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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드로 빠라모
「1917년 멕시코의 아뿔꼬에서 태어났다. 룰포는 멕시코 혁명의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끄리스떼라 반란을 겪으며 어두운 유소년기를 보낸다. 차례로 부모를 여윈뒤 친척집을 전전하며 학업을 계속하려 하지만 최종학력은 초등학교로 그친다. 1930년 룰포는 내무부 이민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퇴근 시간 이후 사무실에 남아 틈틈이 습작 활동을 하였다. 1953년 간결한 문장으로 멕시코의 농민과 반란군 등의 주제를 다룬 단편집 <불타는 평원>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집에서 룰포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문학적 실험을 시도하였는데, 이는<뻬드로 빠라모>(1955)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룰포의 대표작<뻬드로 빠라모>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집필에 들어가다시피한 룰포는 영화 제작과 사진에 눈을 돌려 시나리오 작품집<황금 수탉, 영화 텍스트>(1980)와 사진 작품집<지하 세계>(1981)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1970년 국가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83년 스페인의 아스뚜리아스 왕자상을 수상하였다. 1986년 멕시코시티의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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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말라에 왔다. 이곳은 내 어머니의 남편 뻬드로 빠라모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마을이다.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요구해라. 그 인간은 나에게 당연히 갚아야 할 것을 하나도 갚지 않았어. 얘야, 그런 인간은 우리를 버렸던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돼.
나는 어머니가 되뇌던 추억과 향수를 통해 꼬말라를 떠올리고 있었다. 평생 땅이 꺼질 듯 한 한숨을 내쉬면서도 끝내 돌아가지 않았던 당신의 고향, 그곳으로 내가 가고 있다.
-부친이 어떤 분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모릅니다. 뻬드로 빠라모라는 이름밖에
내가 마부를 만난 곳은 길이 여러 갈레로 나뉘는 엔꾸엔 뜨로스였다. 그곳에서 나는 꼬말라로 가는 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참을 서성거리던 참이었다.
-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내가 물었다.
- 저 아래요.
- 혹시 꼬말라라는 곳을 아십니까?
- 지금 그곳으로 가는 길이오.
나는 그의 뒤를 따랐지만 그의 발걸음에 맞추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사정을 알았는지 한참 만에 그가 걸음을 늦춰주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서 걷게 되었다.
-나도 뻬드로 빠라모의 자식이오.
한 떼의 까마귀들이 텅 빈 하늘에 울음소리를 남기며 날아가고 있었다. 까옥, 까옥, 까옥.
-혹시 뻬드로 빠라모라는 분을 아십니까?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캐물었다. -어떤 분이지요? -원한에 사무친 자요. 그는 자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채찍을 휘둘렀지만, 짐승들이 이미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던 터라 공연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봐요. 그가 걸음을 멈추며 나를 불러 세웠다. - 저기, 돼지오줌보같이 생긴 산봉우리가 보이지요? 바로 그 뒤에 메디아 루나가 있소. 저길 보시오. 산등성이가 살짝 드러나는 곳 말이오. 그러면 이번에는 반대쪽에 있는 산등성이를 보도록 하시오. 저쪽과 마찬가지로 겨우 끄트머리만 보일 거요. 그런데 저 산등성이들 사이에 있는 땅이 누구 것인 줄 아시오? 그게 몽땅 뻬드로 빠라모 거요. 자기 새끼들이 거적 위에서 태어나도 코빼기조차 내밀지 않던 잘난 양반 말이오. 하지만 그런 인간이 세례식만큼은 꼭꼭 참석했다니, 가당찮은 것도 유분수지. 필시 당신에게도 그랬을 거요. 안 그렇수? -잘 모르겠군요. -빌어먹을, 지옥으로나 꺼지라지! -방금 뭐라고 하셨지요? -이제 다 왔다고 했소. -그렇군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 꼬레까미노라고, 여기서는 저 새들을 그렇게 부르지요. -그게 아니라, 제가 물은 것은 이 마을입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페허 같군요.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여기엔 아무도 살지 않소. -그렇다면 뻬드로 삐라모는....? - 그 양반은 오래전에 죽었소.
그런데 이 마을에는 소리가 없었다. 나는 자갈을 밟을 때 담벼락이 부딪혀 나오는 내 발소리 외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나는 큰 길을 따라 마을을 돌아다녔다. 집들은 하나같이 텅 비어 있고, 낡고 부서진 대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제멋대로 자란 잡초들이 전부였다. 마부는 저 풀을 마령초라고 했던가. “마령초는 사람들이 떠나길 기다렸다가 뿌리를 내리지요. 당신도 곧 보게 될 거요.”
큰 길 어귀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머리와 얼굴을 숄로 가린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홀연히 사라졌던 그 여자를 다시 만났다.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 여자를 놓치지 않고 큰 소리로 물었다. -에두비헤스 부인이 어디 살고 있는지 아세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 저기요, 저 다리 옆에 있는 집이에요;.
-들어와요.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꼬말라에 남게 되었을 때, 마부는 작별 인사를 잊지 않았다. -저기 산등성이가 겹쳐진 곳까지 가야 돼요. 우리 집이 거기 있는데, 아무 때나 한번 들르도록 하시오.
-숙박할 만한 곳은 없습니까? - 도냐 에두비헤스를 찾으시오. 아직 살아 있을테니까. 그분에겐 내가 보내서 왔다고 전하시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분디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름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들어와요, 내가 에두비헤스 디아다예요. 그 여인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 같았다. -여기 있는 게 뭡니까? - 세간이에요. 보시다시피 우리 집은 살림살이로 가득 차 있어요. 다들 짐을 꾸려 우리 집에 맡기고 떠났는데, 돌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된 거예요.
그건 그렇고, 젊은 양반이 바로 그분의 아드님? -그분이라뇨? -누구긴, 도냐 돌로레스지요. -아, 예. 그런데 제가 그분의 아들이란 걸 어떻게? -그야 젊은 양반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별을 받았으니까. 오늘, 바로 오늘 말이에요. -기별이라뇨? 저희 어머니가요? -그래요.
문이 없었다. 우리가 들어왔던 통로가 방문이었다. 그 여인이 초에 불을 붙이자, 텅 빈 공간이 보였다. -여긴 잠을 청할 만한 곳이 아니군요. -걱정 마요, 졸음이 가장 좋은 침대가 아니겠어요?
