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 백일법문 간경결제] 제7강 집중토론
성철선사상 집중토론문
▒ 목 차 ▒
■ 법맥과 인가의 문제를 통해 본 한국 선불교의 문제점
元鏡 (송광사 전통강원 학감) ▲ 위로
근본불교에서 聲聞들이 4념처관 등을 수행하여 깨닫는 순간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음을 스스로 안다고 하였다. 그런데 달마대사 이후 선종의 전등이 인가라는 형식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면 깨침에 있어서 自證과 印可[他證]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특히 선가에서 “깨달은 뒤에는 선지식의 인가가 필수조건이다”라 하여 인가는 성철선사가 보조스님을 비판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석존 열반 이후 마하가섭으로 법의 전등[법맥]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선가에서 만든 이야기에 불과하다. 달마대사 이전 석존의 직제자인 성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소위 ‘소승’들이었다. 그들은 아라한과를 얻어 성인의 반열에 들었기 때문에 自證이지 선가에서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전등록에서처럼 인가에 의한 법의 전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문의 전등인 印可는 달마대사 이후 중국선불교에서 새롭게 창안한 독특한 전법의 방식일뿐 인도불교에서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선가에서는 인가를 대단히 중요한 깨침의 검증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깨달은 경지에서는 이심전심으로 즉시 알아차리기 때문에 인가라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무심으로 알지만 잘못 깨친 사례를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런 방식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모른다. 또한 성철스님의 『한국불교의 법맥』에서도 같은 주장을 한다.
“불조의 혜명을 서로 잇는 인가(印可)와 전법(傳法)은 불법 문중의 생명선이다. 만약 각자가 깨달았다고 자처하면서 마음대로 출세한다면 그 진위를 가릴 길이 없다. 깨달은 뒤에는 선지식의 인가가 필수조건이다. <생략> 선문의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출세한 종사들은 모두가 인가를 얻어 법등을 서로 이은 것이다. <생략> 만약 마음대로 출세한다면 종문의 혼란을 초래하여 불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한편 북전의 『이부종륜론』등에서는 부파분열의 원인으로서 “대천의 5사”를 들고 있는데 바로 이것은 아라한의 깨달음에 관한 것이었다. 석존 열반 이후 1세기 이후에 아라한의 깨달음이 불교교단 안에서 증득의 문제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인가라는 검증의 과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인도불교에 있어서 깨달음은 자증의 방식을 채택하였다고 하겠다. 『4분율』에서도 <아라한과로서의 그 경지를> 깨닫지 못했는데도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여> 깨달았다고 말하면 대망어가 되어 4바라이죄를 범한다는 것으로 보아 인도에서 아라한과의 깨침은 자증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한편 인가와 관련하여 볼 때 성철스님의 선에서 간화선 참구를 통한 깨침의 검증은 두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즉 3관을 돌파하고 死中得活하여 확철대오한 후 선지식의 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3관은 스스로 검증할 수 있는 단계이지만 그 이후 확철대오한 것이 바른 깨침인가를 점검하여 인가를 받는 과정이 있음으로서 재차 깨침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착각도인을 예방하기 위하여 선가에서 스승없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제3강에서도 혜원스님은 “견성의 구경각은 ‘무념무심’이지만 수행자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三關’을 돌파해야 하며 오매일여의 공부가 성취되어야 ‘견성’이 되는 것이며, 이후 이를 점검받기 위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야 함이 필수조건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선종에서 법맥과 인가를 중요시 여기는 심리는 무엇일까.
