 예측을 불허하는 ‘다변화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게다가 존재의 유한성도 한몫 거든다. 본원적이기에 피해가기 어려운 불안이다. 불완전하고 불평등한 인간의 내적·외적 조건, 죽음 앞에서의 무기력함과 고독 등이 불안을 만드는 복합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에 대한 보고서」는 제목이 시사하듯 불안에 대한 다각적 접근을 가능케 하는 텍스트이다. 이 글에서 불안은 두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일시적이며 해소 가능한 것, 지속적이며 해소가 요원한 것이다. 전자에는 치과에서의 체험이 담겼고, 후자에는 한 남자(남편)의 폭력적 행위가 개입된다. 미셸 푸코의 관점으로 보자면 치과에서 꼼짝없이 치아를 내맡긴 채 진료를 받는 환자와 그 구강을 통제하는 치과의사 사이에는 종속적인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은 불안감을 조성하지만 의료가 끝나면 해소된다. 그러나 이 수필의 남자가 여자에게 저지르는 폭력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남자의 “술 냄새, 광기 어린 눈빛, 거친 고함, 거대한 몸”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여자는 그가 귀가할 때쯤이면 전전긍긍, 여린 짐승처럼 몸을 웅크린다. 여자는 남자의 주취와 폭력 여하에 따라 무기력하게 복종하거나 평온과 불안 사이를 오간다. 악몽을 꾸는 듯한 삶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작가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신호불안”과 쇠렌 키르케고르의 “꿈을 꾸는, 상상하는 힘”을 상기한다. 작가가 이들 맥락을 어떻게 수용했는지, 단편적 언급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프로이트는 자아를 불안의 소재지로 보고 ‘현실적 불안, 신경증적 불안, 도덕적 불안’을 구분했으며, 불안이란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회피 혹은 방어 등으로 대처하려는 합목적적인 반작용으로써 발하는 위험신호라고 보았다. 한편 키르케코르가 말하는 ‘꿈을 꾸는 상태’란 타락하기 전의 아담처럼 주체와 객체 및 선악의 구별이 없는 순진무구의 상태다. 아직 각성하지 못한, 차이가 무화된 상태에서 누리는 평화와 안식이 있다. 그러나 선악과에 대한 금지명령은 오히려 자유의 가능성을 자각케 하고 이에 상응하는 의지적 결단 이행에 따르는 책임과 긴장은 불안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불안은 속박과 자유, 타락과 구원 사이에서 양의성을 지닌다. 그리고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상상이란 인식행위의 한 양상으로써 ‘자기반성’의 성격이 강하고 ‘변화와 가능성’에 방점이 찍힌다. 이는 현실적 자기와 이상적 자기를 연계하는 역동적 활동체로 자리매김 된다.
텍스트 상으로 보자면 「불안에 대한 보고서」에서 드러난 여성화자의 상상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반복된 체험이 불러오는 상상이며, 그러한 기억 이미지가 작동하여 또 닥칠지도 모를 비인간적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수반하는 상상이다. 키르케고르는 대상의 유무 여부에 따라 공포와 불안을 구별한다. 공포가 감정의 문제라면 불안은 존재론적이며 인간성 회복의 수단이 된다. 그렇게 보면 이 수필에선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공포와 더 가깝고 상상의 힘 또한 거리감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화자가 불안을 느낀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대로 머물 것인가,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날 열쇠를 찾아야 할 것인가. 그 선택은 실존의 문제이며, 내적 자유 획득을 향한 일보 전진이며,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려는 인식과 의지의 변증법적 종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불안의 심상과 연관하여 간과하기 어려운 작품이 또 있다. 수필집에 수록된 「허공(虛空)을 밟다」에는 어머니의 불안이 깊다. 작가는 남사당패의 공연을 보면서 어머니의 삶을 떠올린다.
어름사니는 밧줄을 밟고 있는 게 아니라, 밧줄을 잡은 듯 자유로운 몸짓으로 줄을 탄다. 두둥실 떠 있는 구름처럼 그녀는 허공에 길을 낸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길을 내는 어름사니의 몸짓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서려 있다.