모친이 조금만 더 빨리 알려줬어도 이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랬구먼, 어쩐지 그 소리가 까마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더니만.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는 얼마나 됐어요?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자네 모친과 나는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고, 그 시절만 해도 우리는 청춘이었어. 자네 모친은 신혼 초였는데, 얼굴이 예쁜데다 어찌나 마음이 고왔던지 다들 좋아했었지.
-얘 헛간에 처박혀서 뭘 하는 거냐? 소년의 어머니가 물었다. -그냥 있어요 엄마.
너를 생각하고 있어, 수사나. 그날도 오늘처럼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지. 살아 있는 생명의 소리들이 마을을 감싸는데, 그사이 우리는 푸른 언덕 위에서 종이 연을 날리고 있었지. ‘수사나, 도와줘!’ 연줄을 잡은 나의 손에 겹쳐지던 부드러운 너의 손. ‘실을 더 풀어!’
너의 입술은 촉촉이 젖어 있었어. 수사나. 마치 이슬에 젖은 듯 한 그 입술...(※작가의 의도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음. 소설의 문맥으로 보아 에두비헤스 디아다의 아들인 소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음)
-할머니, 옥수수 털어 드릴께요. -진작 끝내고, 초콜릿을 만들려던 참이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어디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슬그머니 코빼기를 내미는 거냐? ~~~할머니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가서 맷돌이나 씻어놓으렴. ~~~-할머니, 못 쓰겠어요. 받침대가 부러졌거든요.~~~-새 걸로 바꾸면 되잖아요. - 말 한번 잘했다. 네 할아버지 장례 치르고, 십일조 내고, 너는 우리 집에 돈 한 푼 없는 걸 알고서 하는 소리냐? 그렇지만 어떡하랴. 새걸 구하는 수밖에.... 이네스 아주머니에게 가서 돈 좀 꿔달라고 해라. 10월 추수가 끝나는 대로 갚겠다고 말씀드리고. - 예, 할머니.
이 할미가 옛날처럼 널찍한 밭에 큰 집만 하나 갖고 있어도 이런 말은 내뱉지 않을 텐데... 네 할아버지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이 고생이지만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니, 그런 줄 알고 살아야지.
-어디 가는 거니? 소년이 대문을 나서려는 참에 그의 어머니가 불러 세웠다. -도냐 이네스 가게에 가요. 맷돌이 망가졌거든요. -가는 김에 검은 비단 1미터만 끊어 달라고 해라. ~~~돈은 우리 집 앞으로 달아놓고. - 예, 엄마. ~~~-뻬드로야! 얘, 뻬드로야....! (※소년의 이름에 “뻬드로“ 라고 불린 것으로 보아 소년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뻬드로 빠라모와 관련이 있는 인물.)그러나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다시 비가 내렸다.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일까. 소년이 눈을 뜨자, 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가 유리창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파란 섬광이 일던 밤이었어, 그때도 나는 유리창에 흐르는 빗물을 보고 있었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상념에 잠길 때마다, 수사나. 나는 너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어.(※소년과 수사나의 관계는 연인관계)
-왜 로사리오에 오지 않았니?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구일제도 잊은 모양이구나. 소년은 문간에 서 있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천장에는 손에 촛불을 든 그녀의 그림자가 서까래를 따라 토막토막 꺽어진 채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슬퍼요.
소년의 어머니가 돌아서고, 이내 촛불이 꺼졌다. 문을 걸어 잠근 소년은 빗소리를 들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성당의 종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간을 재촉하듯이.
(※여기서 상황이 급변하고 다시 주인공과 대화가 시작된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나는 자네의 생모가 될 뻔했지. 모친이 그런 얘기는 안 하시던가?
-아뇨. 그런 말씀은 없었어요. 제가 이렇게 아주머니를 만난 것은 아분디오라는 마부 덕분입니다.
-아! 그 사람 좋은 아분디오가 여태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더란 말이지?
그런데 사람들 얘기가 물뱀을 쫓을 때 쓰는 폭약을 잘못 건드려서 뇌관이 터졌다는 거야. 그 사고가 있고 난 뒤부터 그 사람은 말을 하지 못했어. 아니 말만 못한 게 아니라 듣지도 못하고 맛도 느끼지 못했어.
-제 말은 잘 알아듣더군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아니겠지. 아분디오는 죽었어. 틀림없이 죽었지. 그러니 자네가 만났다는 마부는 다른 사람이겠구먼.
-자, 이제 자네 모친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자네 모친(도냐 돌로레스)은 뻬드로 빠라모를 증오했지. 그 양반 닦달이 워낙 심했거든.
그러던 어느날 오후였지. 소삘로떼(맹금류의 일종)가 유유히 허공을 맴돌고...
도냐 돌로레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차라리 소삘로떼라면 좋겠어. 훨훨 날아 내 언니가 사는 곳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자네 모친은 영원히 메디아 루나를 떠난 걸세. 나는 몇 달이 지난 후에 뻬드로 빠라모에게 자네 모친의 안부를 물었지.
네가 떠난 날, 나는 알았지. 다시는 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
(※상황이 바뀜)
-아주머니. 무슨 일이죠? 도냐 에두비헤스는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미겔 빠라모(※주요 등장 인물. 후안 쁘레시아도나 마부 아분디오와 마찬가지로 뻬드로 빠라모의 아들)의 말이 틀림없어. 메디아 루나 길을 다급하게 달리는 저 말발굽 소리로 봐선.
-이해가 안되는군요, 말발굽 소리라뇨? -못들었어? - 못 들었어요.
-모든 건 미겔 빠라모와 함께 시작되었지. 그날, 그러니까 미겔 빠라모가 죽은 날, 일찍 눈을 붙였던 나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어. 잠결이었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거야.
-무슨 일인가? 내가 미겔에게 물었지. 그 계집애가 퇴짜를 놓았어? 그게 아니라, 길을 잃었어요. 안개가 낀 건지, 연기가 피어 오른 건지, 도무지 앞이 보여야 말이죠.
동트기 전에 메디아 루나에서 사람을 보냈더군. “우리 빠뜨론(※후원자)께서 급히 찾고 계십니다. 미겔 도련님이 죽었거든요. 그래서 꼭 모셔오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시신을 거둔지는 얼마나 됐나? 채 반시간이 안 됩니다.
한 여인이 침실 문에 쓰러질 듯 기대어 흐느끼고 있었다. -왜 우세요, 엄마? ~~~-네 아버지가 죽었다.