*개별주제;
1. ‘사교입선’에 있어서 성철스님의 “교관”
성철스님께서 백일법문을 설하신 까닭은 ‘백일법문’을 통해 ‘중도사상’을 천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선가의 입장에서 선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중도의 법문’을 설한 것이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성철스님께서는 선수행자가 간화선을 실참하기 위한 기본요건으로서 백일법문을 통해 교[선]학적인 불교관[수행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강원과 같은 교육기관은 고려시대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서 강원의 수학기간이나 교과목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인 교육목적은 간화선을 실참하기 위한 예비 단계의 교육이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전통이다. 그래서 현재도 전통강원의 교과목이 선 일변도이다. 그러나 조계종이 선종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전통강원의 교과과목은 아주 잘 짜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강원 교육의 특징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불교사상사를 무시한 역사성이 없는 교육이라는 점이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이 강원교육과 같은 성격, 즉 사교입선의 의미에서 교학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을 때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제기해 본다. 첫째, 성철스님께서는 왜 기존 강원교과과정과 다른 입장에서 선수행을 하기 위한 예비과정을 제시하신 것일까. 만일 강원교과과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당신이 방장으로 주석하신 해인강원의 교과과정과 편제를 고치게 하실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중도사상을 통해 전 불교를 회통하고 통시적으로 불교사를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 강원교육에서 잘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부분임을 사실이다. 둘째, 성철스님께서는 당신의 상좌들에게 절대 강원을 가지 못하게 하시고 특별히 일본어를 공부하여 사교입선하기 위한 기초교육을 가르치셨다는데 그것이 일종의 영재교육인가, 아니면 전통교육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인가. 만일 전통강원의 교육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면 그에 대한 대안이 상좌교육에 나타난 방식인가. 강원교육의 현대화 방안을 위한 고민에서 백일법문, 또는 돈오돈수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2. 선종사에 있어서 청규의 문제
중국 선종의 초조를 달마대사로 보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중국 선종이 하나의 종파로서 실질적인 모습을 갖춘 것은 백장스님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백장청규의 편린의 유추해볼 수 있는 「선문규식」에 의하면 당시 선승들은 주로 율종사찰의 별원에 더불어 살며 율장에 의한 수행을 해오다가 재래의 제도가 선승들의 住持, 說法에 합당하지 못함을 인식하여 선승을 위한 전문수행도량인 총림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여기서 선종 제2의 율장인 청규가 나오게 된다. 다시 말하면 백장스님 이전에는 선승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기는 했어도 독립된 수행처가 없었는데 백장스님에 의해 별도의 수행 도량을 마련하고 선종 수행에 알맞은 청규를 마련하여 명실상부한 선종의 종파를 이룩하게 되었다는 점은 선종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 이후 시대에 따라서 청규는 조금씩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AD 1103년) 때 자각종색선사의 『선원청규』, 원(AD 1388년) 광희선사의 『칙수백장청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청규의 정신은 처음 백장청규에 보이는 수행자의 본분사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었는데 이후 그 정신이 많이 후퇴하여 『칙수백장청규』에서는 국가의 은혜를 갚는 일에 청규의 우선 순위를 두는 등 호국적인 청규로 의미가 쇠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백일법문이나 봉암사 결사를 통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할 점은 출가수행자의 본분을 철저히 자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만일 누구라도 수행자의 본분을 망각한다면 그 순간 출가 비구로서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현재 한국 불교의 문제점은 수행방법이나 주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의 본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서 발생되는 문제들이라고 하겠다. 80년대 잠시 성철스님에 의해 한국불교의 수행풍토가 형성되는가 싶더니 이후 종단은 거대한 종권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판 중심의 판도로 흘러가게 되었다. 현재 한국 조계종에 소속된 승려 개개인이 부처님의 근본정신인 번뇌를 멸진하여 깨달음을 추구하고[상구보리] 더불어 살아가는 대승보살의 모습[하화중생]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성철스님의 선사상에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제도 역시 돈오돈수의 선사상 못지않게 청규정신에 의한 청정수행가풍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 선불교의 법맥과 인가, 이대로 좋은가
각 묵(실상사 화림원) ▲ 위로
1. 공통주제:
교외별전을 주장하는 중국 선불교는 교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인가와 법맥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중국선종의 여러 문파에서는 사자상승의 법맥의 계보를 만드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법맥과 인가를 신주단지 모시듯 해왔다.
