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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불교를 배우고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우리에게 필요한 바른 이치를 말씀 해 주시고, 윤회를 믿고 부처님의 연기법, 인과법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붓따같은 선정수행을 하신 분들은 분명 선정 중에는 높은 경지까지 올라가셨는데, 깨어나면 일상생활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럼 사후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시는 겁니까? 윤회를 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이 자리가 극락인지 지옥인지가 중요한 것은 맞는데 교리적으로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궁금한 것은, 부처님이 스승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붓따의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이 답이 아닌 것 같으시다고 스승님들을 떠나 고행을 하셨고, 고행도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때 다시 고행을 버리고 선정에 드셔서 중도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경지가 사선삼명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그 경지는 부처님이 농경제 때 들어갔던 선정의 경지와 스승님들에게 배운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본 것으로는 부처님이 농경제에 염부수 아래서 선정을 드신 것은 깊은 명상인 것은 맞지만 명상의 초입 부분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고, 스승 알라라 깔라마의 무소유처정과 웃다까 라마붓따의 비상비비상처정의 경지는 깊은 삼매, 높은 경지는 맞는데 보리(지혜)는 없는 일반적인 (아주깊은) 마음집중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봤구요,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때 하신 선정(명상)은 마음의 번뇌를 모두 제거하시고 사성제를 아시고 연기를 깨달으신 보리(지혜)가 있다는 차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열반하면 부처가 되는 경지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공부하다 보니 열반은 아라한의 경지도 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번뇌의 불을 끈 열반의 경지가 아라한인데, 초기경전을 읽어보면 부처님 당시에 출가하신 분 들은 대부분 아라한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구요, 아라한이라면 모든 번뇌를 끄신 분들인데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아라한이 되시고도 두타행을 수행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라한들도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라한이 되신 분 중에서 두타행을 계속하시는 분은 아라한이 아닌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라한이 되셔서 문제(?)를 일으키는 아라한들도 모두 윤회를 벗어나신 겁니까? 수업 중 자살을 한 아라한에 대한 말씀 하셨을 때 ‘자살한 아라한은 마라의 손아귀를 벗어났다’라고 하신 것 같은데, 그럼 아라한이 되고나면 잘잘못을 떠나 윤회를 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답변입니다. 질문을 한 단락씩 옮기면서 답을 달겠습니다.
제가 불교를 배우고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우리에게 필요한 바른 이치를 말씀 해 주시고, 윤회를 믿고 부처님의 연기법, 인과법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붓따같은 선정수행을 하신 분들은 분명 선정 중에는 높은 경지까지 올라가셨는데, 깨어나면 일상생활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럼 사후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시는 겁니까? 윤회를 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이 자리가 극락인지 지옥인지가 중요한 것은 맞는데 교리적으로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삼계 또는 육도 윤회의 세계 가운데 이곳은 인간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계에서 살더라도 알라라 깔라마나 웃다까 라마뿟따와 같이 선정 중에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몸은 인간이지만, 그 마음은 높은 선정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입니다.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 모두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기 전의 스승으로, 알라라 깔라마는 성도하시기 전의 부처님, 즉 싯다르타 태자께 무소유처정(무소유삼매)를 가르치셨고, 웃다까 라마뿟따는 비상비비상처정(비상비비상삼매)를 가르치셨습니다. 무소유삼매(無所有三昧)는 객관인 허공과 주관인 식(識)이 모두 끊어진 삼매로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다는 점(무소유)을 자각하는 삼매입니다. 이 상태에서 더 정신을 집중하면 비상비비상삼매(非想非非想三昧)로 올라가는데, 이는 아무 것도 없다(무소유)는 생각은 사라졌지만(비상),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비비상) 삼매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께서는 이런 삼매의 경지를 곧 체득하셨지만, 삼매에서 깨어나면 다시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에 이들 수행이 번뇌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점을 아시고, 이들 스승에게서 떠나서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고행에 전념하셨는데, 고행 역시 번뇌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점을 아시자, 고행 역시 버리고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 홀로 앉으셔서 선 수행에 들어가 궁극적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질문에서 알라라 깔라마나 웃다까 라마뿟따와 같이 높은 삼매의 경지를 체득한 분들은 사후에 어디로 가는 건지? 물었는데, 이들이 체득한 선정의 하늘나라(천상)에 머물게 됩니다. 알라라 깔라마의 경우 무소유처천(無所有三昧處天)에 머물고, 웃다까 라마뿟따는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에 머뭅니다. 이 두 곳 모두 삼계 가운데 무색계의 천상에 속합니다. 천상(天上)이라고 표현했지만, '삼매의 경지'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또, '머문다'거나 '간다'는 표현을 썼지만, 무색계 천상은 물질(色)이 없는(無) 곳이기에 이 우주 상에서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이들 수행자가 체득한 삼매의 경지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무소유삼매를 체득하면, 죽은 후 몸은 사라지고 6만 대겁 동안 그 마음이 무소유삼매의 상태에 머뭅니다. 비상비비상삼매를 체득한 사람은 죽은 후 그 몸은 사라지고 그 마음이 8만 대겁 동안 비상비비상삼매의 상태에 머뭅니다. 이들 삼매의 경지는 삼매를 체득한 수행자 홀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6만 대겁(무소유처천) 또는 8만 대겁(비상비비상처천)의 수명이 다하면 다시 색계나 욕계의 아래 세계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삼매의 세계인 무색계도 윤회의 세계일 뿐입니다. 무색계 천상에 태어나면 2만~8만 대겁 동안 그 경지에 머물러있어야 하기에 '하늘에 있는 감옥'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불교 수행할 기회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같이 삼매만 추구하면 불교가 아닙니다. 정신 집중을 의미하는 삼매에 연기와 공성의 지혜가 수반되어야 불교수행입니다.