여인이 다시 흐느낀다. 억눌린 듯하면서 예리한 통곡이 이어진다. 여인의 몸이 고통으로 뒤틀리고 있다. -네 아버지를 죽였단다. - 어머니, 어머니를 죽였던 그 사람을요?(※애매모호한 부분이다. 어린 뻬드로 빠라모가 아버지 루까스 빠라모의 죽음을 알리는 모친에게 되묻는 표현임은 분명하지만, 본문을 바탕으로 뻬드로의 나이를 추정해 볼 때, 어머니, 어머니를 죽였던 그 사람을요? 라는 표현은 의아하다.)
성당 한복판에 위치한 제단에는 거대한 납덩이처럼 보이는 관이 놓여 있었다. 그 주위로 긴 양초와 꽃들이 장식되어 있고, 뒤편에는 아까부터 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제의 모습이 보였다.
렌떼리아 신부는 뻬드로 빠라모와 어깨를 스칠가 봐 조심스럽게 관으로 다가갔고, 자뭇 부드러운 동작으로 성수를 들어 올려 주검 위에 뿌렸다.
-신부님, 당신이 내 자식 놈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뻬드로 빠라모가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문에 따르면, 당신 형님을 내 아들 놈이 죽였다더군요. 더욱이 당신은 내 아들 놈이 당신의 질녀까지 욕보였다고 믿고 있으니.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나는 당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p36
렌떼리아 신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저녁 식사를 초콜릿 차로 대신했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잇었다. -얘, 아나야. 오늘 땅속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 아뇨. - 미겔 빠라모를 기억하고 있지? - 예, 삼촌. - 그 사람이었다. 아나는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 그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지? - 분명하지는 않아요. 삼촌. 너무 어두워 얼굴을 볼 수 없었어요. -그러면 그자가 미겔 빠라모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 그 사람이 “쉿, 놀라지 마, 아나. 난 미겔이야”라고 말했거든요. - 그자가 네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은 너도 알고 있었지? - 알고 있었어요. - 그래서 어떻게 했지? - 가만히 있었어요. -p39
별똥별이 떨어지는 밤이었다. 꼬말라는 불빛이 꺼진 채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p42
아, 나는 마리아 디아다의 눈빛을 잊을 수 없어. 자신의 언니인 에두비헤스 디아다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애원하던 그 눈빛을. 언니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도 부족해서 다른 사람 대신 자식까지 낳았어요. 그런 언니가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게 잘못인가요? ~~우리 언니를 강제로 입원시켰던 거예요. “하지만 당신 언니는 자살했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거역했던 거요.”
렌떼리아 신부는 밖으로 나갔다. 별빛이 빗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마 여기 갇혔던 사람이 내지르는 소리였겠지. 오래 전에 이 방에서 또리비오 알드레떼가 죽었는데, 은신처를 구하지 못해서 그럴 거야. 목을 매단 자들이 시신을 수습조차 못하도록 만들었거든. 그건 그렇고, 열쇠가 없었을 텐데, 자네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알다가도 모르겠구먼. -에두비헤스라는 분이 문을 열어주더군요. 방도 준비해 두었고요. -에두비헤스 디아다가? -예, 그분이었어요. - 가엾은 여자 같으니, 아직도 이승을 떠돌고 있구먼.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믿소. 이제부터 모든 일을 하나씩 처리할 테니, 똑바로 들으시오. 쁘레시아도 자매에게 진 빛이 가장 많던데 맞소? -그렇소, 그만큼 적게 갚은 데다, 당신 부친이 생전에 맨 뒤로 제쳐둔 탓도 없지 않소. 아무튼 엔메디오 목초지는 자매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데, 언니인 마띨떼가 과달라하라인지 꼴리마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도시로 가는 바람에 동생인 롤라, 다시 말해 도냐 돌로레스(롤라) 명의로 되어 있소.
-내일 당장 롤라에게 청혼을 하시오.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서 묻는 말이오? 나는 이미 늙었소. -당신이 아니라 내가 청혼을 하겠다는 거요. 그 여자는 은근한 매력이 있소. 당신은 그 여자에게 가서 이 뻬드로 빠라모가 사모하고 있다고 전하시오. ~~ 가는 길에 렌떼리아 신부에게 들러서 계약을 수정한다고 일러두시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갚은게 얼마요? - 한 푼도 없습니다, 돈 뻬드로. -돈이 되는 대로 갚을 테니 염려 말라고 하시오. -p 51
돈 뻬드로, 함께 일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롤라를 잘 설득하시오. 사실 나는 그 여자를 좋아하고 있소. 풀고르 씨.
어린놈이 도대체 어디서 그런 묘안들을 끄집어냈단 말인가. 풀고르 세다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메디아 루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난 그놈에게 털끝만치도 기대한 게 없었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녀석이오.” 지금은 고인이 된 돈 루까스(※뻬드로 빠라모의 부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놈은 게을러 터졌소.” 그래서 나는 그 맑을 믿지 않았던가. “풀고르 씨, 내가 죽거든 다른 일을 찾도록 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돈 루까스.”
저놈은 나중에 나를 외면할 놈이오. 나는 자식 농사에 실패했소. -p53
돌로레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힘들 게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살아나면서 안색까지 변하고 있었다.
-돈 풀고르,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해요. 그분이 나를 마음에 두었다니, 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돌로레스 양, 그분은 오로지 당신 생각뿐이오.
혼인 날짜를 이틀 후로 잡았는데, 어떻소?
-그분은 당장 결혼식을 올릴 작정이오. 혼수가 문제라면, 걱정할 것 없소. 돌아가신 그분의 모친도 자신의 옷을 입은 돌로레스 양을 보면 무척 기뻐하실 거요. 옷을 대물림 하는 일은 그분들의 관습이잖소.
그는 딱 여드레만 더 여유를 달라며 양팔을 뻗어 앞을 가로막는 돌로레스를 뿌리치고 대문을 나섰다.
이 결과를 돈 뻬드로 -세상에 뻬드로처럼 영악한 놈이 또 있을까-에게 알리고, 재산이 공동소유라는 것을 재판관에게 알리는 거야.
-돌로레스에게 결혼 지참금 얘기는 했소?
- 그 이야기는 미처 꺼내지 못했습니다. 빠드론. 모든 얘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기뻐하는 사람에게 차마 그럴 순 없더군요. - 당신은 어린애요.
-이 마을은 메아리로 가득 차 있어. 담벼락 사이나 돌무더기 틈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소리. 그런 메아리 말이지 ~~~어떤 때는 그 소리가 킥킥대는 웃음소리처럼 들리다가, 어떤 때는 마치 웃다가 지쳐버린 웃음소리처럼 들리거든.