그러나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교단의 어떠한 지도자의 상승을 인정하지 않으셨으며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셨으며 법을 귀의처로 하라고 하셨다. 다음은 장부 대열반경(D16)과 상응부(S47:9)에 나타나는 관련 경문이다. 조금 상세하게 인용해본다.
아난다: 그래도 제게는 ‘세존께서는 비구승가에 대해서 아무런 말씀도 없으신 채로 반열반에 들지는 않으실 것이다’라는 안심이 있었습니다.
세존: 이제 그런데 아난다여 비구승가는 내게서 무엇을 바라는가? 아난이여 나에 의해서 법은 안과 밖이 없이 설해졌다. 아난이여 여래의 법들에는 스승의 주먹(āariyamuṭuc0ṭi, 師拳)과 같은 것은 없다. 아난이여 ‘나는 비구승가를 인도하리라’거나 ‘비구승가는 나의 지도를 받는다’라는 [이런 생각을 가진] 자는 비구상가에 대해서 남길 말이 있을 것이다. 아난이여 그러나 여래에게는 ‘나는 비구승가를 인도하리라’거나 ‘비구승가는 나의 지도를 받는다’라는 [그런 생각이] 없다. 그러니 비구승가에 대해서 남길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나는 아난이여 늙었고 나이 들었고 노년이 되었고 길의 끝에 다다랐고 나이는 찼고 내 나이가 80이 되었다.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으로 묵어가듯이 아난이여 여래의 몸도 그와 같이 가죽 끈으로 묵여서 간다고 여겨진다.
아난이여 여래가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오로지 느낌들을 소멸하여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를 증득하여 머물 때 그때에 여래의 몸은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이여 여기서 누구든지 내가 멸하고 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면서 공부짓는 자들은 누구든지 암흑의 앞에서 나의 [참다운] 비구들이 될 것이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분명히 스승의 주먹[師拳]이 없다고 하셨으며 자기자신과 법을 의지해서[自歸依 法歸依] 공부지어라고 말씀하셨다. 반면 중국 선불교는 인가를 중시해왔다. 교학을 무시 내지는 부정하는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입장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가이다. 저 학인이 화두를 타파했는지 아닌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는 객관적으로 없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기본종지로 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인가와 인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맥을 중시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특히 법맥을 계통 나열하여 한 종장의 권위를 확보하려 애쓰며 우리는 선종사를 통해서 이런 법통을 속가의 족보이상으로 중시여기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법맥이 끊어진 간화선은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힘들다는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조때 법통이 끊어졌음이 분명한 한국간화선이 그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방의 위빳사나에서는 인가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미얀마에서는 인물 중심의 수행 법통을 중시하지 않는다. 미얀마에서는 굳이 스승의 인가를 받지 않아도 빠알리 삼장과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의 여러 지침서 등이 빠알리어와 미얀마 말로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자신의 경지를 정확하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위빳사나 행자라면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간화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간화선의 권위의 원천인 인가해줄 사람이 없다는데서 찾아야할 것이다. 인가해줄 권위를 확보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간화선의 현실이다. 이제 대안을 찾아야한다. 간화선의 권위를 인가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 수밖에 없다. 인가의 법맥은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가라는 간화선의 권위를 강조하면 할수록 자기모순에 빠지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법체계를 세워야하며 법으로서 모든 판단의 근거를 삼아야한다. 부처님께서도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가대신에 법(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물․심의 현상이든)의 정확한 이해를 강조하는 위빳사나로부터 법체계화를 배워야할 것이다.(간화선과 위빳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서 발췌)
이런 의미에서 성철스님께서 주창하신 봉암사 결사를 “부처님 법대로 살자”라는 운동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유훈과도 일치하는 결사였다. 이제 한국불교는 더 이상 법맥과 인가에 목을 매달지 말고 어떤 것이 법인가를 두고 진지한 고뇌를 해야 할 것이다.