…(중략)…
불안함과 초조가 달려들 때면 억지로라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꺼이꺼이 울지 못해 부르는 노래는 바람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허공을 떠돌았다. 지친 육체에 매달린 고단함을 떨쳐내기 위해 어깨를 들썩거릴 때, 어머니의 두 팔을 잡아준 건 비빌 곳 없는 허공이었다.
― 「허공(虛空)을 밟다」 부분
온몸으로 맞바람을 감당하며 외줄에서 춤추는 어름사니(남사당패에서 줄을 타는 줄꾼)의 몸짓이 어머니의 삶과 겹친다. 어머니는 어느 날, “막걸리 서너 잔에 흥타령을 풀어놓으시며 평생을 외줄 타는 심정으로 살아왔노라”고 하신다. 육신이 병든 아버지는 정신마저 피폐해져 어머니를 불안케 했다. 그렇다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외줄을 잘라버리거나 그 줄에서 내려올 수 없다. 이는 곧 추락이나 포기를 의미하니까. 긴 불면의 밤을 보내야하는 불안은 어머니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에게로 이어져 정신적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으로 남는다. 이는 반복강박을 수반한다.
위 두 편의 수필에서 여성이 겪는 불안의 중심에는 남편이라는 이름의 두 남성이 있다. 어머니의 남편, 여성화자의 남편이다. 한 집안의 가장이되 부재와 다름없는 상황에서 두 여인의 삶은 이들에게 철저히 종속된다. 외줄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불안에 대한 보고서」에서 화자는 자아를 객관화한다. 남자의 폭력이 줄어든 외적 조건이 불안 감소의 한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는 수동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여자’의 “평온함에 대한 간절함”과 “더 이상 엎드릴 수 없”다는 자각이 능동적 탈주에 요긴하다. 이러한 내적 변화를 바탕으로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리는 미세한 기운이 자아의 바닥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하여 불안에 지배당하며 페르소나로서 행복을 지어보이던 여자는 타인에게 눈을 돌릴 여유도 찾는다. 타인의 고독한 뒷모습에 위로의 눈길을 보내며 따듯한 미소로 다독일 수 있는 여유다. 이 수필에서 3인칭 화자의 설정은 감정과잉의 지양과 객관적 거리 유지에 유효하다.
「허공을 밟다」에서는 어떤가. 균형을 잘 잡는 것도 극복의 한 방법이다. 어머니는 “외줄에서 바로 서는 법을 온몸으로 터득”하며 “바람을 잡아 오히려 바람을 이용할 줄 알게 되기까지 위태로웠던 순간들을” 넘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머니 세대에선 가장의 몫을 대신하여 가정을 흔들림 없이 지키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에 비해 작가는 좀 더 적극적이다. 자신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불안을 떨쳐내며 “내 인생의 주체는 나”라는 주체의식과 각성으로 거듭난다. 불안 앞에서 늘 무릎을 꿇을 수만은 없다. “바람만이 위세를 떨치는 허공”에서 휘청대지 않으며 새 길을 내야한다. 불안한 공연을 아름답게 마친 후에야 외줄에서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도 작가는 ‘관객’으로서 거리를 유지한다. 《경북일보》 문학대전(2016) 금상 수상작답게 문학적 성취도도 높다.
어느 한 시대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때에 따라 변모하며 해당시대의 특징을 반영한다. 그러나 ‘불안’은 거의 전시대를 관통한다. 그 양태가 어떠하든, 삶이 지속되는 한 인간은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철학적 사유가 이로부터 파생한다. 예컨대 불안의 요인과 해법을 다각적으로 검토한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라고 했으며, 야망은 욕망으로 변주된다. 또한 평생 불안에 침잠했던 키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와 『불안의 개념』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후자의 저술에서는 전통적인 원죄설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불안과 접목하여 심리학적·인간학적으로 해명하면서 객관적 불안과 주관적 불안을 대별했다. 전자가 양적이라면 후자는 질적이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불안이란 ‘인간 실존의 특질’이며, ‘자유의 현기증’이며, ‘구원의 가능성’이다. 이외에도 키르케고르의 자장(磁場) 안에서 하이데거와 폴 틸리히가, 그밖에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불안을 주목하고 숫한 질문을 던진 것은 불안이 그만큼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인간 삶에 깊숙이 침투하여 있음을 방증한다.