우리 언니는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에 죽었어. 당시 우리 집 식구가 전부 열여섯 명이었는데, 자네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던 시절을 상상할 수 있겠지. 잘 보게, 여전히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죽은 자들을. 그러니 앞으로는 얼마 전에 죽은 자들의 말소리와 메아리 소리를 듣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게. 후안 쁘레시아도.(※소설 속에서 화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알려지는 부분)-p59
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 그리고 사람들의 음성. ......올해 옥수수가 잘 되면 자네 빛을 꼭 갚겠다고 했지만, 농사를 망치면 어떡하겠나. 자네가 참아야지. p61
나는 지붕이 반쯤은 폭삭 내려앉은 집으로 들어갔다. 한 쪽 바닥이 지붕이자 천장인 셈이었다. 다른 한쪽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 두 분은 죽은 사람들인가요? 여자는 웃고, 남자는 냉담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오라버니가 나를 자기 여자로 만든 뒤부터 혼자 지냈어요.
오늘 밤은 꼭 들소를 잡아야 해. 그 순간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분이 남매라는 사실을 조금 전에 알았습니다. -조금 전에 알았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당신보다 훨씬 오래전에 알았소. 그러니 우리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게 나을 거요. 우리는 누가 우리 두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천장 위로 한 떼의 새들이 날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둥지를 찾아가는 개똥지빠귀였다. -p75
-우리 어머니가 물려준 깨끗한 모포 두 장으로 언니가 갖고 있던 음식과 바꿨어요. 아까는 그분이 계셔서 모른 척했지만, 당신이 보았다는 그 여자가 바로 우리 언니예요. P79(※에두비헤스 디아다 자매일까?)
날이 저물면서 별이 뜨고, 한참 지나자 달이 떠올랐다.
시간이 마치 뒷걸음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들을 보았다.
당신 오라버니는 어디 있습니까? -가야 할 데가 있다는 말 못 들었어요? 오늘 밤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당신에게 나를 맡겼는지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잠시 바람을 쐬어야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튀어나온 얘기는 달랐다. -돌아오겠죠. 그러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환상
-그런데 아주머니 이름이 도로떼오인가요?
-도로떼오든 도로떼오든, 그건 상관없네, 굳이 밝히자면 도로떼아가 맞지만.
-어떤 속삭인이 나를 죽인 겁니다.~~~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지요.
-자네를 발견했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네. 나는 도니스가 어디서 오는 길이었는지 몰랐어.
자네는 고향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나? -처음에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네 생부인 뻬드로 빠라모 씨. 그 분을 찾아왔다고요. 결국 어떤 환상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날이 새면서 비가 내렸다.
마지막 사람들이 대문을 벗어나는 순간, 미겔 빠라모가 메디아 루나에 들어섰다. 그는 전속력으로 몰고 오던 말을 풀고르의 코앞에 들이대며 훌쩍 뛰어내렸다. -어딜 갔다가 이 시간에 오는 게냐? 풀고르가 캐묻듣이 물었다. -여자 집이요. - 누군데? -당신이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 -틀림없이 ‘절뚝이’ 도로떼아 년이렸다. 이 근방에서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들을 좋아하는 계집은 그년뿐이니까.
고얀놈! 그는 미겔을 떠올리며 마음속의 말을 토해 냈다. 제 아비를 빼다 박아도 그렇지,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벌써 그 모양이라니, 틀려먹었어. ~~~ 사람을 죽이고 다니니, 그런 식으로 나가다간...
-나는 모르는 일이야, 후안 쁘레시아도. 고개를 숙이고 산지가 하도 오래되어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잊어버렸어. 설사 고개를 들었다고 해도 무슨 마음으로 쳐다보겠나? 하늘이 너무 높기만 했지만, 숨을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P93
렌떼리아 신부님이 그러시더군. 평생 영광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게 될 거라고.
두 발을 바지런히 놀리면서 사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죽어서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될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뻬드로 빠라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선친이 죽었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방문이 열려 있었던 것만 다를 뿐, 그날도 오늘처럼 재를 뿌린 듯 우울한 빛을 드리운 새벽녘이었다. 한 여인이 방문에 기댄 채 이내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가 잊어버린, 이미 수없이 잊어버린 과거를 되살리게 만든 어머니였다. “네 아버지가 살해 당했단다!” 그녀의 갈라진 음성이 억제된 흐느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미겔의 죽음
그 속에 담긴 물체가 마치 수의를 입혀놓은 주검처럼 보였다. -누구냐? 그가 물었다. -미겔 도련님입니다, 돈 뻬드로. 풀고르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누가 그렇게 만들었지? 그는 내심 ‘살해당했다’는 대답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미 피가 머리까지 거꾸로 솟구치고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귀에 들린 것은 풀고르의 차분한 대답이었다. -누가 죽인게 아니라 죽었습니다. 석유 불이 타오르며 어둠을 밝히는 가운데, 플고르가 애써 자신의 말에 살을 붙였다. -짐승이 죽인 겁니다.
무수한 세월이 흐른다 해도 렌떼리아 신부는 딱딱한 침상이 깨워서 바깥으로 났던 날 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미겔 빠라모가 죽었던 그날 밤을. p96
모든 것은 하찮게 보이던 뻬드로 빠라모가 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자는 독초처럼 뿌리를 내린 거야. 고해실에서 들은 얘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가. “신부님, 어젯밤 저는 뻬드로 빠라모와 동침했습니다.” ~~“그 양반에게 제 딸자식을 바쳤답니다, 신부님.”
렌떼리아 신부는 뻬드로 빠라모에게 갓 태어난 핏덩이(미겔?)를 데리고 갔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돈 뻬드로, 생모는 출산 직후에 세상을 떴소. 듣자하니, 이 아이의 생부가 바로 당신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이 받아주면 안 되겠소? 뻬드로 빠라모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 아이를 신부로 만들어주시지요.
신부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들을 부르기 위해 고해 성사실의 칸막이 창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나 다른 고해자의 말을 듣는 동안, 자신의 상체를 똑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고 속이 메스꺼웠다. 마치 거센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입자에 휩싸인 듯한 기분과 함께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혀 끝에 끈적끈적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동시에 고해자의 귀에는 신부의 입에서 반복되는 아멘 소리가 차츰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영원히, 아멘! 영원히, 아멘! 영원히... -그만하시오. 신부는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고해자의 말을 중단시켰다.