2. 개별 주제: 돈오돈수를 주창하는 간화선의 나아갈 길
돈오돈수를 주창하는 선종의 화두의 출발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근본 신조로 하고 있다. 그런 전제를 다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정이 화두의 출발이다. 무엇하나 전제를 둔다면 화두와는 십만 팔천리이고 간화선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모든 제한, 조건, 발상, 가정, 가설, 관념에서 일시에 초탈하고 초탈했다는 생각까지도 거부하는 게 간화선이다.『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초기 부처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산냐남 우빠로다나(sañuc0ñuc0āam uparodhana) ― 산냐들의 척파’라 할 수 있다.
여기 산냐로 표현된 것들이 바로 모든 제한, 조건, 가정, 가설, 관념, 경계이다. 이런 산냐의 척파를 고구정녕히 설하는 것이 선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이고『금강경』에서는 아뜨마산냐(āmāsamjñuc0ā) 즉, 我相(자아라는 산냐)을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궁극의 자아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그기에 몰입함을 근본으로 삼는 힌두 수행과는 출발부터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굳건히 서서 확철대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간화선의 태도는 직관적(intuitive)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무전제를 주창하는 한국 간화선에 문제가 있다면 ‘한국 간화선은 무아를 잊어버렸다’라는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간화선은 불교의 근본인 무아에 바탕한 무전제의 수행이다. 부처님 원음은 무아에 바탕한 사제․팔정도․12연기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간화선 수행을 하는 자는 먼저 이런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을 깊이 사유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야하고 그것을 내 중노릇과 수행에 적용시켜야할 것이다.(이상 간화선과 위빳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서 옮김)
요즘 교계에서 간화선 수행의 지침서를 만들기에 분주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간화선 지침서는 이미 나와 있다. 강원에서 배우는 서장과 선요를 위시한 옛 조사스님들의 어록에 구구절절이 적혀있는 간절한 말씀이 바로 지침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새로운 지침서를 요구한다. 이러한 옛 스님들의 어록으로는 화두에 대한 의정이 돈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납자에게는 옛 조사어록만으로는 해소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옛 스님들의 어록만으로 화두에 대한 의정을 일으키지 못할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에 태어나서 현대문물을 접하고 현대식 교육을 받고 출가한 요즘출가자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옛 스님들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특징을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현대를 특징짓는 키워드를 하나로 들라면 역시 과학일 것이다. 과학은 인문/사회/자연/공학 등 제분야를 총괄하는 방법론이며 과학이야말로 현대인이 만들어낸 최고의 종교라고 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뭐냐는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과학은 분명히 분석을 그 토대로 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교육과 가치는 분석에 토대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미디어가 제시하는 정치/경제/문화/사회의 제 현상에 대한 분석을 접하면서 그것을 토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분석을 집행하는 도구는 수학이고 그래서 수학공부는 초등학교 때부터 강조되고 있다.
불교는 애초부터 분석적이다. 그래서 서양 불교학자나 불교 지도자들은 불교를 religion이라 부르기를 거부하고 불교는 science라고 강조한다. 불교는 이런 분석적인 도구를 가지고 세상과 특히 나라는 존재를 분석해서 제시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으며 그것은 사건(samaya, event)의 흐름(santati, dhāa)일 뿐이라고 강조하며 그래서 갈애를 일으킬 이유도 필요도 없으며 그런 갈애가 해소된 평화로운 상태(열반)가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8정도를 말씀하셨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법을 봐서 즉 법(5온, 12처, 18계, 4제, 12연기, 37조도품 등)의 무상/고/무아의 성질/특징을 꿰뚫어 봐서(견) 해탈/열반을 성취한다고 강조하고 계신다.
이런 분석적인 입장을 더욱더 심화시켜 철저하게 밀고 간 것이 아비담마/아비달마이다. 특히 아비담마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아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드디어 그런 나의 삶이라는 사건의 최소단위로 찰나(khaṇ/kṣṇ)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찰나의 구조를 연기(조건, paccaya)와 더불어 심도 깊게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무아와 연기를 확인한다.