예술가는 예술로써 불안을 응시한다. 에드바르 뭉크가 「절규」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까마귀가 있는 밀밭」에서 그러했듯, 예술은 불안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 화가는 선과 색채로, 음악가는 노래로, 문학인은 문자로써 불안을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함으로써 치유의 해방구를 마련한다. 장미숙의 「불안에 대한 보고서」나 「허공을 밟다」는 그러한 초극의 한 방편에 속한다.
3. 현실 읽기, 기호와 발화 방식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는가. 작가가 딛고 있는 시공간은 글의 내용과 성격을 가른다. 「빵님과 커피님」 「난타」 「칼」이 모두 동일공간에서 벌어진 예화를 소재로 전개된다. 작가의 일터, 프랜차이즈 빵집이다. 빵이란 무엇인가. 밥이며 실존의 기표다. 빵집은 작가가 일상에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중심공간이며 실존의 토대이며 글감을 건져 올리는 샘터다. 작가가 현재 한 수필잡지에 「빵, 그리고 사람들」을 연재하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단순한 체험서술로만 그친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세밀한 관찰과 개성적 의미화를 거쳐야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제 작가의 시선은 자아의 내면에서 외부로 확장되고 비판의식이 더해져 사회수필의 면모를 지닌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포착한 대상들을 기호로 삼아 기의를 확장하고 형상화한다. 그 과정에서 의미화 못지않게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 발화방식이다. 그중에도 알레고리나 비유 등은 형상화의 꽃이다.
「빵님과 커피님」은 제목에서 의도적으로 존칭 접미사 ‘-님’을 붙여 과잉 존칭의 세태를 희화적으로 풍자한다. 주체존칭 선어말어미 ‘-시-’는 상위자의 상태나 동작에 대한 존대를 표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만 요즘엔 사물에도 과도한 존칭이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다. 사물이 상위자로서 주체가 되는 것이다. 백화점에서 시작되었다 해서 ‘백화점 높임법’이라고도 하는 사물존칭은 단순한 어법의 문제를 넘어 사회문화현상과 대중심리를 반영한다. 빵집도 예외는 아니다. 빵은 졸지에 빵님이 되시어 “소보로 빵님께서 일찍 나가셔서” 팔 수 없고, “크림빵님께서 늦게 나오셔서” 팔 수 없고, 생크림이 많이 들어간 소보로빵님께서는 “뚱뚱해지셨”다고까지 한다. 빵님들이 “온종일 나오시고 들어가시고, 없으시고, 팔리시고, 망가지시고, 딱딱해지신다”는 대목에선 쓴웃음이 나는 한편 “삼십대 여사장”의 과잉 존대가 안쓰럽다.
이런 현상이 왜 생길까. 잘못된 표현인 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쓰거나, 알면서도 경쟁사회에서 서비스 정신으로 포장한 상업전략일 수도 있다. ‘고객은 왕’이라는 위계의식이 암묵적으로 작용하여 고객 입장에선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점원 입장에선 고객의 우월적 욕구를 충족해주려 과잉 굴신을 한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지만 은연중에 과공(過恭)이 아니면 결례(缺禮)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하는 수필이다.
「난타」에선 빵집이 난타공연의 무대가 된다. 방담(放談)의 북채로 두드리는 난타다. 그러니까 주연이나 조연이 따로 없고. 특별한 무대장치도 없는 빵집이 공연장이 된다. 빵 값 계산을 기세 좋게 나서서하는 사람이 입장권을 제공하는 셈이다. 첫 출연진인 “삼사십 대의 젊은 엄마들”의 북채에 제일 먼저 두드려 맞는 것은 학교다. 그 다음엔 선생님―친구 엄마―학원으로 이어지다가 ‘시’자 붙은 시부모, 시누이, 시동생 등이 줄줄이 끌려 나온다. 사물존칭의 ‘시’, 시댁의 ‘시’, 오나가나 ‘시’가 문제다. 그러나 시집살이는 옛말, 바야흐로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상위 시대에는 ‘시’쪽보다 ‘친정’쪽의 위상이 더 높다. “그녀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한껏 고조되는 순간이다. 이럴 때 악곡이 빠질 수 없다. 기운차고 명랑한 콘 브리오가 어울린다. “건강과 자식, 남편의 북을 두드리는” 중년 여인들, “울쌤 짱나!”를 외치는 여고생들도 출연진에 속한다. 남성들은 방담에서 부재중이다. 속성상 아무래도 여성들이 이 세상에 대고 할 말이 더 많은 듯하다.