참고로 삼계 내 천상에서의 수명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습니다.
여기서 보듯이 천신들 가운데 가장 수명이 짧은 사대왕중천의 천신(사찰 입구 천왕문의 사천왕)의 경우에도 그 수명이 9백만 년입니다. 괄호 속의 수명은 물리적 시간이고, 천신 자신은 500년으로 느낀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영원한 곳이 아니며, 무상한 윤회의 세계일 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궁금한 것은, 부처님이 스승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붓따의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이 답이 아닌 것 같으시다고 스승님들을 떠나 고행을 하셨고, 고행도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때 다시 고행을 버리고 선정에 드셔서 중도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경지가 사선삼명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그 경지는 부처님이 농경제 때 들어갔던 선정의 경지와 스승님들에게 배운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사선삼명에서 사선(四禪)은 삼계 가운데 색계 제4선(第4禪)의 경지를 의미하고, 삼명(三明)은 그런 제4선의 경지에서 열린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세 가지 신통력(明)을 의미합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12세 때에 농경제에 참석하여 벌레가 작은 새에게 먹히는 장면, 그 작은 새를 큰 새가 다시 채가는 장면을 보신 후, 비감에 젖어 그 자리를 떠나서 염부수 아래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기셨는데, 그 때 들어가셨던 경지가 색계 4선 가운데 첫 단계인 초선(初禪)이었다고 합니다. 선(禪)은 범어로는 댜나(dhyāna), 빠알리어로는 자나(jhāna)라고 쓰는데, 동아시아에서 이를 선나(禪那)라고 음사했다가, 나(那)자를 지우고 줄여서 선(禪)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무소유처정이나 비상비비상처정 모두 삼매로 선과 다릅니다. 선을 정려(靜慮)라고 의역하는데, 문자 그대로 '고요히(정) 사유함(려)'을 의미합니다. '정신집중'을 의미하는 삼매는 마음을 '고요히(정)'하는 수행일 뿐이며 '사유함(려)'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사유해야, 연기법과 공성을 발견합니다. 또 있는 그대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을 지관쌍운(止觀雙運)이라고 풀기도 합니다. 마음의 집중(止, 사마타)과 대상에 대한 관찰(觀, 위빠싸나)이 함께 하는 것이 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알라라 깔라마나 웃다까 라마뿟따가 체득한 삼매는 지만 추구할 뿐, 관이 없습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농경제에서 나와 염부수 아래에서 들어간 초선은 이런 지관쌍운의 수행의 첫 단계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곰곰이 생각하는' 수행이 선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벌레가 새에게 쪼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생명의 세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시다고, 먹이가 되고 먹어야 사는 '고기 몸(육신)'에 대한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학 용어로 표현하여 부정관(不淨觀)을 성취하신 겁니다. 또 이렇게 비정한 고기 몸의 세계인데,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고기 몸이 제공하는 음욕과 식욕 등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 연민의 마음이 솟습니다.이는 자비관(慈悲觀)의 성취입니다. 후대의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부정관과 자비관을 닦을 경우 그 마음이 색계의 경지로 향상한다고 가르칩니다. 12살 어린 싯다르타 태자께서 염부수 아래에서 들어가신 명상의 경지가 색계 초선인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물론 초선이든 제4선이든 선의 경지가 불교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이런 집중(지)과 사유(관)가 함께하는 선의 경지에서 연기법을 발견해야 깨달음입니다.