소납은 분석적인 교육과 분석적인 사유체계를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자란 현대의 수행자들이 이런 불교의 분석적인 입장을 제대로 이해할 때 화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참구의 길이 열린다고 감히 강조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화두 수행은 대아/진아/불성/여래장/주인공을 설정하고 그것을 참구해 들어가는 힌두/우빠니샤드적인 외도선이 되고야만다고 역설한다. 간화선에 대한 어떤 지침서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더라도 법과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분석적인 이해를 하지 못하면 그것은 휴지조각에 불과할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물심의 현상(dhamma, 法)을 분석해서 제법의 찰나성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법무아를 확인할 때 우리는 화두를 보게 되고 법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먼저 이런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불교의 분석적 태도를 받아들여 무상과 무아를 철저히 이해해야한다. 그렇게 될 때 무전제를 표방하는 간화선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간화선은 아뜨만/진아/대아/불성/여래장/주인공을 찾는 외도선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제언하면서 소납의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 짓는다..
■ 선종의 조통설에 대하여
법공 스님 ▲ 위로
저 번 주에서 넘어온 테-마는 성철스님 (이후, 존칭생략)의 보조지눌에 대한 법의 계보가 없다 (임제의 적손이 아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는데, 오늘 이 시간은 그 法統(祖統)이란 것의 연원을 살펴보는 것으로 한다.
먼저 언급하고 넘어 갈 일은, 오늘 논쟁을 할 부분들이 성철을 비방하는 것도 아니고 더 더욱 선을 정진하고 있는 참선 납자들의 정진력을 해태 시키기 위함 (화두가 옳지 않다거나, 선이 시대에 맞지 않다거나 하는 등)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 다만 그 목표는 오늘날 우리의 머리 속에 깊게 입력되고 있는 선종사의 여러 문제들이 그 허구성이 심하여 그 베일을 밝혀서 그러한 문제점들의 논란만 일삼고 있는 현실의 각성과, 그 것에서 발전하여 앞으로의 문제로 나아가야 함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또 하나 밝혀 둘 것은, 조통설에 관한 학설(사실은 신회의 연구)은, 이미 1920년대부터, 중국학자 胡適, 楊 鴻飛, 楊 曾文 등에 의해 그 선두가 점유되었고, 이후 일본의 柳田聖山, 小川 隆, 田中良昭 등의 학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실정이나, 유독 한국에서 만이 이러한 실정에 눈이 어두운 것은 한국불교의 학문을 등한시하고 깨달음 안일주의로서의 선 풍토가 이러한 무지를 낳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하 위의 학설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자.
그러면 제일 궁금한 것은 역시, 이러한 전법계보의 법통설은 누가 먼저 제기하고 나섰는가? 라고 하는 것이다. 그 점을 호적의『하택대사신회전』을 토대로 알아보기로 하자.
신회의 활대의 법회에서, 숭원법사는
“唐國에 있어서 보리달마를 이미 그 처음이라고 한다면, 그는 西國에 있어서는 누구의 뒤를 이었는가? 또 몇 대를 경유하였는가.” <이하『신회어록제3권』>
이러한 엉터리 질문(당시에는,달마이후부터 신수까지의 계보뿐이 없었기 때문)에 신회는 대담하게도 잘못된 대답을 한다. 즉,
“보리달마는 제8대이다…uc0…여래의 서국과 당국으로 부터의 경유는 총 13대가 된다.”
숭원은 다시 묻기를,
“어디에 의거하여 보리달마의 서국 제8대라고 하는 것을 아는가?”
신회 답하기를,
“『禪經序』에 의하면, 서국의 代數를 알 수있다.”
라고 이야기하나, 여기에서 신회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禪經序』라 함은, 東晉의 구나발타라가 역출한 達摩多羅와 佛大先의 共著인 『수행방편론』으로서, 일반에『禪經』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불멸도 이후로부터, 존자대가섭, 존자아란, 존자末田地, 존자舍那婆斯, 존자우바굴,존자바수밀, 존자승가라차, 존자달마다라, 내지 존자불야밀다라 까지로 법을 호지하는이는 이 慧燈으로서 차제로 전수한다.”