작가는 관객이 되어 그녀들의 난타를 글로써 난타하고, 독자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생중계되는 난타공연의 2차 관객이 된다. “두드려라, 쳐라, 마음껏 발산하라.” 마당극 한 편을 보듯 풍자와 해학이 넘친다. 맛깔스런 문장과 비유가 독자를 흡인하면서 세상사 천태만상을 보여준다. 오늘도 어딘가에 공연자들이 모여 앉을 것이다. 인간사, 어디서든 연극무대다.
「칼」을 본다. 주제 천착이 깊다. 칼이라는 기표 하나로 이만한 의미를 끌어내려면 칼날처럼 예리한 관찰과 심층적 사유는 필수요건이다. 칼은 여러 종류가 있으며 선용과 악용으로 용도와 이미지가 달라지지만 이 글에서 소재로 삼은 것은 빵집에서 쓰는 조리 도구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다. 작가의 칼질이 예사롭지 않다. 묘기에 가까운 칼질의 묘사는 실제이되 암유다. 자를 것은 잘라내니 이지적이고, 잘린 재료들은 배합되니 조화를 돕는다. 공간과 대상이 확장되면서 칼의 가치도 달라진다. 내 집 부엌에서 가족을 위한 음식 만들기에 헌신하는 칼과 빵집에서 손님을 위한 샌드위치 만들기에 헌신하는 칼은 다르다. 후자의 칼질이 가치의 전환점을 통과해 삶의 기술이라는 새로운 영토에 안착할 때 독자의 눈은 빛난다. 적당한 칼질, 그것은 삶의 지혜가 된다. “차가움과 따스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칼은 ‘빵-노동-돈’의 고리에서 배고픈 이들의 육신과 정신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삶의 허기를 채워주는 매개체가 됨으로써 “행복 만들기에 동참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마음의 칼날을” 벼리는 기제로 선용될 때 칼은 삶의 운용(運用)과도 맥을 같이 한다.
온종일 서서 칼질을 하는 사이, 여러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칼이 춤을 추기 시작한 건, 재료만 봐도 모양을 가늠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손과 칼이 하나가 되었다.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가 완성될 때마다 마치 예술행위를 하듯 훔훔해졌다.
―「칼」 부분
이제 칼질은 노동행위에서 예술행위로 전환된다. 위 인용문에서 칼질은 단순히 샌드위치를 자르는 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칼질의 대상은 삶과 글로 환치 가능해진다. ‘칼이 춤추다―손과 칼이 하나가 되다―예술행위를 하듯 훔훔해졌다’로 이어지는 맥락은 장자(莊子)의 「포정해우(庖丁解牛)」를 연상케 한다. 장자가 요리사 정(丁)을 통해 말하는 것은 ‘기예(技藝)의 완성’과 ‘양생(養生)의 도(道)’이다. 포정이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자기 눈에 비친 것이 모두 소로 보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후엔 자신이 갈라낼 부분만 보이게 되었고, 소를 신기(神技)로 다룰 경지에 이르러서는 눈으로 보지 않는다. “눈·손·마음의 작용은 멈추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정기(精氣)의 영묘(靈妙)한 작용만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가 다 해체되고 만족스러운 경지에 이르러서야 칼을 깨끗이 닦아 제자리에 놓게 된다. 19년간 삼사천여 마리나 되는 소를 잡았지만 그의 칼은 이제 막 숫돌에 간 것처럼 날카롭다. 이 우화가 전하는 주제처럼, 삶을 운용하든 글을 쓰든 ‘기교를 초월한 신기(神技)’의 경지에 이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작가는 처음엔 “손이 달달” 떨렸다지만 “칼로 밥을 번지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손과 칼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장자의 도에까지 이르는 길은 지난하지만 추구하는 바는 유추할 수 있다. “기본 구성에 재료를 바꿔가며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칼질은 창작행위나 삶의 태도로 환치된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칼질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듯, 삶도 글도 벼리기에 따라 질적 차이가 난다.
