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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 이스라엘의 깊은 부패
이사야 59:1~8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은 큰 맥락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뛰어넘어서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도록 그 구원의 대상을 넓히셨는가를 말씀하는 맥락 중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의와 공의를 행치 아니하고 부패하되 심히 부패함으로써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을 위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는데, 이제 완전한 실패자로 증명된 선민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 만민에게 그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는 이사야 59장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그가 택하시고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와 잘못을 가혹하게 언급하는 일종의 고발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 중 오늘 첫 한 단락인 이사야서 59장 1절로부터 8절까지를 먼저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이 말씀은 지금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사야 50:2 말씀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하나님 자신은 얼마든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가 부르짖어 구하면 그들에게 손을 펴고 그들에게 응답해주시기에 능하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돌보지 않습니까? 우리가 고난 중에 부르짖어도 어찌하여 응답해주지 않으십니까? 왜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이렇게 지체하십니까?”
라고 원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관심, 불성실함, 하나님의 무능력을 지금 탓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함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귀가 둔하여 그들의 간구를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기도 응답이 더뎌지고 문제의 짐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도 기억합시다. 우리도 어려움에 처하고 문제가 속히 해결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무능력한 것인가, 하나님은 나를 잊어버리시고 내게 은혜 베푸실 의향이 전혀 없으신가 하는 의심과 원망을 갖기 쉬운데,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자 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과거에나 지금에나 동일합니다. 과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야에서 매일 아침 내리는 만나만 먹고서 고기를 못 먹었노라고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며 울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그들에게 하루나 이틀도 아니고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할 정도로 한달 내내 먹도록 실컷 고기를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모세는 하나님께 남자 보행자만 육십 만 명인데 어찌 한 달 동안 그들을 먹이실 수 있겠느냐고 불가능하다는 취지로 말씀 드립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수기 11:23)
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 지중해 바다쪽에서 서풍을 불어서 이집트에서 튀르키예 쪽으로 오고 가는 메추라기 떼를 몰아서 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끌어서 사람들이 손으로 그 메추라기를 잡아 이틀 동안이나 자루에 모아담고 햇볕에 널어놓고 말려서 한달 내내 고기를 먹도록 해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위대하며 그의 지혜도 바다처럼 깊고 넓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능력이 모자라거나 하나님께서 듣지 못해서 주의 백성들을 고난에서 건지지 못하는 일은 절대로 없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만큼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시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미루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에 대하여 2절에서 하나님은 그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왜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과 유다를 돕지 아니하셨으며 그들이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응답해주실 것 없었느냐면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과 유다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싶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싶고 그들을 해치려는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구해내고 싶고 여러 재앙들로부터 그들을 건져내고 싶지만,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가로막아 돕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먹구름처럼 가려서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로 그들을 환하게 비추지 못하고 그들이 아무리 부르짖고 기도해도 하나님께 그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25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추수하게 하시는 은혜)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도와주시고 높여주시고 마음껏 사용하시고자 하시며 풍성한 은혜들을 지극히 넘치게 부어주시기를 누구보다 더 강렬하게 원하지만, 그렇게 그의 백성들에게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고 그의 백성들 편의 죄와 허물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항상 명심합시다. 그래서 복을 받기 원하며 생명을 얻기 원하는 자들은 무엇보다 모든 죄악들을 멀리하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다윗의 시편 34편 12절 이하에서도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냐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편 34:12~16)
이 말씀처럼 장수하며 복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악을 금하며 입술에서 거짓말을 금하며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늘 화평을 찾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하나님은 이어지는 3절 말씀에서 좀 더 구체적인 죄와 악에 대하여 덧붙여 설명합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여기서 손과 손가락은 사람의 행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입술과 혀는 사람의 말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손에서 피가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하고 억울하게 하는 악행을 저질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약탈적이고 압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악한 자인 것입니다. 또한 말에는 거짓이 가득하여 남을 속이는 데 능숙하며 그 마음에 진실함이 없으며 그들의 혀는 독한 화살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독을 쏟아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은 권세와 재력이 있는 자들일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재물이 더해지거나 권세가 주어질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 흘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도리어 낮은 자리로 내려가며 받은 은혜들을 가지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섬기기를 힘쓰며 우리의 입술이 다른 이들의 아픔과 상처들을 싸매어주고 힘과 위로를 주어 살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이 됩시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서 드리셨느니라”(에베소서 4:31~5:2)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평생 우리 손에서 다른 사람의 억울함의 피가 묻히지 않으며 또 우리 입술에서 어떠한 거짓과 악독함이 묻어나지 않도록 늘 주의합시다. 우리 손을 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고 성령의 생수로 부지런히 우리 입술을 씻어서 늘 죄악에서 우리를 정결하기를 늘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이제 하나님은 앞서서 3절에서 자기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악을 지적하였은데 이제 나아가 그 사회의 악에 대하여 고발하기 시작합니다.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이제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회 구조적인 악을 지적하십니다. 사회 전체가 다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하나님은 다시 사법제도의 부패를 말합니다. 재판정에서 공의 곧 정의로움이 사라졌습니다. 진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를 담은 사회 규범을 우습게 여기고 허망한 것을 붙잡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거짓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익만 얻는다면 뻔뻔하게 법정에서도 거짓 증언을 합니다. 돈을 주고 거짓 증인을 사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증언하도록 합니다. 뇌물을 주어 재판장을 매수합니다. 사회 각처에 거짓이 보편화됩니다. 거짓말을 지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자기편에게 유리하도록 여론 조작을 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선민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과 유다 사회 내부에서도 사법 제도 및 사회 각 분야에 이러한 각종 죄악들이 무르익은 모습들 때문에 이제 공의와 공법이 사라지고 진실이 사라지고 거짓과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이 되고 답답하시겠습니까?