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그러나 신회는 범문을 해석 못하고, 역사를 조사하지도 않고 達摩多羅를 그냥 菩提達摩로 보아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달마다라는 東晉(297~401)의 사람으로, 『禪經』도 그 때에 이미 출간 되었던 것인데, 어쨌든 그는 보리달마보다도 훨씬 더 옛날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회의 더 참기 힘든 잘못은, 사람들이 그를 괴이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걱정해 惠可가 보리달마 자신에게 이것을 물었다고 하는 신화까지 꾸며내는 의도적 거짓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당시의 화상들이 대체로 범문을 해석치 못하고, 역사도 조사치 않는 자가 많았고, 인쇄술이 없어 서적의 펴 냄이 어렵고, 고증이나 교감의 학문도 없었기 때문이어서, 신회가 달마다라를 보리달마로 바꿔 친 데에 대한 당시의 반론은 말할 것도 없고, 천 여년이 지나기까지 이것을 괴이하게 생각하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돈황의 사본에 가끔 [보리달마다라]라고 쓴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로부터 천 여년이 지나기까지 겨우 8대를 지났다는 것은, 신회로부터 그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북종에서는 이러한 설을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東都淨覺의 7대설이 『능엄경』의 역자인 구나발타라를 제1조로하고 보리달마를 제2조로 한 정도로, 구 외에 대부분의 북종화상은, 6대설을 고수하여 달마이전의 계보를 문제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남종에서는 自宗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 저것의 달마이전의 계보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대개『付法藏傳』을 근거로 한 것으로, 23대설, 24대설,25,28,29대설 등도 있으나, 唐 碑文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설들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僧祐의 <출삼장기>중의 살바다부의 계보에 의하면, 51대설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8대설은 너무 적고, 51대설은 너무 많아, 후에는 점차 28대설로 귀착된 것이다.
이러한 28대설도 아마 신회의 주장으로서, 신회의 만년 때 일어나, 활대에서 제창한 8대설과 후에 바꿔 친 것일 것이다. 이것을 신회의 주장이라고 한데에는 2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 첫째만 들어보면 돈황사본의『육조단경』이 신회 일파의 손에 의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이며, 그 책의 말미에 이미 40대설이 나타나있다. 거기에는 처음에 7불이 있어 여래는 제7대가 되며, 師子가 제20대, 달마가 제35대, 혜능이 제40대로 되어있다.이 가운데 여래로부터 달마까지 합계29대, 거기서 傍系의 末田地를 제외하면 바로 28대설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로 해서 28대설이 신회 일파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믿는 것이다.
어쨌든 돈황의 석실에는 최고의 8대설이 보존되어져, 우리들은 이러한 조통설의 변천사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태종의 지의는 (혜문-혜사-지의: 원래 남악일파는 9師 相承설이 있었다) 自宗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付法藏傳』을 채용하여 혜문을 용수에게 직결시켜, 「용수는 高祖師」라 인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천태종의 법통을 형성한 역사인데, 후의 신수일파의 6대의 법통이나, 남종의 8대설, 28대설 등은, 천태의 법통을 정한 지의를 답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태종에서 일찍이 『付法藏傳』을 채용했기 때문에 남종도 이 책을 채용하여, 自派의 근거로 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신회의 이러한 주장보다 한발 앞선 이는, 북종의 신수의 제자인 普寂이다.
원래 같은 종파(북종)에 있던 普寂은, 숭산 숭악사에서 신수의 제를 지내고, 신수를 제6조, 자기를 제7조로 하는 다음과 같은 법계를 주장했다.
“달마보살은 可에게 전하고, 可는 璨에게 付하고, 璨은 信에게 내리고, 信은 忍에게 의뢰하고, 忍은 秀에게 보내고, 秀는 지금의 화상 寂에게 부여했다.” <『全唐文』권263>
이에 대하여 신회는,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 P291>에서,
“지금 보적선사는 자칭해서 제7대라 하여, 거짓으로 秀화상을 세워 제6대로 한다”
라 비판하여, 그 유명한 법계를 주장하는 것이다. 즉, <上同의 p 263>에서,
“달마는 한장의 가사를 전해 법의 信으로서 惠可…uc0…弘忍은 慧能에게 전하여, 6대의 相承은 連綿해서 끊어지지 않는다.”