「동전은 필요 없어요」는 수필집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눈길을 끈다. 작가는 하찮게 취급되는 동전에서 인간상을 끌어낸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에게 돈은 무한욕망이다. 그러나 동전만은 예외다. 손님들이 동전을 대하는 태도는 각양각색이다. 거스름 동전 몇 푼은 아예 손사래를 치며 놓고 가거나, 동전계산이 귀찮아 카드결제를 하거나, 돼지 저금통에 거스름 동전을 넣고 가기도 한다. 집에 있는 동전을 몽땅 가져와서 빵 값으로 내밀거나, 지갑 안에 있는 동전을 지폐로 바꿔가는 손님도 있다. 어린 아이들마저도 동전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작가는 동전들의 한숨소리를 듣는다. 작가에게 인격을 부여받은 동전이 나누는 대화에서 작가의 촉수가 반짝인다. 젊은 여자 하이힐 바닥에 붙은 껌을 떼려 더러운 신발바닥에 몸 바친 백 원짜리가 허탈하게 하소연하자 십 원짜리는 서랍 틈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며 몸을 부르르 떤다. 초등학생 손에서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오십 원짜리 동전도 서럽기는 매한가지다. 그나마 오백 원짜리는 좀 나은 편이다. 1966년생 십 원짜리, 1972년생 오십 원짜리, 1970년생 백 원짜리, 1982년생 오백 원짜리의 애환이 절절하다. 그런 와중에도 “몸에 흠집 하나 없이 잘 보관된 친구들은 동전 수집가들에게” 금수저 대접을 받는다. 동전세계에도 귀하신 몸의 자리는 따로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천덕꾸러기가 된 동전들의 푸념이 세태를 반영한다. 돈은 인간 삶의 편리를 위해 고안되었지만 오히려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나 돈에도 상하귀천이 있다. 돈은 돈이로되, 끝자리에 붙어 몇백 몇십 몇 원의 우수리로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동전들, 인간은 인간이로되 자본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우수리처럼 왜소해지는 인간들. 그 자화상이 닮았다. 그들도 한때는 존중받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제자리를 잃은 이 시대의 아웃사이더들이다. 작가가 더욱 우려하는 건 물신주의로 삭막한 세태풍조에 가려 뒷전으로 밀려나는 온정과 웃음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비판적 안목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알레고리를 비롯한 다양한 발화방식은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빵집은 작가 장미숙이 거쳐 가는 실존의 계곡 중 한 지점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만나는 제반 대상들은 현실을 읽는 기호로 작동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동전에서 사회상을 꿰뚫어본 심안이 예리하다.
4. 어머니의 생, 칸타빌레에서 칼마토까지
‘어머니는 마음의 고향’이란 말은 이미 낡은 비유가 되었지만 피해갈 수 없는 진리다. 누구의 가슴엔들 어머니가 살아 있지 않으랴. 사랑이나 그리움이 전부는 아니다. 회한이나 미움까지도, 어머니가 포섭하는 감성의 색깔은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그처럼 인간 심연을 지배하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그중에도 장미숙에게 각인된 어머니는 특별하다.