-고해 성사를 치른 지 며칠이나 되었소? -이틀 되었습니다. 신부님.
p-106※뻬드로 빠라모의 아내 수사나는 이미 죽었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던 어머니의 침대 위에, 시트 위에, 어머니와 나를 감쌌던 바로 그 흑색 모포 밑에, 나는 누워 있다. 그 시절에 나는 어머닌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나는 외로움을 잊고자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있지만, 어머니의 침대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 영원히 잠든 관 속에 반듯이 누워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은 몸이다.
2월의 아침은 푸른 하늘과 바람과 참새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열리고 있었다.나는 기억한다. 그 2월의 어느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는 이미 다 큰 처녀였지.
기억하니 후스띠나? 너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의자를 정리하고 있었지. 그러나 어머니의 마지막을 보러 온 문상객은 없었어.
-도로떼아 아주머니, 방금 아주머니가 얘기하셨어요? - 뭘? 이런, 내가 깜박 잠이 들었나 보군.
바로 우리 옆, 큰 무덤에 누워 있는 도냐 수사나, 그 여자가 틀림없어. 그 여자는 오늘처럼 날씨가 찌푸리거나 습기가 찬 날이면 몸부림을 치거든. -그분이 누군데요? -뻬드로 빠라모의 마지막 부인이었지. 그 여자가 미쳤다는 사람도 있고.
-죽은지 오래됐어요? - 그럼, 무척 오래됐지.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던가? - 그분의 모친에 대한 이야기 같았어요.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먼, 그 여자가 여기 왔을 때 자기 어머니는 데려오지 않았는데....그렇지, 이제야 생각나는군. 그 여자는 여기서 태어나 오래전에 가족과 함께 마을을 떠났어. 그 여자 모친은 폐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평생 집 안에서 지내는 바람에 이상한 사람으로 소문났었지.
-이 소리 들리죠? 지금 뭐라고 하잖아요.
....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었어. 간신히 몸을 일으켜 보니 바닥에 있는 돌들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더군. 내 손에서 묻은 피로 말이지. 나는...(※또 다른 원혼들의 소리. 뻬드로 빠라모에 의해 희생된.)- p113
얘야, 뻬드로 빠라모란 자가 뭐라고 한 줄 아니? 나는 그자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단다. 내게 일을 주면서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자는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란다. 더욱이 나는 그자에게 빚을 갚은 거나 다름없단다. 그자에게 안드로메다 광산에 대한 정보와 작업 방식까지 소상하게 알려주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광산 사업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라고 하자. 그자가 뭐라고 대답한 줄 아니? “광산 따위에는 관심 없소. 바르똘로메 산 후안 씨,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 따님뿐이오.
그자가 원한 것은 바로 너였다. 수사나야. 그자는 소꿉놀이하던 얘기를 하더구나. 어릴 적에 너와 함께 강가에서 멱을 감았다는 거야.
그렇다면 너는 그 사람과 잠자리를 함께하겠다는 거냐?
-예, 바르똘로메씨.
-얘야, 너는 나를 바르똘로메 씨라고 불러선 안 된다. 나는 네 아비야!
-나는 누구죠? - 너는 내 딸이다. 이 바르똘로메 산 후안의 자식이란 말이다.
꼬말라의 들판에 비가 내리고 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곳에 긴 비가 이어지는 게 사뭇 기이하다. 일요일 아침 아빵고의 인디오들은 아침 일찍부터 마을로 내려와 있다. 그들이 펼쳐놓은 좌판에 올리브 열매로 만든 염주와 로즈메리와 사향초가 보인다.
수사나는 후스띠나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갓 태어난 수사나를 품에 안아 어르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키던 일이며, 어린애의 사탕 같은 눈이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 게 엊그제 일처럼 느껴졌다.
수사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어젯밤에 급작스럽게 쓰러지시는 바람에 미처 손을 쓰지 못했고, 너무 먼 곳이라서 시신을 모셔올 엄두조차 못 냅답니다. 수사나 어쩌면 좋아요. 이렇게 홀로 남으셨으니.
-그랬구나. 수사나는 웃고 있었다. - 그 사람은 지난밤에 작별 인사를 하러 왔던 거야.
수사나는 어린 시절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얘야 어서 내려가거라.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어린 소녀는 갱목 사이로 난 구멍을 통해 땅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빠, 아무것도 안 보여요!
-잘 봐라! 손에 잡히는 게 있으면, 손전등으로 비춰보라니까!
어린 소녀는 불빛에 드러나는 물체를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해골! 아빠 해골이에요!
-얘야, 이런 것 말고도 금으로 만든 동전이 있을 테니 더 찾아봐라!
어린 소녀는 나중에 얼음처럼 차가운 아버지의 눈을 보고서야 그 동그란 물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수사나는 웃고 있었다. -바로 당신 이었군요, 바르똘로메 씨.
바람이 불고 있었다. ~~수사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그녀의 얼굴을 어지럽게 뒤덮고 있다. ~~~ -아버지. -그렇소 나는 당신의 아버지요.
나는 알고 있었어요. 플로렌시오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 주러 오리라는 것을.
수사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온 몸을 질질 끌고서 렌떼리아 신부에게 다가가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촟불을 감싸며 말했다. -나의 비탄이 당신에게는 위안이 될 거예요! 신부는 ~~~다급하게 촛불을 껐다.
수사나는 침실이 어두워지자 재빨리 모포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당신을 평온하게 해주러 왔소. 신부가 나직하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렇다면, 잘 가세요. 아버지. 이제 당신은 필요 없으니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그녀는 차츰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소리는 그녀에게 항상 냉혹함과 두려움을 안겨주던 발소리였다. -무슨 일로 왔어요? 당신은 이미 죽었잖아요! 렌떼리아 신부는 침실로 나와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옂너히 밤을 휘젓고 있었다. (註. 환상 속의 실제 아버지를 신부로 표현)
말더듬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메디아 루나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뻬드로 빠라모를 찾았다.
-그분을 찾아서 푸, 풀고르 씨가 보내서 왔다고 저, 전해주시오.
말더듬이라고 불리는 사내는 뻬드로 빠라모가 나타날 때까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잠시 후 나타난 뻬드로 빠라모는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 사내에게 물었다.
-내가 바로 네가 찾고 있는 사람이니 어서 얘기하라.
-푸, 풀고르 씨가 사,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려고 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전, 아, 아무것도 모, 모릅니다. 다만 그자들이 혀, 혁명군이라는 것밖에는...