요컨대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은 그저 삼매일 뿐이고, 선은 삼매와 관찰이 함께 하는 수행입니다. 선은 어떤 테크닉을 쓰는 게 아니라, 내가 풀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너무나 건전한 수행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 문제 풀 때, 곰곰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방식이 선입니다. 다만 '곰곰이 생각하는' 대상이 수능 시험을 대비한 수학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 인생과 우주의 문제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본 것으로는 부처님이 농경제에 염부수 아래서 선정을 드신 것은 깊은 명상인 것은 맞지만 명상의 초입 부분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고, 스승 알라라 깔라마의 무소유처정과 웃다까 라마붓따의 비상비비상처정의 경지는 깊은 삼매, 높은 경지는 맞는데 보리(지혜)는 없는 일반적인 (아주깊은) 마음집중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봤구요,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때 하신 선정(명상)은 마음의 번뇌를 모두 제거하시고 사성제를 아시고 연기를 깨달으신 보리(지혜)가 있다는 차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답했듯이 아주 옳게 판단했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열반하면 부처가 되는 경지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공부하다 보니 열반은 아라한의 경지도 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번뇌의 불을 끈 열반의 경지가 아라한인데, 초기경전을 읽어보면 부처님 당시에 출가하신 분 들은 대부분 아라한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깨달음을 모두 열반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몸이 살아 있을 때의 깨달음을 유여의열반, 몸조차 사라지는 (돌아가시는 것)열반을 무여의열반이라고 부릅니다. 아라한과 부처의 차이는 열반에 있는 게 아니라, 복덕의 대소에 있습니다. 복덕이 많은 분은 부처님, 복덕이 적은 분은 아라한입니다. 불교 수행에서 아라한의 길을 버리고 대승 보살도의 수행에 들어가는 이유는 복덕을 쌓기 위한 것입니다. 3아승기 대겁에 걸쳐서 수많은 중생을 도움으로써 인연복을 쌓아서, 나중에 내가 성불했을 때 내 말을 듣고, 따라줄 중생의 수를 늘이는 것이 보살도의 목적입니다. 즉 보다 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윤회에 머물면서 인연복을 짓습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구요, 아라한이라면 모든 번뇌를 끄신 분들인데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아라한이 되시고도 두타행을 수행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라한들도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라한이 되신 분 중에서 두타행을 계속하시는 분은 아라한이 아닌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라한이 되셔서 문제(?)를 일으키는 아라한들도 모두 윤회를 벗어나신 겁니까?
아라한이 되어도 두타행을 하는 분도 계십니다. 교만한 듯한 분이 계시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과거의 습 때문이라고 합니다. 번뇌를 모두 제거했다는 점에서는 모든 아라한이 동등하지만 그 습관, 능력, 개성 등에서는 차이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문제일 아난다, 설법제일 부루나, 신통제일 목건련, 지혜 제일 사리불, 두타제일 마하가섭 등 부처님 10대 제자 분들의 특기가 다양한 겁니다.
그리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라한들도 계신 것 같다고 썼는데, 이는 어떤 분을 말하는 건지요. 문제를 일으킨다면 악업을 짓는다는 말인데, 그런 아라한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확인해 보고서,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알려주면 답해보겠습니다.
수업 중 자살을 한 아라한에 대한 말씀 하셨을 때 ‘자살한 아라한은 마라의 손아귀를 벗어났다’라고 하신 것 같은데,
내가 담당했던 수업 중에 위와 같은 설명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혹시 초기불교나 부파불교 수업 등 다른 교수님의 수업시간에 들은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번뇌가 가득한 일반인의 자살은 악업으로 죄가 되지만,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의 자살은 죄가 아닙니다. 외도 가운데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고행의 삶을 살다가, 고행을 통해서 자신의 악업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자각이 생기면 완전한 해탈을 위해서 단식에 들어갑니다. 삼매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물만 마시다가 서서히 돌가가시는 분도 계시고, 물도 마시지 않고 돌아가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를 단식사(斷食死) 또는 삼매사(三昧死)라고 부릅니다. 현대 인도에서도 이렇게 단식사, 삼매사의 방식으로 자살하신 수행자가 나타나면 자이나교의 모든 신도들이 이를 칭송하면서 좌탈한 그분의 법구(法軀)를 상여 위에 모시고 마을을 돌면서 큰 축제를 벌입니다. 불교의 경우도 앉아서 돌아가신 스님들이 간혹 계셨습니다. 이를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고 부릅니다. 불교 수행자는 주변에 폐가 안 되고, 시절 인연이 다했을 때, 가부좌 틀로 앉아서 스스로 숨을 거둘 수 있습니다. 좌탈입망입니다. 좌탈하신 스님과 자이나교 수행자의 사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리고 마라는 '죽음의 신'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다시는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 하지 않기에 마라의 손아귀를 벗어납니다.
그럼 아라한이 되고나면 잘잘못을 떠나 윤회를 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아라한이 된 후에는 잘못된 업을 짓지 않습니다. 다만 그 전에 지었던 악업의 기운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여의열반에 들면(아라한이 돌아가시는 것) 다시는 생명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으십니다. 윤회하지 않습니다. 안락하고 영원한 열반에 안주합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교수님 답글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