내게 어머니는 무조건 옳다. 앞뒤가 맞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얼토당토않은 일에 화를 내도 어머니는 내게 항상 옳다. 여태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머니의 희생을 진부한 언어, 신파적 표현으로 미화하고 싶진 않다. 진솔함으로 다가갈 수 있으면 어머니의 한(恨)을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 「동그라미를 그리다」(작가의 말) 부분
작가가 수필집 첫머리에서 어머니에 대해 밝힌 소회다. 「고추밭 연가」에서는 이러한 심상이 오롯이 드러난다. 이 수필에서 어머니는 색깔과 음조로 온다. 고추처럼 매운 인생을 살아낸 어머니 삶의 색조는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음조는 칸타빌레에서 칼마토로 펼쳐진다. 어머니에게도 한때는 미풍처럼, 노래하듯, 칸타빌레 같은 시절이 있었으리라. 열아홉 젊은 시절 한 남자의 아내가 되던 때의 삶은 ‘비바체처럼 빠르고 경쾌’했다. 그러나 그 남자가 병고를 겪으면서 삶의 곡조는 점차 ‘슬픈 라멘토소’로 이어지고 삶의 무게는 페산테처럼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세상의 거센 바람에 휘청거릴만했지만 어머니는 쓰러진 고춧대를 일으켜 세우듯 리솔루트의 창법으로 결연하게 맞서 삶을 푸르게 일구어냈다. 음표와 같은, 손수 거둬야 할 고춧대 같은 자식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에게 자식은 삶 그 자체이며 존재이유다. 한때 고된 노동의 땀방울이 프레스토와 스트린젠도의 속도로 어머니의 전신을 흠뻑 적셨지만, 이제 팔순을 넘긴 노모는 칼마토처럼 고요하고 조용한 생의 곡조를 따른다. 이렇듯 작가가 인식하는 생은 하나의 리듬이며 여러 곡조로 변주되는 악보다.
필자는 『젊은 수필』(문학나무, 2014) 선정 과정에서 장미숙의 작품을 평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선정된 작품이 「어깨」 「똬리」 「도라지 꽃」이었는데 그중에서 「어깨」 외의 두 작품이 어머니의 삶과 연관된다.
「똬리」에는 옛 여인들의 삶이 있되 그 중심은 어머니다. 똬리는 어머니의 삶을 반추하는 기제가 되고 “동그란 중심”으로 어머니의 삶과 등가를 이룬다. 가난한 종가의 종부로서 병든 남편과 세 딸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여인, 새참과 물동이는 물론 비린 생선대야를 이고 새벽 장까지 오가야 했던 어머니는 머리에서 똬리를 내려놓을 새가 없었다. 똬리가 여인의 삶을 머리에 이듯, 한 가정의 무게를 이고 살았던 어머니의 머리에 남은 “동그란 상처”는 작가에게 “핏빛 훈장”이자 “왕관”으로 각인된다. 똬리가 어머니 삶의 무게를 받쳐준 상징물이었듯, 어머니는 장미숙의 삶과 글을 받쳐주는 똬리와도 같다.
「도라지 꽃」에서는 어머니가 “푸른 눈물/푸른 멍/푸른 새벽”의 이미지로 파랗게 살아난다. 돌무더기 산밭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도라지꽃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가정을 일군 어머니는 강인하되, 지아비의 사랑을 갈구하며 작은 배려에 달뜰 줄도 아는 여린 여인의 면모를 지녔다. 작가는 “지구의 중심을 꽉 잡고 땅 속 깊숙이 제 몸을 비틀며 이어가는 도라지는 다름 아닌 어머니의 사랑을 닮아 있었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들 작품을 ‘무의식의 원형(原型, Archetype)’으로 분석했었다. “원형(圓形)은 많은 것을 상징한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는 시작과 끝이 없는 원의 형상으로서 영원성의 상징이다. 알[卵], 태양, 달, 바퀴, 지구가 둥글고 우주의 이치가 둥글다. 원은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이며 생성과 순환을 표상한다. 또한 원은 우리의 집단 무의식을 형성하는 원형(原型)으로서 어머니와 결부된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원형으로 살아있는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인 우주의 이치와 맞닿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고추밭 연가」에도 적용된다. 장미숙의 수필에서 어머니는 둥긂과 푸름, 무의식의 원형 및 대지 이미지와 상통한다. 이와 더불어 고추밭은 어머니가 살아낸 실존의 현장이며, 「고추밭 연가」는 고추농사를 짓 듯 자식을 길러내며 굴곡진 삶을 이겨낸 어머니가 부른 생의 찬가이며, 어머니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딸로서 작가가 바치는 연가이며 송가인 셈이다.