수사나 산 후안의 세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뻬드로 빠라모가 영원히 풀지 못한 숙제였다.
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그들이 나타났다. 스무 명쯤 되는 사내들은 탄띠와 장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뻬드로 빠라모는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우리에게 내려온 지시 사항 중에는 당신을 조사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소. 우리가 여기 온건 그것 때문이오.
-우리가 무기를 든 것은 썩은 정부나 당신 같은 인간들의 횡포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기 때문이오.
-10만 뻬소를 내놓겠소. 뻬드로 빠라모는 즉각 곱절을 제시하며 물었다.
-누가 우두머리 같더냐? 뻬드로 빠라모는 그들이 떠나자 물뱀에게 물었다.
뻬드로 빠라모가 지폐를 세는 동안, 고개를 떨어뜨린 헤라르도는 생각에 잠겼다. 보수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돈 루까스에 이어 뻬드로 빠라모 앞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잇었다. 특히 개망나니나 다름없던 미겔 빠라모 때문에 겪은 수모는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유치장에 갇힌 미겔을 빼낸 것만 해도 줄잡아 열다섯 번이 넘었다. 그중에서 랜떼리아 씨 살해 사건을 해결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죽은 자의 손에 총을 쥐어주고서 사건을 흐지부지 만들었건만, 미겔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하얀 이를 드러낸 채 히죽이죽 웃고 있었다.
문을 열자, 문틈으로 달려든 빛에 수사나의 윤곽이 드러났다. 뻬드로 빠라모는 그 빛이 닿도록 한쪽으로 비켜 앉은 채 정신없이 뒤척이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과 살풋 열린 입술이 그녀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모포를 끌어당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을 덮어준 뒤, 가만히 귀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그때 침실 문이 열리면서 렌떼리아 신부가 들어섰다. 신부는 몸가짐을 추수른 뒤에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영성체를 하겠소.
꿈결에서 증오를 삼키고 있던 수사나가 다시 중얼거리며 모포로 파고들었다. “플로렌시오, 비록 짧은 날이었지만 아주 행복했어요.”
-도냐 파우스따, 저기 저 메디아 루나 좀 보세요. 하루 종일 불이 켜져 있던 창문 말이에요.
-~~~설마 하니 메디아 루나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 저 방은 삼년 전부터 불빛이 꺼진 적이 없어요. 뻬드로 빠라모의 여자가 저 침실에서 여태껏 병치레를 해왔거든요. 어둠 공포증에 걸린 사람은 잠시나마 불이 꺼지면 미친다고들 하던데, 혹시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어쩌면 그 여자가 죽었는지도 모르지.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만 해댄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 여자와 결혼하더니, 그 양반이 죗값을 톡톡히 치르는 게지 뭐.
-돈 뻬드로가 참 안됐어요. -도내 파우스따,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죠? 그 양반은 죗값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을 치러야 해요.
밤 11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누군가가 메디아 루나 쪽을 향해 위치한 광장을 접어들고 있었다. 낮 익은 모습이었다. ~~~낯익은 모습이었다. ~~~의사 선생 아닌가요? ~~~내가 아무리 눈이 침침하기로서니 발렌시아 씨를 못 알아볼까. ~~아무래도 성당으로 다시 돌아가서 렌떼리아 신부님께 알려야 할까 봐요. 저 불쌍한 여인이 병자 성사도 못 받고 세상을 떠나면 안 되잖아요. ~~~-앙헬레스, 꿈속에서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도냐 파우스따, 당신은 왜 언제나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세요? ~~~~-그럼, 내일 봐요. -안녕히 주무세요. 마을은 다시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 내 입은 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 신부님. -예, 신부님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시오. -무슨 얘기를 하실 건데요? 고해 성사는 받았잖아요. 그런데 왜 다시 해야 하는 거죠? -고해 성사가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는 거요. -내가 죽게 된다는 건가요? - 그렇소. - 그렇다면, 왜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거죠? 나는 쉬고 싶어요. 내 잠을 빼앗아가려고, 내가 깨어날 때까지 여기 계셨군요. 눈을 떴으니, 이제 뭘 하죠? 아무것도, 신부님. 난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나를 이대로 놔두고 돌아가세요. -나는 당신을 위해 여기 와 있소. 수사나. 그러니 내 말을 그대로 따라하시오. 그러다 보면, 당신 스스로 자신을 재우듯 저절로 잠이 들 것이고, 아무도 당신을 깨우지 못할 거요. -좋아요, 신부님. 이제 신부님의 말씀을 따르겠어요.
렌떼리아 신부는 고개를 들고서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죽 둘러보았다. 침실 문 가까이에 팔장을 낀 뻬드로 빠라모가 서 있고, 그 옆으로 발렌시아 의사와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신부는 다시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며 낮은 음성으로 타이르듯 일렀다. -이제 당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가게 될 거요.
이어 그는 그녀의 입술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세요, 신부님! 나를 위해 괴로워하지 마세요. 나는 지금 아주 평온하답니다. 자꾸 졸음이 쏟아지는 게...
순간 그녀는 자신의 머리가 눈앞으로 꺽이는 기분이 들었다. 눈이 튀어나오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머리가 복부로 처박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머리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밤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나는 가엾은 수사나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지. -도로떼아 아주머니, 지금 무슨 얘길 하시는 거죠? =얘긴 무슨 얘기, 방금 다 말하지 않았나.
동이 틀 무렵이었다. ~~도냐 수사나가 죽었대. ~~~-누구긴, 뻬드로 빠라모의 여자 말이야. ~~~장례식은 축제로 변하고 있었다. ~~~장날까지 겹친 꼬말라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투계장에 모인 사람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 복권에 당첨되어 환호성을 내지르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물뱀은 계속해서 돈 뻬드로를 찾았다.
-이제 우리는 까란사(※1913년 마데로와 함께우에르따 정부에 반기를 들었으며, 나중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초기 혁명 동지인 빤초 비야와 사빠띠와는 적대 관계였다. 1920년 피살되었다) 군입니다.
-잘했구나.
-우리는 오브레곤 장군(※멕시코 혁명기의 장군이자 정치가. 1920~1924년 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다. 빤초 비야에 맞서 까란사를 도왔으나, 나중에는 까란사와 적대 관계에 놓였다. 1928년 암살되었다.) 휘하에 있습니다.
-잘했구나.
-저쪽이 평화를 되찾았기 때문에 우리는 해산할 것입니다.