또 4절 마지막 부분에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이어지는 5절에서 추가적으로 그 말씀을 보충하여서 증언합니다. 5절과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옥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여기서 그 선민 사회에 점점 더 악이 깊어지고 더 강력하게 퍼지는 모습을 여기서 ‘독사의 알들과 거미줄’의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사가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독사가 알을 낳고 그냥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알을 품습니다. 실제로 알을 낳고 그 알을 품는 뱀들이 있습니다. 보통은 뱀들이 알을 낳고 떠나거나 직접 뱀 새끼를 낳습니다. 그러나 구렁이는 알을 낳고 그것을 이 주 정도 품는다고 합니다. 알을 따뜻하게 품기 위하여 햇살에 자기 몸을 덥히고 가서 알을 품어주고 또 어떤 정성스런 어미 뱀은 비가 줄곧 내리면 혹시라도 알이 차가워져서 부화하지 못할까 봐 그 비를 다 맞으면서 알을 품기도 한답니다. 하나님께서 5절에서 악인들이 악을 마음에 품고 깊이 모의하는 것을 독사가 알을 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이 마음속에 떠올랐다가 스쳐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요 그 악을 마음에 깊이 품고 연구하고 자기만 아니라 다른 악인들까지 끌어들여서 악행을 구체적으로 모의하고 실행 계획을 세우는 등 악에 골몰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하나님은 독사가 그 알을 품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독사가 알을 품듯이 거짓과 술수를 통하여 의롭고 진실하고 순수한 자들과 그러한 사람들을 파멸하고자 하는 자들이 사회에 많아지면 그 사회는 무서운 혼란과 재앙이 뒤덮게 됩니다. 그렇게 깊이 악에 물든 자들에 의하여 사회 전체가 악해지고 맙니다. 여기서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밝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사회 전체에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깊이 죄악에 물들고 악이 사회 전반에 퍼지고 말았다는 증언입니다.
거미줄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미는 으슥한 데에 거미줄을 쳐놓고 먹잇감을 기다리고서 먹잇감이 걸려들면 달려들어 독을 주입하고 돌돌 말아서 먹어버립니다. 이처럼 악한 자들이 사회 도처에서 약한 자, 순진한 자들에게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다가 자기의 먹잇감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독사의 알들이나 거미줄의 비유는 당시 선민 이스라엘과 유다 사회가 점점 악이 퍼져나가서 하나님이 그리셨던 공의와 공법이 물같이 흐르는 세상,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에 그 후손들을 통하여 본래 이루고자 하신 그 사랑과 공의와 진실과 평화가 입맞추는 나라와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버린 망가진 사회가 된 것을 하나님은 여기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부끄러움도 없고 후회도 없이 아무런 주저함 없이 무섭게 악행을 저지르는지를 7절에서 다시금 고발합니다. 7절과 8절을 읽겠습니다.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화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 악행자들은 악을 행하기에 신속합니다. 남의 피를 흘리기를 순식간에 행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악한 생각이 가득합니다. ‘생각’이라는 히브리어 ‘마하세바’라는 단어는 ‘계획, 생각, 창안’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계획하는 것도 악하고 생각하는 것도 악하고 무엇인가 독창적인 생각하는 것조차 악을 생각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7절 말씀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도 인용한 바 있습니다. 로마서 3장 9절 이하에 모든 사람이 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진술하면서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에서 이르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깊은 타락과 부패와 악함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내에서 깊고 넓게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해도 안될 만큼 깊이 부패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탁월한 지도자를 보내주었고 율법을 주었고 선지자들을 그토록 부지런히 보냈지만 선민 이스라엘이 실패했거늘 어찌 이방인들 스스로가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같이 모두 다 타락하고 부패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과 부패와 악행의 대가로 인하여 평강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길은 어지럽고 황폐와 파멸을 스스로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표범이 그 가죽을 흑인이 그 피부를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 스스로는 결코 깊은 죄성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라질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못박혀 대속하시고 부활하셔서 택한 백성들을 살리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또 성령을 보내주셔서 죄악의 삶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파멸 대신에 평강의 길을 걷게 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도와주심의 은혜를 힘입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와 죄악 때문임을 기억하면서 늘 자기를 살펴서 회개에 힘쓰며 주님의 의를 힘입어 늘 은혜의 보좌 앞에 달려나가 간구하는 자가 됩시다. 우리 자신의 의는 없으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열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길이 열렸으니 그를 힘입어 기도함으로 응답받는 자가 됩시다.