신회의 궁극적 최종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慧能을 제6조로 하는 법계의 공인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후의 전통적인 선종사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여러 설화나 교의, 즉 예를 들면, 달마와 양 무제와의 문답, 傳衣付法說, 西天祖統說, 頓悟의 교의라고 하는 것도 본래는 이 한 점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신회는 이러한 법회를 열은 것만이 아니고, 이 것을 계기로 하여, 많은 귀족관료와 만나, 자기의 신사상을 정력적으로 설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은 당대의 시인으로 유명한 王維로서 그 역사적 입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신회의 주장에 그 문하내지 法嗣인 乘廣, 慧堅의 견해를 보면, 승광은,
“機에는 깊고 얕음 있으나, 법에는 높낮이가 없네. 2종을 가름은, 중생과 돈점의 見을 있게 하네. 3승을 설함은, 여래 방편을 여는 것 뿐. 名은 밖으로부터 얻음으로 분별을 생기게 하고, 道는 안으로부터 證하기 때문에 異同이 없네 ”
라, 하여 돈점을 기준으로 남북 양종을 대립시킨 신회의 입장을 부정한데 반하여, 혜견은, (혜능- 신회- 혜견)이라고 하는 도식을 주장하며, 신회를 “第7祖”로 하고 있으면서도, <唐故招聖師大德慧堅禪師碑>에 의하면,
“소를 올려 모든 장로와 불법의 邪正을 논해, 남북 양종을 정하며…開示 때에는 頓受로 해서 漸이 아니며, 수행의 때는 漸淨으로 해서 頓이 아니네. 法空을 안즉 법에 邪正없고, 宗統을 깨달은즉 宗에 南北 없네. 분별을 해서 실체 없게 하지 않기를 ”
이라고 하여, 신회의 법통투쟁에 비판하는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대충 이렇게 하여 법계내지 조통설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훑어 보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코 실다운 내용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을 익히 알았다. 한마디로 법계내지 법맥 운운하는 것은 유교,도교의 사상을 받은 것이었으며, 또한 조통설은 신회의 작품으로 그가 신수의 嗣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북종을 공격해 남종선을 창출하여 선종 정통설을 지어내 이른바 혁명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이미 지난 주에 말 한 바이다.
법계운운의 조통설을 경제적 측면에서 고찰하여 본다면, 이것은 당시대의 불교가 사원경제의 발전에 의해 재산계승의 문제가 발생한 결과, 문벌귀족의 宗法制度를 채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승가에서도 적용되어, 아버지와 아들의 이어짐이 곧바로 스승과 제자의 이어짐 으로서 활용되어, 僧傳에서는 法裔, 法嗣 등의 말이 사용되었다. 때문에 이것은 분명히 당시대의 세속지주의 종법제도가 불교의 제 종파에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로서 살펴보는 것에 한하여 이해를 돕는 선에서 그칠 일이지, 돈오나 법계에 연연한다거나 고집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볼 때 사상의 흐름과 정보에 어두운 어리석음을 범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원효, 의상, 또한 보조등이 스스로 법계에 대해 운운하지 않았던 것은, 어찌 보면 중국불교의 이러한 실체가 없는 허상을 미리 철두철미 하게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일이천 여년의 흐름, 그것도 타국의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사상을 똑 바로 파악한다는 것은 힘드는 일이다. 외람된 말 일지는 몰라도 이러한 의미에서 똑바로 보지(正見) 못하면 이것이 바로 외도이고 사도이지 별 다로 외도며 사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목련이나, 가섭, 사리불이 석가모니부처님을 만나 비로서 정법의 길을 접어든 것처럼 올바로 보고 올바로 사념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 위로
[출처: 초기불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