-렌떼리아 신부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까? 아니면 반대편에 서야 합니까?
-물어볼 것도 없이 정부 편에 서야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우리는 정식 군대가 아니라 반란군으로 내몰린 신세입니다.
뻬드로 빠라모는 메디아 루나의 거대한 대문 옆에 놓여 있는 낡은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지않았어, 머지않았다고. 그의 말이 끊어졌다 이어지고 있었다. “수사나, 당신이 떠난 뒤로 무척 많은 세월이 흘렀구려. 하지만 저 희미한 빛과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새벽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소.
바로 그 시간, 도냐 이네스는 그녀의 아들 가말리엘 비얄 빤도의 가게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아분디오 마르띠네스가 가게 안으로 들어선 것도 그 시간이었다.
-그래,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다른 건 필요 없고, 알코올 반 리터만 가져가려고요.
-자네 처가 다시 기절이라도 했나?
-죽었어요, 지난 밤 11시쯤, 나귀를 팔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독한 원액으로 줄까?
-예, 후딱 들이켜고 곧바로 취해 버렸으면 좋겠어요.
-알겠네, 같은 가격에 이백 데시리터를 줄 테니. 자네 처에게는 내가 늘 아끼던 사람이었다고 일러주게. 하늘나라에서 부디 나를 잊지 말라는 말도 빠뜨리지 말고. -그럴게요. ~~~ 아분디오는 딸꾹질을 해대며 가게를 나왔다. 독한 알코올을 목구멍에 털어 넣을 때마다 불덩이를 삼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저 빨리 취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잠시 후에는 마을을 벗어나는 오솔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미아나! 뻬드로 빠라모가 고함을 질렀다. -저기 누가 오는데, 어서 나와 보지 않고 뭐 하고 있어! 고개를 앞으로 꺽은 아분디오가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도와주십시오. 마침내 거대한 대문 앞까지 걸어온 그는 낡은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죽은 제 처를 땅에 묻어야 합니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미아나가 기도했다. “하나님, 저희가 나쁜 자들의 간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뻬드로 빠라모의 얼굴이 마치 빛을 가리듯이 모포 속으로 사라졌고, 동시에 다미아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마디 비명이 들판 너머까지 퍼져 나갔다. “사람을 죽였어요! 돈 뻬드로가 죽어가고 있어요!” 아분디오는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하면 저 여자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의 의식은 한곳으로 집중되지 못한 채 흩어지고 있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마당의 침상위에 눕혀놓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꾸까,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암말처럼 생생히 살아 숨쉬던 아내였다.
-도와주십시오. 그는 애원했다. - 제발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한 다이아나의 비명 소리에 눌려 들리지 않았다.
멀리 꼬말라에서 검은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물체들이 사내들의 모습으로 바뀌고 아분디오를 에워싸기 시작하면서, 다미아나의 날카로운 외침 소리가 끊겼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들었던 손이 스르르 풀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내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운 뒤에 안채로 데려갔다.
-별일 없습니까, 빠드론! 그들이 물었다. 뻬드로 빠라모는 모포 밖으로 얼굴을 내민 채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피로 범벅이 된 아분디오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았다. -아주 잘 걸렸군. 네놈은 우리와 함께 가야겠어.
뻬드로 빠라모는 팔걸이 의자에 몸을 내맡긴 채 마을로 향해 나 있는 오솔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이파리들을 떨어뜨리는 향나무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똑같은 운명을 선택하고 그렇게 가는 거야. 이어 그는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수사나를 생각했다.
그는 눈을 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휘엉청 밝은 달이 떠 있던 날, 나는 당신을 쳐다보느라 눈이 멀 정도였어. 당신의 얼굴에 달빛이 스며드는데, 넋을 잃을 수밖에. 달빛이 보드랍게 스쳐 간 얼굴, 별빛이 만든 무지개 빛깔로 촉촉한 입술, 밤의 물결에 투명하게 드러나던 당신의 육체. 수사나. 수사나 산 후안...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마치 탈골된 어깨를 지탱하는 목발처럼 바닥까지 저절로 늘어뜨려졌다. “내가 죽어가고 있는 거야.”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의식은 한곳에 집중되지 못한 채 조각조각 흩어지며 과거의 기억들을 건너뛰고 있었다. 돌연 세월의 흐름이 정지되듯, 뛰고 있던 심장이 박동을 멈추었다.
이제 새로운 밤은 찾아오지 않아. 그는 유령들로 가득 찬 세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유령들과 함께 땅속으로 묻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제 곧 아분디오가 나를 찾아오겠지. 피투성이가 된 두 손으로 내가 거부했던 돈을 달라고 할 거야. 하지만 나는 그자를 피해 눈을 가릴 손이 없어. 그래서 그자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잇을 수밖에. 날이 새면서 그자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자의 목소리마저 죽을 때까지.
그는 누군가의 손길이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느낌을 받았다.
-저예요, 돈 뻬드로. 다미아나가 말했다. - 점심을 이곳으로 가져올까요? -아냐, 내가 가지. 지금 가고 있어. (※이 부분은 대부분의 비평가들에 의해 이미 죽은 다미아나 <“앞에서 아분디오의 비수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가 뻬드로 빠라모를 죽음의 세계까지 동행하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해석된다.)
뻬드로 빠라모는 그녀의 팔에 기댄 채 몸을 움직이려고 기를 썼지만,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토해 내지 못한 채 쓰러지고 있었다. 땅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돌무더기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Review]
멕시코 국기는 가운데에 독수리가 뱀을 입에 물고 있는 문양이 들어 있다. 아즈떼까인들은 마야문명의 마지막 왕조로 오늘날 멕시코시티인 고원지대에 문명의 터를 정하고 개척했다. 본래 이곳은 호수가 있었고 주변에 광활한 늪지대를 형성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늪지대에는 뱀들이 많이 있었는데 국기의 문양은 당시 용맹스러운 아즈떼까인들의 개척정신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멕시코 시티의 ‘소칼로 광장’은 그들이 세운 신전이 있던 곳으로, 1520년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졌다. 오늘날 남아있는 당시 흔적으로는 주말마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소수의 아즈떼까인들의 춤 공연과 시티의 동쪽 지역, 소치밀코에 작은 호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소수의 스페인 정복자들은 막강한 세력을 지닌 마야인 들에게 부족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피를 흘리지 않고 정복했다. 마야인들은 미래에 흰 수염의 구원자가 올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처음 스페인 군대가 들어왔을 때 그들을 구원자로 알고 호의적으로 대한 것도 멸망의 한 이유로 꼽고 있다. 오늘날 멕시코인들은 1824년 독립을 얻기까지, 오랜 기간 정복자들에 의해 생겨난 혼혈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저자인 ‘후안 룰포’는 1917년 멕시코의 해안도시인 ‘아카풀코’ 출생으로 멕시코 독립과 불안전한 내전의 소용돌이 가운데 유 소년기를 지나며 부모를 모두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보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멕시코 시티’로 올라온 그는 이민국에서 일하며 틈틈이 습작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1955년 발표되었으며, 멕시코 내전 시대인 1920년대의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환상소설로서는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 비유한다면 개화기의 소설과 같은 것으로 그들의 교과서에도 등장한다고 한다. 그는 명성이 알려지면서 영화와 사진 관련 일에 몰두하며 책은 발표하지 않았고, 1986년 세상을 떠났다.