어머니는 장미숙의 수필집 도처에서 숨 쉰다. 모시를 삼거나 척박한 흙의 현장과 장터를 오가며 노동의 무게를 감당하는 어머니(「전짓다리」 「도라지꽃」 「참깨 한 알의 무게」 「똬리」), 유년의 추억 및 음식이미지와 함께하는 어머니(「토란, 동화를 꿈꾸게 하다」), 뚜껑이나 지붕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어머니(「뚜껑」 「지붕」), 고향집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 혹은 생성의 존재로서의 어머니(「고향집 지키는 절구통」 「바지랑대」 「순」) 등 다양한 모습으로 구현된다.
장미숙은 지면을 화폭삼아 색채 이미지도 자주 그려낸다. 그 으뜸은 푸른색이며, 이는 때에 따라 자연의 블루, 우울과 불안의 블루, 생명성과 희망의 블루 등으로 변용된다. 특히 어머니와 결합하는 푸른색은 자연이나 생명력의 상징과 가깝다. 「푸른 성지」에서 산의 색은 성지와도 같은 고향의 색, 자아를 일으키고 품어주는 색, “생명의 밑거름”이 되는 색을 표상한다.
5. 에필로그
장미숙은 생의 동그라미 어디쯤에 닿아 있을지 모를 한 자락에 서서, 과거라는 항아리에 봉인된 기억들을 끄집어내 볕을 쪼이고, 그 시공간과 함께한 존재들을 반추하며 현재를 돌아보고, 이를 토대삼아 미래를 꿈꾼다.
그 여정에서 내면의 깊은 불안을 내비친다. 이는 자전적 생애와 연관이 깊다. 살아간다는 건 불안의 계곡을 건너는 일이며 이쪽과 저쪽의 벼랑 끝 허공에 걸쳐진 외줄을 타는 것과도 같다. 누군가에게는 굵고 튼튼한 줄이, 누군가에겐 금방 끊어질 듯 가느다란 줄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거부할 수 없다. 줄이 팽팽하게 긴장감을 줄수록 탄력 있게 튀어 오를 수 있다는 건 아이러니지만, 그 줄이 어떤 것이든 온몸을 얹고 걸어야 한다. 관건은 불안을 어떻게 극복·승화하는가이다. 장미숙의 수필쓰기는 이처럼 자아를 억압하는 요소들을 해체하고 정화하여 주체적인 자기로 거듭나기 위한 몸짓의 일환이다.
점차 불안의 계곡을 통과한 작가는 또 하나 실존의 현장에 발을 담그고 있다. 작가는 일터에서 만나는 대상들을 기호화하여 세상을 읽어내며 개성적 발화로써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한편 소외된 존재에 대한 연민도 깊다. 주로 사회 저변에서 만나는 대상들이다. 이와 색깔은 다소 다르지만 가족서사에도 연민이 내재한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아내로서 남편을 혹은 어미로서 자식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담겨있다.
또 다른 특징은 음조와 색조 이미지를 자주 차용한다는 점이다. 여러 대상 중에도 가장 다성악적으로 변주되는 것은 어머니의 생이며 대지모성의 푸른색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은 “어떤 색”이고 “어떤 무늬”(「뜨개질」)일지 자문하며, “어두운 잿빛”에서 탈피하여 점차 “밝은 색”으로 나아간다. 한 코 한 코 고리를 만들고 이 색깔 저 색깔을 엮어 뜨개질을 하듯, 하루하루 시간의 고리를 잇고 다채로운 색으로 조화롭게 생의 무늬를 교직하여 인생이라는 대작을 완성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장미숙이 문자로 그려내는 삶의 노래, 수필의 인생 악장에는 어머니가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한다. 장미숙에게 어머니는 육신은 물론 세계의 원류이며, 일부이자 전부이며, 원심력이자 구심력이다. 여기에 고향과 실존의 현실이 그물코처럼 얽혀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어린 새가 어미 새가 되어 허공을 높이 날아오르듯, 지류를 흐르던 물줄기가 대해로 나아가듯, 수필의 지평을 무한 확장하는 일이다.
《계간수필》(수필), 《문학마당》(평론) 등단.
저서: 평론집 『김구용의 사상과 시의 지평』(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수필집 『새벽 한 조각』(현대수필문학상 수상)
공저 『언어의 화엄, 시의 영성』, 『주근옥의 문학 세계』, 『한국여류 수필선』(3인 공저, 일어판) 외 다수
문학박사,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문우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