“꼬말라” 시골 마을에서 부친의 유산을 물려받아 온갖 나쁜 짓으로 재산을 모은 ’뻬드로 빠라모‘라는 인물과 그가 낳은 자식들에 의해 자행되는 부녀자들의 희생. 타락, 불법으로 당시 개화기 시대의 멕시코의 시골 마을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는‘ 뻬드로 빠라모’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가 마을을 떠난 ‘도냐 돌로레스’의 아들인 ‘후안 쁘레시도’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마을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마도 어머니는 그에게 무언가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아들을 보낸 것 같다.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요구해라. 그 인간은 나에게 당연히 갚아야 할 것을 하나도 갚지 않았어. 얘야, 그런 인간은 우리를 버렸던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돼.” <본문>
낯선 마을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마부인 ‘아분디오“였는데,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 그 역시 ’뻬드로 빠라모‘의 버림받은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부친이 어떤 분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모릅니다. 뻬드로 빠라모라는 이름밖에“<본문>
그는 마부의 소개로 알게 된 “에두비헤스 디아다”라는 여인의 집을 찾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가 이곳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간과 공간,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별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에두비헤스 디아다’는 어머니의 옛 친구이며 어머니 ‘도냐 돌로레스‘ 가 ’뻬드로 빠라모‘와 결혼한 첫 날 밤에 신부 노릇을 대신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현실 속의 인물인지 의심이 간다. 그녀는 이 마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마을은 메아리로 가득 차 있어. 담벼락 사이나 돌무더기 틈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소리. 그런 메아리 말이지 ~~~어떨 때는 그 소리가 킥킥대는 웃음소리처럼 들리다가, 어떨 때는 마치 웃다가 지쳐버린 웃음소리처럼 들리거든”<본문>
이 대목에서 잠시 한 소년이 ‘에두비헤스 디아다’의 아들로 등장하는데, 그 역시 환상 속의 인물로 후에 이 소설의 주인공 ‘뻬드로 빠라모’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소년은 넋두리같이 혼잣말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를 생각하고 있어, ‘수사나’. 그날도 오늘처럼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지. 살아 있는 생명의 소리들이 마을을 감싸는데, 그사이 우리는 푸른 언덕 위에서 종이 연을 날리고 있었지. ‘수사나, 도와줘!’ 연줄을 잡은 나의 손에 겹쳐지던 부드러운 너의 손. ‘실을 더 풀어!’ ~~~너의 입술은 촉촉이 젖어 있었어. 수사나. 마치 이슬에 젖은 듯한 그 입술.”<본문>
이 대목은 앞으로 전개될 내용 중에서 등장하는 성당 신부 ‘렌떼리아‘와 ’ 뻬드로 빠라모’, 그리고 마지막 죽을 때까지 함께 했던 신비로운 여인 ‘수사나’에 대한 비밀의 열쇠가 들어 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에서 ‘뻬드로 빠라모’라는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이 죽은 혼령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지만 논리적 이해는 오늘날까지도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는 책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특징인 ‘환상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책이지만 책 내용 곳곳에 드러나는 강렬한 표현은 두고두고 머릿속에 머물고,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무언가에 긴 혼미의 터널을 지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특히 이러한 환상의 세계를 소설 속에 도입함으로써 저자는 더 적나라하게 그곳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들추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 ‘뻬드로 빠라모’는 사랑하는 아내 ‘수사나’의 죽음 이후 실의에 찬 모습을 보인다.
“수사나, 당신이 떠난 뒤로 무척 많은 세월이 흘렀구려. 하지만 저 희미한 빛과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새벽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소.”<본문>
그리고, 술에 취해 그를 찾아와서 죽은 아내의 장례를 치를 돈을 요구하며 애원하는 아들 ‘아분디오’의 청을 거부하고 비수에 찔려 죽는 것으로 소설은 마친다.
<본문>
“신부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들을 부르기 위해 고해 성사실의 칸막이 창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나 다른 고해자의 말을 듣는 동안, 자신의 상체를 똑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고 속이 메스꺼웠다. 마치 거센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입자에 휩싸인 듯한 기분과 함께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혀 끝에 끈적끈적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동시에 고해자의 귀에는 신부의 입에서 반복되는 아멘 소리가 차츰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영원히, 아멘! 영원히, 아멘! 영원히... -그만하시오. 신부는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고해자의 말을 중단시켰다.”
“고해 성사를 치른 지 며칠이나 되었소? -이틀 되었습니다. 신부님.“
“나는 모르는 일이야, 후안 쁘레시아도. 고개를 숙이고 산지가 하도 오래되어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잊어버렸어. 설사 고개를 들었다고 해도 무슨 마음으로 쳐다보겠나? 하늘이 너무 높기만 했지만, 숨을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그런데 이 마을에는 소리가 없었다. 나는 자갈을 밟을 때 담벼락이 부딪혀 나오는 내 발소리 외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나는 큰 길을 따라 마을을 돌아다녔다. 집들은 하나같이 텅 비어 있고, 낡고 부서진 대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제멋대로 자란 잡초들이 전부였다. 마부는 저 풀을 마령초라고 했던가. 마령초는 사람들이 떠나길 기다렸다가 뿌리를 내리지요. 당신도 곧 보게 될 거요.”
“꼬말라의 들판에 비가 내리고 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곳에 긴 비가 이어지는 게 사뭇 기이하다. 일요일 아침 아빵고의 인디오들은 아침 일찍부터 마을로 내려와 있다. 그들이 펼쳐놓은 좌판에 올리브 열매로 만든 염주와 로즈메리와 사향초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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